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카겐 그레넨
Written by Aster
※ 본 글은 영화 '퍼시잭슨과 번개도둑', 그리고 그리스로마 신화의 일부분을 각색하여 쓰였음을 알려드립니다.
- 데미갓 : 반신반인. 신과 인간 사이에서 태어나 부모 신의 능력을 일부 갖고 태어나는 이들을 일컫는 말로, 데미갓 캠프(인간 세상과 단절된 곳)에서 전투 훈련을 함.
- 테티스 : 바다의 여신. 글에서 성운이의 어머니이자 아름다운 외모로 제우스와 포세이돈 등 많은 신에게 구애를 받았다고 알려짐.
- 올림포스 : 신들의 산. 그리스로마 신화에서 신들이 살고 있다고 전해지는 공간임.
- 케이론 : 켄타우로스(반인반마)로 데미갓 캠프 내 최고의 지도자. 성운과 성우의 선생님인 셈.
- 넥타르와 암브로시아 : 신들의 음료와 빵을 지칭. 이것들을 섭취함으로써 신들은 영생을 유지할 수 있음. 데미갓이 소량 섭취할 시 기력이 회복되며, 꾸준히 다량 섭취하게 될 시 신으로써 영생을 살 수 있게 됨.
너는 도둑맞은 것을 찾을 것이며 그것이 제자리로 돌아가는 것을 보리라.
O
도둑맞은 것이 내내 너를 향해 앓았던 마음이었는지, 네게 품었던 감정이었는지는 잘 모른다. 그저 이 모든 것들이 제자리로 돌아가는 것을 보리라던 예언은 틀렸다고 자부한다. 지금, 내 마음은. 그리고 내 감정은. 나도 어디쯤을 헤매는지 전혀 알 수 없으니까.
너는 네가 찾던 것을 발견하고 너의 것으로 하리라.
H
내가 그토록 찾아 헤매던 것이 너였는지, 너를 향한 내 진심이었는지는 잘 모른다. 그저 내가 찾던 것이 무엇이든 지금 내 곁에 네가 있고, 네 옆에 내가 서있음에 예언이 맞아들었다는 것을 확신할 뿐이다. 지금 네가 내게 속삭이는 모든 말들이 사랑한다는 고백으로 들리니까.
-
함부로 신에게 도전하지 말라는 말을 실감했다. 성우는 단언컨대 자신이 신의 아들로 태어난 이후 지금이 가장 고통스럽다고 말할 수 있었다. 그저, 다들 부모신과 대화를 할 수 있다기에 왜 자신은 그 흔한 환청 같은 대화도 듣지 못하는지 이유를 알 수 없어서 품은 마음이었다. 당신은 왜 나를 낳아놓고 얼굴 한 번을 비추질 않지? 당신은 왜 나와 대화조차 하려고 노력하지 않는 거지? 당신은 왜, 나를 보고 싶어 하지 않는 거지. 그런 의구심이 섞인 욕심과 원망은 얼굴도 모르는 아버지를 향해 커져만 갔다. 그리고 종국에는, 성우로 하여금 올림포스로 발걸음을 옮길 생각까지 하게 했다. 물론, 계획을 세움과 동시에 제우스에게 들켜 이렇게 벌을 받았고.
성우는 지금만큼은 이름뿐인, 또 허울뿐인 아버지를 온 마음을 다해 원망했다. 당신이 포세이돈이라서, 3대신이라서, 내가 지금 이렇게 아프다는 걸 알긴 알까. 제우스는 성우가 처음 세상에 태어나던 날부터 갑작스럽게, 모든 신들에게 데미갓 자식들과의 만남을 금지시켰다. 신들은 신들의 자리에서, 신들의 권능을 지키고, 신들답게 행동해야한다는 이유에서. 그 말에 성우는 태어나자마자 아버지를 잃었다. 말을 알아듣고 쓸 수 있게 되었을 쯤에는 인간인 어머니와 정이 들기도 전에 데미갓 캠프로 옮겨져 케이론의 보살핌을 받았다. 그저 딱 한 번, 아버지가 보고 싶다는 욕심을 부렸을 뿐인데 성우에게 돌아온 것은 가혹한 제우스의 벌이었다. 온 몸이 상처투성이가 되어 어딘지도 모를 인간 세상에 다시금 떨어졌을 때, 성우는 이미 반쯤 혼절한 상태였다.
"저기요...?"
"ㅁ.. 무..."
"여기서 쓰러지시면, 저기... 으어, 이게 다 ㅍ, 피야? 저기 일어나실 수 있겠어요?"
눈도 다 못 뜬 채로, 엉거주춤 저를 일으키는 손길에 오롯이 몸을 맡겼다. 성우는 지금, 저를 이끄는 사람이 누구인지, 어떤 사람인지도 모르면서 무작정 따라 집으로 들어갔다. 그냥 왠지, 목소리가 따뜻해서. 그저 이끌리는 대로 따라 가면, 살 수 있을 것 같아서. 따라 들어간 집 안은 실눈을 뜨고 봐도 꽤 넓었다. 거실을 지나쳐 망설임 없이 화장실 쪽으로 저를 데려가는 집주인에 성우는 피 때문인가, 라고 안일한 생각을 했다.
"잠깐만 정신 잃지 말고 있어 봐요. 제가 안 아프게 해드릴 수 있거든요, 아마도요!"
화장실이라기엔 너무 넓었다. 한 쪽 벽면에 큰 욕조가 설치되어 있었고 집주인은 그곳에 물을 받기 시작했다. 물, 물이다. 물이었다. 성우는 샤워기에서 떨어지는 물줄기를 보자 정신이 번쩍 드는 것만 같았다. 맑은 물줄기가 쏟아져 내리는 소리에 귀가 트이고, 눈이 떠지는 것만 같았다. 성우는 비척거리며 욕조 앞에 다가가 섰다. 빠르게 욕조를 채운 물줄기를 멍하니 바라보다 반쯤 차오른 물의 표면에 가만히 제 손을 얹었다.
"가만히 앉아 있으, 어? 어?"
욕조를 채우던 물이 어느새 표면 위에 얹어져 있던 성우의 손을 타고 올라와 팔과 목 그리고 얼굴과 욕조에 기대 서있는 다리까지 적셨다. 더 놀라운 일은, 단순히 물이 성우의 몸을 타고 올라와 적시는 것이 아니라 물이 타고 올라간 자리마다 있던 상처들이 말끔히 치료되어 사라지고 있다는 점이었다. 물이 더 많이 타고 올라올수록 성우는 제 몸상태가 나아지는 것을 느꼈다. 마음 같아서는 욕조에 물을 가득 받은 뒤 뛰어들고 싶었지만 시간적인 여유가 충분치 않았다. 서둘러 데미갓 캠프로 돌아가야만 했다. 제우스의 미움을 산 지금 자신이 안전할 수 있는 곳은 데미갓 캠프뿐이라는 사실을 성우는 모르지 않았다.
"감사합니다. 덕분에, 살았어요."
"방금 그거, 어떻게 한 거예요?"
"네?"
"방금 물에 손만 대셨는데 물이 알아서 이렇게 팔 타고 올라와서 상처가 다 없어졌잖아요. 그거 어떻게 한 거예요? 그거 어떻게 그쪽도 할 줄 알아요?"
"그쪽도...요?"
집주인은 말하는 것보다 보여주는 게 낫겠다는 혼잣말을 하더니 세면대 구석에서 면도날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는, 성우가 그를 말릴 새도 없이 자신의 손목을 긋자 붉은 선혈이 면도칼이 스치고 지나간 살갗 위로 솟았다. 집주인은 꽤나 따끔거릴 상처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성우가 그랬던 것처럼 손을 물 표면에 얹었다. 찰랑이는 물이 집주인의 손등 위로 조금씩 스치자, 성우가 그랬던 것처럼 집주인 역시 물이 손등을 타고 올라가 손목에 난 상처를 흔적도 없이 치료해주었다.
"저도, 이거 할 줄 아는데."
성우는 흔들리는 두 눈으로 오롯이 그 모습을 담아냈다. 아무것도 모른다는 저 순진한 표정으로 신기하다는 듯 저를 올려보는 눈빛에 꼭 빠져드는 것만 같았다. 물의 힘을 빌려 상처를 치료할 수 있는 것은 바다의 힘을 나눠 쓰고 있는 신들의 자식들에게만 주어진 특권과도 같은 능력이었다. 모두가 부러워하고, 가장 도움이 되는 유용한 능력. 그런 능력을 어떻게 한낱 인간이 가질 수 있지. 이렇게 되면, 답은 하나뿐이었다.
"당신, 누구 아들이야."
"저요?"
"설마, 나랑 아버지가 같아?"
여전히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이, 성우의 말은 반절도 이해 못한 표정으로 멍하니 서있는 집주인에 성우는 설마 자신이 데미갓인 줄 모르는 것인가 싶어 천천히 되물었다.
"당신 엄마랑 아빠 있지?"
"있어요."
"아빠 뭐하시는 분이야, 얼굴 알아?"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저를 빤히 쳐다보다가 아빠 뭐하시는 분이냐는 질문에는 기분이 좀 상했는지 미간 사이가 찌푸려지는 게, 상황에 맞지는 않았지만 퍽 묘한 느낌을 주었다. 그러더니 발걸음을 옮겨 대꾸도 않고 거실로 걸어 나가는 집주인의 뒤를 따라가자 집주인이 뻗은 손가락 끝에 걸린 액자에는 해맑게 웃고 있는 어린 소년과 인자한 미소를 지고 있는 남자가 보였다.
