魚 變 成 龍
어 변 성 설
Written by 기장
1
꽂힌 지 십오 년은 된 간판의 문구이다.
쓰레기를 버리지 말아주세요. 우리의 친구 개천이 아파한답니다!
개천의 '천' 자가 흐릿해져 거의 '개'만 남은 형상이었다. 삐뚤어진 간판을 비뚤게 보고 있는 옹성우 너머로 구겨진 백도복숭아 캔이 원을 그리며 날아왔다. 그것은 차마 간판에 닿지 못하고 옹성우의 어깨에 맞고 떨어졌다. 그들도 진작 알았을 테다. 아마도 툭 던져보는 낯선 패기일 것이다. 몇십 미터는 어차피 거리상 도달하지 못할 것이 자명하니 말이다.
"아이고, 죄송해요... 죄송!"
멀리서부터 킥킥 웃던 목소리가 황급히 투를 바꾸고 지나갔다. 이방인은 더러운 개천에 동전이나 캔뚜껑 던지는 건 기념으로 알면서 다른 사람에게 피해 주는 것은 더럽게 싫어하는 경향이 있었다. 장난 칠 생각만 있었지 그게 설마 사람 칠 줄은 몰랐던 것이다. 하지만 다급한 사과에도 옹성우는 뒤쪽에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타격당한 어깨를 어루만지는 일도 없었다. 일행은 뒷통수와 반듯한 목부근을 잠시간 힐끗힐끗 보더니 저들끼리 웅얼거리며 사라졌다. 날벼락에도 미동없이 서 있는 남자가 이상하다는 소리다. 중얼중얼. 귀가 안 들리나? 멀쩡하게 생겼는데.
물론 맞는 소리다. 마네킹처럼 선 옹성우에게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귀도 들리지 않고 눈도 보이지 않으니까 말이다. 완벽한 차단이다. 강직하게 선 청년의 눈은 온힘을 다해 감기고, 귀는 곱게 접힌 상태였다. 옹성우는 매사에 열심이다. 그래서 눈막 귀막도 정직하고 열심히 시행해온다. 어른들이 시키는 그대로 정석이었다. 이 모습을 지나가는 김씨 아지매가 보면 소리쳐줄 것이다. 진지하이 보기 좋다이, 아가! 마을의 어른들은 진지한 면이 웃긴 건 둘째로 쳐야 한다고 했다. 이쁜 성으 형 본받으라고 꼬맹이 귀 잡고 흔든 적도 수다분했다. 지나간 일행이 옹성우의 현재 앞모습을 보았다면 이상정신을 가진 사람이라며 동정심에 가득 찬 말을 웅얼댈 수 있는 모습이었지만 말이다.
곧은 이마 위로 까만 앞머리가 수북하다. 긴 속눈썹이 그림처럼 눈가를 푹 덮고 있었다. 도예처럼 찍힌 정삼각 모양의 점 위로 땀 한방울이 흘렀다. 단추가 목끝까지 잠긴 셔츠가 일렁이는 목덜미를 가볍게 조이는 모습이다. 고요하게 들썩이는 속눈썹 우산이 펼쳐지기 삼초 전이었다.
오십팔, 오십구, 육십.
끝이다!
눈을 번쩍 뜬 옹성우는 차근차근 왼쪽 귀부터 원상태로 돌려놨다. 고운 수제비 모양의 귀가 뽁 소리를 내며 펴졌다. 까맣게 반뜩이는 눈이 어느 때보다 진중하다. 내 귀는 소중하지. 그리고 흐릿한 눈을 다섯 번 연속으로 껌뻑거려논다. 야무지게 양쪽 귀를 문지른 옹성우가 우렁찬 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장 아주머니 아픈 허리 건강하게 해주시구요, 옆옆집 꼬마 선호네 양파 농사 풍년 되게 해주시구요! 또. 또. 푸리 건강하게 해주시면 좋겠어요!"
마을 제사 있을 때마다 튀어나오는 흔한 소망들이었다. 사람들은 소박함을 손에 모아 쥐고 빌었다. 맥락과 더불어 깊이도 없었지만 그러는 편이 좋았다. 그렇게 어쩌다 하나 얻어걸리면 높아진 행복지수를 가지고 노동요라도 부를 터였다. 시원한 목소리가 종합된 기원을 읊었다. 이걸로 이번 추수를 버틸 것이다. 옹성우만의 주술이나 다름없다.
땀을 한 번 닦은 후 옹성우는 주위를 스윽 돌아봤다. 휘휘 삼백도는 돌려봐도 사람 하나 없다. 저 골려먹는다고 꼬망이 두엇이라도 있다면 심하게 창피를 볼 것이기 때문에 옹성우는 신중했다. 웃음 참는 소리도 없이, 순도로 적막한 것을 확인한 이후에, 현이에게 주워들은 말을 꺼내놓았다.
현이는 겁쟁이다. 항상, 네 집 건너에 있는 공동 변소를 가려다가 강가에서 귀신을 봤다고 호들갑을 떨었다. 바로 이 장소. 옹성우가 심혈을 기울여 잡소망을 외치는 이곳 말이다.
