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련(片戀: 조각 편, 사모할 련)
Written by 기억조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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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른편에 햇살에 비쳐 반짝이는 바다를 두고 쫙 트인 해안도로를 따라 차를 몰고 오다 보면 전망 좋은 곳에 작은 성운의 북카페가 있다. 성우는 오늘도 조수석에 작은 꽃다발을 놓고 운전대를 잡았다.
성운의 카페는 굳이 차를 타고 가야 할 거리에 위치하지는 않았지만 오늘은 평소보다 일찍 사무실에 가봐야 해서 오랫동안 주차장 구석에 주차돼 바깥 공기를 쐬지 못한 차를 끌고 나왔다.
창문을 내리고 액셀을 밟으면 눅눅한 바닷바람이 머리칼을 간지럽혔고 차 안은 금세 바다 특유의 짭조름한 냄새로 가득 찼다. 가시각(可視角) 한편에 조그맣게 빨간 등대가 보이면 성우는 창문을 올리고 한 손으로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정리하며 작게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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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는 부산이다. 대한민국 제2의 도시. 성우가 나고 자랐던 제주도에 비교하면 아주아주 바쁘고 시끄러운 곳이다. 아침의 지하철과 버스는 출근과 등교를 하려는 사람으로 미어터지며 해운대와 광안리는 전국팔도, 세계 각국의 사람들로 붐빈다.
맛있다고 입소문을 탄 음식점은 순식간에 관광객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중심지와 살짝 거리감이 있는 곳에 있는 부둣가에는 컨테이너를 실은 거대한 배가 하루에도 몇 번씩 들락날락거렸다. 모든 사람이 바쁘고 또 정신없었다.
딱 한 사람, 하성운 빼고.
성우는 성운을 떠올리며 다시 웃음을 지었다. 하성운은 이곳과 다르게 언제나 천하태평인 사람이었다. 성운을 생각하며 부드러운 도로를 달리다 보니 어느새 왼편으로 노란색 건물이 보였다. 알록달록한 색깔의 건물들이 모여 있는 곳에 위치한, 성운과 잘 어울리는 카페였다.
성우는 부드럽게 핸들을 틀어 마당으로 들어가 하나밖에 없는 주차선에 차를 주차했다. 커다란 통유리로 창가에 앉아 책을 읽는 성운의 모습이 보였다. 차가 다가오면 고개를 들어 보일 법도 한데 성운은 단 한 번도 성우가 오는 소리에 고개를 든 적이 없었다. 그만큼 둔하고 또 무딘 사람이다.
성우는 조수석에 놓인 꽃다발을 들고 천천히 차에서 내렸다. 푸른 잔디 위에 깔린 넓적한 돌을 밟고 문 앞까지 가는 동안에도 성운은 하얀 얼굴을 보이지 않았다. 노란색과 잘 어울리는 분홍색 문에 팻말이 붙어 있다. 성우는 꽃으로 입을 가리고 팍 웃었다.
[CLOSED]
성우는 천천히 손을 뻗어 팻말을 뒤집어 놨다. 지금이 도대체 몇 시인데 아직도 문을 안 열고 있어. 알록달록한 나무판에 삐뚤빼뚤한 성운의 글씨체로 OPEN과 CLOSED가 쓰인 팻말이 귀여워 성우는 한참을 유심히 그것을 바라보다 손바닥으로 나뭇결을 훑은 뒤 문을 밀어 안으로 들어갔다.
경쾌한 종소리가 카페 안에 울렸지만 성운은 책에서 눈을 떼지 않으며 얌전히 창가 옆 푹신한 의자에 앉아 책장을 넘기고 있었다. 성우는 카페를 둘러보다 살짝 열려 있는 작은 창문을 보고 기가 차 숨을 내뱉었다. 도로 아래쪽에 위치한 바다에서 파도가 철썩철썩 치는 소리가 이리도 크게 들리는 걸 봤을 때 아마 성운은 성우가 온 것을 알고도 모르는 척하는 중일 것이다.
“연기 그만.”
“왔어?”
성운은 그제야 성우를 보며 활짝 웃었다. 우아한 손짓으로 테이블 위에 놓인 달 모양 책갈피를 들어 책장에 꽂고 책을 덮은 성운은 설핏 미소를 지었다. 그 책갈피는 언젠가 성우가 성운이 부탁한 책을 사기 위해 갔던 대형서점에서 사와 선물한 것이었다. 얄쌍한 초승달 위에 붙어 있는 작은 별이 꼭 성운 옆에서 간신히 관계를 붙잡고 있는 저 같아서 씁쓸한 표정을 지었던 건 죽어서 무덤에 들어갈 때까지 말하지 않을 사실이었지만 말이다.
“오늘은 분홍색 안개꽃이랑 라일락.”
“되게 안 어울리는 조합이네, 나 비슷한 계열 색 조합 안 좋아해.”
분홍이랑 보라색이 그런 계열에 있는지 내가 어떻게 알아, 성우는 작게 투덜거리며 떠안기듯 성운에게 꽃다발을 건네줬다. 성운이 조금만 더 부지런했거나 눈치가 빨랐으면 성우가 매주 주던 꽃의 꽃말을 찾아봤을 텐데. 성우는 내가 별걸 다 기대한다는 생각으로 고개를 저었다. 하성운이 그럴 리 없다. 성운은 꽃다발에 얼굴을 묻고 눈을 내리깐 채 가만히 서 있었다.
“월요일인가 봐 오늘.”
“응, 오늘 월요일.”
“슈트 입었네.”
“응.”
“왜?”
“웬일로 저한테 관심을 주세요?”
“줘도 난리야.”
성운은 마른 꽃잎이 바닥에 가득한 창가에 다가가 시들어 빠진 튤립을 화병에서 꺼내 쓰레기통에 버렸다. 매주 월요일, 성우는 집 근처 꽃시장에서 꽃을 사와 성운에게 건넸다. 꽃을 좋아하는 성운이 활짝 웃는 모습이 좋아서, 그리고 둔한 성운에게 월요일의 시작을 알리려고.
성운 덕에 성우도 월요일 아침은 다른 날보다 조금 더 부지런히 움직이고 조금 더 기분 좋게 시작할 수 있었다. 성운은 화병의 물을 따라내고 깨끗한 물을 담은 뒤 꽃다발을 꽂아뒀다.
“라일락 향기 때문에 커피 향이 묻히면 어떡하지.”
“테라스에 놔도 괜찮을 거 같은데.”
성우는 성운이 방금까지 앉아있던 의자에 앉아 창밖을 쳐다봤다. 테이블 위에 있는 책은 거들떠보지도 안 봤다. 애초에 책에는 관심이 없었다. 어쩌면 책을 너무 사랑하는 하성운 때문에 책이 싫어진 것일 수도 있지만. 의자에 가만히 앉아 시원하게 탁 트인 바다를 보고 있노라면 지상낙원에 온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성운이 커피머신을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리고 원두 갈리는 소리가 귓가에 윙윙거렸다. 난 또 돌체라떼 마시겠네. 성우는 생각만 해도 달달한 커피 맛을 떠올리며 얼굴을 찌푸렸다. 그렇게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좋다고 해도 매번 차가운 돌체라떼를 건네는 성운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건 너도 좋아할 거야.”
성운은 당당히 그렇게 말했었다. 그 말이 아주 많이 틀린 건 아니라서 성우는 짧게 고개를 끄덕이고 차가운 물방울이 맺힌 플라스틱 컵을 받아들었었다.
“아침부터 멍때리면 어떡해.”
“어? 어, 또 돌체라떼.”
“주는 대로 마셔, 돈 받기 전에.”
“받아도 되는데.”
“됐거든요.”
성운은 튤립이 있던 자리에 화병을 내려놓은 뒤 성우 옆에 앉았다. 하얀 연유 위에 부은 커피가 서서히 퍼지고 있는지 컵 아래부터 흰색, 갈색, 검은색으로 이뤄진 층이 눈에 들어왔다.
성우는 빨대를 살짝 위로 올리고 커피를 마셨다. 빨대 끝이 컵 아래까지 내려가 있으면 연유의 달짝지근함이 목을 타고 넘어가 온종일 머리를 아프게 했다. 도대체 왜 이런 달짝지근한 것을 하루에도 몇 번씩 마시는 건지 성우는 이해할 수 없었다. 저러다 당뇨 오지.
“쫙 빼입고 어디 가?”
“사무실.”
“근데 왜 여기서 이러고 있어.”
성운은 느긋하게 빨대를 빨다 눈을 크게 뜨며 몸을 일으켰다. 그 눈이 놀란 토끼 눈과 흡사해 보여 성우는 픽 웃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얼굴에 다 드러나는 것이 퍽 웃긴 하성운이었다.
빨리 가, 성운은 어제 들어온 새 책 정리도 해야 하고 청소한 뒤 손님을 맞이해야 한다며 성우를 가게에서 쫓아냈다. 손님이 있든 말든 상관하지 않고 카페 안 제일 조망 좋은 곳에 앉아 책을 읽는 하성운이 한 말이라고는 전혀 믿기지 않았다. 성우는 작은 손으로 있는 힘껏 저를 밀어내는 성운에 순순히 밀리며 카페 밖으로 나섰다.
“너 너무 자주 찾아와, 이제 좀 드문드문 와도 돼.”
성운은 양쪽 허리에 손을 올리고 고개를 저었다. 성우도 성운을 따라 고개를 저었다. 내가 왜 그렇게 자주 오는지 너는 몰라도 돼, 오지 말라고만 하지 마라. 성우는 됐다고 퉁명스럽게 말한 뒤 차에 올라탔다. 운전석에 앉아 급하게 안전벨트를 하고 창문을 내리니 분홍색 문 앞에서 웃으며 가볍게 손을 흔드는 성운이 보였다.
예쁘다.
