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사즉생
Written by 태이
바다 끝자락에 있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 해단도(海端島)였다. 널따란 크기에 비해 토착민은 별로 없었는데, 구태여 그 이유를 따지자면 나라님이 사시는 북적한 육지와는 거리가 먼 외톨이 섬인 탓도 있겠지만 섬 근방을 제외하곤 쉽사리 오도 가도 못하게 하는 강한 물살이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그들은 이 외딴 섬에 고립되어 있었으며, 그마저도 원인모를 섬 안 재난으로 인해 날이 갈수록 근심에 근심만 더 해지고 있는 실정이었다.
유발자도 모르고 퍼진 중병이라든지, 기름진 토양임에도 이상하게 시들시들해진 농작물이라든지, 밤낮 없이 떠들어 댈 수 있을 정도로 사건이야 많았지만 죄다 정확한 이유도 모르는 의문투성이 뿐이었다. 그러니 마땅한 해결책도 없어 사람들이 하는 일이라곤 물 떠놓고 하늘님, 별님, 달님하며 제사를 올리는 것이 다였다. 물론 어디 있는지도 모를 신을 부르짖는 게 그리 효험이 있는 행동은 아니겠지만 다들 뭐라도 해보자는 심산이 컸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해단도를 둘러싼 흑해(黑海)의 험난한 파도를 뚫고 유유히 들어온 나룻배 하나가 있었다. 다 허물어져 가는 나무 판때기 위에 서있던 사람은 비견 많이 줘봐야 삼십대 후반으로 보이는 외관이었는데, 이상하게도 나이 많이 먹은 노인마냥 백발을 가진 사내였다. 그가 천연덕스러운 표정을 한 채 허리를 꼿꼿이 핀 정자세로 배에서 내리자 주위 사람들의 시선은 모두 그에게로 향했다. 대부분은 그가 걷어차면 무너질 법한 쓰레기로 어떻게 바다를 건너왔는지 의아한 시선을 보내는 것이었다.
처음 보는 이방인에 대한 경계심으로 눈알만 도르륵 굴리던 섬사람들 중, 제일 먼저 나선 건 촌장 김씨 할아범이었다. 김씨 할아범은 큼큼- 하고 괜한 헛기침을 내뱉으며 그에게 물었다. ‘뉘시오?’ 그의 물음에 인자한 미소를 지은 남자는 차분한 어조로 이리 대답했다. ‘성도사라 하오.’ 그러고선 그가 스스로 덧붙이길, 바다 건너 대륙에서 온 영험한 도사라더라. 때마침 그의 뒤 너머 아늑히 먼 수평선 끝자락에 점같이 보이는 선박이 서너 대가 지나갔는데 그 선박들을 가리키며 말하는 도사 왈, ‘저 선박의 종착지가 내가 살던 육지요.’
왼손에 든 죽선을 차르륵 펼쳐 살랑살랑 흔들어대며 그는, 자신은 대륙의 나라님이 사시는 궁에서 일할 정도로 실력이 출중한 성인이라며 자랑하듯 떠들어댔다. 앞날을 들여다 볼 수 있을 정도로 무슨 경지에 올랐다고 말하기는 하는데, 섬사람들은 도사의 말이 하도 어려워 그냥 그런가보다 했다. 평생을 농작물이나 물고기를 잡으며 살아왔던 사람들이니 아무렴, 그의 사정에 대해 무심이 반, 낯설음이 반일 수밖에.
그렇게 마을에 당도한 이방인은 마을 끝자락에 작은 오두막을 짓고 살아갔다. 처음부터 있던 사람마냥 그는 이곳의 생활이 자연스러웠으며, 사람들을 대하길 스스럼없었다. 그예 점차 그와 어울리는 이들이 늘어났고, 그가 해주는 육지 이야기를 재밌어하는 젊은이들은 때로 몰려다니며 그의 집을 자주 찾아오고는 했다. 그러다 누군가는 그가 손에 쥐고 있는 두터운 책을 손짓하며 관심을 보였다. ‘도사님은 그런 걸로 공부하십니까?’ 그의 말에 도사는 책을 덮고 대답했다. ‘그렇다. 내 아직 부족해서 수련을 게을리 하면 안 되지.’ 기다랗게 내려온 수염을 슥슥 쓸어내리며 말하는 도사의 모습을 보고, 이야기 속으로만 전해지던 산신령이 이런 모습이 아닐까하고 누군가는 생각했다.
'요괴에 짓이 틀림없군. 저어 산이 보이나?'
'신영산에 무슨 일이라도…?'
'저기에 아주 위험한 놈이 살고 있다. 내 방법을 찾아 볼 터이니 그때까지 조심들 하라 전해주거라.'
'네!'