너무 떠들어대서 공갈 빠는 애들도 귀나 후빌 이야기었는데, 사실상 우스개 전설이나 다름없었다. 이젠 어른들도 불려진 귓말인지 민담의 금계전설인지 분간하지 못하는 정도였다. 강에 물귀신이 살어. 그러나 소문답게 항상 '남의 일'이었다. 현이의 일, 옆동네의 일... 원래 저 자신의 일은 소문이 될 수 없다.
그 귀신은 하얗게 샌 턱수염을 허리까지 기른 귀신이라고 했다. 자기는 보고 바로 오줌을 지리고 도망왔고, 그래서 나무를 하던 옆동네 아이의 말을 보태면-세상에 도끼를 빠트렸더니 금도끼 은도끼로 바꿔주었다고 한다-산신령이 물귀신이었다니, 이런 망발이 다 있나. 옹성우가 세상 염세적인 표정을 지었지만 현이가 눈을 부릅뜨고 진실을 주장하는데 찬물을 끼얹을 수는 없었다. 그리고 지금은 간절하게 그 설화와도 같은 이야기로 손발이 움찔대고 있으니 말이다. 이것은.... 혹시나 하는 마음일 테다. 진귀한 빅피처일 수도 있고, 유치한 허상일 수도 있다.
"이웃 마을은 강물에 신선이 산다는데..."
물론 천신은 대답이 없다. 옹성우는 비웃음을 살까 방금 전 나타났다가 사라진 이장 아주머니를 훔쳐보았다. 누가 듣지도 않는데 우렁찬 외침과 대조되게 소곤대며 중얼거린 후, 빨개진 얼굴로 달음질을 뺐다. 누이가 들으면 다 컸는데 웬 유치한 망상질이냐고 엉덩짝을 맞을 것이었다.
"우리 개천에서는요. 용이 나게 해주세요."
魚 變 成 龍
"밥 먹으라!"
아이들이 우당탕탕 모래사장을 휘저으며 대문으로 달려갔다. 하드를 사러 갔다오던 성우의 누님은 그걸 입체적인 얼굴에 고대로 맞았다. 분명히 헤드폰에도 들어갔을 거다.
"야이씨- 뒤질래?"
가늘지만 다부진 주먹을 쥐고 흔들어 봐도 뒤통수들은 문지방에 쏙 숨어버린다. 손을 줬다폈다 화풀이를 했지만, 그녀는 곧 하드가 녹을까 재빨리 걸음을 옮겼다. 음악이 새어나오는 고물 워크맨을 주머니에 쑤셔박았다.
2
마을은 시골, 시골 중에서도 땅골, 땅골 중에서도 개미집이었다. 덥수룩하고 수더분한 사람들로 가득한 동네. 아침이면 남녀노소 눈을 비비며 빨랫감을 들고 빨랫방으로 향했고, 오후 다섯시면 지는 노을을 바라보며 똥개를 산책시켰다. 물론 그렇다고 개울물 빨래를 하거나 여자를 아낙이라고 부르진 않는다. 조금 작고, 덜 개발된, 뒤떨어진, 그런 고을일 뿐이다. 다들 그것을 알고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다들 민달팽이의 초속에 맞추어 살았다. 느리다고 엉덩이를 차이지 않는 건 옹성우에게 참 좋은 일이었다. 굳이 노력하지 않는 경우엔 원체 굼떴기 때문이다.
옹성우와 누이는 자그마한 주민사무소에서 컸다. 옹성우의 친모는 홀어머니였는데, 출산 한달 전 배를 부여잡고 이 마을에 내려왔다고 했다. 약해진 몸은 아이의 바동거림을 버티지 못했다. 그녀는 제 애를 껴안아보지도 못하고 죽었다.
누이는 어미인지 아비인지 멀리서 온 누군가가 우체통에 버리고 갔다고 했다. 신기한 건 둘 다 정확히 같은 날에 벌어진 일들이었다. 그래서 그냥 남매 하기로 했던 것이다.
하지만 둘에게 그런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마을의 어린애라곤 손에 꼽을 정도였고, 걔들의 어머니가 함께 남매를 길렀고, 걔들과 손가락 빠는 시절부터 구르며 놀았다. 적은 가구 수가 점점 더 적어지는 것 같았다. 모두가 가족은 아니더라도 사촌과 다름없었다.
그렇게 살았다. 한자리에 뿌리를 뻗은 소나무처럼 살아갈 운명일 것이었다. 민달팽이들은 소라를 얻으려 하지 않았다. 그냥, 그냥저냥 이곳에서 살다 이곳에서 죽으려고 했지. 애초에 짱박혀 살라고 부모가 내려와서 낳고, 버린 것 아닐까?
"야. 옹성우."
"왜 누나."
"넌 대학 안 가?"
학교 재정은 몇 안 되는 이웃마을의 세금으로 충당되는 구조였다. 중학교까지는 의무 교육이라 그렇다 쳐도, 고등학교는 사정이 달랐다. 교장은 사이좋게 등록하러 간 훤칠한 남매들에게 직접 말했다. 한 명밖에 등록할 수 없겠구나. 안타깝고 단호했다. 하지만 남매는 순순히 교무실 옆에 딸린 교장실을 나왔다.