성우는 멍하니 성운의 모습을 바라봤다. 언제나 그랬듯 하성운은 너무나도 예뻤다.
“…가.”
“뭐라고?”
하성운을 보다 보면 종종 이렇게 말을 놓칠 때가 있다. 아름다움에 빠져 넋을 잃는다고 해야 할까. 성우는 멍한 표정으로 성운을 바라봤다. 성운은 성우에게 바보 같아 보이니까 그런 표정 짓지 말라고 말했었지만 그게 어찌 가능한 일일까.
“조심히 가라고.”
성우는 손을 들어 보이고 부드럽게 차를 몰았다. 백미러로 성운의 모습이 작게 보이다 이내 시야에서 사라졌다. 성우의 입술 호선도 덩달아 사라졌다. 아침 시간을 쪼개 겨우 누린 찰나의 행복이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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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우는 성운을 좋아했다. 아니, 지금도 변함없이 좋아하는 중이다.
벌써 성운을 남몰래 좋아한 것도 4년이다. 길을 잘못 들어 우연히 들르게 되었던 성운의 카페 때문에 성우가 부산에 정착한지 벌써 4년이라는 것이다.
그날은 오늘처럼 맑은 날이 아니었다. 비는 억수 같이 내렸고 한 치 앞도 보기 어려웠다. 성우는 지방 출장 때문에 부산에 잠시 머물렀어야 했고 성운의 카페와 멀지 않은 곳에 집이 마련되어 있었다. 하지만 낯선 곳에서 맞닥뜨린 장대비에 덜컥 겁이 난 성우는 급하게 빛이 있는 곳으로 차를 몰아 주차를 하게 되었고 그때 노란색 벽에 분홍색 문을 한 성운의 카페에 들어서게 되었다.
“잠시 실례…”
“저희 영업 끝났…”
설거지를 하고 마른 수건으로 글라스를 닦던 성운은 카페로 들어서는 성우를 보며 말을 멈췄다. 머리와 어깨에서 뚝뚝 떨어지는 빗물을 투박한 손으로 털던 성우도 말을 멈춘 상대를 보기 위해 고개를 들다 성운과 눈이 마주쳐 분주히 움직이던 손을 멈췄다.
아, 사랑인가 보다.
급작스럽고 갑작스러운 감이 있었지만 성우는 머릿속에 종소리가 댕댕 울리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제가 25년을 살며 처음 느낀 감정이었다. 첫눈에 반한다는 말 따위 믿지 않았는데, 운명 같은 거 믿지 않았는데. 수수한 옷차림에 약간 피곤해 보이는 그 얼굴이 왜 그렇게 예뻐 보였는지. 성우는 제가 입을 헤벌쭉 벌리고 있다는 것도 모른 채 한참을 멍하니 성운을 바라봤다.
“밖에 비 많이 와요?”
빗방울이 샤워기 물처럼 쏟아지는 소리가 이 사람 귀에는 들리지 않는 건가? 성우는 당연하게 귓가에 들려오는 빗소리에 귀를 기울이다 의문스럽다는 표정을 짓는 성운을 빤히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이 비에 흠뻑 젖어 안으로 들어왔는데도 태평하게 비가 많이 오느냐고 묻다니.
“이거로 몸이라도 좀 닦으세요.”
성운은 층층마다 책이 쌓여있는 계단을 밟고 위로 올라가 방으로 들어갔다가 작은 수건을 들고 내려왔다. 아마 카페의 2층은 이 사람이 사는 집인 모양이었다. 성우는 성운이 건넨 수건을 받아들었다. 살짝 맞닿은 성운의 손가락이 따뜻했다. 성우는 천천히 주먹을 쥐며 수건으로 얼굴을 가렸다. 볼이 달아오르는 것 같았다.
“따뜻한 차라도 드릴까요?”
담가 둔 유자청이 이제 맛있을 때예요. 성운은 성우의 대답은 듣지 않은 채 카운터 쪽으로 다가가 컵을 달그락거렸다. 성우는 몸에 묻은 물기를 닦아내고 얌전히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성운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내부가 온통 노란 불빛인 카페는 이 젊은 사장과 굉장히 잘 어울렸다. 눅눅한 습기를 머금은 듯한 헌 책은 카페 벽면에 세워둔 책꽂이에 빽빽이 꽂혀 있었다. 그 책꽂이로도 모자란 것인지 통유리 앞 선반에도, 계단 위에도, 테이블 아래 수납공간에도 책이 그득했다. 정말 책을 사랑하는구나, 성우는 어쩐지 이 아기자기하고 따스한 분위기를 내뿜는 카페가 마음에 들었다. 물론 지금 저를 위해 따뜻한 차를 내오는 저 사람이 더 마음에 들었지만.
“첫 개시를 불청객과 함께 할 줄이야.”
성운은 생긋 웃으며 성우 앞으로 하얀 바탕에 작은 꽃잎이 분홍, 하늘색으로 그려진 예쁜 찻잔을 밀어 넣었다. 향긋한 유자 향이 코끝을 간지럽혔다. 성운은 성우가 천천히 차를 마시는 모습을 보고 저도 찻잔을 들어 올려 차를 후후 불었다.
“옷 축축하겠네, 이름이 뭐예요?”
“네?”
성우는 예상치 못한 질문에 초면임에도 불구하고 성운과 눈을 맞추다 호탕하게 웃었다. 애초부터 이름을 물어볼 거였으면서 왜 굳이 젖은 옷 얘기를 꺼냈는지. 성우의 웃음소리에 전염이라도 된 듯 성운도 성우를 바라보며 활짝 웃었다. 카페 안은 둘의 웃음소리가 가득했다.
성운은 한참을 꺄르르 웃다 힘이 들었는지 배를 움켜쥐고 숨을 몰아쉬었다. 성우도 숨을 돌리기 위해 길게 숨을 내뱉었다. 오늘 처음 본 사이인 둘이었지만 늘 봐왔던 친구 사이 같았다.
“그쪽 이름이요, 이~름.”
“옹성우예요.”
“옹? 되게 특이하다 이름.”
“덕분에 한 번 들으면 안 잊어요.”
“응, 그럴 거 같아.”
어느새 은근슬쩍 반말하는 성운을 보며 성우는 턱을 괴었다. 붙임성이 좋은 건지 아님 예의를 잘 안 차리는 건지.
“왜 나만 이름 말해요?”
“안 물어봤으니까?”
성운은 생긋 웃으며 차를 홀짝였다. 예쁘면 다인가, 성우는 성운의 긴 속눈썹과 곧게 뻗은 콧대, 붉은 입술을 힐끗힐끗 쳐다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쁘면 다인 것 같다.
“하성운이에요.”
얼굴도 예쁘더니 이름도 예쁘다. 성우는 생김새와 찰떡인 성운의 이름에 감탄했다. 아주 작게 탄식했는데 용케도 그 소리를 들었는지 성운은 질색하며 이름 하나 들었다고 탄복하는 건 별로라고 했다.
“몇 살이에요?”
성우는 최대한 성운이 타준 차를 천천히 마시려고 노력하는 중이었다. 한 모금 한 모금, 향긋한 유자차를 마실 때마다 하얀 바닥을 보이는 것이 아쉬웠다. 축축한 옷이 마르며 체온을 뺏어가 몸이 으슬으슬 떨렸지만 춥다고 찻잔을 내려놓고 벌떡 일어설 수는 없었다.
밤은 깊어 가는데, 이렇게 죽치고 있는 건 굉장한 민폐라는 걸 아는데도 성우는 계속 쓰잘머리 없는 말로 성운을 붙잡고 이곳에 머물고 싶었다. 카페 사장님과 이렇게까지 대화를 해도 되는가에 대해 의문이 들면서도 성우는 성운이 먼저 이름을 물어봤다는 것을 핑계 삼으며 성우는 자꾸자꾸 질문을 던졌다.
“스물다섯 살이요.”
“어, 나도.”
편하게 반말해요, 딱히 이유는 없고… 동갑인 사람 처음 봐서 그래요. 성운은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성우는 별말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비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기세를 누그러뜨리더니 이내 언제 비가 왔냐는 듯 뚝 그쳤고 바깥에서 고요히 철썩이는 파도 소리만이 귀에 들려왔다. 따뜻했던 유자차는 차게 식어있었고 찻잔엔 마른 유자 껍질이 붙어있었다.
가야 한다.
머리로는 가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성우는 가기 싫음을 온몸으로 표현했다. 괜히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렸고 옆에 있는 책꽂이에서 책을 꺼내 책장을 뒤적였다. 성운은 빈 찻잔 두 개를 가져가 유자청을 개수대에 쏟고 찻잔을 닦았다. 물소리와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리다 뚝 그쳤다.
성운이 무슨 말이라도 할 줄 알았는데. 성우는 온 신경이 성운에게 쏠려 몇십번이고 같은 페이지를 반복해서 읽다가 조용해진 느낌에 고개를 들고 성운을 바라봤다. 성운은 설거지를 끝냈음에도 불구하고 싱크대 앞에 얌전히 서 있었다.
“너무 늦은 거 같은데… 자고 가.”
혹시 졸음운전이라도 하다가 사고 나면 어떡해. 성운은 싱크대에 튄 물기를 닦던 행주를 내려놓고 다시 성우가 앉아 있는 쪽으로 걸어왔다.
“감기 걸리면 내가 너무 미안할 거 같아서 그래.”
성우는 그제야 웃으며 책을 덮었다. 우리 집이 이 카페와 멀지 않은 곳에 있다고 말하면 되는데 그러고 싶지 않았다. 언제 다시 올지 모르는 기회였다. 조금 무리를 해서라도 기회를 놓치면 안 될 것 같았다.
성우는 성운을 따라 책이 층층이 쌓인 계단을 올라가 작은 방에 들어섰다. 화장실, 매트리스 하나와 앉은뱅이책상 하나. 무슨 일제강점기 시대 때 공부방도 아니고, 성우는 성운이 건네는 옷을 받아들고 눈을 깜박였다.