"우리 아빤데요. 그럼, 이제 다시 제 질문. 아까 물로 상처 치료한 거, 그거 어떻게 한 거예요?"
자신의 힘을 과신했던 신의 아들 옹성우와 자신의 힘에 대해 무지했던 신의 아들 하성운의 첫 만남은 그랬다. 모두의 시기질투를 한 몸에 받았던 성우가 모두의 사랑을 받는 성운을 만난 그 처음은, 신기하게도 제우스가 성우를 미워하며 내린 벌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그게 성우의 전부가 될 줄도 모르고.
-
“성운아.”
“어, 성우야!”
성운이 데미갓 캠프에 합류한 지 오늘로 일주일째였다. 달라진 게 있다면 늘 중심에 서있던 성우가 한 발짝 물러났고, 그 중심에 똑같은 바다의 힘을 가진 새로운 신의 아들 성운이 서게 되었다는 것이 전부였다. 그 작고도 큰 변화는 적지 않은 사람들로 하여금 많은 것을 달라지게 했다. 그 중 가장 큰 변화는, 힘의 균형이 갈라졌다는 것이다. 3대신인 포세이돈의 아들 옹성우를 견제할 성운의 등장으로.
“성운아, 여기서 뭐해 혼자.”
“그냥, 답답해서.”
“음, 아빠... 보고 싶어서?”
“... 아-니-”
“근데 왜 여기서 이러고 있어. 너 아빠.. 보고 싶으면 여기 오잖아.”
데미갓 캠프의 기숙사 끝방, 그러니까 성우의 방은 호수와 이어져있었다. 그리고, 성우와 똑같은 바다의, 물의 힘을 타고난 성운은 울적해질 때 -주로 자신의 인간 아버지가 보고 싶을 때- 성우의 방을 찾아 발만 호수에 담가 앉아있곤 했다. 그리고 그럴 때면 성우는 늘 한 발 물러서 있던 발걸음을 내딛어 성운의 옆에 서주었다. 성운의 그리움을 전부 공감할 수는 없지만, 괜스레 성운이 슬픈 표정을 짓는 것은 싫었다. 꼭 제 곁을 떠나갈 것만 같아서.
“우리 얼마나 더 여기 앉아있을 수 있어?”
“성운이 네가 원하는 만큼.”
“푸흐, 그게 뭐야.”
“왜 이러고 앉아있는지 안 알려줄 거야?”
“성우야.”
“응, 성운아.”
“너는 아빠, 아, 아니다, 엄마 안 보고 싶어?”
성우는 성운의 질문에 숨부터 크게 들이쉬었다. 거봐, 아빠 보고 싶었던 거 맞네. 너는 꼭 이렇게 내가 아는 척을 해야만 솔직해지더라. 하지만, 성운의 속마음까지 읽어내는 성우 역시도 성운의 질문에는 대답을 할 수 없었다. 보고 싶다는 감정을 몰라서, 대답을 못하겠다고 하면 믿을까. 물론, 성우에게는 성운에게 그런 매정하고 믿음이 가지 않을 대답을 꺼낼 생각 자체가 없었다.
“... 글쎄?”
“글쎄가 뭐야. 엄마 안 보고 싶어, 진짜?”
“나는, 성운아. 너무 어릴 때부터 여기서 살았어. 그래서, 엄마 얼굴이 생각이 안 나. 엄마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어떻게 생겼는지 잘 모르니까 보고 싶은지 잘 모르겠어.”
“거짓말. 나는 우리 엄마가 어떻게 생겼는지 몰라도 매일 보고 싶은데. 말로만 바다의 여신이라고 들었지, 본 적이 없잖아. 길가다가 마주쳐도 모를 사람인 거잖아. 엄만데. 나는 있지, 그게 너무 싫어. 신의 아들이라는 게 보고 싶은 내 사람 한 명도 볼 수 없는 거라면 그냥 아무것도 모르던 때가 더 좋은 것 같아.”
“왜 이렇게 투정이실까, 우리 에이스님께서? 아는 것의 무게라는 건 그런 거야. 견뎌내야 하는 거. 일어나, 가자 이제.”
“... 어딜?”
“전투훈련 안 가? 늦으면 혼나, 우리.”
성운은 성우가 건넨 손을 잡고 일어섰다. 익숙하다는 듯이 성우는 어깨 걸쳐져 있던 수건으로 성운의 젖은 발을 꼼꼼히도 닦아주었다. 세심한 손길이 익숙해서, 또 가만히 누군가의 애정 어린 손길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 좋아서 성운은 슬며시 미소지었다. 성우가 사랑하는 몇 안 되는 장면이었다.
성우의 손을 잡고 전투 훈련장으로 가는 길이 너무 짧게만 느껴졌다. 성운에게 있어서 성우와 함께하는 시간들은 늘 짧고 아쉽기만 했다. 그냥, 이대로 둘만 남는대도 좋을 것만 같은데. 신의 아들이라는 것은, 그리고 성우의 말대로 그것을 알게 되고 또 받아들이는 것은 생각보다 훨씬 무겁고 버거운 일이었다. 남들과 똑같지 않아서, 평범이 아니라 특별하다는 말로 표현되는 자신이 가끔은 무섭다고 느껴질 만큼. 어쩌면 성운이 하루아침에 달라진 제 삶에 이토록 빠르게 적응하고 여즉 별 사고 없이 보낼 수 있었던 것은 전부 성우 덕분일지도 몰랐다. 아니, 그랬다.
“오늘도 팀을 나눠서 모의 전투를 해보지. 마침 물의 힘을 빌려 쓰는 데미갓이 딱 둘 뿐이니 성운이랑 성우 너희가 팀을 나누면 되겠구나.”
둘은 차마 싫다고 할 수가 없었다. 데미갓 캠프에서 케이론의 말은 절대적이었다. 잔뜩 울상을 짓고 싫은 티를 온몸으로 내면서도 둘은 순순히 다른 색의 깃이 달린 투구를 받아썼다. 어쩌다보니 성우의 팀은 전쟁의 신인 아레스의 아들들과 태양의 신인 아버지를 닮아 활쏘기에 특화된 아폴론의 아들, 그리고 처녀신 아르테미스의 유일한 딸로 구성되어 전투 훈련에 딱 맞는 팀이 되었다. 반면, 성운의 팀은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의 외모를 빼닮은 딸과 신들의 전령 헤르메스의 아들 그리고 전쟁의 여신이자 지략가로 알려진 아테나의 딸로 성우의 팀에 비한다면 전력이 약해보였다. 무엇보다도 자신의 팀 앞에서 제 아버지와 똑같은 기백으로 삼지창을 들고 서있는 성우의 모습이 성운으로 하여금 이기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게 만들었다. 내가 어떻게 성우를 이기지.
“다들 알겠지만, 상대팀 진지에 꽂힌 깃발을 먼저 찾아내 들어올리는 쪽이 이기게 되는 간단한 룰이다. 전투는 상대를 가려가며 싸우는 것이 아니다. 나를, 또 내 친구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진지하게 임해라. 그럼, 시작하지.”
성우의 눈빛이 사납게 빛났다. 반인반신으로 태어나 제 몸을 타고 흐르는 신의 피라는 것은 이리도 무서운 것이었다. 승리에 대한 강한 집착과 승부 앞에서 예민하게 반응하는 제 기질은 말하지 않아도 제 아버지를 닮았을 것임을 알았다. 설사 상대가 성운이라 하더라도 이번만큼은 져줄 생각이 없었다. 승패를 정하는 싸움이라면 반드시 자신이 이겨야 했다. 아무리 주변에서 날고 기어도, 자신을 이길 사람은 없어야 했다. 그래야, 포세이돈의 아들이라는 이유만으로 받는 수많은 견제로부터 저를 지켜낼 수 있으니까.
성운은 의연한 척 제 검을 다잡았다. 성우의 기백에 지고 싶지 않았다. 케이론의 말처럼 그냥 모의 전투일 뿐이니까 진지하게 임해서, 성우를 이겨야겠다고 생각했다. 성운은 일주일째 모의 전투에서 져본 적이 없었다. 제 앞에서 삼지창을 들고 선 성우를 성운은 무심하게 바뀐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성우 역시 늘 제게 보이던 따뜻함이 어린 눈빛을 거둬들였다. 오로지 자신의 강함을 증명해보이겠다는 신의 아들로써의 욕망으로 가득 찬 눈빛에 성운은 또 빨려들어갈 뻔한 것을 케이론이 전투의 시작을 알림과 함께 정신을 차렸다.
“오늘도 난 안 져, 안 질 거야.”
“아무리 너라도, 안 봐줘, 성운아.”
그러나 두 사람 모두 굳은 결심이 무색하게도 차마 서로에게 칼끝을 겨룰 수가 없었다. 성운은 성우의 옆을 빠르게 스쳐지나가듯이 뛰어가며 절대지지 않겠다고 성우에게 선전포고를 놓았다. 솔직하게는 스스로와 하는 약속이자 다짐이었다. 나는 너와 등을 지게 되더라도, 피할 생각이 없어, 성우야. 그게 무엇이든, 우리 서로 모두를 위한 선택을 할 거야.