언젠가 젊은이 중 하나가 도사에게 물었다. ‘저… 도사님, 진짜 이곳에 저주라도 깃든 겁니까?’ 그의 말에 도사는 잠깐 미간을 찌푸리더니 며칠 뒤에 답을 하겠다고 했다. 그 후 나타난 도사가 하는 말이, 해단도에 제일 높고 커다란 산이었던 신영산(伸瑛山)에 아주 사악한 요괴 놈이 있다고 하는 것이다. 그는 품 안 가득 들고 온 요상한 부적때기들을 마을 사람들에게 나눠주며 백귀야행이라고 요괴들은 밤에 움직이니 다들 밤에는 출입을 삼가하고, 혹여나 나갈 일이 있으면 그가 전해준 부적을 쥐고 나가라 했다. 그리고 며칠 뒤 그는 요괴가 마을에 침입하지 못하도록 마을 어귀마다 말뚝을 박았다.
'이제 하나만 남았소.'
'무슨 일 말입니까?'
그쯤 되니 사람들은 도사를 신뢰하고 있었다. 처음 그에게 물음을 구했던 젊은이 무리는 물론이오, 며칠 새 그에게 부적을 받아든 섬사람들 모두가 그를 향해 눈을 빛내었다. 요 며칠 사이 불온한 일이 안 일어난 것도 있었지만 여태 마땅한 이유를 몰라 밑도 끝도 없이 저주라는 말로 주절거리던 그들에겐 요괴라는 실체를 제시하며 행동을 보이는 도사의 말을 신뢰하는 것 외엔 다른 길이 없었다. 하여, 섬에 저주가 깃들었다는 기괴한 낭설이 이젠 도사의 의해 뒤룩뒤룩 살을 붙여 ‘신영산에 있는 못된 요괴가 저주를 내렸다.‘ 라는 정설로 변해버린 것이다. 게다가 스스로 밝히는 바, 그는 과거 나라님을 위해 일하기도 했던 영험한 도사였고, 이 작은 촌구석을 위해 피곤함을 마다하지 않고 밤새 노고해주는 그가 믿음직해보이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니 사람들은 도사의 다음 말을 듣기 위해 숨소리조차 멈추며 쫑긋 귀를 세웠다.
'섣날 그믐날 인간 제물을 받쳐야 하오.'
필사즉생 必死則生
上.
해단도에는 그 유래가 그리 길지 않은 전통이 하나 있었다. 바로 섣날 그믐날이 되면 신영산에 제물(祭物)을 바치는 것. 제물의 조건은 복잡하지 않았다. 그저 젊고 아름다운 처녀이기만 하면 되었다. 이 전통은 성도사라는 사람이 마을에 내려온 지난 이십년 동안 지속되어 왔고, 그것은 올해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제물의 조건이 부합하는 사람이 이제 없어 문제였다.
"도사님, 그믐날도 얼마 남지 않았는데 금년 제물은 어찌하지요?"
십년 전 바뀐 촌장은 양씨였다. 그는 성도사에 대한 신뢰가 큰 사람 중 하나였는데, 제사가 며칠 안 남은 오늘 금년 제물에 대한 답을 찾고자 서둘러 직접 도사를 찾아왔다. 그는 의자에 엉덩이 붙이기 무섭게 도사에게 물었음에도 기다리는 그 짧은 새 초조함과 난처함으로 목에 갈증이 이는 것만 같았다. 혹여나 이십년 전처럼 요괴의 화를 입어 다시금 저주가 시작되는 건 아닌지 걱정이 들어 어저께부터는 속까지 더부룩할 지경이었다. 반면 뭐가 그리 여유로운지, 도사는 제 앞에 놓인 찻잔을 들어 차를 한 모금 마시더니 입매를 곡선으로 그렸다.
"아직 혼례를 치루지 않은 사내 아이 중에 미동은 없습니까."
"미동이라 함은…"
촌장은 눈썹을 찡그리고 고민에 빠졌다. 마을 아이들을 떠올려보았지만 마땅히 생각나는 재목은 없었다. 도사는 그런 그가 답답했는지 혀를 한번 차고 이어 말했다.
"어부 하씨네 성운이 말입니다."
"아, 성운이 말입니까."
그의 말에 촌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제 생각에도 성운은 여느 사내아이들과 다르게 피부가 뽀얗고 몸집도 작은 게 그가 찾는 미동에 어울리는 듯 했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그가 진짜 계집아이처럼 마냥 곱상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멀리 봐도 가까이 봐도 사내아이로 분명히 구분이 가능할 터인데 그를 제물로 받칠 수 있는 것인가. 촌장이 의문이 선 눈길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래도 사내아이인데."
"그건 그리 중요치 않습니다. 본디 인간 제물을 탐하는 요괴는 그저 고운 것에 미친 것들 뿐이니. 걱정 마십시오."
"그렇군요."
납득한 촌장이 가슴을 쓸어내리며 맞장구를 쳤다. 애초에 이 듣도 보도 못한 인간 제물을 제안한 것도 성도사였다. 그러니 그가 하자는 대로 하는 것이 옳음이라. 촌장은 며칠 묵은 체증이 내려가는 듯 개운함을 느꼈다. 요 근래 제물 걱정에 잠 못 이뤘는데 다행히 오늘 밤은 편히 잠을 잘 수 있겠다 싶었다.
*
“성운아! 피해야 돼!”
“무슨 말이야?”