“그거 입고 자.”
성운은 성우를 배려한답시고 문을 닫고 밖으로 나가줬다. 성우는 재빨리 옷을 갈아입고 축축한 옷 뭉텅이를 들고 어찌할 바를 몰라 쩔쩔매고 있었다. 성운은 빼꼼히 문을 열고 성우를 살피다 옷을 받아서 들어 세탁 바구니에 던져 넣었다.
“나중에 옷 찾으러 와, 빨아둘게.”
성운은 멍청하게 서 있는 성우의 곁을 지나 매트리스에 털썩 앉은 뒤 구석으로 기어가 누웠다. 성우는 이제 자신이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다. 처음 본 사람 옆에서 자는 건 아닌 것 같고, 역시 너무 오버한 건가 싶었다.
“눈 굴러가는 소리 다 들려. 그냥 여기서 자.”
성운은 피곤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성우는 재빨리 몸을 움직여 매트리스 가장 끝쪽에 몸을 뉘었다. 성운은 금세 도로롱거리며 잠에 빠졌지만 성우는 쉬이 잠들지 못했다. 쫓겨나듯 온 지방 출장도, 엄청난 폭우도 모두 성운을 만나게 하려고 하늘이 만들어둔 하나의 장치 같았다.
성우는 조용히 몸을 일으켜 바닥에 앉아 가만히 성운의 옆모습을 응시했다. 사람 속도 모르고 세상모르게 잘 자는 모습이 괘씸해 코끝을 톡 건드니 끄응, 신음을 뱉고 이불을 푹 덮는 성운이었다. 성우는 실실 웃다 바닥에서 일어섰다. 아무래도 여기서 계속 있다가는 심장이 너무 빨리 뛰어서 부정맥 증상이 나타날 것 같았다.
성우는 최대한 살살 계단을 밟기 위해 노력하며 내려간 뒤 카페 문을 열었다. 때에 맞지 않는 경쾌한 종소리에 몸을 움츠린 뒤 최대한 숨죽인 채 문을 닫은 성우는 차에 시동을 걸고 집 주소를 내비게이션에 찍은 뒤 카페를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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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첫사랑의, 짝사랑의 시작이었다. 성우는 사무실에 들어와 투명한 탁자에 돌체라떼가 담긴 컵을 올려놓고 사무용 의자에 몸을 묻었다.
“치워드릴까요?”
반보다 더 많이 남은 커피를 보며 비서가 물어봤고 성우는 고개를 저었다. 항상 끝까지 마시지 못하지만 모두 버리지도 못한다. 하성운이 준 거니까.
성우는 옷에 밴 커피 향을 맡으며 서류를 뒤적였다. 자꾸 서울로 다시 올라오라는 말이 들렸지만 애써 무시하며 없는 일을 만들어서 하는 중이었다. 외국에 정착해있는 누나가 쌍둥이를 낳은 뒤 힘드니 와서 같이 아이 좀 봐달라고 몇 번이고 연락했었지만 일 핑계를 대며 다음으로 미루던 중이었다.
괜한 오기 부리지 않고 얌전히 서울로 올라가야 하는 건 맞지만 최대한 끝까지 안 가고 버티고 싶었다. 하성운이 있는 부산을 떠나고 싶지 않았다. 서울에서 가져온 일은 거의 다 끝내서 부산에서 성우가 할 일은 얼마 남지 않았다. 성우는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으며 서류를 몇 번이고 재검토했다.
“들어와요.”
노크 소리에 성우는 문을 힐끗 보고 다시 서류로 시선을 돌렸다. 웬만해서 집무실에 잘 들어오지 않는 비서가 문을 두드리는 걸 보니 무슨 골치 아픈 일이 생긴 것 같았다.
“성우야, 시간 괜찮지?”
“어머니?”
익숙한 목소리에 성우는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왜 엄마가 여기에 왔어? 성우의 어머니는 단정한 모습으로 성우의 사무실에 들어와 자연스럽게 소파에 앉았다. 도대체 왜 직접 여기까지 오신 건지, 성우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어머니를 응시하다 그 맞은편에 앉았다.
“네 누나 외국에서 혼자 공부하고 일하느라 힘들었던 거 알지.”
성우의 어머니는 항상 온화함을 유지하시는 분이었지만 옳고 그름은 확실하셔 아니라고 생각하실 땐 근엄하셨다. 성우는 올 것이 왔다고 생각하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부디 제가 생각하는 그 말만은 하지 않으면 좋겠다고 바라고 또 바랐다. 이미 그러지 않을 거라는 걸 직감했지만 말이다.
“네 누나 다른 사람한테 손 벌리는 거 죽기보다 싫어하는 애다. 그런 애가 한 번만 도와달라잖니.”
결국은, 아니 마침내. 아니, 기어코.
성우는 목이 타는 느낌에 테이블 위에 있는 커피를 빨대로 빨아 마셨고 다디 단 연유 맛에 인상을 찡그렸다. 이제 이 단내 나는 커피와도 안녕인 건가.
“성우야.”
“네?”
“부탁할게.”
성우는 컵을 내려놓고 물이 묻은 손을 허벅지에 쓱쓱 비볐다. 어차피 거절이라는 건 할 수 없었다. 누나를 도와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저도 미룰 수 있을 만큼 미룬 거니까. 하지만 역시 하성운과 떨어져 있어야 한다는 게 마음에 걸렸다. 옆에 있다고 제가 뭘 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하성운은 그냥 옆에서 바라만 보는 것만으로도 좋은 사람이었으니까.
“비행기 표는 걱정하지 마라, 여기 정리하는 거 며칠이면 되니.”
정리는 하루 만에 끝낼 수 있었다, 어차피 아버지가 운영하는 회사에서 일하는 거였기 때문에 모든 뒤처리는 아버지께 맡겨도 상관없었다. 문제는 하성운이었다. 성우는 한숨을 뱉으며 양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보기만 해도 좋은 사람의 곁에 있는 것조차 할 수 없다는 게 벌써 힘들었다.
성우의 어머니는 워커홀릭인 아들이 일을 못 할 생각에 괴로워하는 줄 알고 가만히 미소를 짓고 등을 몇 번 두드린 뒤 그대로 사무실을 나갔다. 성우는 핸드폰을 꺼내 어머니께 메시지를 하나 보냈다. 아주 짧은 문장이었지만 꽤 오랜 시간을 고민하고 또 고민한 뒤 손가락을 움직였다.
[하루면 됩니다.]
최대한 빨리 떠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다는 말을 믿었다. 성우는 문을 열고 비서에게 반 이상이 남은 돌체라떼 컵을 쥐여 준 뒤 옷깃을 정리했다. 이제 부산에 있을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시간이 부족했다.
성우는 바로 성운의 카페로 향했다. 조급한 마음에 자꾸만 몸이 삐끗거렸다. 성우는 차키를 바닥에 떨어트렸고 두 번이나 문을 열기 위해 헛손질을 했다. 갖은 우여곡절 끝에 운전석에 앉은 성우는 안전벨트도 매지 않은 채 무작정 액셀을 밟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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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홍색 문을 여니 딸랑이는 종소리가 났고 어서 오라는 성운의 목소리가 들렸다. 행주로 선반을 닦다 고개를 든 성운은 다급한 표정으로 카페 안으로 들어오는 성우를 보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카페에선 아침에 성우가 사다 준 라일락 향기가 희미하게 났다.
“왜 왔어?”
성우는 성운의 말에 대꾸하지 않은 채 가게 안을 한 번 훑어봤다. 처음 본 흐트러진 성우의 모습에 성운은 성우의 팔을 두 손으로 잡고 무슨 일이 있는지 재차 물었다. 성우는 성운의 물음에 고개를 좌우로 저을 뿐이었다.
“손님 없으니까 나랑 놀러 나가자.”
“뭐?”
성우는 빨리 가자는 의미로 손을 잡아끌었다. 성운은 느닷없이 카페로 와 놀러 가자는 성우가 이상하다고 느꼈지만 침착한 목소리로 기다리라고 말한 뒤 앞치마를 벗어 냉장고 옆에 걸어두었다. 성우는 카페를 정리하는 성운을 눈으로 좇으며 얌전히 옆에 서 있었다.
“무슨 바람이 들어서 이래.”
성운은 뒤에서 성우의 허리를 밀며 밖으로 나왔다. 따뜻한 햇볕이 두 사람을 비추고 바다냄새를 머금은 시원한 바닷바람이 둘의 머리카락을 헝클어뜨렸다. 성운은 성우를 앞에 세우고 손을 뻗어 팻말을 쥐고 뒤집었다.
[CLOSED]
성우는 성운이 옆 좌석에 앉아 문을 닫자마자 차를 몰았다. 성운은 꽤 난폭하게 운전하는 성우의 모습을 바라보다 고개를 돌렸다.
“내일 죽어? 왜 그래.”
창문을 내리고 팔을 내민 성운은 손을 펴 손가락 사이로 통과하는 바람을 느끼고 있었다. 옆에서 성우가 위험하니 손을 집어넣으라고 말했지만 기분이 좋다는 이유로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있었다.
“나 누나 쌍둥이 돌보러 가.”
“아, 결국 가는 거야?”
성운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며 손을 거둔 뒤 창문을 올렸다. 잠깐 바람을 쐰 것뿐인데 오른손은 차갑게 식어있었다. 온기가 돌 수 있게 주먹을 쥐었다 피며 성운은 창밖 풍경에 집중했다. 오랜만에 하는 외출은 꽤 즐거웠다.
“보수동이네.”
“응.”
“내 카페에도 책 많은데 굳이.”
책에서 좀 벗어나나 싶었는데 또 책이 있는 곳이다. 하여튼 옹성우 센스는, 성운은 성우가 공영주차장에 차를 대는 동안 계속 피식피식 웃었다. 저 바보를 어쩌면 좋지.