전력은 다소 약하더라도 집단지성의 힘을 발휘할 줄 알았던 덕분에 성운의 팀은 빠르게 성우네 팀의 진지를 찾아냈다. 물론, 가장 먼저 그곳에 도달한 것은 성운이었다. 성운은 제 어머니의 뛰어난 외모를 빼닮은 것은 물론 데미갓 캠프 내에서도 손꼽히는 검술 실력을 뽐내었다. 작고 하얀 성운이 무거운 장검을 들고 거침없이 상대를 제압해가는 모습은 예쁘다는 말이 어울리는 그에게 몹시 어색한 장면이었다. 그런데도 그 이질감에서 풍기는 묘한 분위기가 있었다. 그 칼끝이 제 목을 향한대도 여한이 없을 것 같은 느낌. 성운의 칼에는 그 끝이 죽음일지도 모르는데도 불구하고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이 있었다.
“운, 뒤에!”
성운이 팀원의 소리와 함께 고개를 돌렸을 때는 이미 늦은 뒤였다. 성우의 팀에는 뛰어난 궁수들이 있다는 사실을 간과한 결과는 처참했다. 성운의 오른팔을 스치고 발밑으로 떨어진 화살을 주워든 것은 성우였다. 어디서 이렇게 갑자기도 나타난 건지. 화살이 스치고 지나가 찢어진 성운의 오른팔을 잡고 제 팀원을 향해 살기어린 눈빛을 보내는 성우의 눈은 꼭 집착의 그것과 같았다. 성우의 기세에도 이미 활을 떠난 화살은 멈출 줄 모르고 성운에게로 쏟아졌다. 아무리 성우라고 한들, 그에게도 시간을 멈출 능력은 없었다.
“하윽!”
“시발, 성운아!!”
성우의 삼지창으로 화살을 쳐내는 데는 분명한 한계가 있었다. 성우의 노력에도 기어코 성운의 어깨를 명중한 화살은 결국 성운의 입에서 신음을 뱉게 만들었다. 처음으로, 성운의 앞에서 욕을 질러댄 성우 역시 놀람과 당황스러움을 감출 수 없었다. 이 작은 몸에 다칠 데가 어디 있다고. 다급하게 성운을 잡아끄는 다부진 손은 더 이상 전투 따위는 중요하지 않은 듯했다. 전투 훈련을 위해 만들어진 넓은 들판을 가로질러 성우는 제 기숙사로 향했다. 오로지 호수, 그리고 성운을 치료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성운이 호수에 발을 담글 때 자주 앉던 자리에 그를 엎드리게끔 했다. 화살을 어떻게든 해야 치료를 할 텐데 싶어 성우는 제가 다 이를 악물고 화살을 뽑아냈다. 생살을 찢고 들어온 화살이 도로 빠져나가는 고통은 그 덤덤한 성운마저 살짝 눈물짓게 했다. 화살을 뽑아낸 성우는 고민도 없이 투구와 갑옷만 벗어두고는 호수로 뛰어들었다. 그리고 성운과 눈을 맞추면서, 성운의 손가락 끝을 잡고 물을 올려 보냈다. 성우의 손에서, 성운의 손끝으로 부드럽게 이어지는 물줄기는 성운의 옷을 적시며 화살에 찢긴 상처에까지 다다랐다. 물이 닿자 피가 멎어가면서 상처가 빠르게 아물어 가기 시작했다.
“이 작은 몸에 다칠 데가 어디 있다고, 성운아.”
“성우야, 나 아파.” “많이 아파? 상처 조금씩 아물고 있어, 조금만 참아.”
아니, 성우야. 나 사실 하나도 안 아파. 상처가 다 아물어 가는데 왜 아프겠어. 이깟 상처쯤이야 성운 혼자서도 충분히 치료할 수 있었다. 제게도 성우와 똑같은 능력이 있었으니까. 다만, 그저 이렇게 저를 걱정해주는 성우의 따뜻함은 오직 제게만 허락된 것 같아서, 그래서 가만히 있었을 뿐이다. 제 손 끝에 닿는 성우의 다부진 손의 온기가 좋아서, 또 조금씩 스치는 성우의 숨소리가 제 심장 그 깊은 곳까지 불어오는 것 같아서. 인간 세상에 있었을 때 이런 감정을 뭐라고 불렀더라. 아마도 사랑, 이었다.
-
요즘 성우의 일상은 늘 똑같았다. 온 캠프를 누비며 쏘다니는 성운의 뒤를 쫓아 걸으며 누굴 만나는지, 어떤 걸 먹는지 일거수일투족을 함께 하는 것. 성운도 그 사실을 모르지 않았다. 그래서, 성운은 항상 천천히 걸었고 여유있게 행동했다. 성우가 자신을 놓치지 않도록.
“야, 옹성우. 너 왜 자꾸 나 따라다녀.”
성운은 요즘 들어서 자주 전에는 부려본 적 없던 투정도 부렸다. 항상 성우야, 라며 다정히 부르던 이름을 옹성우! 라고 부르기도 했고 뭐가 그리 마음에 들지 않는지 툭하면 물을 끌어와 성우에게 뿌리곤 했다. 물론, 성우는 가볍게 피하거나 제 힘으로 물을 막아내고는 성운에게 아이같이 굴지 말라면서도 해사하게 웃어보였다.
그러고 보면, 처음부터 성우는 성운에게 있어서 한없이 유해지는 모습을 보였다. 왜 그런지 딱히 생각해본 것은 아니지만 짐작 가는 이유는 있었다. 자신이 가장 힘들 때 만난, 자신을 가장 닮은 사람. 원래 사람은, 자신을 닮은 이에게 끌리는 법이라고 누군가 그랬다. 성우는 처음으로 예언이 아닌 누군가의 말을 믿게 되었다. 자신과 지나치게 닮은, 성운을 사랑하게 되면서.
“옹성우, 말고 성우야.”
“뭐라구?”
“옹성우 말고, 성우야, 라고 불러줘.”
“갑자기 무슨...”
“얼른, 성우야, 해줘.”
“... 왜, 성우야.”
“거봐, 이게 훨씬 더 듣기 좋잖아.”
“그...래?”
“성운아, 나 궁금한 거 하나 물어봐도 돼?”
“응, 뭔데?”
“만약에, 진짜 만약인데, 너랑 내가 서로 죽이지 않으면 안 될 전쟁터에서 만나게 된다면 너는 어떻게 할 거야?”
“서로 죽이지 않으면 안 되는... 나는, 글쎄.”
애초에 성운이 대답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어떻게 너를 죽일 생각을 해, 내가. 성우는 글쎄, 라는 애매한 성운의 대답에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하긴. 일단 너랑 내가 떨어질 일은 없을 텐데, 그치? 우리가 등 돌리고 싸우게 되는 날이 오면 나는 더 이상 살 수 없을 거야, 분명. 이렇게 좋아하는, 사랑하는 널 죽일 수 있을 리 없으니까.
성운은 날이 갈수록 점차 더 확고하게 제 자리를 넓혀갔다. 화살에 맞았던 그 날 이후로는 단 한 번도 남의 손을 빌려 적진의 깃발을 뽑은 적이 없었다. 성운이 모의 전투에 나설 때면 늘 푸른 깃이 달린 투구가 햇빛에 반짝였다. 승리한다는 것은 언제나 기분 좋은 일이었다. 그리고, 기분 좋은 순간에는 늘 성우가 함께했다. 성운이 장검을 휘두르는 그 옆에서 성우 역시 삼지창을 내세웠고, 성운이 적진의 깃발을 뽑아들 때면 성우의 다부진 한 손이 깃발의 무게를 덜어줬다. 적당한 거리와 긴장을 유지하되 곁을 지키는 것. 성운과 성우, 두 사람 나름의 사랑이었다. 너무나 닮은 모습에 끌리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 다가가지 않는. 가까이 가지도 않지만, 또 멀리 가지도 않는 것. 그래, 이제는 두 사람 모두 인정했다. 사랑이다. 내가 너를, 사랑하는구나.
“성운아, 오늘도 고생했어. 나이스 플레이.”
“으아아, 힘들어. 얼른 가자, 성우야. 나 빨리 쉬고 싶어.”
여느 날과 다를 것 없이 모의 전투를 끝내고, 전적에 1승을 추가한 채 나란히 걸어 성우의 기숙사로 향하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성운은 매일 밤 제 기숙사를 마다하고 성우의 기숙사에서 잠이 들었다. 호수가 바로 옆에서 있어서 마음이 편하다는 말도 안 되는 핑계를 써가며 성우의 침대에 누워 나란히 잠들 때면 저도 그저 사랑에 빠진 평범한 사람이 되는 것 같은 기분에 휩싸였다. 성운이 하루 중 제일 좋아하는 시간이었으며, 성우가 가장 설렌다고 느끼는 시간이기도 했다.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하루의 마무리였다.
“으아, 살 거 같다...”
“피는 못 속여, 이런 거 보면. 그치? 어떻게 물속이 더 편하지.”
“난 아예 들어갈래.”