다급하게 뛰어 들어 온 대헌이 성운을 잡아끌며 말했다. 성운은 그가 억센 손으로 억지로 잡아채는 통에 거의 반 질질 끌려가다 시피 그를 뒤 따랐다. 뒤로 보이는 그의 뒷모습이 땀으로 흠뻑 젖어있어 성운은 알 수 없는 불안감이 느껴졌다. 얼마나 걸었을까, 결국 목적지도 모르는 걸음을 멈추기 위해 성운이 발에 힘을 주어 대헌을 멈춰 세웠다.
“어디 가는데”
“…”
묵묵히 뒤돌아 서 있던 그는 잠시 아무 말도 없었다. 야, 하고 성운이 그의 등을 한 대 툭 치자 대헌이 눈 깜짝할 새 휙 몸을 돌려 성운을 마주 보았다. 그는 굳은살이 박힌 양 손을 들어 올려 성운의 팔뚝을 붙잡고 입을 크게 한 번 열었다가 이내 다시 닫고 여러 번 달싹이기만 했다. 무언가를 쉽사리 말하지 못하는 그의 모습에 성운이 먼저 물꼬를 틀었다.
“무슨 말인데 그리 망설여.”
“…신영산 제물.”
“응.”
썩 달갑지 않은 주제였다. 어려서부터 오랜 지기였던 대헌과 성운은 매년 섣달 그믐날에 있는 그 의식에 대해 반감을 가진 자들 중에 하나였다. 성도사를 불신한다기보다는 그저 살아있는 인간을 정체도 모를 요괴에게 갖다 바친다는 게 잔인하고 혐오스럽다고 생각했다. 섬사람들은 다수를 위한 소수의 고귀한 희생정신이라 치장하지만 어찌되었건 채 태어난 지 약관도 안 되는 아이들의 목숨을 바치는 것이니 이들처럼 반감을 가진 이들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들에겐 그것을 대항할 다른 대책이 없었고, 그렇기에 이렇다 할 주장은 내놓을 리 만무했다. 그저 싫다 해서 안 할 수 있는 것이면 이십년 전에 진작 그만 두었을 것이다. 섬사람들 모두가 스스로를 속이는 이 괴상한 짓거리는 시작하지도 않았겠지.
“올해 제물,”
“알아왔어?”
며칠 전 그들은 올해의 제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지금 처녀 중 제일 나이가 많은 이가 윤골 아주머니네 혜선이었다. 하지만 혜선이는 열 살도 안 된 어린아이였다. 혹시라도 그 아이가 제물이 된다면 그 인생이 너무 가여웠다. 그래서 대헌과 성운은 죽어도 이번만큼은 가만히 두고 볼 수 없다고 결의를 다졌다. 만약 진정으로 아이를 제물에 바칠 의도라면, 무슨 일이 있어도 의식에 훼방을 놓을 작정이었다. 아이를 빼돌리던, 제물을 바치는 성도사를 기절시키던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말이다.
“너야.”
“뭐?”
“너야, 성운아. 그러니깐 빨리 도망가야 돼!”
“…”
성운은 생각지도 못한 대헌의 말에 잠시 어안이 벙벙해졌다. 그러다, 눈을 여러 번 깜빡였고, 침을 꼴까닥 한 번 삼켰다. 평소 농을 치는 아이가 아니었다. 대헌은 진중한 성격에, 남들에게 사려가 깊었고, 또래보다 어른스러운 구석이 있었다. 저 해괴한 말에 말도 안 된다며 난 사내아이라며 대헌에게 그리 다그치고 싶지만 그보다 더 강하게 성운의 머리를 지배하는 감정의 덩어리가 있었다.
“다행이네.”
“뭐?”
안도감. 분명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혜선이처럼 어린 아이가 그리 험한 일을 겪지 않아도 되니 다행이란 마음이 가장 컸다. 그는 감정에 충실한 사람이었고, 그의 감정의 대부분은 이타심에서 태어났기에 그는 그리 이기적인 사람이 못 되었다. 하지만 ‘내가 대신 목숨을 바친다.‘ 와 같은 숭고한 희생정신은 아니었다. 그저 최악 중에서 최선을 계산하는 것이다. 객관적인 가망을 따지자면 어린 혜선이보다는 자신이 더 살 가망이 있다는 건 안 봐도 뻔했다. 대헌은 성운의 말에 그를 타박하려 목소리를 높였다. 성운의 생각이야 어쨌든 대헌의 입장에선 그의 대답은 터무니없기만 했다.
“뭐가 다행이란 거냐! 지금 당장 이곳을 떠나자. 안 그러면 넌 죽게 될 거야.”
“어디로 가야 되는데.”
“어디든.”
“의식을 시작하기 전 날 찾아 사방을 휘저을 거야. 배를 타고 섬을 떠나면 좋겠지만 그건 불가능하고. 어디에 숨어 있든 찾는 건 금방이겠지. 애들 숨바꼭질 하는 것도 아니고 그건 시간낭비야.”
“너… 너 지금 그런 말이 나와?”