“그렇게 책이 좋냐.”
책이 좋아서 그런 게 아닌데. 성운은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항상 책을 읽고 있다고 본인이 책벌레인 줄 안 모양이다. 이젠 지겹다는 티라도 내고 싶은데 책이 싫은 건 아니라서 저도 모르게 책들이 켜켜이 쌓여있는 책방골목에 시선이 갔다. 성운은 성우를 한 번 살피고 먼저 그 골목으로 들어섰다. 종이가 오래돼 나는 눅눅한 냄새와 케케묵은 먼지 냄새가 골목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정겹지 않니?”
성운은 눈을 감고 숨을 들이쉬었다. 성우는 들릴 듯 말 듯 한 목소리로 그렇노라 대답하며 성운의 모습을 찬찬히 살폈다. 이 모습도 잊고 싶지 않았다. 하성운과 함께하는 모든 순간은 너무나 소중해서 깨지지 않게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 했다.
성우는 핸드폰을 꺼내 들어 성운의 사진을 찍었다. 찰칵거리는 소리가 조용한 보수동 책방 거리에 울려 퍼졌다. 사진을 한 컷씩 찍을 때마다 성우는 제가 사랑한 성운의 모습을 떠올렸다.
찰칵
책과 커피를 사랑하는 하성운.
찰칵
작은 일에도 크게 기뻐하는 하성운.
찰칵
향이나 색감엔 민감하고 예민하지만 사람의 감정엔 한없이 무던하고 무지한 하성운.
“제 초상권 좀 지켜주실래요?”
성운은 성우의 앞으로 성큼 다가와 카메라 렌즈가 있는 핸드폰 윗부분을 꽉 쥐고 성우를 올려다봤다. 성운의 옷에 밴 커피향이 물씬 풍기는가 싶더니 성운의 새침한 표정이 눈에 들어왔다. 성우는 찰나의 아름다움에 숨을 멈추고 가만히, 얼빠진 사람처럼 성운을 응시했다.
내가 하성운을 멋대로 사랑해버려서.
**
성운은 먼저 성우에게서 시선을 떼고 부드럽게 몸을 틀어 골목으로 들어섰다. 성우는 성운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한참 떨어진 뒤에서 천천히 성운을 따라갔다. 성운은 주위를 살피며 걸어가다 한 책방 앞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이거, 이 책 얼마예요?”
눈을 반짝이며 제 허벅지 높이까지 쌓인 책 중 한 권을 들고 가게 내부로 들어가는 성운을 보던 성우는 고개를 저으며 책방에 들어섰다. 성운은 책 가격이 너무 세다며 주인아저씨와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기 때문에 성우는 얌전히 책장에 꽂힌 책을 골라 들었다.
둘 다 책값에 대해선 한 치의 양보가 없을 것 같아 책을 들고 바닥에 아무렇게나 앉은 성우는 한참 동안 종이가 닳도록 같은 페이지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꽤 시간이 지난 거 같았는데 성운은 여전히 카운터 쪽에서 주인아저씨와 팽팽한 기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성우는 내용에 집중이 되지 않아 책을 덮고 눈높이의 책장에서 책 세 권을 골라냈다.
“알았어요, 3만원.”
무슨 중고 책이 3만 원이나 하는 건지. 성우는 어깨를 으쓱거린 뒤 성운의 곁으로 다가갔다. 주인아저씨와 열띤 대화를 나눴는지 성운의 볼은 약간 발갛게 변해 있었다. 품에 책을 소중히 안은 성운은 책 세 권을 계산하려는 성우를 힐끔 쳐다봤다.
“살다 보니 네가 책을 사는 경우도 다 보네.”
“그러게.”
성운은 계산을 끝낸 뒤 먼저 밖으로 나가 주변을 서성이고 있었다.
“저 펜 한 번만 빌려 쓸 수 있을까요?”
성우는 마지막으로 고른 책의 페이지를 급하게 넘기고 365쪽 아래에 삐뚤빼뚤한 필체로 글씨를 썼다.
일 년 뒤 오늘 여기서 다시 만나자.
뿌듯한 표정을 지은 성우는 펜 뚜껑을 닫고 주인아저씨께 감사 인사를 전한 뒤 빨간 끈으로 책을 엮고 리본으로 마무리를 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기다리는 게 지겨웠는지 신발 뒤축으로 벽을 콩콩 치는 성운의 뒷모습이 귀여워 보여 성우는 피식 웃고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뭐 마실래?”
아마 못해도 일 년 정도 성운을 보지 못할 것이었다. 둘이 할 건 별로 없지만 작은 추억이라도 쌓고 싶었다. 하지만 성운은 그럴 생각이 없는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난 이 책 빨리 읽고 싶은데.”
성운이 안고 있는 책 제목을 보니 과거에 불온서적 반열에 오른 책이었다. 비쌀 만도 하지. 성우는 빨리 책을 읽고 싶은 성운의 마음을 알 것 같아 군말 없이 주차장 쪽으로 몸을 틀었다. 친구가 곧 외국으로 간다는데도 같이 시간을 보내는 것보다 혼자 책을 읽고 싶다는 성운을 이해할 수 없었고 조금 서운한 감정이 들었다.
성우는 속상한 마음에 입술을 앙다물고 차에 탔다. 성운이 환하게 웃는 모습을 보고 싶어서 이곳으로 왔는데 성운은 밝게 웃고 저 혼자만 기분이 바닥으로 곤두박질쳐 우울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눈치 없는 성운은 빨리 카페에 가고 싶다고 말하며 발을 동동거리고 있었다. 성우는 말없이 성운의 허벅지 위에 제가 산 책 뭉치를 올려뒀다.
“그거 다 읽고 시간 남으면 위에 있는 순서대로 책 읽어 봐.”
“선물이야?”
“응, 선물.”
성운은 책 제목을 눈으로 훑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야 금방 읽지.”
“금방 읽지 말고 이 책이 나라 생각하고 매일 아침 짧게 읽어.”
“아아, 내가 너 커피 만들어주는 시간만큼 책 읽으라고?”
“응.”
그렇게라도 날 매일 생각해줘. 성우는 억지로 뒷말을 삼켰다. 성운에게 부담이 될까 봐, 저를 이상하게 생각할까 봐. 하지만 우려와 달리 성운은 성우의 말에 큰 신경을 쏟지 않았는지 시큰둥한 얼굴을 하고 손가락으로 책표지를 톡톡 두드리고 있었다.
길이 좀 막혔으면 했는데. 가는 길에 성운이 뭐라고 말이라도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도로는 뻥 뚫렸고 성운은 조용히 성우의 옆에 앉아 성우가 예쁘게 묶었던 리본을 풀어내고 다시 묶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떠날 준비해야지 너는.”
책이라도 옮겨주고 마지막으로 긴 대화를 나누고 싶었는데. 성운은 차에서 내리기 전 성우를 돌아보며 그렇게 말했다. 성우는 싫다는 말도 하지 못한 채 성운의 말간 얼굴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작별 인사.”
아까 책방에서 먼저 나서 저를 기다리다 산 건지. 성운은 성우의 손에 작은 책갈피를 쥐여 줬다. 성우는 성운에게 초승달 모양 책갈피를, 성운은 성우에게 별이 수놓아진 책갈피를 선물했다. 각인도 부탁했는지 아래에는 작게 o.s.w라고 쓰여 있었다.
“책 고르길래 샀더니 그 책을 나한테 줄 줄이야.”
책 안 읽어서 쓸 일 없으면 그냥 어디에 걸어둬, 버리진 말고. 성운은 쿨하게 말한 뒤 차에서 내렸다. 성우는 책갈피를 왼손에 꼭 쥐고 창문을 내려 고개를 내밀었다.
“잘 가라고도 안 하냐.”
“넌 어디 가서도 잘 살 사람이야.”
성운은 아무 말 없이 성우의 얼굴을 바라봤다. 성우도 성운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 성우는 막연히 그런 생각을 했다.
“고마워.”
“뭐가?”
네가 내 첫사랑이라서. 성우는 고개를 저었다. 겁이 많아 아마 평생 제 마음을 전하지 못할 것이었다. 그냥 뒤에서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좋아 옆에 서 있는 건 바라지도 않는다.
“나도 고마워.”
“넌 왜?”
“말동무해줘서.”
음료를 시키면 음료를 갖다 주고 손님이 나가든지 말든지 신경도 안 쓰고 책을 읽는 카페 사장은 너밖에 없을 거다. 성우는 장난스레 말을 꺼내고 서둘러 성운에게 들어가라고 손짓했다.
파란 바다를 앞에 두고 카페테라스에 앉아 차가운 돌체라떼를 마시며 책을 읽는 성운의 모습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성우는 눈물이 차오르는 기분이었다. 너는 왜 찬란해서, 너는 왜 빛나서 나를 아프게 해.
성우는 한 발짝 뒤로 물러난 성운을 짧게 훑어보다 차를 몰아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카페 안에서 같이 대화할 시간조차 내주지 않은 성운을 원망했던 저를 다그치며 성우는 액셀을 더욱 세게 밟았다. 만약 성운과 마주앉아 대화를 했다면 성우는 두고두고 후회할 말을 마음 내키는 대로 내뱉었을 것이었다.
너를 좋아한다고, 옹성우가 하성운을 사랑한다고.
**
성운은 성우의 차 뒤꽁무니를 눈으로 좇다 힘없이 카페 문을 열고 들어가 테이블에 아무렇게나 책 더미를 올려둔 뒤 계단으로 올라갔다. 이제 한동안 누군가와 오랫동안 말할 일은 없을 것이다.