성운의 어머니는 바다의 여신들 중 가장 아름답다는 테티스였으며, 성우의 아버지는 바다의 신들 중 왕의 자리에 서있는 포세이돈이었다. 어찌보면 두 사람에게 땅 위를 걷는 것보다 물속에 잠수하여 헤엄치는 것이 더 편할 수밖에 없는 것은 당연한 이치였다. 성운의 까맣고 동글동글한 머리가 호수 속으로 자취를 감췄다. 성우는 다시금 호수를 비추는 스탠드를 확인하고는 자취를 감춘 성운을 좇아 물속에 저를 맡겼다. 잔잔하게 원을 그리는 물결의 파동이 성운과 성우의 피부를 부드럽게 감쌌다. 살결에 닿는 차가운 물의 온도도, 손가락 사이를 빠져나가듯 흐르는 물살도 무엇 하나 빠짐없이 좋았다.
그 중에서도, 지금 이 편안함과 행복함을 똑같이 느끼고 있을 제 앞의 저를 닮은 사람. 성운은 성우가 있어서, 성우는 성운과 함께라서 사랑이라는 감정을 숨길 수 없을 것만 같았다. 멀어지지 않고, 가까워지지 않는 것이 지금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사랑이라고 믿어왔는데 하필 이렇게 눈이 마주쳐버리면. 사랑, 사랑하는 사람, 사랑, 안정감을 주는 장소, 다시 사랑. 성운과 성우의 시선이 기어코 마주쳤다. 성운의 까만 눈동자에 매혹된 듯이 속절없이 끌려갔다. 성운 역시 다가오는 성우를 밀어낼 생각은 들지 않았다.
- 내가, 너를 사랑해, 성운아.
- 성우야, 사랑하고 있어, 이렇게나 많이.
들리지 않을 고백이었지만 상관없었다. 마주한 두 눈에는 오롯이 서로의 모습만이 가득 담겼다. 소용돌이치는 감정과 사랑이라는 버거움에 눈을 감자 비로소 두 사람의 입술이 물살을 가르고 맞부딪혔다. 호수의 중심에서부터 시작된 물결의 파동도 두 사람을 방해할 수는 없었다. 처음에는 가볍게 맞닿은 입술 위를 몇 번이나 헤맸다. 이래도 되는 걸까, 하는 생각에 차마 더 다가갈 수 없었다. 성운이 머뭇거리는 사이 성우가 성운의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자 자연스럽게 벌어지는 입술 사이로 혀가 비집고 들어갔다. 기다렸다는 듯이 성운이 성우의 목에 팔을 두르고, 성우는 성운의 허리를 감쌌다. 빈틈없이 감겨오는 피부에 닿는 호수의 물은 이리도 차가운데, 서로를 옭아매려 애쓰는 혀는 뜨겁기만 해서 성운도, 성우도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짜릿하지만, 그 끝이 애달픈 키스였다. 꼭, 두 사람의 관계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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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초에, 올림포스 신들 사이에서 공공연했던 예언이 한 가지 있었다. 가장 완벽에 가까운 예언만 전했던 프로메테우스가 신들에게, 정확히는 제우스에게 경고했던 예언은 다름 아닌 신들의 자식에 관한 것이었다. 테티스가 아들을 낳게 된다면, 그 아들은 제우스를 능가하는 힘을 갖고 태어날 것이라는 제우스의 권능을 무시하는 예언이었다. 그래서 제우스는, 프로메테우스를 바위에 묶어 독수리들로 하여금 간을 파먹게 하는 잔인한 형벌을 내리고 테티스를 인간과 결혼시켰다.
아무리 제우스라고 한들 프로메테우스의 예언마저 무시할 수는 없었다. 테티스를 인간과 결혼시켜 아이를 낳게 한 것은, 그렇게 태어난 아이는 온전한 신이 아니기 때문에 그 힘이 제 번개의 힘을 능가하지는 못하리란 생각에서였다. 문제는, 신과 인간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들이 영웅으로 이름을 떨치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현대에 가까워올수록 제우스는 극도의 불안함에 시달려 급기야 3대신-제우스, 포세이돈, 하데스-은 더 이상 자식을 낳지 말자는 제안까지 했다. 테티스는 이런 제우스를 너무나 잘 알았고 그래서 성운을 낳자마자 숨기는데 급급했다. 신이라는 이름 아래 자기 자식을 잃고 싶어 하는 부모는 없었다. 자신이 아들을 낳은 것을 알면 제우스가 진심으로 성운을 죽일 것만 같았기에 테티스는 성운을 숨기기로 했다. 아들이 평생, 자신이 데미갓인 것을 모르고 살았으면 했다.
그리고 그 해, 포세이돈이 인간과 사랑에 빠져 데미갓을 낳았다. 3대신 포세이돈의 능력을 고스란히 가지고 태어나 신들의 권능에 맞설 수 있는, 3대신이 낳은 최초의 데미갓이었다. 그렇게, 모든 신들의 관심과 걱정은 포세이돈의 아들 성우에게 돌아갔다. 어쩌면, 이 날부터 모든 신의 관심 속에 자란 성우와 모두로부터 숨어야만 했던 성운의 만남은 운명으로 정해져있던 것이 아닐까. 그리고 피할 수 없는 운명이 될 것이라는 것도 예견되었던 게 아닐까.
“성운아, 일어나봐. 훈련 가야지.”
“우응, 쪼금만 더 자자아...”
“이러다 늦어, 우리. 얼른 일어나봐.”
성우의 기숙사 침대에 나란히 누워 잠들었던 성운과 성우의 새로운 아침도 시작되었다. 물론, 늘 똑같이 성운에게 팔베개를 해주며 품에 안고 재웠던 성우가 성운을 깨우면서. 유난히 밝은 햇살에 눈을 찌푸리며 잠투정을 하는 성운의 이마에 가볍게 입술을 맞춘 성우에 성운도 피식 웃으면서 침대에서 일어났다. 다를 것 없는 하루의 시작인데, 무언가 많이 달라진 느낌이었다. 제 이마에 입을 맞춰오는 성우도, 맑은 날씨도 너무 다 좋기만 했다. 이 완벽함이 지속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만큼.
“옹, 케이론이 너 부르셨어. 급한 일이라던데 서둘러 가보지 그래?”
“케이론이?”
성운과 훈련장으로 향하던 성우의 발목을 붙잡은 것은 케이론의 급한 호출이었다. 성운을 먼저 검투 훈련장으로 보내고 케이론이 있을 들판 쪽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무슨 일인지 도통 알 수가 없어서 불안했다. 멋대로 성운과 훈련장에서 도망쳤을 때도 개인적으로 호출하지는 않았었는데.
“케이론?”
“제우스님이 아셨다.” “...네?”
“성운이가 이곳에 있다는 걸 알았어.”
“그게 문제가 되는 건가요...?”
성우는 심각한 표정으로 잔뜩 고민에 빠져있는 케이론을 이해할 수 없었다. 성운의 존재가 뭘 어쨌다는 걸까. 오히려, 조심해야할 것은 자신이 아니었나. 덩달아 복잡해지는 머리에 성우가 미간을 찌푸렸다.
“테티스가 낳은 아들은 제우스를 능가하는 능력을 가질 것이다.”
“네? 케이론, 그게 무슨...”
“프로메테우스님의 예언이야. 그래서, 테티스님이 성운이를 숨겼던 거야. 존재가 발각되는 날, 성운이는 죽을 테니까.”
“케이론, 제가 지금 이해가 잘 안 돼서 그러는데요. 신들의 견제를 받는 건 저 하나로 족한 거 아니었나요.”
“그건 어디까지 예언이 있기 전까지의 얘기지. 프로메테우스님의 예언이 있다면 말이 달라져. 지금 제우스님한테 있어서 가장 위협적인 존재는 성우 네가 아니라, 성운이가 된 거지.”
성우는 자신이 겪어온 관심이라는 말 아래의 폭력과도 가까운 감시와 그 안에서 지켜내야만 했던 자신의 자리와 목숨에 대해 떠올렸다. 그 위태로움을 똑같이 성운이 견뎌야 한다는 소리였다. 아니, 정확히는 성운은 위태로움을 견디는 것이 아니라 신의 권능에 맞서 자신을 지켜야했다. 제우스를 넘어서야만, 살 수 있다는 소리였다.
“...가요.”
“뭐라고?”
“어쩌다가, 아시게 됐냐고 묻잖아요! 19년 동안 조용히 살았어요. 제가 아니었으면, 자기가 데미갓인지도 모르고 인간세상에서 행복하게 아버지 사랑 받으면서 살았을 아이에요. 그런 아이를 제가 데려오는 바람에 이렇게 된 거잖아요. 그쵸, 저 때문이죠, 그런 거죠?”
“성우야, 이건...”
“도망쳐볼게요. 19년을 잘 숨어 있었어요. 이제 와서 들켰다고 달라지는 건 없어요. 성운이가 올림포스에 가게 될 일도, 그렇다고 타르타로스에 가게 될 일도 없을 거예요. 제가 그렇게 만들 거예요.”
반드시 성운을 지켜내겠다고 말하는 성우를 막을 힘을 적어도 데미갓 캠프 내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성우의 힘에 일방적으로 밀리지 않는 사람은 아마 성운이 유일할 것이었다. 성우와 케이론이 뒤를 돌았을 때, 그곳엔 성운이 있었다.
“성운아, 네가 왜 여기...”
“도망 안가면, 저 죽어요?”
“성운아.”
“케이론, 저 도망 안가고 여기서 계속 있으면, 제우스님...한테 죽을 운명이에요? 그래요?”