대헌은 성운이 이해가 안 갔다. 초연한 표정으로 자신의 암담한 상황을 읊는 그의 말은 분명 구구절절 옳은 말이지만 그가 내놓은 결론은 결국 죽으러 가는 길에 얌전히 따라가겠다는 의미 아닌가. 대헌이 어리석은 자신의 친우를 향해 되물었다.
“그래서 그냥 죽겠다는 것이야?”
“아니.”
성운은 대헌의 잔뜩 찌프러진 검은 눈썹을 바라보며 단호히 말했다.
“절대 안 죽어.”
*
하얀 무명옷을 입은 성운은 덜덜 떨리는 양손으로 사발을 조심스레 들었다. 조르륵- 도사가 사발 안 가득 효수(曉水)를 따랐다. 도사가 직접 제조한 효수는 제물이 될 이들을 위한 마지막 배려였다. 고요한 새벽처럼 불안한 심신의 안정을 일으켜주는 차라고 했다. 이딴 차 한 잔 마신다고 얼마나 효과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안 먹는 이보단 나을 거였다. 성운은 망설임 없이 한숨에 벌컥벌컥 들이마셨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사발을 떨어뜨리며 바닥으로 쓰러졌다. 쨍그랑-! 날카롭게 깨지는 소리와 함께 뒤에 서 있던 사람들 중 몇이 다리에 힘이 빠진 듯해 보이는 그를 부축했다. 누군가가 안타까워하는 소리가 들렸다. 충격을 받아 제 몸도 못 가누는 모습이 여간 안쓰러운 게 아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결국 그는 도사의 손에 이끌려 신영산에 들어설 수밖에 없었다.
신영산은 요괴가 산다는 이야기가 전해진 뒤로는 출입이 엄격히 금해졌다. 괜히 산 근처를 어슬렁거리다 요괴의 심기를 거스를까 싶어 그 주위도 얼씬 거리는 사람이 없었다. 하지만 그것이 일 년에 한 번 제물 의식을 치를 때만큼은 예외였다. 성도사, 그리고 그를 도울 장정 셋, 그리고 제물, 이렇게 다섯 사람만은 의식 마지막 단계를 위해 마을에서의 의식 과정이 모두 끝나면 신영산을 출입했다. 그렇게 걷던 다섯 사람은 높은 나무로 빼곡한 산림 어딘가 쯤에서 움직임을 멈췄다. 도사가 한 나무를 손짓하자 장정 셋이 족히 몇 백 년은 넘게 산 것 같아 보이는 커다란 나무기둥에 성운을 결박시켰다. 그를 일자로 세워, 나무 기둥과 함께 붉은색 동아줄로 다섯 번 휘감았다.
“다 끝났습니다.”
그리 어려운 것은 아니니 금방 일은 끝났다. 그들은 성운에게 심심치 않는 위로의 말을 건넸지만 성운은 그저 고개만 푹 숙인 채 한 귀로 듣고 흘려버렸다. 이제 넋까지 나가버렸다고 아무개가 말했지만 실제론 그 반대였다. 성운은 긴장감에 온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타박타박, 그들이 자리를 떠나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을 때쯤이었다. 힘없이 늘어져 있던 그는 별안간 온 몸을 들썩여 단단하게 묶여있던 끈을 조금이라도 더 느슨하게 만들기 위해 애를 썼다. 그리고 마을에서부터 지금까지 꽉 쥐고 있던 주먹을 살짝 폈다. 그 사이로 핏방울이 뚝뚝 바닥으로 떨어졌다. 쓰러진 척 몰래 챙겨놨던 날카로운 사발 조각이었다. 그는 그것을 제대로 손에 움켜쥐었다. 긴장감 때문인지 조각으로 인해 찢어진 손바닥의 고통은 느껴지지도 않았다. 그는 미친 듯이 굵은 동아줄에 조각을 비벼댔다. 최대한 빠른 시간 안에 줄을 끊고 달아나야 했다.
투,
투둑,
툭,
마지막 줄을 끊자마자 성운은 힘껏 달음박질쳤다. 어디를 향하는지는 뛰어가는 자신조차 알 수 없었다. 그저 그는 앞만 보고 달렸고, 또 달렸고, 달렸다. 어쩌면 마을을 향해 뛰어가는 걸 수도, 신영산 어둠 더 깊숙이 들어가는 걸 수도 있다. 하지만 힘없이 기둥에 매달려 있는 것보다는 희망이 있었다. 살 것이다. 성운은 오늘 내내 이 짧은 말만 머릿속에 담았다.
“악!”
순식간이었다. 나무뿌리에 걸려 넘어진 몸이 손 쓸 새 없이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 데구르르 굴러가면서 성운은 본능적으로 자신의 머리를 팔로 감쌌다. 새하얗던 무명옷이 금세 더러워졌다. 흙 속에 박혀있던 돌멩이에 몸이 부딪히고 뾰족하게 튀어나와 있던 식물의 가지에 몸이 베였다. 엉망진창인 몰골로 구르던 그는 이내 그 아래 있던 개천 속으로 빠졌다.