성우는 성운의 유일한 말동무였고 행복이었다. 성우가 오는 소리가 들리면 성운은 미소를 머금고 책을 읽는 척을 했다. 제가 왔는데 모르는 척한다며 서운함 가득한 목소리로 말을 건네는 성우를 보는 그 순간이 즐거워서,
매주 월요일마다 종류가 바뀌는 꽃다발을 기다리는 것도 즐거웠다. 색감에 예민한 저를 생각해서 꽃의 색깔과 모양을 고심하며 골랐을 옹성우가 귀여워서.
“언제 오는 건지 안 물어봤네.”
바보같이. 하나밖에 없는 친구가 외국으로 간다는 사실에 슬퍼서 정작 물어봐야 할 건 하나도 물어보지 못했다. 성운은 힘없이 매트리스에 엎드려 양손으로 눈을 가렸다. 간다는 게 거짓말이었으면 좋겠다.
**
성우는 정말로 다음날 바로 한국을 떴다. 몇 시에 갈 건지 말도 하지 않았으면서 성우는 혹시나 성운이 저를 찾으러 왔을까 몇 번이고 뒤를 돌아봤다.
성우는 비행기에 올라서자마자 대책 없이 외국으로 가겠다 말한 저를 탓하며 내리고 싶었다. 제가 성운의 곁을 떠난 사실을 믿고 싶지 않아 성우는 양주를 두 잔 들이켜고 안대를 쓴 뒤 억지로 눈을 감았다.
며칠 동안은 정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쌍둥이들이 어찌나 힘이 좋고 빨빨거리며 돌아다니던지, 성우는 누나와 재회의 감동을 느끼기도 전에 젖병을 삶고 타락죽을 만들었으며 기저귀를 갈았다.
아이 돌보는 것은 처음이라 제가 느끼기에도 한참 부족하고 우둔했다. 성운을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아니, 안 하기 위해 무던히도 노력했다. 일부러 일을 천천히 했고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을 찾아서 했다.
“성우 네가 원래 이렇게 부지런했나?”
“나 많이 변했어 누나.”
성우는 쌍둥이를 안고 비행기를 태워주며 인상을 찡그렸다. 성운은 잘 지내고 있을까, 쌍둥이들의 하얗고 뽀얀 피부를 보면 자연스럽게 성운이 떠올랐다. 그래서 괴로웠다.
/
성운은 성우가 외국으로 간지 꽤 됐지만 여전히 카페 문이 열리며 들리는 종소리에 고개를 들지 않고 책 읽는 척을 했다. 언제나처럼 핀잔을 주는 성우의 목소리가 들릴 거라 기대하며 마음속으로 키득거렸다. 하지만 들려오는 것은
“여기 아직 오픈 안 했나요?”
익숙지 않은 타인의 목소리뿐이었다. 아, 옹성우가 있을 리 없구나. 성운은 책을 덮고 벌떡 일어나 당혹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손님을 보며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다른 생각하느라 못 들었어요, 오픈했습니다.
실수도 잦았다. 성운은 카페라떼라고 쓰여 있는 주문서를 들고 있으면서도 자꾸 컵 밑바닥에 연유를 뿌리고 있었다. 메뉴판에 없는 돌체라떼를 마실 사람은 이제 저 하나뿐인데. 이 정도로 성우가 내 삶에 깊숙한 곳에 자리하고 있었나. 성운은 뺨을 톡톡 두드리고 정신차리자고 다짐했다.
성운은 성우가 말한 대로 매일 아침 짧게 20분 정도 책을 읽었다. 마음 놓고 보면 세 권을 며칠 안에 다 읽을 것 같아 내용에 빠지지 않으려고 무던히도 노력했다.
매일 아침 알람을 맞춰두고 벨이 울리면 책을 덮었다. 딱히 책을 읽으며 성우를 생각하지 않았지만 책을 읽다 보면 마치 곁에 성우가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더욱 시간을 지키며 책을 읽었다. 성우를 떠올리는 그 시간이 오래 남아있도록 페이지 수를 아끼고 싶었다.
「좋은 습관은 배신하지 않는다」
참 본인 같은 책도 잘 골라왔다. 성운은 질린다는 듯 고개를 젓고 책을 덮었다. 좋은 말은 많은 책이었지만 제 취향은 아니었다. 그래도 꾹 참고 읽었다. 성우가 성운에게 철이 없다며 해주던 말 같아서.
“그 커피는 뭐예요?”
알람 소리에 미련 없이 책을 덮은 뒤 멍하니 파도가 밀려오는 바다를 바라보니 누군가가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고개를 돌려 소리의 근원을 바라보니 고개를 갸웃거리며 질문을 건네는 사람이 보였다. 성운은 한 모금 정도 남은 돌체라떼 컵을 들어 보이며 이게 맞냐는 눈짓을 보냈다. 그 사람은 고개를 끄덕였다.
“돌… 돌체라떼요.”
성운은 누군가가 말을 거는 건 오랜만이라 조금 놀랐다. 오래간만에 길게 말을 해 입놀림이 이상해진 것 같았다. 성운의 당황한 표정을 보고 방해했다는 느낌을 받은 건지 말을 건 그 사람은 가게 안쪽을 가리키며 살갑게 말을 붙였다.
“저 자리에 앉아있는 사람인데 저 사장님 거랑 같은 거로 주세요.”
성운은 고개를 끄덕이고 조금만 기다리면 자리로 음료를 갖다 드리겠다고 말을 덧붙였다. 몇 마디 안 했는데 심장이 쿵쿵 뛰었다. 역시 사람과의 대화는 성운을 긴장하게 만든다.
**
/
“뭐 보고 있냐?”
“아 남의 핸드폰 보는 거 엄연한 범죄다?”
쌍둥이들이 자는 틈을 타 소파에 엎드려 성운의 사진을 보던 성우는 핸드폰을 낚아채 깔깔거리는 누나를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정색을 하며 손을 내밀자 누나는 장난도 못 치는 거냐고 투덜거리면서 핸드폰을 다시 성우의 손에 쥐여줬다.
“애인?”
“뭐래, 내가 미쳤어?”
“게이가 뭐가 어때서, 여기 게이 많아.”
“그거 때문 아니라니까.”
“아니긴 뭐가 아니야. 그럼 그 징그러운 멜로 눈깔이나 거두고서 그 사진 보시죠 옹성우 씨.”
누나는 성우를 소파 구석으로 밀어내고 굳이 그 옆에 누워 성우의 핸드폰을 훔쳐봤다. 성우는 질색하며 누나의 얼굴을 밀어냈지만 하나라도 더 보겠다는 그 기세를 꺾기엔 역부족이었다.
“애인이 아니면… 짝사랑?”
아니라고 해야 하는데. 성우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한 채 가만히 누나가 말한 그 단어를 곱씹었다. 짝사랑… 내가 하성운을. 짝사랑.
성우는 다시 핸드폰으로 시선을 돌렸다. 하성운은 눈이 예쁜데. 카메라 렌즈를 바라보는 성운을 찍기 위해 화면을 바라보면 꼭 저를 쳐다보는 것 같아 성우는 눈을 뜨고 있는 성운의 모습을 끝끝내 담지 못했다. 그 눈을 똑바로 마주할 자신이 없어서 성우의 핸드폰엔 온통 성운이 눈을 감은 사진뿐이었다.
책방 골목에서 웃고 있는 사진, 촛불이 밝혀진 케이크 앞에서 두 손을 모으고 기도하는 사진, 성우가 사주는 비싼 밥을 먹으며 고맙다고 고개를 숙이고 있는 사진 등등. 성우는 저도 모르게 다시 입가에 미소를 띠며 사진을 보고 있었다. 누나는 그런 성우의 모습을 보며 픽 웃었다. 단단히 빠졌네 아주.
“좋아하는 사람 두고 여기 오느라 좀 짜증 났겠네.”
“별로.”
“왜?”
“… 괜찮아.”
하지만 성우는 전혀 괜찮지 않아 보였다. 외국으로 와 처음으로 성운의 사진을 들여다본 날 이후로 성우는 자주 멍하니 있을 때가 많아 번번이 젖병을 우그러뜨렸고 음식을 새까맣게 태웠고 쌍둥이에게 줄 이유식을 제 입에 넣었다.
성우도 성운도 엉망인 하루하루를 간신히 버티며 보내고 있었다.
**
/
“뭐 읽어요?”
“아리스토파네스 희극 전집이요.”
“와… 전공이 연기예요?”
“아뇨.”
“그럼 연극 좋아하세요?”
“아뇨.”
“…….”
“선물해준 사람이 읽으라고 해서요.”
벌써 책을 두 권째 읽고 있었다. 곁에 아무도 없던 봄을 지나 여름이 되었고 붙임성이 좋은 특이한 사람을 만났다. 성운은 짧게 대꾸를 하고 고개를 돌려 다시 책 읽기에 열중했다.
이 사람은 성운의 이름을 알려고도, 본인의 이름을 알려주려고도 하지 않았다. 성운에게 많은 대화를 요구하지 않았고 짧은 대답을 들으면 미련 없이 자리를 떠 본인의 일에 집중했다.
끈적한 바닷바람이 온몸에 붙는 게 습해 괴롭게 느껴지는 계절이 왔다. 성우의 생일이 곧 다가올 텐데. 성운은 색이 짙어진 바다를 보며 눈을 깜빡였다. 얄밉게도 성우는 잘 도착했다, 잘 지내고 있다 와 같은 연락을 하지 않았다. 시대가 발전하고 문물이 발달하면 뭐 하는가, 연락 한 통이 없는데.
물론 성운도 먼저 메시지를 보내거나 하지 않았다. 자존심이 상하기도 했고 막상 핸드폰을 들어보면 하고 싶은 말도 없었다. 말주변이 없는 제가 원망스러운 날의 연속이었다.
/
원래 생일 같은 걸 챙기는 스타일은 아니었지만 누나와 함께 있다 보니 자연스럽게 생일을 챙기게 되었다. 맛있는 저녁을 먹고 쌍둥이들에게 뽀뽀를 받으며 사랑한다는 말을 들으니 더욱 성운이 보고 싶었다.