“성운아, 안 그럴 거야. 내가 그렇게 할게. 내가 그렇게 만들게.” “네가 무슨 수로. 성우야, 네가 무슨 수로 나를 지켜. 그래봤자 너나 나나 고작 반만 신일뿐인 거잖아. 결국, 우리가, 내가 신들을 이길 리가 없잖아.”
“음, 그건 모를 일이지.”
“케이론, 헛된 희망을 심어줄 생각이라면 그만 둬요. 왜 진작, 그런 얘길 해주지 않은 건데요? 왜 저한테 너는 태어나서는 안 되는 존재였다고 말해주지 않으신 건데요, 왜!”
성운의 발악에 성우의 꽉 쥔 주먹이 결국 성운의 얼굴을 향했다. 네가 그렇게 말하면, 나를 걸고 널 지키겠다고 다짐한 내가 뭐가 돼, 하성운. 어젯밤에 다정히도 맞췄던 입가가 터져 피가 맺혔다. 쳤어, 지금? 나를, 옹성우가...? 성운은 입안을 씹은 탓에 비릿하게 퍼지는 피를 뱉어냈다. 성운이 뒤로 넘어지는 동시에 정착할 곳을 잃은 성우의 다짐은 허공에 나뒹구는 공기로 바스라졌다. 왜 이렇게 내 마음을 몰라줘, 너는.
“태어나서는 안 되는 존재가 어딨어. 왜 말을 그렇게밖에 못해, 너. 성운아, 나 무슨 일이 있어도 너 다치게 안 해. 죽게는 더더욱. 왜 이길 수 없을 거라고 확신하는 건데. 예언도 네가 이길 거라잖아. 믿어, 좀.”
성운을 넘어뜨렸던 손으로, 다시 성운의 손을 붙잡아 일으켜줬다. 찢어진 입술에서 피어나는 핏방울들이 성우의 눈에 가득 찼다. 이렇게 바로 후회할 일을 왜 해, 멍청한 새끼. 성우의 미련한 눈빛을 눈치 챈 성운이 급하게 입가를 훔쳐냈다. 나 하나도 안 아파, 하듯이.
성우는 그 날 훈련에 전부 참여하지 않았다. 성운을 제 기숙사로 데려가 한참을 쳐다만 봤다. 둘이 함께 누웠던 침대에 성운을 앉히고 자신은 호수에 뛰어들어 그렇게 몇 시간을 얼굴도 보여주지 않았다. 답답해진 성운이 저도 같이 호수에 빠져들려고 하기 직전에야 성우는 수면 위로 얼굴을 비췄다. 아무리 방법을 강구하려 들어도 마땅한 해결책이 떠오르지 않았다. 이토록 제 자신이 한심하고, 비참했던 적이 없었다. 전에 없던 패배감이었다. 포세이돈의 아들이 어떻고, 아버지의 능력을 닮았고, 그런 것은 중요치 않았다. 지금 제 눈에 가득 차오른 저 아이, 성운이를 안전하게 도망시킬 수 있느냐가 중요했다. 그리고, 그럴 능력이 저한테는 없는 것만 같았다.
“성운아.”
“응, 왜, 성우야.”
“여기서 나가면, 어디로 가고 싶어? 도망치면 말이야.”
“음... 생각해본 적이 없어서 모르겠는데... 우리한텐 여기가 세상의 전부라고, 네가 말했잖아.”
“그냥 아무데나 좋으니까 얘기해봐. 나는 정말 세상의 전부가 여기뿐이지만 너는 아니잖아. 캠프 들어오기 전에 즐겨 갔던 곳이라던가 그런 거 없어?”
“너, 진짜 나갈 생각으로 묻는 거야?”
“응, 도망치자고 했잖아.”
“옹성우 너 진짜 바보야? 우리가 어떻게 도망을 쳐. 온 세상을 뒤져봐도 신들의 눈에 안 띄는 곳이 없을 건데, 우리가 어떻게 도망을 쳐. 말이 안 되잖아.”
“애초에 우리 존재가 말이 안 된다고는 생각 안 해봤어? 캠프 밖에 나서서 아무나 붙잡고 물어봐봐. 그리스로마 신화를 믿으세요? 제우스의 존재를 믿으십니까, 하고 물어보라고. 어떤 미친놈이 네, 믿어요, 라고 하겠어.”
“그러니까 더더욱 안 된다는 거잖아. 그 누구도 우릴 도와주지 못하니까. 아니, 나를 도와주진 못하니까. 너는 적어도 여기서 벗어나지 않으면, 안전할 수 있잖아. 그러니까, 그냥 아무것도 하지마 제발. 나 때문에 위험을 감수하려고 들지 마, 제발. 부탁할게, 성우야. 응?”
우리는 왜, 이렇게 만났을까. 우리는 왜 이렇게 기구한 운명을 타고나서 서로를 위해서 해줄 수 있는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이, 사랑한다는 말도 제대로 못해주고 이렇게 바라만 보는 것도 아픈 관계여야 하는 걸까. 성우가 비로소 호수에 나왔다. 잔뜩 젖어 물이 떨어지는 옷을 어찌할 생각도 하지 않고 그대로 성운의 앞에 다가가 섰다. 젖은 옷이 다부진 몸에 달라붙었고, 스쳐부는 바람이 더욱 시렸다. 바람보다도 더 차갑게 식은 성운의 눈을 바라보다가 성우가 그대로 고개를 숙여 성운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너 때문에 이러는 거 아니야.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고 싶은 내 욕심 때문에 그런 거야. 그러니까, 성운아 너는 그ㄴ,”
성운이 먼저 입술을 부딪혀왔다. 한참을 물속에 빠져있던 성우의 차가운 입술 위로 붉은 성운의 입술이 맞닿았다. 그 온기 사이로 짠 맛이 났다. 성운의 감긴 눈에서 애처롭게 눈물이 흘러 뺨을 타고 흘렀다. 왜 울어, 성운아. 위로라도 되는 마냥 성운의 뺨을 감싸며 성우가 성운의 두 귀를 막았다. 멀리서 노을이 지고 있었다. 맞닿은 두 사람의 얼굴 위로 주황빛 노을이 내렸다. 성운의 두 귀를 여전히 막은 채로 성우의 혀는 성운의 입안 깊은 곳까지 탐했다. 두 혀가 섞이며 질척이는 소리가 성운의 안에서 울렸다. 숨이 차 살짝 벅찬 듯 흘린 신음소리도 성우의 입안으로 먹히며 성운을 더 안달나게 했다. 세상의 모든 소리로부터 벗어나 오로지 성우와 제가 키스하는 소리만 들리는 지금, 성운은 꼭 자신과 성우만 이 곳에 존재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세상에 우리 둘만, 이렇게 사랑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성운의 전부를 온전히 다 탐하려는 듯 몰아붙이는 성우 덕에 성운이 뒤로 넘어지며 침대에 눕혀졌다. 한시도 떨어지지 않으려 빈틈없이 입술을 맞대오는 성우가 벅찼던 성운이 가볍게 성우의 가슴팍을 몇 번 치자 엄살을 피우며 아프다는 듯 입술을 뗐다.
“와, 진짜 아파.”
“흐으, 숨 차, 잖아.”
가쁜 숨을 몰아쉬는 성운의 뺨이 살짝 붉었다. 예쁘다. 꼭 처음 우리가 만났던 날, 그날처럼. 너무나 소중해서, 안으면 부서질까 어쩔 줄 몰라하는 성우의 젖은 옷 위로 성운의 손이 닿았다. 축축하게 젖은 옷이 달라붙은 성우의 가슴팍을 쓸어내리다가 울망한 눈으로 성우를 바라봤다. 아린 시선이 허공에서 야릇하게 얽혔다. 어둠이 내려앉고 있었다. 아마도, 아프고 또 길어질, 온전히 맞닿았지만 여전히 서로 다른 생각으로 가득 찰 깊은 밤이 될 것 같았다.
-
폭풍전야를 앞두고 시간은 빠르게만 흘러갔다. 성우의 걱정과 성운의 불안을 타고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흐르는 시간 앞에 조금씩 무뎌져만 갔다. 어쩌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과 함께. 이게 비 오기 전의 맑은 하늘과 같은 것이라는 걸 알았더라면 좀 달라졌을 테지. 하지만, 안타깝게도 어린 성운과 성우는 몰랐다. 이게 비극의 서막이 될 거라는 것을.
“성운아, 비 냄새 안 나?”
“비?”
“응, 비 올 거 같다, 오늘.”
“비 오는 거 싫은데... 땅 질퍽해져서 훈련하기 힘들어.”
“케이론한테 오늘 훈련은 안하면 안 되냐고 여쭤볼까, ㅋㅋㅋㅋㅋ”
실없는 농담을 주고받을 만큼 편해진 분위기가 어딘지 아슬아슬했다. 성우의 농담에 성운이 바람 빠지듯 웃었을 즈음, 갑작스럽게 하늘에 짙은 먹구름이 깔렸다. 정말 한 순간에 햇빛을 잃은 하늘에는 번개가 내리쳤다. 제우스였다. 기어코, 성운을 찾아온 것이었다. 성운의 행복을 방해하듯이, 꼭 그렇게.
“오랜만이군, 자네.”
“어떻게 여기까지...”
“그렇게 걱정할 거 없어, 오늘은 자네를 벌하러 온 게 아니니까. 자네도 알잖아? 지금 자네는 잠시 내 관심 밖이라는 걸.”