움찔거리는 안경알과 주먹을 줬다폈다 하는 손가락으로 충분히 마음을 짐작했다. 그는 주민사무소의 이장이었다. 누이를 발견하고 남매에게 제 부인의 젖을 먹였다. 누이는 망연자실했지만 빨개진 눈을 감추었다. 어쩔 수 없는 건 정말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돌아서는 교장의 눈도 빨갰을 테다.
3
그날 밤엔 정자에 앉아 소다맛 하드를 빨며 똥개를 구경했다.
컹컹 짖는 게 말썽이었지만. 귀엽게 보이고 지랄이야-! 씨근덕 씨근덕 웃으니 애가 또 컹컹 짖었다. 시원한 웃음소리가 한동안 슈퍼 앞 정자를 울렸다. 평소였으면 함께 웃어재꼈을 누이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주위가 조용해졌다. 집에 오면서 했던 질문을 더해서, 마지막 확인이었다.
너,
"안 가도 돼?"
"응."
"진짜로?"
집에 오는 길에 한참 버스 밖을 내다보던 옹성우는 괜찮다 말했다. 깊이 없이 던져진 말이었지만 십수년을 함께 살아온 누이라면 바로 알아듣는 법이다. 버스 소음과 달리 지금은 귀뚜라미가 울었다. 하지만 작게 웃는 동생의 옆모습은 똑같았다. 더 후련해 보였다.
피 한 방울도 안 섞였지만 닮은 그녀의 옆얼굴에 눈물이 고였다. 영리한 것에서도 둘은 같았다. 진짜 친남매 아니가. 그래서 어른들은 여린 뒷덜미를 주무르며 웃곤 했다. 비로소 옹성우가 웃었다. 하드의 가장자리가 무르게 녹아 뚝 떨어졌다. 누나한텐 소라가 필요하니까.
느리게 살래, 누나.
4
평소와 같은 날이다. 학교 간 누나를 대신해 어른들 사이서 빨랫감을 옮기고, 야참을 챙겨먹고, 슈퍼마켓을 들러 하드를 채우고, 여전히 탁한 개천에 들렀다. 가벼운 소원을 빌었다. 이틑날 있는 누님의 중간고사, 망하게... 잘보게 해 주세요! 그녀는 필시 성공해서 자기 버린 부모를 찾겠다고 했다. 빚을 갚는 듯한 태도였다. 어깨 굽히고 서서 홀로 키득키득 웃었다. 그때 뒤에서 이질적인 경적소리가 났다.
"어이, 학생!"
이 마을 사람들은 전부 옹씨 남매를 이름으로 불렀기 때문에 이런 호칭을 사용할 사람은 없을 터였다. 달갑지 않게 뒤를 홱 돌아보았다. 햇빛이 너무 반짝여서 눈을 가늘게 떴는데, 인상을 찌푸려 선명함을 되찾았다. 사람은 없고, 저건 뭐여. 뭣이 큰데...
때깔나는 스포츠카였다. 순간 가늘게 펴진 원체 동그란 옹성우의 눈이 띠요옹 커졌다. 반짝임이 반사된 햇빛이 아니라 광인가보다. 입도 떡 벌어졌다. 숨을 몰아쉬던 옹성우는 눈을 질끈 감고 떠서야 곧 평정심을 되찾을 수 있었다. 과거의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저래 반짝이는 운송 수단을 본 것은 태어나 딱 지금으로 두번째인데, 첫번째의 기억이 유난히 강렬했던 탓이다. 옹성우가 이리저리 뛰는 다람쥐에서 민달팽이의 삶을 다짐하게 된 계기였다. 기어코 들뜬 숨이 가라앉고 못마땅한 표정만이 남았다. 정확히 말하면 거품이나 기스 하나 없는 차문과 바퀴가 짓이기고 있는 강아지풀과 진달래를 보고 나서부터다.
저런 비싼 차를 몰고 촌동네에 오다니, 경적 소리에 동물들 다 놀라겠구만.
로드킬 하고 돌아가기만 해봐라, 마을 입구까지 쫒아가주마.
대충 이런 생각이다. 아무래도 토종삵 하나는 저 새끈한 차앞머리에 치이는 상상이 들었다. 한참 못마땅하게 보고 있는데 스무스하게 내려간 창문 아래로 웬 남자의 얼굴이 튀어나왔다. 옹성우는 습관적으로 험상궂은 얼굴이 늙고 주름진 남자였다. 현재 눈만 갸름하게 뜨고 있는 옹성우는 필히 용건이 있어서 온 것임을 본능적으로 눈치챘다.
저 자신은 습관이 배어서 모르겠지만, 건들한 모습이 처음 보는 사람에게 결코 좋은 인상을 남기지는 않기 마련이다. 심지어 5초 전에 손을 뻗은 남자가 개천 너머로 담배꽁지를 던져버렸다. 옹성우가 막을 새도 없이 멍하니 풍덩하는 강물을 바라봤다.
방금 전에 소원 빌었는데. 첫 제물이 담배야. 천신이 골초냐니?