성운은 성우의 생일이 되면 온종일 모른 척하고 있다가 다음날이 되기 2분 전에 생일 축하해, 내가 마지막으로 축하해주는 거 맞지? 라고 문자를 보내곤 했다. 그 문자가 아직도 있을 텐데. 성우는 피곤하다는 말로 먼저 방에 들어가 핸드폰 문자 목록을 뒤적였다.
“아직도 있네,”
딱 하성운같이 담백한 한 문장. 성운의 생일 축하 메시지에는 매년 제가 마지막으로 축하해주는 것이 맞냐는 질문뿐이었다. 그게 그렇게 중요한 건가.
성우는 핸드폰 상단에 뜬 시간을 확인했다. 11시 57분. 성우는 오늘도 성운이 제가 마지막으로 생일 축하하는 거냐는 질문을 보내줄 건지 확신할 수 없었다.
연락이 닿으면 당장이라도 전화를 걸 것만 같았다. 딱딱한 글씨체로 보내진 메시지가 아닌 따뜻한 음성을 듣고 싶었고 목소리를 듣는 것보다는 얼굴을 보고 싶었다. 그래서 성우는 연락하고 싶은 마음을 꾹꾹 눌러 담았다.
하루가 길었다. 예전엔 하루가 참 짧았는데. 하성운 하나를 사랑하기만 해도 벅차서 시간이 부족하고도 또 부족했다.
생일이 끝났다. 애석하게도 성운에게 온 연락은 없었다. 그 흔한 온점도, 케이크 모양 이모티콘 하나 없이 성운은 성우의 생일을 넘겼다. 성우는 핸드폰 화면에 뜬 00:00라는 시간과 8월 26일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 내 생일을 잊은 거겠지, 나 같은 건 잊었겠지.
성우는 서랍을 열어 성운이 이별 선물이라며 준 별 모양 책갈피를 손에 쥐었다. 여전히 처음 줬던 모습 그대로 기스 하나 없이 깨끗한 모양이었다. 하성운 곁에 제가 없다는 게 실감이나 처음으로 타지에서 눈물을 흘렸다. 향수병이라는 말 같지도 않은 변명을 들이밀며 성우는 베개에 얼굴을 묻고 한참 어깨를 들썩이며 흐느꼈다. 아주 지독한 혼자만의 생일 축하였다.
/
“아직도 희극 읽어요?”
“재미없어서 다른 것도 좀 읽다 보니….”
성운은 머쓱한 웃음을 지었다. 옹성우가 도대체 왜 제게 이런 걸 선물했는지 알 수 없었다. 이제 제법 차가운 바람이 불었다. 낙엽은 카페 앞 잔디를 붉게 물들였고 유자 철이라 성운은 어제 신선한 유자를 배달시켰다.
“재미없으면 다른 책 읽으면 되잖아요.”
“이거 선물한 사람이 꼭 읽으라고 했거든요.”
“재미없는 책을 안 놓고 끝까지 읽으려고 하는 걸 보면 그 선물한 분, 엄청 소중한 사람인가 보네요.”
“별로.”
그 남자는 성운의 말에 이해가 잘 안 된다는 표정을 지었다. 너무 빨리 대답해서 그런가… 성운은 제가 더 이해 못 하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남자를 올려다봤다.
“사장님께 소중한 사람 맞을 거예요. 꼭 읽으라는 말에 재미도 없는 책을, 그것도 매일 읽는 게 가능하다고요? 절대 아니에요.”
오늘은 헤이즐넛 커피가 마시고 싶네요, 그 사람은 그렇게 말하며 카페 구석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는 성운이 앉은 곳과 정반대 편에 앉아 얌전히 노트북을 두드렸다. 성운은 손가락으로 짚고 있던 페이지에 시선을 돌렸다.
「구름」
희곡 이름이 구름이었다. 옹성우가 한창 놀릴 때 구름이라고 했는데. 성운은 한참 동안 그 글씨를 바라보며 천천히 검지로 글자를 훑었다. 생일 때 연락이라도 할 걸 그랬나.
단어 하나에 옹성우를 떠올리고 옹성우와 관련 있던 것들을 생각하다보니 생일 때 축하 메시지를 보내지 않은 게 조금 후회가 되었다. 어려운 것도 아닌데, 그깟 자존심이 뭐라고. 그래도 태어난 날인데.
“택배 왔습니다~”
성운은 카페 문을 열고 들어오는 기사 아저씨의 우렁찬 목소리에 깜짝 놀라 책을 그대로 덮고 벌떡 일어났다. 헤이즐넛 커피도 빨리 드려야 하는데, 유자가 가득 담아져 있는 박스를 열자 유자 향이 확 풍겼다. 유자청을 담고 숙성됐을 때 처음 성우를 만났었는데.
성운은 기사님께 꾸벅 인사를 하고 부지런히 커피를 추출했다. 늦어서 미안하다고 마들렌과 커피를 건네니 고맙다고 살짝 웃어 보이는 그를 보며 성운은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유자를 굵은 소금으로 깨끗하게 닦고 껍질을 깐 뒤 얇게 채 쳤다. 유자 씨를 골라내고 예쁜 유리병에 유자와 설탕을 번갈아 가며 켜켜이 쌓았다.
이 유자청이 아주 맛있어질 때 비가 내리던 그 날처럼 성우와 같이 차를 타서 마실 수 있을까, 그때처럼 어두운 카페 안에서 작은 전등이 켜져 있는 탁자에 서로를 마주 보고 앉아 따뜻한 차를 홀짝이며 웃을 수 있을까.
아마, 아니.
성운은 라벨지를 떼어 하나하나 정성스럽게 붙였다. 큰 유리병에는 날짜와 카페용이라는 글씨를, 작은 유리병에는 오늘 날짜와 osw를 썼다.
/
12월 31일에 거리로 나갔다. 크리스마스 장식과 새해를 맞이하는 장식이 거리를 가득 반짝이는 빛으로 덮고 있었다. 성운의 카페에서도 이렇게 꾸미고 새해를 맞이했는데.
도보에는 커플들이 가득했다. 성우는 벤치에 홀로 앉아 가만히 지나치는 사람들을 바라봤다. 한 여성이 활짝 웃으며 달려가 남성을 껴안았다. 그는 여성을 번쩍 안아 들고 길 한복판에서 진한 키스를 나눴다. 성우는 미소를 지었다.
“가고 싶으면 한국 가도 돼, 네가 많이 도와주고 쌍둥이들도 커서 괜찮을 거 같아.”
누나는 매형과 같이 쌍둥이를 재우며 이렇게 말했다. 성우는 괜찮다며 손사래 쳤다. 아무래도 하성운을 볼 자신이 없었다. 몇 개월 동안 연락 한번 없이 있다가 무작정 찾아갈 수는 없었다. 딱 일 년만 버티자고 다짐했었다.
이렇게 계속 하성운을 짝사랑할 것인지, 아니면 친구조차 되지 못하게 마음을 고백할 것인지. 일 년 안에 답을 찾을 거라 벼르고 또 벼르고 있었다.
카운트다운이 시작되었다. 다들 제 옆에 있는 사람의 손을 꼭 쥐고 기쁜 표정으로 숫자를 셌다. 성우는 양쪽 무릎 위에 손을 올려놓고 그들이 숫자를 세는 모습을 바라봤다. 작년 말일엔 뭘 했더라, 아마 성운의 집에서 티비를 보고 있었을 거다.
성운은 제야의 종소리가 끝난 뒤 시큰둥한 표정으로 “새해 복 많이 받아“라고 말했고 성우는 ”너도“라고 싱겁게 답했던 것 같다. 별다른 표정을 보이지 않은 성운이었지만 성우는 행복했다. 새해의 시작을 하성운과 함께할 수 있어서, 나에게 새해 복 많이 받으라고 가장 먼저 말한 사람이 하성운이라서.
하루에 열두 번도 마음이 바뀌었다. 성운의 사진을 보거나 성운을 떠올릴 때마다 성우는 성운에게 제 마음을 전하고 싶었다. 막연히 우리 둘이 아주 달디 단 사랑을 시작하고 싶다, 그런 생각은 아니었다.
이제 서른 살이다. 그런 아이 같은 생각을 할 수는 없었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건 아주 중요한 문제였다. 한 사람이 원하고 바란다고 이뤄지는 것이 아니었다. 성우는 그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성운에게 고백할 수 없었다.
저 혼자 하성운을 사랑하기 때문에, 하성운은 저에게 마음이 없기 때문에 함부로 사랑한다 말을 건네기 어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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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해가 지났다. 성운은 카페에 새 달력을 걸며 익숙지 않은 숫자를 몇 번이나 되뇌었다. 성우가 외국으로 뜬 5월이 되려면 4개월이나 남았지만 벌써 떠난 지 일 년이 된 기분이었다.
“나쁜 새끼.”
아침에 새해 복 많이 받으라는 메시지를 보내려다 그만뒀다. 혼자 매달리는 기분이었다. 딱히 매달리고 말고 할 사이는 아니었지만 어쨌든, 기분이 상했다. 무슨 잘난 일을 한다고 친구한테 연락 한 번을 못 하는지.
유자청은 잘 만들어졌다. 너무 달지도, 묽지도, 되직하지도 않고 딱 적당한 묽기에 적당한 맛. 유자청은 맛있었지만 한 번도 개시한 적이 없었다. 아무도 찾지 않는 게 딱 성운 제 모습 같았다. 성운은 한숨을 내쉬고 다시 계단을 밟고 방으로 올라갔다. 아무래도 오늘은 카페 문을 열지 않는 게 나을 것 같았다.