“그게 무슨 소ㄹ,”
“좀 조용히 하지. 신의 뜻을 거스르고 감히 내게서 도망치려 한 죄는 잠시 뒤 물을 테니.”
제우스의 가벼운 손짓에도 성우는 하릴없이 무릎이 꺾였다. 신의 권능은 이런 것이었다. 인간의 피가 섞인 반인반신 따위가 넘볼 수 없는 힘. 진짜 신들의 힘 앞에서 꼼짝없이 무릎 꿇려지는. 그게 성우의 한계였다. 제 아무리 포세이돈의 아들이라 한들 그 점은 변하지 않았다. 데미갓은, 데미갓일 뿐이었다. 신의 피를 타고났지만, 인간의 한계를 가진.
“... 생각보다 늦으셨네요.”
“오, 패기가 넘치는군. 설마 예언의 전부를 믿고 그러는 건가.”
“프로메테우스님의 예언은 단 한 번도 틀린 적이 없다고 배웠습니다. 그렇다면, 제가 딱히 무서울 필요도 없지 않을까요.”
성운은 생각보다 담담했다. 성우의 앞에서 그토록 불안해하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을 만큼 당당했고, 아무렇지 않아보였다. 물론 바르작거리며 떨리는 손마저 성우의 눈에서 감출 수는 없었지만.
“꽤 당돌하구나. 테티스와는 제법 다른 느낌이야.”
“한 번도 보지 못한 엄마를 닮는 게 더 어려울 것 같은데요.”
“허, 그 이상의 버릇없음은 용서하지 않아. 더 이상 봐주지 않을 생각이니 조용히 따라와줬으면 좋겠는데.”
“성운아, 갈 거 아니지? 가면 안 돼, 알지? 응?”
“조용히 따라가는 대신, 성우도 함께 데려가요. 성우 안 가면 저 안 가요.”
“정말... 정말 당돌하군, 그래. 내가 지금 너랑 거래하자고 이러는 게 아니라는 걸 알 텐데. 나는 지금 부탁을 하는 게 아니야. 명령을 하는 거지. 신의 뜻을 거스를 생각인가?”
“... 손해실 텐데요.”
“뭔가 착각을 하는 모양인데. 내가 지금 여기서 번개를 내리치면 다 죽어. 네가 데려가겠다는 같잖은 옹성우도. 그러니까, 주제를 알고 그냥 따라가는 게 어떨까? 테티스의 아들이라고 봐주는 것은 정말 딱 거기까지야. 이것도 네가 테티스를 꼭 빼닮았기 때문에 봐주는 거라는 걸 알았으면 좋겠군.”
그다웠다. 신들의 왕이 한낱 데미갓 따위를 상대해줄리 없었다. 그때였을까. 호수의 물이 움찔거리며 성운의 주위를 감쌌다. 단순히 성운이 팔을 벌렸을 뿐이었는데, 마치 그가 물의 신이라도 된 마냥 호수의 물이 끌어 올라와 성운의 주위를 감싸고 성우를 보호하듯 가뒀다. 성우는 제 주위를 둘러싼 물에 손을 뻗어 기력을 회복했고.
“꽤 좋은 재주를 가졌군, 그래.”
“저도 몰랐어요, 제 힘이 이 정도일 줄.”
“그래서, 알고 나면 뭐가 달라지지?”
“많은 게 달라지죠. 첫 번째로는, 제가 제우스님을 그렇게 무서워하지 않게 되었다는 것? 도망을 못 친 게 아니라 안 친 거라는 걸 아셔야 할 텐데요.”
“감히! 지금, 내ㄱ,”
“두 번째는, 제가 예언을 따르고 싶어졌다는 거죠. 제가 제우스님을 능가할 능력을 가졌다면 신들의 반열에 오를 수도 있다는 얘기, 아닌가요?”
“버릇이 없는 건 저쪽을 닮았군. 좋아, 함께 가지. 올림포스로.”
놀란 것은 성우뿐이었다. 성우는 제가 제우스를 마주한 이후 처음으로, 그가 누군가에게 숙여주는 것을 보았다. 한낱 반인반신 따위가, 라는 말을 달고 사는 제우스가 그 ‘고작 데미갓’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모습은 무척이나 생소한 것이었다. 오히려 그런 모습을 이끌어낸 성운은 무덤덤했지만.
“가자, 성우야.”
“하성운... 너 뭐야, 어떻게 된 거야.”
“다 설명할게, 무사히 다녀와서.”
“하나도 빠짐없이 전부 해야 할 거야. 내가 아까 얼마나 심장 떨어질 뻔 했는지 알아?”
“안 다쳤잖아, 나 멀쩡해!”
“다칠 뻔 했잖아!”
“참나, 날 지켜주네 어쩌네 하시던 분이 고작 손짓 한 번에 풀썩 해놓고 말이 많다?”
“야, 그건!”
“잔말 말고, 가자. 올림포스로. 너 아버지 보고 싶어 했잖아.”
너는 그 상황에서도 나를 생각해서 그런 거였구나. 아니 어쩌면, 네가 그렇게 담담했던 이유는 이럴 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미 너는 마음을 굳게 먹고 있었기 때문에 그리도 태연했던 거구나. 성우는 그저 조심히 성운의 작고 하얀 손을 마주잡았다. 늘 제가 건넨 손을 잡기만 했던 손이 오늘은 저를 끌어당겨 세워주고, 또 깍지도 껴주었다.
어느새 성운은, 그렇게 달라져있었다. 마냥 웃고, 덤덤한 척 꾸며내던 모습에서 벗어나 진짜로 담담해질 줄 아는 어른으로 성장해가고 있었다. 그래서 성우는, 조금 부끄러워졌다. 나는, 여전히 그대로면서 이런 아이를 지켜주겠다며 말로만 나섰던 거구나. 그런 성우의 생각을 꿰뚫어보기라도 하듯 성운의 손이 더 힘을 주어 성우에게 손깍지를 껴왔다.
“그럼, 가지. 케이론, 자네도 이 아이를 숨긴 죄는 면치 못할 거야. 다녀와서 보지.”
제우스는 끝까지 성운을 숨겨준 모든 이에게 벌을 각오하라는 말을 남기며, 성운과 성우를 제 연기로 감쌌다. 올림포스로 올라가서 결딴을 낼 생각이었다. 신들의 왕, 그 최고의 자리에는 반드시 제우스, 자신이 서 있어야 했다. 그리고, 성운과 성우는 자신의 존재에 가장 큰 위협이었다. 어쩌면 제 밑에서 부릴 수 있는 포세이돈이나 하데스, 혹은 제 자식들인 신들보다 뭣도 모르고 인간의 교활함을 타고났으면서 신의 능력도 부릴 수 있는 데미갓이 더 위협적일지도 몰랐다. 정말로 프로메테우스의 예언은 사실일 지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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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감았다 떴을 땐, 이미 꿈에서나 나올 법한 신전이었다. 올림포스. 신들이 살고 있는 곳답게 그 위압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성운과 성우는 나란히 발걸음을 멈추고 서서 올림포스로 향할 문을 올려다보았다. 성운의 몸집의 한 10배쯤 될까, 제우스는 진작에 들어가 있는 듯했다. 성우와 눈을 한 번 마주친 성운이 씨익 웃으며 문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문이 저절로 스르르 열리며 제우스가 앉아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올림포스, 그리고 제우스. 그 앞에 선 성우와 성운. 이제는 결론을 지어야할 때였다. 성운이 정말 제우스에 의해 끝을 맞이하거나, 제우스가 성운에게 패배를 인정하게 되거나. 예언의 종지부를 찍어야 할 순간이었다.
“문을 열 수 있는 걸 보면, 신의 피가 흐르긴 흐르나보군.”
“그럼요, 제 어머니가 제우스님이 구혼했던 테티스인걸요. 제가 어머니를 꼭 빼닮았다고, 방금 전에 제우스님이 그러셨잖아요.”
겁이 없는 건지, 아니면 진심으로 이 상황을 즐기고 있는 것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성운은 진심으로 웃고 있었다. 누구라도 겁을 내야 마땅할 상황에서 오히려 제우스에게 농담에 가까운 말을 던지면서. 그 모습에 기가 찬 것은 비단 제우스뿐이 아니었다. 올림포스의 12신, 제우스 옆에 앉은 포세이돈과 타르타로스-지옥-에서 올라온 하데스를 비롯한 여러 신들 역시 제우스에게 함부로 말하는 성운을 어이없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다만, 그 누구도 섣불리 성운을 꾸짖을 수는 없었다. 테티스의 아들은 제우스의 능력을 뛰어넘는 힘을 가지게 될 것이라는 예언이 있었기에.
“아, 본론 시작 전에 먼저, 포세이돈님께 드리고 싶은 말이 있는데요.”
“해보지.”
“감사하다고 꼭 말씀 드리고 싶었어요. 덕분에, 제가 성우를 만났다고 너무 감사드린다고, 저한테 너무 과분한 사람을, 또 사랑을 주셔서 진짜 감사합니다.”
“늘 당신을 원망했어요. 왜 나를 낳아놓고 단 한 번도 보러 오질 않는 걸까. 왜 남들은 다 듣는 부모신의 목소리를 나는 못 듣는 걸까. 나는 왜 당신의 아들로 태어나야 했을까. 진심을 다해 원망했고 또 진심을 다해 미워했었어요. 근데 지금은 또 당신한테 감사해요. 당신을 보겠다고 욕심 부렸던 덕분에 제우스님의 벌을 받고 성운이를 만났어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아버지 노릇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건 진심이에요.”