잔잔한 개천에 큰 파장이 생기면서 몸이 점점 가라앉았다. 숨이 막혀왔고, 차가운 물이 온 몸을 감쌌다. 폐부 깊숙이 물이 차오르는 것 같았다. 성운은 개천에 가라앉으면서도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살려고 발버둥이라도 쳐야할 터인데 손가락 하나 꼼짝할 수 없을 만큼 힘이 빠져 있었다. 그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물로 가득 차 아늑해진 저 너머만 바라보는 뿐. 나는,
살 것이다…
下.
뜨여진 눈꺼풀 너머로 흐릿하게 시야가 보였다. 똑똑똑. 어딘가에서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가 일정한 박자로 들려왔다. 성운은 힘없는 눈을 억지로 띄우며 눈알을 도르륵 굴렸다. 여기가 어디지? 머릿속으로 의문이 스친다. 느릿하게 깜빡이는 눈으로 주위를 살피던 성운은 곧 자신이 어두운 동굴 속에 누워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왜 여기에… 분명 기억 속 마지막은 시체처럼 물속에 가라앉은 자신이었다. 그 이유를 알 수 없음에 당황하는 것도 찰나 곧 전신을 뒤덮는 열기에 흡- 하고 숨을 들이마셨다.
"으으…"
앓는 소리를 내며 몸을 웅크렸다. 제 위로 덮여져 있던 가죽을 치우며 열기를 식히려 들었지만 좀처럼 열기가 가시지 않았다. 불덩이 같이 붉어진 얼굴로 숨을 간헐적으로 내뱉었다. 급격하게 오르는 심박 수에 성운은 이러다간 심장이 터져 죽는 것은 아닌지 하는 걱정에 사로잡혔다. 내 몸이 왜 이러지? 원인모를 변화에 눈물을 글썽이며 성운이 바닥을 손톱으로 긁었다. 그러다 천 아래 솟아나 있는 것을 보고 놀라 막무가내로 잡아 내리려 들었다. 하지만 도리어 손과 맞닿은 감촉에 알 수 없는 흐느낌만 나올 뿐이었다. 그예 성운은 그것에 더 한 갈증을 느껴 깊게 생각할 시간도 없이 길게 내려진 천을 끌어 올렸다. 속곳 하나 입지 않은 맨살이 바닥에 깔린 지푸라기에 닿았다. 이미 가슴께까지 올린 천에 성운의 몸이 차가운 공기에 노출되었다.
고작 천 한 조각이었지만 그 차이는 천지차이였다. 방해물 없이 여실히 손에 닿는 몸의 감각에 성운은 이성을 잃고 느껴지는 쾌감에 생각을 잊었다. 한숨과 같은 신음을 뱉으면서 요령도 없이 그저 손이 가는대로 따랐다. 수음 한 번 해본 적 없는 그였기에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조차 몰랐다. 본능적으로 행위를 쫓아가는 자신은 스스로도 처음 보는 모습이었지만 성운은 얼른 몸 안 가득 차있는 갑갑한 열기를 있는 힘껏 바깥으로 뽑아내버리고 싶었다. 그러니 그 낯선 갈망의 재촉은 성운으로서 감당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탁.
갑작스레 들린 소리에 성운은 게슴츠레하게 뜬 눈으로 소리의 근원지로 시선을 돌렸다. 그곳엔 정체모를 남자가 앉아있었다. 그는 마른 나뭇가지를 가득 옆에 쌓아 놓고선 하나 둘씩 반으로 쪼개는 중이었는데, 남자는 성운의 시선에 그를 한 번 힐끔 쳐다보더니 이내 다시 나뭇가지를 손질하기 시작했다. 무표정한 남자의 얼굴에 성운은 문득 자신의 차림새를 내려 보았다.
“으읍…”
미약하게 떠져있던 눈이 그제야 제대로 뜨여졌다. 성운은 그제야 속절없이 끌려가는 자신을 막기 위해 아랫입술을 깨물며 억지로 몸에서 손을 때었다. 붉게 충혈 된 눈엔 아직도 물기가 잔뜩 고여 있었지만 그는 풀어헤친 옷을 도로 정리하는 동안에도 끝끝내 눈물 한 방울 떨어뜨리지 않았다. 입기에 민망할 정도로 옷의 상태는 좋지 않았지만 거적때기 하나 없는 이곳에서 이마저 없으면 자신만 곤란했다. 성운은 아직 수그러지지 않은 하체를 아까 전 자신의 위에 덮어져있던 가죽을 끌어다 감추었다.
“저… 저기…”
매가리 하나 없는 소리가 남자를 향해 추락하듯 떨어졌다. 남자는 부싯돌을 비벼 켜진 불씨를 살리기 여념 없었는데, 용케도 그의 말을 들었는지 고개를 숙여 나뭇가지를 향해 입바람을 불던 것을 멈추고 얼굴을 들여 올렸다.
“왜 그러는 게냐?”
“여기가 어딥니까.”
“동굴.”
보면 모르냐는 표정이었다. 깜깜하고 사방이 돌로 둘러 쌓여있는 것을 보고도 성운이 모를 리 없었다. 댁 어디 사시오? 라는 질문에, 우리 집에 삽니다. 라고 대답하는 꼴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성운은 가뜩이나 기운이 없고 아래가 화끈해 죽겠는데 말장난을 하는 남자가 아니꼬웠다.