「해저 2만 리」
세계 명작을 안 읽어봤을 성운이 아니었다. 성운은 이미 다 알고 있는 내용을 꾹꾹 참아가며 읽어가야 함을 원망했다. 옹성우가 확인할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시간을 정해놓고 그 시간만큼만 책을 읽고 있는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도대체 무슨 이유로 본인이 이러는지 성운도 명확히 알 수 없었다.
“700페이지가 넘어.”
성운은 도대체 이 책을 언제까지 읽어야 할지 가늠조차 할 수 없었다. 700페이지가 넘는 책을 매일 20분씩 언제 다 읽지. 해가 바뀌었으니 마음가짐도 바뀌어야 할 것 같았다. 그래서 성운은 매일 30분씩 책을 읽기로 했다. 그리고 이 책을 다 읽으면 성우를 더 기다리지 않기로, 성우를 친구라고 인정하지 않기로 했다. 친구의 부재와 무관심은 성운을 힘들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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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13일까지 정확히 30일 남았다. 성우는 주먹을 꽉 쥐고 눈을 감았다. 성운의 생일은 성우의 생일날처럼 서로 연락하지 않으며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넘어갔다. 3월 22일이 된 시간부터 23일로 넘어가는 시간까지 성우는 끊임없이 핸드폰 속 성운의 사진을 들여다봤다. 내가 보고 있는 게 사진이 아닌 진짜 하성운이라면 좋을 텐데.
시간이 벌써 이만큼이나 지났다. 쌍둥이들은 이제 성우의 도움 없이도 혼자 밥을 잘 먹었고 화장실에서 볼일도 볼 수 있었다. 아이들은 짧다면 짧은 시간 동안 무럭무럭 컸는데 성우 혼자 도태되었다.
성우는 아직도 갈 길을 정하지 못한 채 갈팡질팡하고 있었다. 성운은 여전히 그대로일까, 아니면 다르게 변했을까. 성우는 더 세게 주먹을 쥐었다. 손톱이 살을 파고드는 느낌이 생경했다.
고백할까.
그만둘까.
어떻게 지냈냐고 물어볼까.
성운은 제가 선물한 책을 잘 읽고 있을까, 성우는 문득 궁금해졌다. 성운은 매일 책을 읽으며 저를 생각하고 있을까, 아니면 다른 책들 사이에 그 책을 꽂아놓고 본인 취향인 다른 책을 읽고 있을까. 성우는 피식 웃었다. 나는 아직도 네가 준 책갈피를 잘 갖고 있는데. 아직도 나는 매일 그 별 모양 책갈피가 너라고 생각하며 들여다보는데.
4월이다. 성운이 좋아하는 꽃이 슬슬 필 시기가 되었다. 다시 만나는 날에 성운에게 꼭 주고 싶은 꽃이 있었다. 그 꽃을 받고 성운이 웃어줄지, 거들떠보지도 않을지. 그 전에 나를 만나주긴 할 건지. 성우는 장담할 수 없었다.
“누나, 나 5월 11일에 가려고.”
“더 일찍 가도 되는데.”
“아니야, 그때 가야 해.”
“고생했어. 정말 고마워.”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을 보니 살이 쪽 빠져있었다. 아이들에게 시달리고 어울리지 않게 상사병에 시달려 괴로워서 그랬겠지. 성우는 뺨을 톡톡 두드렸다.
세상에서 제일 멋있는 모습으로 성운의 앞에 나타날 예정이었다. 찢어지고 부르터서 넝마가 된 마음을 휘황찬란한 겉모습에 숨기고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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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0페이지. 이제 페이지 수가 얼마 남지 않았다. 성운은 고개를 돌려 달력을 확인했다. 5월 11일. 성우가 이때쯤 갔던 거 같은데. 성운은 다시 고개를 반대쪽으로 돌려 유자청이 담긴 유리병을 바라봤다. 큰 유리병에 담긴 유자청은 이미 모두 다 사용해서 매실청으로 바뀐 지 오래였다. 작은 유리병엔 아직도 유자청이 담겨 있었다.
“썩는 거 아니야?”
공기와 접촉이 없어서 아마 그럴 일은 없겠지만 괜히 심통이나 성운은 그렇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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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공항이었다. 성우는 눈을 감고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비행기에서 계속 선잠만 자 몸이 찌뿌둥했다. 아직도 마음을 다잡지 못했다. 지금 성운에게 가면 시원하게 뺨을 맞을 것만 같았다. 아무런 사진도 글도 없는 성운의 메신저 프로필을 보며 성우는 가만히 눈을 깜빡였다. 화면이 바뀌며 핸드폰이 부르르 울렸다. 성우는 작게 헛기침을 하고 전화를 받았다.
“아버지, 저 부산 공항으로 바로 왔습니다.”
“또, 또 부산에 갔니.”
“부산이 좋아서요.”
부산도 좋지만 부산에 사는 하성운이 좋아서요. 성우는 그 말을 삼키고 환히 웃으며 전화를 끊었다. 드디어 성운을 만나게 되었다. 사실 성운이 일 년 전 날짜를 기억하고 보수동으로 나올 거라는 생각은 없었지만 성운은 언제나 그렇듯 그 자리, 노란 카페 안에 있을 테니까.
성우는 제가 카페로 찾아가기 전까지 성운이 나오지 않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야 마음을 정리하며 멋대로 들뜨지 않을 테니까. 만약 성운이 보수동으로 늦지 않게 와준다면 성우는 성운도 나와 같은 마음일까 괜히 기대할 것이었다.
5월 13일. 미련 없는 척하며 옹성우가 하성운에게서 도망치듯 떠났던 날. 너무 감정적이었던 자신을 책망하며 후회하면서도 잊어야겠다 마음을 먹은 날. 보고 싶을 거 같아서 연락 자체를 끊겠다 생각한 날. 핸드폰에서 지워내도 기억에 뚜렷하게 남아있는 성운의 전화번호 11자리를 다시 핸드폰에 저장하는 걸 몇 번이고 반복했던 날.
일 년 뒤 오늘 여기서 다시 만나자.
일 년 전에 밑도 끝도 없이 혼자서 약속한 장소에 나가기로 정한 날.
성우는 회사 사람들의 환대를 받으며 신속하게 살던 집으로 갈 수 있었다. 몇 분만 걸어가면 성운을 만날 수 있지만 성우는 차키를 들고 차를 몰아 보수동으로 향했다.
“여기 리시안셔스랑 천일홍 드라이플라워 같이 해서 작은 꽃다발로 만들어 주세요.”
성운에게 꼭 주고 싶었던 꽃으로 꽃다발을 만든 뒤 성우는 보수동 책방골목에 들어섰다. 골목은 관광객들로 붐볐기 때문에 성우는 한 자리에 계속 서 있을 수 없었다. 고개를 돌리고 아무리 갸웃거려 봐도 성운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어쩌면 다행일지도 몰라.‘ 성우는 안도했다. 성운이 정말 온다면 어떻게 말을 시작해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성우는 몇 시간이고 골목에 서서 성운을 기다렸다. 혹시나 길이 엇갈릴까 봐, 혹시나 제가 성운을 놓칠까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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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13일. 성운은 팻말을 [OPEN]으로 뒤집고 카페 문을 연 뒤 내부를 청소했다. 수요일. 성운은 차가운 돌체라떼를 만들어 테이블에 올려놓고 푹신한 소파에 앉아 책을 꺼내 들었다.
360페이지. 이제 재밌는 내용만 나오기 시작했다. 성운은 안경을 고쳐 쓰고 책에 열중했다. 오늘은 30분이 더디게 흘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361페이지
362페이지
363페이지
“오늘의 커피 한 잔이요.”
아, 성운은 작게 탄식했다. 한창 재밌게 읽고 있었는데. 고개를 드니 생글생글 웃고 있는 그 남자가 보였다. 몇 개월 동안 꾸준히 카페에 오는 사람. 이름도, 나이도 모르는 사람. 성운은 별말 없이 일어나 커피를 내리러 카운터 쪽으로 향했다.
행복한 독서시간을 방해했으니 세상에서 제일 단 음료를 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연유를 평소보다 더 많이 넣었고 우유에도 설탕을 좀 뿌렸다. 엄청 달겠다. 성운은 활짝 웃으며 달콤한 커피를 그 사람에게 건넸다.
“맛있게 드세요 손님.”
어차피 몇십분 있다 한 모금 마실 사람이었다. 성운은 다시 자리로 돌아가 책을 들었다. 365페이지를 다 읽고 장을 넘기려는데 아래쪽에 쓰인 삐뚤빼뚤한 글씨가 보였다. 헌책방에서 산 책이라 그런지 낙서가 있었다. 이런 건 더 싸게 팔아야 하는데, 성운은 입술을 삐죽 내밀고 글씨를 읽었다.
일 년 뒤 오늘 여기서 다시 만나자.
필체가 익숙했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꼭 옹성우가 써놓은 것 같았다. 일 년 뒤 오늘이라. 그게 언젠지 날짜라도 써놓았으면 좋았을 텐데. 성운은 성우와 책방에 갔던 날이 가물가물했다. 이맘때인 건 알겠지만 언제라고 확신할 수 없었다.
“멍청이 같은 놈.”
아마 곧 떠난다는 아쉬운 마음에 헛소리를 적은 것일 거다. 옹성우는 이런 걸 기억하고 일 년 뒤 오늘의 날짜에 맞춰 올 사람이 아니다. 성운은 코웃음을 치고 책을 다음 장으로 넘겼다. 내용은 흥미진진했지만 성운은 도저히 책에 집중할 수 없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과 에이 설마, 하는 마음이 계속 공존했다. 성운은 신경질적으로 책을 덮었다. 그리고 카페 구석에서 열심히 작업하고 있는 그 사람에게 걸어간 뒤 맞은편에 앉아 제가 건넸던 돌체라떼를 들고 빨대를 쭉 빨았다.