나란히 서서 손을 잡고 고개 숙여 전하는 성운과 성우의 진심이었다. 많이 돌아왔지만, 결국 우릴 만나게 해준 건 당신들 덕분이었다는 감사. 그것이 성운과 성우가 신들에게 차릴 수 있는 최대한의 예의였다. 칼을 겨눠야할 상대이기 전에 어찌되었건 자신들의 부모였고, 은인이었다.
“할 말은 그게 단가.”
“네, 그럼 이제 본론으로 돌아갈까요?”
“예언을 전부 들었다고?”
“테티스가 낳은 아들은 제우스를 능가하는 능력을 가질 것이다.”
“제대로 알고 있군, 그래, 그렇다면 내가 너를 어떻게 할지도 알고 있겠군.”
“죽이시게요?”
“네가 나보다 뛰어난 능력이 있다고 예언은 말했다. 그렇다면, 네 힘이 어느 정도 인지 내가 확인할 필요가 있을 것 같은데.”
제우스가 손으로 한 쪽의 바다를 가리켰다. 유럽 그 어딘가의 작은 마을과 인접해있는 잔잔한 바다였다. 마을 주민들이 소소하게 어선을 타고 조업을 하거나 함께 둘러앉아 해산물 손질을 하고 있는 그런 어촌. 그 고용함이 나름의 평화로움을 지키고 있는 작지만 예쁜 마을이었다.
“저 바다를 움직여보게.”
“네?”
“저 마을 옆에 있는 바다에 파도가 일게 해봐. 마을을 전부 덮어버릴 만큼 큰 파도라면 더 좋고.”
“... 마을을 전부요? 마을 주민들이 죽거나 다칠 텐데요.”
“그냥 해봐. 네 힘이 어느 정도인지는 알아야 내가 겁을 먹든 너를 죽이든 할 거 아닌가.”
성운의 힘을 평가하겠다는 것은 핑계였다. 어차피 너는 인간이니까 이런 억지와 같은 내 명령을 따르지 못하겠지, 하는 마음. 제우스의 예상처럼 성운은 당황스러운 눈으로 마을을 바라보기만 했다. 데미갓들은 대체로 그랬다. 감정이 앞섰고 그것은 흠이 되어 완벽을 추구하지 못하게 되었다. 때문에, 데미갓들은 신들을 이길 수 없었다. 비슷한 능력을 갖추었다고 하더라도.
“파도가 마을을 덮치기만 하면 되는 건가요?”
“물론.”
“그 정도 높이의 파도가 일어나기만 하면 된다는 거죠?”
“할 수 있다면 해보라는 거지.”
성운이 여태 깍지끼고 있던 성우의 손을 더 힘주어 잡았다. 할 수 없어서 망설이는 것이 아니었다. 자신의 힘이 어떤지 알게 되었기에 마을 사람들이 다칠 것이 눈에 뻔해서 망설이는 중이었다. 그런 성운을 전부 안다는 듯이 성우가 다정히 성운에게 눈을 맞춰왔다. 바다를 바라보던 성운의 눈에 오로지 성우만이 가득 찼다. 천천히 성운을 끌어안는 성우의 어깨에 살포시 뺨을 기대니 머리가 조금은 맑아지는 기분이었다.
“다 괜찮을 거야. 믿어, 성운아.”
“할 수 있을까, 내가...?”
“아까 자신감 넘치던 하성운 어디 갔어, 응? 믿어, 진짜로. 할 수 있어, 성운아.”
성운을 안은 채 귓속말로 달래준 성우가 성운을 품에서 놓아주었다. 안길 때만 해도 불안에 떨던 성운은 어느 새 차분한 눈빛으로 바다를, 그리고 마을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을을 다 덮칠 정도로 높은 파도기만 하면 되는 거죠?”
“그렇대도. 할 수 있으면 보여봐.”
성운이 조용히 손을 내어 바다를 향해 뻗었다. 잔잔하던 물결이 조금씩 일렁이기 시작했다. 바다 위에 떠있던 배들이 급하게 작업을 철수하려고 바쁘게 움직였고, 파도는 조금씩 더 높아지고 사나워졌다. 성운의 손끝에 힘이 실릴수록 파도는 거세졌다. 배들은 그물을 채 다 걷지도 못한 채로 항구로 돌아가려 뱃머리를 돌렸고 파도는 그를 막듯이 높아만 졌다.
성운이 한 번 더 손끝에 힘을 주자 마을을 다 덮칠 크기의 파도가 일었다. 빠른 속도로, 엄청난 크기의 파도가 밀려오는 것을 인간의 힘으로 막아설 수는 없었다. 애초부터 바다에는 도망칠 곳이 존재하지도 않았고. 성운은 파도를 일으켜 배를 전복시키고, 마을 덮어버릴 듯 밀어붙였다. 그리고, 파도가 항구에 닿기 직전에 힘을 빼 파도가 가라앉게 만들었다.
“이 정도면, 되나요?”
“왜 끝까지 파도를 밀려 보내지 않은 거지?”
“마을이 잠기면, 주민들이 피해를 볼 테니까요.”
“이미 배를 몇 척씩이나 엎고서 할 말은 아니지 않나 싶은데.”
“끝까지, 보셔야죠.”
성운이 가리킨 끝의 바다에는 돌고래들의 등에 탄 어부들이 보였다. 단 한 사람도 빠짐없이, 돌고래의 등에 타 무사히 항구로 옮겨지는 사람들을 보며 성운이 가볍게 웃어보였다. 제 어머니를 닮은 것이, 아니 제 어머니의 아들인 것이 이럴 때는 도움이 됐다. 돌고래들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는 테티스의 아들이라는 이유만으로 돌고래들은 성운의 말을 꽤 잘 따라 주었다. 고작 속으로 도와달라 간절히 외치며 손짓 몇 번 했을 뿐인데도.
“신이라면 더더욱 인간의 삶을 들여다보고 또 살필 줄 알아야 하는 것 아닌가요? 신이라고 해서 우위에 있다는 착각을 언제까지 하실 생각이죠? 고작 자신의 자리를 지키는 것에만 집착하면서 인간을 소유물로 여기실 생각이에요? 그런 게 신이라면, 저는 반인반신으로 살고 싶지 않아요. 신의 피가 섞였다는 게 소름 끼치도록 싫으니까.”
성운이 말을 끝마치자마자 성우의 품을 파고들었다. 성우는 그런 성운에 당황하지 않고 그대로 그를 안아 토닥였다. 잘했다고, 정말 잘했다고 다독여주는 칭찬이었다. 지금은 이렇게 말해도 성운이 사실 얼마나 여린 사람인지 누구보다 잘 아는 성우였다. 방금 그가 얼마나 간절한 마음으로 돌고래들에게 신호를 보냈을지, 얼마나 긴장되는 마음으로 파도를 일으켰을지 전부 알았다. 그래서 수고했다고, 이보다 더 잘할 수는 없었다고 확인시켜주듯 성운의 어깨를 감싸안고 등을 토닥여줬다.
“성운이가 제우스님보다 더 강한 힘을 갖고 태어났다는 건 이런 뜻이었을 거예요. 신들은 한 번도 생각하지 않은 인간의 입장에서 행동하고 그들의 감정을 헤아리고, 그래서 자신의 욕심으로 인간들을 다치게 하지 않을 그런 공감 능력을 가졌잖아요, 성운이는.”
성우의 말이 올림포스를 울렸다. 신에게 없는 공감능력을 가진 신의 아들. 인간의 편에 서서 그들을 이해하고 사랑할 줄 아는 신의 핏줄이라. 이러니 당연히 성운이 제우스보다 더 큰 힘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성운은 사랑으로 그들을 포용할 줄 알았으니까.
“성운, 너에게 묻지. 완전한 신이 되는 것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지?”
“반쯤 신의 피가 흐르는 것도 끔찍한데, 저보고 신이 되라구요? 저는 그렇게 매정하게 인간들을 고작 자신의 소유물처럼 부릴 생각은 꿈에도 없어요.”
“우리한테도 너 같은 신이 필요하다면, 그래도 생각을 바꾸지 않을 텐가?”
“무슨 말씀이세요, 그게.”
“신들 사이에서 똑바로 네 고집을 펼치려면 너도 신이 되어야 하지 않겠냐는 뜻이지.”
“제 고집이요...?”
“신들 사이에서도 인간들의 입장을 대변해주고 중재해줄 신이 한 명쯤은 필요할 테니까.”
“진심...이세요?”
“제우스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지.”
성우의 품에서 헤어져 나온 성운의 앞으로 넥타르와 암브로시아가 건네졌다. 데미갓 캠프에서도 조금씩 아주 가끔 정말 지치고 힘들 때나 먹었던 신들의 전유물. 성운은 제게 내밀어진 넥타르와 암브로시아를 빤히 쳐다봤다. 이걸 먹어도 되는 걸까. 내가 신이 되도 되는 걸까. 성운은 넥타르가 담긴 잔을 들었다. 저를 유심히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져 고개를 돌렸을 땐 성우가 성운은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성운아, 제발. 마시지 않을 거지? 나를 두고 신이 되지 않을 거지? 성운아, 나는 너를. 성운에게는 들리지도 않을 걸 알면서 속으로 무한히도 외쳤다. 제발 나를 두고 가지마, 성운아. 성우의 애처로운 눈길이 분명 성운과 마주쳤음에도 불구하고 성운은 잔을 내려놓지 않았다. 그저 암브로시아를 반대쪽 손으로 집으며 떨리는 목소리로 제우스에게 간청했다.