“여기가 어딥니까.”
“왜 또 묻는 게냐. 혹 백치인 건가?”
“…이곳이 신영산입니까?”
“산은 맞네만 내 이름을 지은 기억이 없군.”
당신이 뭔데 산의 이름을 짓습니까. 성운은 목구멍까지 차오른 말을 애써 삼켜냈다. 짧은 대화였지만 저 사내는 말이 안 통하는 사내임이 확실했다. 성운은 다시금 희미해지는 정신과 어느새 지 멋대로 움찔거리는 하체에, 더 이상은 안 되겠는지 늘어져있던 손을 들어 자신의 뺨을 세차게 내리쳤다. 한 번, 두 번, 그리고 세 번째 덥썩 손목이 잡혔다. 소름끼치도록 차가운 냉기가 손목에 전해졌다.
“진짜 백치인가?”
“…”
“무엇이 그리 화가 나 자학을 하는 것이냐?”
이상하게도 코앞까지 다가온 남자의 몸에선 시원한 냉기가 느껴졌다. 자신이 지금 화마에 휩싸여 그렇게 느끼는 것일 수도 있지만 그가 잡아챈 손목에 피어난 냉기가 조금은 신경을 누그러뜨리고 있다는 건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성운은 더 이상 생각할 겨를도 없이 다른 손을 뻗어 그의 등을 감싸 끌어안았다.
“이건 또 무슨,”
“잠시만요…”
땀에 젖어 끈적한 온몸과 달리 이미 바싹 말라붙은 입술은 그가 심하게 깨물어 핏물까지 송골송골 맺혀있었다. 성운은 입안으로 스며들어오는 피를 삼키며 그의 어깨에 턱을 올리고 느리게 눈만 깜빡였다. 그러길 잠시 아무 말도, 행동도 없던 남자가 어정쩡한 자세로 있던 몸을 고쳐 성운을 아주 조심스레 자신의 품에 감싸 안았다. 불행히도 남자는 인간의 속마음을 훔쳐보는 능력 따윈 없어 그가 왜 이러는 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성운의 불덩이 같은 몸엔 차가운 자신의 몸이 어느 정도 도움이 될 것 같아 보였다. 그리고 그게 맞다면 그를 안은 품을 더 단단히 하는 게 그를 살리는 일일 것이다.
“옹성우. 내 이름이다. 니 이름이 무엇이냐.”
“하성운이요. 하성운.”
...
..
.
성운은 꼬박 며칠을 일어났다 잠들었다 하는 것을 반복했다. 그리고 남자는 그 옆에서 항상 성운을 살뜰히 보살폈다. 스스로의 열기가 버거워 밤새 고열에 시달리면 그를 아이 다루듯 조심스레 끌어안아 하루 종일 품에 안아주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정성에도 불구하고 아직 성운의 몸은 납덩이에 깔린 것 마냥 무거웠다. 가라앉은 정신에 희미하게 보이는 시야는 모든 것이 어슴푸레하게만 보일 정도로 그는 심신이 허했다.
“으응…”
깨어나자마자 갑작스레 훅 느껴지는 추위에 성운은 무의식적으로 앓는 소리를 내었다. 하지만 그는 잠들었을 때도, 깨어있을 때도, 연신 소리를 내었기 때문에 소리 하나만으로 그가 일어났다는 사실을 쉬이 알아낼 리 없었다. 하지만 성우는 기민히 성운에게 물었다.
“일어났군. 많이 추운가?”
질문에 대한 답은 굳이 전해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성운의 입술은 이미 보랏빛으로 변해 있었고 사시나무 떨 듯 온몸을 떨어대었기 때문이었다. 동굴 벽에 기대 성운을 살펴보던 성우는 이내 옆에 놓인 마른 나뭇가지 몇 개를 더 쪼개었다. 그리고 성운 옆에 작게 피어놓은 모닥불에 마구 집어넣어 화력을 올렸다. 그럼에도 성운의 추위는 쉽사리 사라지지 않았다. 떨림은 조금 줄었지만 얼굴은 이미 식은땀으로 범벅이 된 상태였다.
“이 몸과 달리 인간의 몸은 많이 번거롭군.”
여상하게 말했지만 성운은 그의 말에 어지러운 신경을 곤두세웠다. 스스로를 인간임을 부정하는 것처럼 들린다면 너무 과민한 것일까. 하지만 가만 보면 성우는 허깨비 같은 자이기도 했다. 해단도는 워낙 고립되어 있는 곳이라 서로 간에 모르는 이가 없었다. 하지만 앞에 이 남자는 살아생전 처음 보는 이였다. 하다못해 이름 또한 들어 본 적이 없었으며, 섬 내에 옹씨 성을 가진 자는 아무도 존재하지 않았다. 마치 땅에서 솟기라도 한 것 마냥 갑자기 섬에 나타난 성도사처럼. 생각해보면,
“…진짜 인간이긴 한 건지.”
“아니네만.”