어쩐지 상이 더럽더라니. 옹성우는 인성이 상에 미치는 영향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악당들은 저렇게 생겼구나!
나고 처음으로 위기란 걸 겪었을 때 깨달은 것이었다. 그때 험상궂은 악당을 해치우기 위해 더욱 험상궂은 용사가 찾아왔었는데, 그들의 얼굴은 강했다. 강함과 졸렬함은 차원이 다르고... 그냥... 이 남자는 더블에이급 악당임이 분명했다. 옹성우는 창문에 팔을 걸치고 (옹성우 기준) 비열하게 웃는 남자를 가자미처럼 쳐다봤다. 아직 아무것도 안 했는데... 옹성우의 희망찬 외침이 부정타게 만든 것이면 충분하다.
"어어, 학생. 이즈야 보나. 뭐 좀 물어보지."
"오늘 통행 불가요. 주민센터에서 공지하래서요."
"뭔... 어이!"
"멧돌 손잡이는 이곳에 팔지 않습니다."
"얘 뭐래. 학생!"
"저 학교 안 다니는데요."
옹성우가 팩 돌아 끝없이 난 도로 위를 질주하기 시작했다. 뒤에서 학생! 학생! 당황한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울려퍼졌다. 학생 아니라니까! 뵈지도 않을 테니 뒤돌아보고 메롱을 날려주었다. 씨바-알! 누님 중간고사 잘 보라고 애써 소원까지 빌어줬는데. 더러운 개천이라고 킬킬 웃고 무시할 때부터 자알 봤다.
옹성우는 차 속력이 저 뛰는 속도보다 빠르다는 걸 무시하고 계속 달렸다. 역주행 당할 것이 분명했지만 말이다. 악당은 물럿거라!
동네의 특성상 불법단체가 찾아오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사년 전, 스포츠카와 봉고차를 몰고 나타난 악당들. 무기도 없이 말만으로 이장님을 꼬셨다. 뭐 결국 현이와 옹남매를 팔아넘기려고 한 놈들은 경찰에 붙잡혀 끌려갔다. 불법인신매매단체였다. 그도 그럴 것이, 출생신고가 안 된 애들도 더럿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시대에도 그랬다. 상품으로 가치가 딱이라 했다. 그래서 이런 불청객은 싹부터 자르는 것이 맞았다. 얼른 주민사무소 가서 알려야지. 옹성우는 영리했다.
5
그러니까, 몰랐단 말이지. 몰랐다고. 맹세컨데, 옹성우는 매끈한 스포츠카를 앞지르는 데 정신이 팔려서, 굳게 닫힌 그 뒷자석이나 뒷좌석 뒤의 뒤 유리에 철썩 붙인 <쉿! 아이가 타는중~♥> 문구의 검은색 아크릴 스티커의 여부는 전혀 몰랐단 말이다. 평소에 뭐만 해도 겁을 집어먹는 습관이 있다고 잔소리하던 누님이나 이장님의 말씀을 귓구녕 후비지 말고 잘 명심해둘 걸 그랬다. 악... 악당은 물럿거라!
"요 머스마가 차암 겁도 잘 먹구리, 경계두 자알 합니다. 사냥개보다 더 훌륭하지요. 마을 지킴이구로.... 하하하!"
옹성우는 마을 살면서 그런 말을 틈만 나면 후비는 귓구녕으로 들어본 적 없다. 하지만 그것보다 뜨거운 영상의 날씨 때문에 땀을 뻘뻘 흘리고 있는 이장님이 지금 다른 연유의 식은땀을 배출하고 있는 게 옹성우는 못내 머쓱했다. 아직도 영 인상이 좋지 않은 상대방도 못마땅하게 추임새나 넣고 있었다. 이것을 말이 사고라고 할 수도 없고, 참 난감할 뿐이다.
"그라서인지 마을 치안이 와다리 좋지요. 그랍죠, 여 주민들도 복작복작 잘 살고요."
"흠흠, 아, 예."
옹성우는 열심히 입을 움직이는 이장님의 출렁이는 뱃살을 보는 데 넋을 빼기로 했다. 그런데도 아까의 기억만 생생해질 뿐이다. 전혀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으로 망부석이지만 점차 귀는 트여왔다. 왜 저르케 이장님이 골을 빼냐고-! 저 스포츠카는 대체 의기양양한 태도다.
약 십칠분 전즈음 악당을 따돌렸다는 소식을 자랑하러 주민사무소로 다람쥐마냥 우다다 들어왔고, 이장님의 이름을 외침과 동시에 죽을동 속력을 올린 악당이 주민사무소에 들이닥쳤고, 옹성우가 눈을 동그랗게 뜨지마자 이미 하르방 이마만큼 입을 벌린 이장님이 후다닥 팔을 휘저었다.
"아아..."
천천히 탄식한 옹성우가 구불하고 까만 머리를 지그시 쥐어잡았다. 온 얼굴로 울상을 짓는다. 옹성우가 제대로 절망했을 때만 나오는 얼굴이었다. 옹성우의 누나가 이 표정을 볼 때면 스냅샷을 여섯 번은 찍어두곤 할 만큼 우습다. 옹성우는 슬그머니 흘끈흘끈 이쪽을 노려보는 스포츠카의 주름진 미간을 피해 고개를 돌렸다. 이젠 등 너머로 들려오는 침 튀기는 이장 아저씨의 목소리. 어깨가 슬쩍 구부러졌다.