“성우에게도 넥타르와 암브로시아를 내어주세요. 제 편도 하나쯤 올림포스에 있어야 하는 거잖아요.”
“그건 안 될 말이지.”
“어째서요? 성우가 위협이 되는 존재라면서요. 그래서, 계속 데미갓 캠프에 두고 감시하시는 거잖아요. 그러면, 그런 거면 그냥 아예 신으로 제우스님 아래에 두고 감시하는 게 더 낫잖아요, 네?”
“그래, 네 말처럼 그게 더 나을 지도 모르지. 하지만, 옹성우를 신으로 두는 것은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야. 옹성우는 너랑 똑같은 데미갓이 아니니까.”
“똑같은 반인반신인데 뭐가 다르다고 그러세요.”
“옹성우는 포세이돈의 아들이니까, 그래서 안 되는 거야. 신들의 균형이 무너지게 되니까.”
“신들의 균형이 그렇게 중요한가요? 어차피 중심에는 제우스님이 계실 거잖아요.”
“달라. 그렇게 보이지 않겠지만 3대신은 나름의 균형이 있어. 포세이돈이 함부로 나를 못 건드는 것처럼, 나도 하데스에게 함부로 굴지 않지. 그건 셋 나름의 질서야. 그런데 여기에 포세이돈 아들이 들어온다? 안 될 일이지. 왜 신들의 자식들이 올림포스에 많이 남아있지 않은 것인지 생각해보면 간단한 문제지.”
제우스의 말에 성우가 고개를 떨궜다. 결국 이렇게 끝날 운명이었구나. 성운을 붙잡고 신이 되지 말라고, 그냥 나와 같이 돌아가자고 애원이라도 하고 싶었다. 나는 아직 어리니까, 성숙하지 못해서 네가 필요하다고 말하고 싶었다. 사랑한다는 말도 제대로 해준 적이 없는데.
성우의 소리 없는 애원이 들릴 리 없었다. 성운은 한동안 성우를 바라보다가 넥타르를 제 입안으로 흘려보냈다. 암브로시아도 꼭꼭 씹어 삼켰다. 그런 성운을 차마 지켜볼 수가 없어서, 성우는 뒤돌아서 올림포스에서 벗어나려했다. 성우가 뒤를 돌아 문을 향해 걷자 다급해진 것은 성운이었다. 저대로 가면, 언제 다시 볼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성운이 제우스를 향해 눈짓하자 제우스는 둘이서 얘기하라는 듯 신들을 해산시켰다. 저마다 각자의 연기를 보이며 신들이 자리를 비워주자 성운이 다급하게 성우에게로 달려가 어깨를 붙잡았다.
“성우야, 얘기 좀 해.”
“무슨 얘기. 너는 그냥 여기서 신이 되면 된다는데, 대체 무슨 말이 더 필요한 건데.”
“어쩔 수 없다잖아! 나는 너랑 같이 신이 되고 싶은데 너를 신으로 만들어 줄 수 없다잖아!”
“그러니까!! 너는 나랑 같이 있는 게 아니라 신이 되는 게 중요했던 거잖아! 나는 신 따위 아무래도 상관없었어. 애초에 신이 되려고 올림포스에 올라온 게 아니었으니까. 내가 신이 되지 못하니까 너 혼자 신이 되길 바랐던 게 아니야 난. 난, 우리가 여전히 그대로 데미갓이더라도 그냥 너랑 함께이고 싶었어. 근데, 성운아, 너는 아니었던 거야.”
성우가 거칠게 성운의 손을 뿌리쳤다. 너무도 다른 방식으로 서로를 위해 왔기에 이번에도 자신의 방식을 고수하려고 들었던 어린 두 사람은 그렇게 틀어졌다. 성운의 뒤로 바다가 비췄다. 성우의 기숙사 벽 한 쪽을 가득 채운 그 곳. 스카겐 그레넨이었다. 문득 성운과 제 기숙사 침대에 누워 그 사진을 보고 나눴던 대화가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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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사진이 어딘지 알아? 덴마크 그 끝에서도 가장 최북단, 스카겐 그레넨이라는 곳인데." "알아, 아마 저기가 바다 색이 달라서 유명해졌지? 한 바다에서 물결이 섞이지 않는 곳이라며." "맞아. 나는 스카겐이 싫어." "싫으면서 사진은 왜 걸어뒀데? 왜. 왜 싫은데?" "똑같은 바다에, 똑같은 물이면서 안 섞이잖아. 아니, 못 섞이는 건가. 닿아있는데 닮아지지가 않아."
꼭 우리처럼. 성운이 너랑, 나처럼. 똑같은 바다의 신들에게서 태어나서, 똑같은 능력을 가졌는데 이렇게나 닮아서 서로의 마음까지 닿아있는데, 서로를 향해있는 마음의 크기가 닮아지질 않아. 언제나 내가 너를 이기고 있잖아. 나는 그게, 성운아, 시리도록 싫어, 언젠가는 네가 내가 아닌 다른 선택을 할 것 같아서.
"난 스카겐이 너무 좋은데." "... 왜?" "똑같은 바다에, 똑같은 물이면서 다르잖아. 닿아있는데 못 섞이는 그 색이 예쁘잖아. 스카겐은 닿아있는 그 곳이 서로 너무 달라서 예쁜 거야."
꼭 우리처럼. 성우 너랑, 나처럼. 이렇게나 닮은 운명으로 태어나서 심지어는 서로 사랑하게 되었는데 서로에게 닿으려는 방식이 달라서, 그래서 우리가 더 애틋한 거야. 그리고 나는, 성우야, 그런 애틋함이 너무 좋아. 서로가 서로에게 이렇게나 다르게 표현하더라도, 결국 우린 그 끝에서 맞닿아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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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우가 성운의 너머를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자 성운 역시 뒤돌아 제 뒤를 비추던 스카겐 그레넨의 색이 달라지는 그 사이를 쳐다보았다. 저게 꼭 우리 같다고 생각했었는데.
“성운아.”
“응, 얘기해.”
“나는, 스카겐이 정말 너무 싫어.”
“... 왜, 왜 싫은데?”
“똑같은 바다에, 똑같은 물이면서 못 섞이잖아. 그깟 밀도 차이가 뭐라고. 왜 닿아있는데 닮아지지가 않아, 도대체.”
너랑 내가 같은 마음인 걸 이제는 너무 잘 아는데, 더는 닿아있을 수조차 없는 사이가 되잖아. 신이 되어버릴 너를 더 이상 내가 닮아질 수가 없잖아. 너는 결국 내가 아닌 다른 선택을 하고 말았잖아.
“그래도, 성우야. 나는 스카겐이 좋아.”
“대체 왜...”
“똑같은 바다에, 똑같은 물이면서 서로 다른 모습을 했잖아. 스카겐은 닿아있는 그 곳이 서로 너무 달라서 예쁜 거야. 성우 너랑, 나를 닮았는데 어떻게 싫을 수가 있어...”
우릴 꼭 닮았지, 스카겐 그레넨은. 같은 바다의 신의 아들인 것부터 신들에게 위협이 되는 존재라는 것도 어쩜 그리도 닮았는지 몰라. 닮아지지 않아서, 서로의 방식대로 끝까지 서로를 위해줄 수 있어서 예쁜 거야. 우린 우리의 사랑을 했으니까.
“사랑해, 성운아. 하성운, 사랑해, 내가, 내가 정말 진심으로, 처음, 사랑이라ㄱ,”
“사랑해, 나도. 성우야, 사랑해. 내 처음을, 아니 마지막도 너라서 과분했어.”
“과거형으로 말 하지마. 나는 아직도 사랑해. 사랑할 거야. 네가 신이건, 인간이건, 데미갓이건,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아, 나는.”
“사랑해줘. 지독하게 이기적인 사랑만 하는 나를, 사랑해줘, 성우야.”
파도가 치는 줄만 알았다. 갑작스레 나타나 제 인생을 바꿔놓은 사람이었다. 하성운은, 옹성우는, 제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고 마음까지 흔들었다. 서로를 쳐다만 보는 것으로도 감정의 파도가 쳐서 제가 저 자신을 조절할 수 없었다. 그렇게 거센 파도가 치는 줄만 알았다. 언젠간 잠잠해지겠지, 다시 물결이 잔잔해지겠지 싶었다. 그런데, 바람에 밀리는 파도인 줄만 알았던 이 사람은 제게 전부가 되었다. 제 삶의 우주가 되어버렸다. 우린 그렇게 사랑했다. 그리고 사랑한다. 거센 파도가 제가 공들여 쌓은 성을 다 쓸어버리도록 내버려두면서.
닮아지지 않아도, 괜찮다. 나는 나대로, 너는 너대로 사랑하자. 그 끝이 서로를 향해 닿아있으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스카겐 그레넨의 닿은 그 곳처럼. 그렇게 사랑한다, 옹성우는 하성운을. 또, 하성운은 옹성우를.
너는 도둑맞은 것을 찾을 것이며 그것이 제자리로 돌아가는 것을 보리라.
그리고, 너는 네가 찾던 것을 발견하고 너의 것으로 하리라.
[The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