성운은 방금 자신이 들은 소리에 화들짝 놀라 몸을 벌떡 일으켰다.
“지금 무슨 소릴…”
“인간이 아니란 소리지.”
“…”
남자의 의문스런 화법은 어찌 보면 꽤 직설적이기도 했다. 그는 돌려 말하는 법이 없었고 답이 단순할 만큼 간결했다. 그럼에도 성운은 저 치가 한 소릴 곧이곧대로 받아들여야 하는 지를 잠시 망설였다. 인간이 아니라면 무엇이랴.
하나 밖에 답이 없지 않은가.
*
“잠시 나갔다 오겠다.”
성운은 그의 말에 일언반구도 없이 멍하니 허공만 바라보았다. 하지만 성우 또한 대답을 들을 생각은 없었는지 별다른 반응 없이 몸을 일으켜 동굴 밖을 빠져나갔다. 달이 지고 해가 뜨고 해가 지고 달이 뜨는 것이 몇 번 이건만 성운은 아직 이렇다 할 갈피를 잡지 못했다. 지금까지로서 그는 자신을 해칠 의도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마을에서 전해 들었던 흉포한 모습 또한 보지 못했다. 날이 갈수록 옳고 그름이 무엇인지 정도를 찾지 못해 방황하는 나그네처럼 복잡한 속내만 겹겹이 쌓여갔다. 턱하니, 체한 것처럼 속이 갑갑했다. 성운은 답 없는 생각 끝에, 이리 온 후로 대부분의 시간을 누워있기만 해 찌부등한 몸을 조심스레 일으켰다.
낮이고 밤이고 하루 종일 불을 태우던 모닥불에서 멀어지기 시작하니 벌써부터 미세한 오한이 들었다. 며칠 새 기가 상해도 단단히 상한 모양이었다. 이름 모를 짐승의 가죽을 몸에 단단히 휘어 감고 발자국 소리도 내지 않은 걸음새로 걸었다. 그리 깊은 동굴은 아닌지 그는 금세 출구를 찾을 수 있었다. 타닥타닥. 이제와 보니 밖은 비가 오고 있었다. 내리는 비의 빗방울이 굵고 많아 우기에 접어듬을 알 수 있었다. 성운은 어둑해진 구름이 퍼붓는 빗소리를 들으며 그렇게 잠시간 서있었다. 비록 날씨는 어두웠지만 오랜만에 맡는 바깥 내음이 퍽 상쾌했다. 예의 그 체증이 내려가는 거 같기도 했다.
성운은 동굴 바로 앞 개천으로 시선을 돌렸다. 눈만 굴려 위를 쳐다보니 자신이 굴러 떨어진 경사가 보였다.
“하- 요괴를 피해 달아났건만, 도리어 요괴에게 달려온 꼴이 되었구나.”
멍청하기 짝이 없었다. 요괴가 사는 동굴 앞 개천에 떨어졌다니, 살고자 아등바등되었던 과거의 자신이 우습기도 했다. 어쩌면 이것이 사람들이 말하는 운명일지도 모른다. 남자인 자신이 제물로 바쳐져-, 요괴가 사는 동굴 앞에 떨어져-, 죽는 날만 바라보는 그런 운명.
“마지막은…”
아직 의문이긴 했다. 살의 없는 눈빛에 어찌할 바를 모를 정도였으니. 진정 자신이 알고 있는 요괴가 맞는 건가 싶었다. 실제로 인간을 잡아먹는 요괴 따위 본 적 없으니 쉽게 믿지 못하는 것 일 수도 있다. 게다가 그와 자신은 겉으로 보기엔 다른 점이 눈곱만큼도 있지 않아 더 그럴지도 모른다.
“저건…”
그때였다. 성운은 저 앞에 보이는 무언가에 홀린 것 마냥 동굴에서 벗어나 밖으로 뛰쳐나왔다. 철퍽철퍽 어느새 진흙이 돼 물기가 흥건한 땅을 맨발로 밟으며 서슴없이 걸었다. 흙 사이로 모습이 들어난 무언가 앞에 도달하자 그는 걸음을 멈췄다. 아-. 성운은 깨달음을 얻은 사람처럼 멍하니 그리 내뱉었다.
“나 진짜 바보구나.”
자신의 발치 아래 있던 뼈 조각을 지나쳐 성운은 미친 듯이 뛰었다. 누군가의 유골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근래 배불리 먹은 기억도 없는데 토가 나올 거 같았다. 그래서 그는 동아줄을 끊고 달렸을 때처럼, 그렇게 죽을 듯이, 아니 살기 위해, 그는 달렸다. 머리 위론 폭우처럼 빗물이 쏟아지고 숨은 턱 끝까지 차오르고 몸은 아직도 여의치 않았지만 그에겐 선택 사항이 없었다. 살고 싶다면 저 괴물에게서 멀리, 더 멀리-
*
“헉!”