"너 성이 뭐야?"
그때 옹성우의 모든 난리부르스를 바로 뒤에서 지켜보고 있던 웬 작은 남자애가 드디어 고개를 돌린 옹성우에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열었다. 옹성우는 깜짝 놀라 심장을 부여잡았지만 이 애는 아무렇지 않게 눈을 치깔았다. 미안, 놀랐구나. 남자애가 가볍게 꼬았던 마른 다리를 풀며 담백하게 사과했다. 아-, 아, 괜찮아. 옹성우는 되려 저가 당황해 꾸벅 고개까지 숙여보였다. 그래서 방금 전의 질문은 까맣게 잊어버렸다. 질문에 대한 순간적인 요상함도.
오동통한 입술이 쭈볏 움직였다. 그러자 상황판단력이 빠른 옹성우는 이 애가 <쉿, 아이가 타는중~♥>이라는 위대한 문구의 대상자라는 걸 깨달았다. 아무리 봐도 그런 '아이'로는 안 보이는데 말이다. 체구가 작고 파리한 게 어디 아픈 애일 수 있겠다는 생각은 들었다. 둥근 어깨를 크게 덮는 흰티 아래로 내린 팔은 사내애라기엔 지나치게 가늘었다.
뭘 뚫도록 쳐다보는 습관 때문에 옹성우는 종종 아이의 어깨죽지라던가 허연 목께에 관찰하듯이 시선을 던졌다. 상대는 어색하면 웃음내는 습관이 있는지 옹성우의 뚜렷한 시선에 잘게 웃어댔다. 우스운 상황이다.
어느새 옹성우의 시선은 이 작은 남자애한테 팔린 지 오래였다. 옹성우의 입이 불퉁하게 튀어나왔다. 배경처럼 들리는 비열한 목소리를 바탕으로 생각해 보니 그런 악당놈의 아이라기엔 상당히 부조화스러웠다.
"혹, 혹시 아버지 되시어?"
저가 한 행위가 떠올라 멈칫했지만 옹성우가 꿋꿋이 입을 열었다. 남자애는 작게 여러번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괜히 머쓱한 옹성우는 짧은 뒷머리를 매만지기만 했다. 대충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
뭐, 악당을 처벌하려다... 천신보다 높으신... 토지주神를 건드리서... 죄송합니다...
하지만 남자애는 옹성우의 주제넘은 행위에 대한 추호의 생각보다는 다른 걸 곰곰히 곰씹는 투였다. 오동통한 입술이 다시 한 번 오물거렸다. 옹성우는 뛰어난 관찰능력으로 그것이 남자애가 뭔가를 발언하려 할 때의 전행위임을 눈치챘다. 눈을 치깔고 있던 남자애가 자기 손가락을 쥐어잡으며 물었다.
"너 성이 뭐야?"
그제야 옹성우는 남자애의 지속적인 시선을 감지할 수 있었다. 이 질문의 답을 듣고 싶었던 게 분명하다. 옹성우는 가만히 눈을 세 번 깜박였다. 첫인사 같은 땐 보통 이름을 묻지 않나. 어쩐지 이상한 맥락이었지만 궁금해하는 것 같아서 답해주기로 했다. 사실 느릿한 남자애의 손끝이 굉장히 불안해 보였기 때문이었지만 말이다.
"나 옹씨인데."
"아, 아..."
"신기하지. 다 놀라더라."
"으응. 홍씨라는 줄 알았어."
"다 그래. 온 아니고 홍 아니고 옹이다."
"그렇구나."
"근데, 왜 물어?"
"그른데, 여긴 왠 일루 오셨답죠."
한참을 오고가던 목소리가 동시에 옹성우의 공기를 파고들었다. 이장이 드디어 쩔쩔매는 것을 멈추고 본론을 열었다. 옹성우의 귀가 쫑긋 섰다. 그러고 보니 토지주라기엔 토박이 옹성우에게 지나치게 초면인 얼굴이었다. 아니 애초에 그런 게 존재하는지도 몰랐지. 저 밟고 있는 땅 주인은 저희를 박아두고 코빼기도 비추지 않던 것이다. 그동안 땀을 뻘뻘 흘리며 수화기에 허리를 조아리는 이장님의 통화 대상이 그저 수리업체겠거니 넘긴 것이 화근이었다. 한창 집중하는데, 그러던 중 팔 옆에서 일인용 소파가 바스락 움직였다. 근처에서 데시벨이 잡힌다.
"다행이다."
"어?"
"다행이라구."
"뭐가?"
"응, 친형제는 아니라서."
"미안한데, 아까부터 무슨 소리하는 건지. 잘 모르겠어."
옹성우는 엄마의 성씨를 따랐다. 근데 그건 왜. 옹성우가 동그란 눈을 검벅이는데도 남자애는 잘근 웃음을 지었다. 그건 예의 쑥스럼이 아니라 의문 드는 씁쓸함이었다.