“나 마시라고 주더니 사장님이 마시면 어떡해요.”
“이거 어차피 너무 달아서 못 마실 거예요.”
“왜요, 나 책 읽는 시간 방해 안 했는데.”
“안 그럴 거 같은 사람이 그럴 짓을 하면 어떨 거 같아요.”
“말이 너무 어려운데.”
노트북에서 눈을 뗀 그는 가만히 성운의 눈을 바라봤다. 그 눈길이 익숙하지 않아 성운은 급하게 쥐고 있던 컵으로 시선을 옮겼다.
“내가 아는 사람은 이런 걸 절대 안 할 사람인데…”
“네.”
“그런 걸 한다고 하면 어떨 거 같냐고요.”
내가 아는 옹성우는 이런 걸 기억하고 챙길 사람이 아닌데. 왜 이런 실현 불가능한 일을 꾹꾹 눌러가며 글로 남겼을까. 성운은 묵직한 연유가 목으로 넘어가는 것을 느끼며 인상을 찡그렸다. 달고 맛있던 연유도 성우를 생각하자 코피가 났을 때 고개를 젖혀 목으로 넘어가는 피처럼 역하게 느껴졌다. 그때 넌 도대체 무슨 생각이었던 거야…. 성운은 힘없이 컵을 내려놓았다.
“새 음료로 바꿔줄게요.”
“괜찮아요. 그리고 그 사람 한 번 믿어 봐요.”
옹성우를 믿어 보라니. 성운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사장님은 그 사람 말 하나 지키겠다고 매일 꾸준히 책 읽으셨잖아요,”
“그건 그냥 걔가 시킨 거니까,”
“그분도 사장님처럼 반신반의하면서도 말했을 거예요, 과연 매일 읽어줄까 싶으면서도 그랬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서. 그래서 그렇게 말했을 거예요.”
저 지금 좀 바쁜데, 그 사람은 싱긋 웃으며 성운을 바라봤다. 아, 죄송해요. 성운은 황급히 고개를 틀어 다시 제자리로 향했다. 옹성우가 나를 믿었다고? 도대체 내가 뭐라고. 성운은 의자에 앉아 양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도대체 일 년 전 오늘이 언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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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하성운이 날짜를 기억하고 올 리가 없었다. 성우는 책방 유리에 비친 제 모습을 확인했다. 오늘은 특별한 날이니 하얀 셔츠에 까만 슬랙스를 입었다. 항상 후드티에 청바지를 입었었는데 다른 스타일로 입어보고 싶었다. 가장 멋있어 보이고 싶었으니까. 성우는 왼손에 어색하게 자리 잡은 분홍색 꽃다발을 괜히 오른손으로 툭툭 두드리며 고개를 떨궜다. 날이 어두워지고 있었다.
“아까서부터 누를 그카고 기다리나.”
“아, 예… 아무것도 아닙니다.”
주인아저씨의 말에 화들짝 놀라 꽃다발을 쥔 손을 등 뒤로 숨기니 다 알겠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마, 니 오늘 고백하나?”
“네? 아니 뭐….”
“니는 허우대도 멀쩡하고 얼굴도 잘생기가 성공할끼다.”
“감사합니다.”
성우는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숙인 뒤 골목을 빠져나왔다. 여기에 더 있을 수 없었다. 마음이 점점 착잡해졌다. 어차피 내가 널 좋아한다고 성운에게 툭 터놓고 고백도 못 한다. 그냥 오늘은 월요일이 아니지만 예전처럼 꽃을 사 온 거다. 그렇게 말한 뒤 반갑다고 하고 싶었다.
보고 싶었다는 그 한마디면 되는데. 성우는 운전석에 앉아 숨을 고르게 쉬기 위해 노력했다. 이제 시동을 걸면 나는 하성운을 보러 간다. 보고만 올까, 아니면 카페 문을 열고 들어갈까. 성운을 볼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쿵쿵 뛰어 성우는 손을 가슴께에 올려놓았다. 운전면허 주행시험을 보던 날처럼 운전대 잡기가 너무도 어렵고 힘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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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운은 끊임없이 드는 찝찝한 느낌에 계속 넋을 놓고 있었다. 냉장고 문을 열고 가만히 서 있어 몇 번이고 삑삑거리는 소리를 들었고 뜨거운 물을 플라스틱 컵에 부어 우그러트리기도 했다. 옹성우는 일 년 뒤에 날 만나면 뭘 하고 싶었을까.
“사장님 오늘 상태 별로인 거 같은데 일찍 카페 문 닫으세요, 전 갑니다.”
커다란 백팩을 멘 그 남자는 제가 마신 컵을 정리하고 설거지까지 직접 한 뒤 카페를 나섰다. 친절하게 팻말까지 손수 뒤집어준 남자를 보며 성운은 피식 웃었다. 정말 그의 말마따나 오늘 제 상태는 별로였다.
성운은 앞치마를 벗고 카페 한가운데에 있는 탁자에 앉았다. 열어둔 창문 틈새로 밤공기가, 그리고 파도 소리가 들어왔다. 사방은 고요했고 성운의 마음만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
성우는 집 주차장에 차를 대고 천천히 성운의 카페로 걸어갔다. 머리카락을 스치는 바닷바람이 따뜻해 절로 기분이 좋아졌다. 일 년 내내 생각했던 말은 아마 오늘도 성운에게 닿지 못할 것이다.
성우는 깊은숨을 내뱉고 발걸음을 빨리했다. 지금 이 시간쯤이면 성운은 카페 문을 닫고 방에 올라갔을 것이다. 성우는 문 앞에 꽃다발을 놓고 다시 집으로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이제 저 모퉁이만 돌면 성운의 노란색 카페가 보일 것이다.
바스락, 잔디가 밟히는 소리에 괜히 놀란 성우는 살금살금 돌을 밟으며 카페 앞까지 걸어왔다.
“아….”
불이 꺼져있을 줄 알았던 카페는 불이 켜져 환했고 창문으로 보이는 카페 안에는 성운이 앉아있었다. 성우는 그렇게 보고 싶어 했던 성운이 바로 눈앞에 있어 맥이 탁 풀렸다. 얼굴을 보면 아무것도 못 할 것 같아서 일부러 늑장을 부리며 온 건데. 너무나도 보고 싶었다고 와락 껴안아 버릴 것 같아 두려웠는데. 성우는 꽃다발을 바닥으로 향하게 들며 눈으로 성운의 옆모습을 훔쳐봤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성운은 힘들어 보였다. 안색이 좋지 않았고 몸은 일 년 전보다 더 마른 것 같았다.
무슨 일이 있었나, 성우는 성운의 모습을 모조리 외울 기세로 성운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아직 밤공기는 차서 반팔 반바지를 입을 시기가 아닌데… 드러난 새하얀 다리와 팔이 가늘었다. 작게 반짝이는 하얀 귀걸이와 그에 맞지 않는 붉은 귀도 앙증맞아 귀여웠다.
조금 야위긴 했지만 넌 여전하구나. 변하지 않았구나. 성우는 살짝 미소를 지었다. 성운의 하얀 피부도, 붉은 귀도 좋지만 성우가 제일 좋아하는 건, 보고 싶었던 건 성운의 까만 눈동자였다. 저렇게 똘망똘망하고, 흑진주처럼 아주 까맣고 빛나는….
하성운의 눈동자.
성우는 얼어붙은 듯 그 자리에 서서 성운과 눈을 맞추고 있었다. 성운은 얼빠진 표정을 짓고 있었다. 성우를 마치 못 볼 거라도 본 것처럼 성운은 눈을 몇 번이고 깜빡였고 제 뺨을 두어 차례 때리기도 했다. 성우는 숨을 죽이고 그런 성운을 계속 바라봤다. 아직 무슨 말을 언제, 어떻게 해야 할지 정하지 못했다. 머릿속 실타래가 꼬인 듯 정신이 없었다.
성우는 고개를 떨구고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얼굴에 열이 올랐고 고장 난 테이프처럼 입에선 자꾸 멍청한 탄식만이 나올 뿐이었다. 딸랑- 경쾌한 종소리가 들리고 이내 차가워진 성우의 두 손이 따뜻한 온기에 휩싸였다.
“오랜만이야.”
그렇게 제가 하고 싶었던 말, 하루도 거르지 않고 매일 밤 성운을 떠올리며 준비했던 말. 이렇게도 간단한 말. 성우는 고개를 더욱 숙이며 저를 마주 보려는 성운의 시선을 피했다.
“잘 지냈지?”
그렇게 듣고 싶던 너의 목소리, 그렇게 잡고 싶었던 너의 손. 왜 난 아무 말도 못 하고 고개만 끄덕이는지. 성우는 뜨거워진 눈가를 손등으로 누르며 입술을 깨물었다. 성운을 만나면 울지 말자, 떨지 말자 다짐했던 게 무색해질 정도로 성우는 온몸을 떨며 굵은 눈물방울을 뚝뚝 떨궜다.
“보고 싶었어.”
타지에서 셀 수 없이 그려봤던 우리의 재회가 이렇게도 슬플 줄이야. 성우는 떨리는 손으로 성운에게 꽃다발을 건네고 눈물을 닦아냈다. 성운은 익숙하게 꽃다발을 받아 들고 코를 묻은 뒤 꽃향기를 맡았다.
‘사랑해.’
**
성우가 성운에게 준 라일락과 분홍색 안개꽃.
사랑의 싹, 죽도록 사랑해.
성우가 성운에게 선물한 세권의 책.
「좋은 습관은 배신하지 않는다」
「아리스토파네스 희극 전집」
「해저 2만리」
좋아해.
다시 만나기로 한 5월 13일, 성우가 성운에게 건넨 리시안셔스와 천일홍.
변치 않는 사랑, 변함없는 사랑.
옹성우는 여전히 첫사랑 하성운을 처음 만난 그 날처럼 열렬히 사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