성운은 불안정한 호흡을 내뱉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흔들리는 얼굴 탓에 머리가 어지러웠지만 그것보다 익숙한 물소리에 더 소름이 끼쳤다. 똑똑똑. 그곳이다. 내가 그곳에 있어. 저기 보이는 모닥불은 그 전과 같이 타오르고 있었으며 그 옆엔 여전히 마른 잔가지가 쌓여있었다. 게다가 제 몸 위엔 동굴 앞에 벗어 던지고 갔던 가죽이 어느새 다시 덮어져 있었고, 제 몸 아랜 며칠 동안 꼼작 없이 누워 있었던 그 지푸라기 더미가 있었다. 아까 전 일이 모든 게 허상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 무엇도 변하지 않은 그대로였다. 정말 모든 것이.
“괜찮은 것이냐?”
들리는 목소리에 성운은 몸을 굳혔다. 도망치려 했으니 이제 자신을 죽여 버릴 것이다. 그러니 그 전에 이곳을 벗어나야 했다. 그런 생각이 머릿속을 지배하자 성운은 급하게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그와 함께 다리에 힘이 빠진 그는 금세 볼품없이 지푸라기 위로 엎어졌다.
“조심해라. 몸이 성치 않은 채로 비를 맞아 상태가 더 안 좋아졌다.”
성우가 다가와 그를 똑바로 눕혔다. 성운은 그가 움직이는 대로 가만히 몸을 놔두었다가 성우가 왼손에 들고 있던 날카로운 돌조각이 보이자, 눈이 돌아간 미친 사람처럼 냉큼 그것을 뺏어 들었다.
“그건 왜,”
“차라리 지금 죽여라!”
자신의 목에 칼을 대며 성운이 외쳤다. 어차피 죽을 목숨이라면 더 이상의 농락은 사양하고 싶었다. 요괴의 집에 갇혀 죽는 날만 바라보고 사는 비참한 삶을 조금도 연명하고 싶지 않았다. 성우는 도끼눈을 한 채 자신을 노려보는 성운에게서 돌을 빼앗으려 했다. 하지만 그는 성우가 뻗어오는 손을 향해 돌을 위협적으로 휘둘렀다.
“왜 이러는 것이냐.”
“어차피 죽일 것이라면 그만 끝내라. 이 사악한 요괴야!”
“그게 무슨,”
“무슨 간악한 꾀를 부리려 나를 아직까지 살려두는 것이냐!”
성운의 울부짖음에 성우는 한숨을 쉬었다. 패기 있는 말과는 달리 그는 이제 애처롭게 울고 있었다. 말간 얼굴 전체로 눈물이 뒤범벅되었으면서 그는 자신의 죽음을 외치고 있었다. 성우는 그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난데없이 제 앞에 등장해 언제나 자신에게 의미모를 행동만 해대었다. 죽여 달라는 입과는 달리 죽음을 바라지 않는 눈빛을 보내는 지금처럼. 그래서 요즘 들어 바라건대, 인간의 속마음을 알 수 있는 능력이 자신에게 생긴다면 기필코 성운에게 쓰고 싶었다. 저 땅콩 같은 머리로 무슨 생각을 그리 해대는지. 그는 정말 이상한 자였다. 이상한 자, 참으로 알 수 없는 인간이었다.
“진정 죽고 싶으냐?”
“죽여라.”
“그럼 나에게 용이 되는 것을 포기하고 살생을 하라는 이유가 무엇이냐.”
“뭐?”
성운이 그의 말에 고개를 올려 멀거니 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의 눈을 보는 건 포기하고 뺨에 콕콕 박힌 점 세 개를 대신 바라보았다.
“내 승천하기 위해 지난 구백 구십년 동안 살생을 금하고 개천의 주인으로 살았는데, 이제와 금기를 행해 지난 수련을 허사로 만들라 하고 있지 않느냐. 그러니 하더라도 그 이유는 알고 해야겠다.”
“지금 뭐라고.”
“여의주 무는 게 그리 쉬운 줄 아느냐? 천년을 독수공방하며 개천이나 호수 따위에 갇혀 살아야 한다. 게다가 하늘의 노여움을 받지 않기 위해 괜한 소란도 피우면 안 되지. 이래저래 제약이 많은 일이다.”
“그럼… 요괴가 아니란 말입니까…?”
성운이 넋이 나간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그의 물음에 성우는 처음으로 성운 앞에서 표정을 구겼다. 감히 어불성설이었다. 이무기는 고귀한 용신의 바로 아래 존재였다. 비록 이무기시절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조그마한 물웅덩이 안 생물을 다스리는 게 다이지만 여의주를 물고 승천만 한다면 말이 달라진다. 그리고 그는 이제 이레만 지나면 천지의 물을 다스리는 용신이 되어 모든 이에 숭배를 받을 몸이었다. 한낮 요괴 따위는 그에게 발톱에 낀 때만도 못한 존재였다.
“이무기를 요괴로 대하다니. 다른 이무기였으면 수련이고 뭐고 화가 나 죽임을 당해도 할 말이 없겠구나.”
“이, 이무기.”
“그래. 이 몸은 이무기다.”
필사즉생(必死則生), 죽기를 각오하면 살 것이다. 그렇게 죽음 앞에서 성운은 자신을 구원해줄 신(神)을 만났다.
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