찰나의 시간은 느리게 흘러간다. 배경음악이 크게 들리는 것은 극적인 순간이다.
"와 오싰는지 말씀을 해주셔야, 뵈주든 매매를 허든 하니께요."
"기야, 별 것은 아니고오..."
"험, 아니믄요. 헤헤..."
"아들 찾으러 왔다 아입니꺼."
"에? 아... 아-들?"
"확실헐 텐데. 혹시 열일곱년 전에 여로 웬 배 불룩한 여자가 내려오지 않았답니까?"
"그건, 그란디..."
"그 배에 품고 있던 기 내 자슥이요."
이장님의 입이 떠억 벌어졌다. 더러 등지고 앉은 옹성우의 눈이 크게 뜨였다. 작게 떨린 옹성우 동공을 감지라도 한 듯 남자애가 입술을 쭈뼛거렸다. 안녕. 그제야 담백하게 던져진... 첫인사는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닌데. 기어이 무료한 표정을 지은 남자애가 다시 잘게 웃으며 제 선분홍빛 무릎을 쥐어잡았다. 멈춘 이장님 옆의 악당 얼굴이 의문을 담고 옹성우를 노려봤다. 느릿하게 흘러가던 달팽이살 위로 폭포가 흘렀다.
6
방 안에 가만히 앉은 옹성우 위로 형광등 불빛이 쏟아져내렸다. 깐 귤 두개를 건네도 손만 뻗어 받아채간다. 옹성우는 또 그런 표정을 하고는 성실히 귤을 깠다. 옹성우 누나의 표정이 남도일처럼 변해갔다.
오후부터 멍한 표정은 풀릴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뭔 일 있대도 털어놓고 와하하 웃는 성격이라 옹성우의 누나는 그런 모습이 영 이상할 뿐이었다.
"옹. 너 아까 뭔 일 있었니?"
"어, 어?"
"먼 일 있었냐고. 얘 봐라, 이젠 사람 말에도 집중 못 해."
"그 뭐, 있어. 좀 피곤해서."
"피곤할 게 뭐 있다고..."
옹성우가 다시 탐스럽게 살오른 귤을 까먹자 깔끔하게 탈수된 빨래를 다시 집어든 누나는 그것을 차곡차곡 접기 시작했다. 듬성한 아카시아 나무 너머로 찌르르르 밤벌레 울리는 소리가 들린다. 앞머리를 흔들만한 바람이 슬렁슬렁 불었다. 금새 빨랫감은 네모지게 쌓여갔다. 빨래 다 갠 누나가 할 일 없어진 손을 비비다 손뼉을 짜악 쳤다.
"썅... 내 정신 봐. 주민사무소 들러야 하는데."
"사, 사무소는 왜? 이장님이 불러? 누날 왜?"
"엄메 깜짝야. 갑자기 웬 관심이여."
"그냥 궁금해서 그러지, 뭘..."
"너 진짜 이상타- 오늘."
팔짱을 낀 누나가 옹성우를 한창 노려보려는데 그 시선을 슬그머니 피하던 옹성우 눈에 여즉 불켜진 주민사무소가 들어왔다. 동시에 뒤쪽에서 찌르릉-! 아날로그 전화벨이 울렸다.
전화 왔네? 받기 위해 누나가 장판 위로 도르르 몸을 굴려 벌떡 섰다. 하지만 불도저처럼 와다닥 수화기를 잡아챈 동생 때문에, 그녀는 그만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엉덩이를 떨리는 손으로 감싸쥔 누나가 주먹을 꾸욱 쥐었지만 동생은 흘끔 뒤돌아보고 바로 수화기를 귀에 붙였다.
"옹. 옹. 옹성우. 죽고 싶은 게냐?"
"예에-! 옹가입니다."
"저 새끼를 그냐앙..."
-[성우야, 이장님이다.]
"자, 잘못 거셨습니다!"
뒤에서 몰래 멱살을 잡으려던 누나는 옹성우가 화들짝 놀라 수화기를 던지듯 내려놓자 지가 더 놀라 어깨를 들썩였다. 봉곳한 가슴을 괜히 쓸어내렸다.
"뭐야? 왜 던져!"
"이상한 전화야! 스팸, 스팸!"
"그으래...? 이상하다."
요 촌동네에 스팸 올 데가 있나? 머리를 긁적이며 물러서는 누나를 비켜 돌아선 옹성우가 숨을 몰아쉬었다. 저 너머의 등대같은 사무소는 여즉 불이 켜진 채였다. 곱은 이마를 단단한 손으로 찰싹 때렸다 움켜쥐었다.
제 앞에서 잘게 웃고 있는 남자애를 내비두고 야상을 집어든 그대로 총알처럼 튀어나간 이후로 옹성우는 쭉 이런 상태였다. 그리고 더 정신없는 건 그제야 남자애의 질문이 이해가 되는 것이었다.
[응, 친형제는 아니라서.]
"으아악!!!!"
"악 깜짝이야!
"...."
"이 미츤 새끼 니 아까부터 왜 그래?"
옹성우는 머리를 부여잡으며 어이가 가출할 지경인 누나를 등졌다. 이렇게 이장님의 콜도 씹고 뛰쳐나와서 얻는 것이 뭐냔 말이다. 현실부정은 오히려 더 불안했다. 분명 곧 있어 어떻게든 마주하게 될 텐데, 상상한 게 아니길 바랐지만... 옹성우는 이빨을 물어뜯었다. 낳은 엄마 얼굴도 못 봤는데, 십수년 만에 등장한 아빠라는 작자가 저렇다니. 아무리 봐도 악당인데. 그럼 나 이제 어쩌지. 수퍼맨을 꿈꾸었는데 악당의 아들이 되었어.
우리 누난 어쩌지. 옹성우는 아무것도 모르고 승질 내고 있는 누나를 안쓰럽게 쳐다보았다. 곧이어 얄미운 손에 등짝을 후려맞고 푸닥 엎어졌지만 말이다. 울상 지은 얼굴이 거칠게 일그러진다. 아 누나! 잠시만! 누나-! 아파!
7
소년과 소녀가 벤치에 나란히 앉았다. 잠자리가 두 콧날을 스치고 휘잉 지나갔다. 옹성우의 귀를 잡아끌고 등장한 누나는 기어이 이장님께 전부의 이야기를 전해들었다. 옹성우는 얼얼한 귀를 문지르며 손을 내저었지만 누나는 진지한 표정으로 이장님의 말을 새겨들었다. 당사자보다 더 진중한 태도였지. 이장님은 한숨을 내쉬며 내려앉은 콧등을 비볐다. 꼬옥 데려가야겠단다. 옹성우가 표정을 알 수 없는 누나의 옆모습을 훔쳐보았다.
언젠간 올 거라고 생각했어.
무심하게 던져진 말에 뭉툭한 손가락으로 밤색 바지끝을 문질렀다. 넌 나처럼 버려진 것두 아니고, 웬 여자가 갑자기 내려온 것두 이상하잖아. 땅주인이었구나.
옹성우가 슬며시 고개를 들었다. 핏줄이 아니라는 것이 실감되는 순간은 아주 오랜만이었다. 같은 성씨를 써도 다른 배에서 난 사이였다. 상황을 거부하려고만 했는데. 눈물이 찼다. 찹다.
꼭 데려가야겠다고 단언을 했다면서 아들 얼굴도 안 보러 오는 친아비에 대한 감정 때문에? 정든 땅골에 대한 아쉬움 때문에? 아니다. 추호도 없었다. 티격했던 남매 사이의 정은 저들 생각보다 짙었다. 누나의 표정이 옹성우가 머리를 싸매며 걱정했던 상실감, 절망감, 되려 저를 버린 부모에 대한 야속함 따위가 아니라...
안도감이라서. 내색 안 하면서도 고등학교 양보한 것에 대한 미안함을 가슴 깊숙이 가지고 있던 누나였다. 뭐 올라온다며 이름도 잘 안 불렀던 누나가 동생 옹성우의 등을 두드려주었다. 성우야. 울지 마라. 너는 올라갈 때두 됐지. 옹성우가 옅게 눈물찬 눈을 둔탁하게 문질러댔지만 더욱 차오르는 속도는 당해낼 수가 없었다. 누나는 몸을 돌려 두 뼘은 더 큰 몸을 껴안아주었다. 속 찬 울음이 뱉어졌다. 누나의 허탈한 표정은 없었다. 그 애마냥 잘게 웃기만 했다. 다행이다. 성우야.
미안해, 누나.... 미안해...
성으야. 느릿하게 살지 말구. 수퍼맨처럼 살아라 이젠.
8
"너 이름이 뭐야?"
"와. 이건 이제야 물어보나. 핏줄 확인이 더 중요하지."
"흐음."
"?"
"너어- 울었구나."
무릎을 굽혀 들판에 앉은 저를 똑바로 쳐다보던 흰 얼굴이 오동통한 입술을 꾸욱 다물었다. 가는 손이 희미한 눈물자국을 가리키자 옹성우가 허겁지겁 손바닥으로 얼굴짝을 부볐다. 남자애가 옹성우의 옆에 풀썩 주저앉았다. 반바지를 입어 여린 다리가 쓸리는데도 개의치 않았다.
"미안."
"뭐가 미안해?"
"우리 아부지 때문에 운 거잖아. 아, 너네 아부지도 되는구나."
"그것 때문 아냐."
"아니긴 뭐 아냐! 엉덩이에 뿔 난다."
나란히 앉은 소년들 사이로 바람이 살살 불었다. 옹성우의 까만 머리와 대조되는 연갈색 앞머리가 가볍게 흩날렸다. 입술을 쭈볏 세운다.
"내 이름은! 성운이야. 하성운."
"성운이."
"으응. 너는?"
"난 옹성우."
"우와. 이름 비슷하네!"
"그러게."
볼우물을 올려 웃은 하성운이 만족스럽게 풀을 쓰다듬었다. 옹성우는 그걸 지켜보고만 있다가 입을 열었다.
"근데... 넌 나 안 미워?"
"응? 뭐가?"
"친형제 아니라며. 그럼 나는... 뭐 그런 거 아냐?"
"그런 게 뭔데?"
"뭐... 굴러들어온 돌?
"푸하하! 뭐야! 그럼 난 박힌 돌이게?"
"서자라던가... 엄마가 다르잖아."
"됐어, 뭐 그런 걸 갖구 그래."
하성운은 뭐든 아무렇지 않다는 것처럼 말했다. 박힌 돌, 박힌 돌이래... 잘게 곰씹으며 웃기만 한다. 어찌 보면 아비가 갑자기 얼굴도 모르고 엄마도 다른 아들 찾겠다고 내려온 격인데 뭐든,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다. 괜찮아. 지금 어머니는 다섯 번째 부인이라서. 또 아무렇지 않게 입술을 삐뚜루 세우고 중얼거리는 목소리에 옹성우는 사레가 들릴 뻔했다.
그런 모습에 잘게 웃은 남자애가 발간 무릎을 살살 문질렀다. 옹성우가 눈을 굴려 그 모습을 본다. 어제와 같은 옷차림이었다. 계속 못 올라가고 있는 것이 빤했다. 옹성우가 번쩍이는 스포츠카는 기를 쓰고 피해다니는 바람에 피해를 본 사람 1순위일 것이다. 갑자기 왜 찾겠다고 내려와선. 옹성우는 아비를 찾았지만 전혀 기쁘지 않다. 어쩐지 좋아 보이지 않는 새로운 형제의 몸상태도 한몫 더했다. 불안정해 보여서. 웃어서 그나마 흐리해진 파리한 안색이 어디 아파 보였다.
"근데, 악당... 아버지가 나는 왜 찾으러 온 걸까?"
"아... 그거?"
하성운이 눈을 내깔았다. 보들한 손가락에 바둥바둥 잡힌 개미를 응시한다.
"나 곧 죽거든."
바람이 한 번 쌩 불었다. 개미가 계속 바둥대자 하성운은 그걸 바닥에 던져놨다. 또 아무렇지 않은 표정이었다. 옹성우는 벌어진 입을 닫을 생각도 못 했다.
"쪼오금... 아파서. 지금껏 외동이었어."
"그걸...."
"외동 자리 채울 사람이 필요하긴 한가부다."
작은 어깨가 움직였다. 잘게 웃고 있었다. 아무렇지도 않았다. 옹성우의 크게 뜨인 눈을 마주보며 하성운은 눈웃음쳤다. 표백한 듯 흰 피부가 눈에 선명하게 들어왔다. 어떻게 저런 표정을 지을 수 있지. 어떻게 까만 미래를 말하는데 아이스바를 사러 가는 길에 하는 표정을 짓냔 말이다.
"어랏... 어떻게 멀쩡하냐는 표정이다!"
"...."
"맞지?"
"어...."
"이미 석 달 전에 들었어. 여기도 동생 얼굴 함 보고 가려구 내가 떼써서 온 거야."
여린 어깨가 웃음소리와 함께 흔들린다.
9
"쟤 뭐하노."
"쟈 기도하는 중이라는데요."
그날 옹성우는 악당 아버지를 만나 인사했다. 얘야? 얩니다. 어이없게 읊조리는 말에 한시도 안 지도 맞받아쳐주었다. 새아비는 아들 찾겠다는 말을 물리고 싶어하는 것 같았지만 옹성우는 개의치 않았다. 불안하게 보던 하성운이 또 잘게 웃었다. 너 차암 웃긴다.
사실 원래 형 있었어. 첫째형은 성격이 엄청 조용했는데, 그래서 너 신기해. 어머니 닮은 건가 봐. 아, 형은 나 여섯 살 때 죽었구. 우리 집은 요절하는 풍습이 있나.
이게 다 연좌제 때문이 아닐까. 옹성우가 조심스레 말하자 우하하 웃은 하성운이 등을 두드려댔다. 새아비는 악당이 맞았다. 엄청 큰 대기업을 다닌다고 했다. 원래 큰 일 하는 사람들은 뒤가 구리다고. 하성운은 삐죽삐죽 웃으며 말햇다. 나쁜짓 하구 다니는 거는 알았지.
10
쟤 뭐ㅡ
기도하는 중이라는데ㅡ
옹성우는 옷을 갖춰입고 개천 앞에 섰다. 그 앞에서 전의 기도를 잠깐 떠올렸다. 용이 나게 해주세요. 이장님이 등 두드리고 옆집 현이가 부잣집 아비 찾았다고 축하한다 하는 것도 다 이런 것의 연장선일 테다. 소망이 이루어진 게 이렇게 안 기쁠 수도 있다니, 사소함의 소중함을 문득 깨닫는다.
어변성설. 손을 모아쥐고 중얼거렸다. 마을의 전설은 한번씩 이루어지기 마련이다. 옹성우는 믿는 바가 있었다.
개천에 쓰레기를 버리지 마세요. 아파합니다.
다신 못 볼 문구였다. 옹성우는 손을 모아 쥐고 귀를 붙였다. 개천이고, 용이고. 승천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주어 없는 말이었다. 아프지 않게 해주세요.
출발해야 해! 한 박동을 두고 흰 몸이 손을 휘저었다. 옹성우가 발치를 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