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수궁 돌담길; 因緣
Written by Yiss
버스 창가에 기대서 형과 행복하게 걸었던 그 거리에 차마 지나치지 못 하고 황급히 내려버렸다. 아무런 행동을 하지 않아도, 그냥 손잡고 걷기만 해도 즐거운 한때였다. 그런 곳이 너무 많아서 어딜 갈 수 있을까 눈물짓다가도 한참 지나버린 시간은 괜찮을 거라 토닥여줬었다. 그렇게 견뎌내었는데, 이곳을 걸을 때마다 발걸음을 멈추고 그때를 그렸다. 너도, 나도. 아무것도 모른 채 행복했던 그때. 손을 붙잡고 덕수궁 돌담길 이 아래를 걸으면서 이 길을 걷는 연인들은 언젠가는 헤어진다는 말에 깔깔 대며 웃었다. 우린 이렇게 걷는데 헤어지기는커녕 더 좋지 않냐는 답에 그때는 맞다며 웃었다.
因緣
-형이 그리운 걸까, 그때가 그리운 걸까.
변해있을 줄 알았던 그 길은 돌담길과 가로수가 가득한 그대로였다. 그날도 그렇게 연인들이 꼭 붙어 다니며 웃었는데, 시간이 한참 지난 지금도 여전히 그 곳은 연인들이 손을 꼭 붙잡고 걸어 다니고 있었다. 혼자 이 길을 걸어 다니며 형을 곱씹었다. 시간이 많이 흘러 아프지는 않지만, 딱딱하게 자리 잡은 흉터는 아무리 떼어내도 없어지지 않듯 형이 그랬다. 성우의 발길이 닿는 곳 모두 추억이 떠올랐다. 이곳에서는 버스킹하는 이들을 가만히 지켜봤던 곳, 다리 아프다면서 앉으면서 쉬었던 곳, 예전에는 막혀서 되돌아왔던 곳이 이번엔 개방되어 있는 걸 보고 씁쓸하게 웃었다. 형과 다시 이곳을 걷는다면 정동길 막혀있던 이곳이 개방되었다고 환하게 웃었을 거다.
-성운이형, 이곳이 왜 좋아?
-그냥 걸어도 좋고, 사람을 구경하는 것도 좋아.
-... 나도 좋아.
-진짜?
-형이 좋아해서 좋아.
돌담길 아래 과거의 둘은 너무나도 행복해보였다. 정말 성운이 좋다면 그냥 모든 것이 다 좋았다. 성운을 따라 바뀌었던 취향은 성우의 곳곳에 흔적처럼 남아있었다. 성운이 좋아했던 향수, 성운이 선물했던 지갑과 목도리 등등. 시간이 너무 오래 흘러서 빛을 잃은 제 물건들을 성우는 성운이 선물했던 똑같은 모델로 새것을 샀다. 누군가가 보면 청승이라고 할지 몰라도, 성우는 그게 좋았다. 성운이 남겨준 흔적을 유지하는 게 좋았다.
-괜찮을 줄 알았는데, 안 괜찮네...
돌아오지 못 할 곳으로 떠난 성운을 그린지도 해가 두 번이나 지나있었다. 2년이란 시간동안 성운을 생각하면 웃음과 눈물이 동시에 났다. 떠나간 사람은 모르겠지만, 남겨진 사람은 너무 잘 기억하고 있었다. 잊혀지지도 않은 추억을 끌어안고 살아 숨 쉬는 하루하루가 온힘을 다해 버팀의 연속이었다.
아픈 것도, 사고도 아닌 성운의 선택으로 끝을 냈다는 걸 믿고 싶지 않았다. 나한테는 말해줬어도 됐잖아. 형이 뭘 아파했는지 나한테는 말해도 됐잖아. 성운에게는 들리지도 않을 말을 반복해서 물었다. 대체 왜 그랬어. 나만 놔두고 가면 난 어떻게 하라고. 형 제발 눈 좀 떠봐. 성운의 고요함에 성우만 들썩였다. 3일 동안의 장례가 치러지고 마지막 날, 지금이라도 깨우면 꼭 일어날듯이 자고 있는 성운의 차가워진 손을 붙잡고 화장터로 가는 그 날에도 성우는 울지 않으려 애썼다. 그 마음을 아는지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과 내려쬐는 햇빛이 말로 다 할 수 없이 밝기만 했다.
-그곳에 도착하면 그냥 꿈에 한번 들려줘. 잘 있다고.
원체 조그맸던 성운이 가루가 되니 더 작아졌다. 두 손에 감싸고도 얼마 되지 않는 무게에 성우는 마지막 인사를 전했다. 막지 못한 자신과 혼자 떠난 성운을 원망하고 싶지 않아 더 밝으려고 노력했다. 조그만 함에 담긴 성운을 고이 모셔두면서 끝끝내 참았던 눈물이 팍 터져내렸다. 마지막 가는 길에 절대 울지 않으려 노력했는데, 잘 안 돼. 웃는 모습 보여주고 싶은데 미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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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우연이었다. 덕수궁 돌담길 아래 버스킹하는 이가 신기해서 쳐다봤다. 이거 꿈 아니지? 그렇게 꿈에 찾아와달라고 말할 때는 듣지도 않더니 살아 숨 쉬는 성운을 보는 게 신기했다. 노래를 좋아하던 너가 편안히 노래하는 모습에 성우는 말을 못 이었다. 몇 곡 연속해서 부르더니 이제는 가야할 시간이라며 짐을 싸는 성운을 닮은 이를 잡아 눈을 마주했다. 정말 성운이야? 물으려는 걸 참고 이름이 뭐냐고 물었다.
-성운이요. 하성운.
-....
-저기요?
-.....
너가 돌아온 걸까. 제 앞에 서있는 제 연인인 사람을 닮은 사람에게서 성우는 눈을 뗄 수 없었다. 이름도 얼굴도 같은 너를 보고서 더 무슨 말을 해야 할까 고민에 빠졌다. 성운의 예쁜 얼굴과 미소가 그대로인데 성우 자신만 기억 못 하는 아이를 정말 어찌해야할까.
-나 기억 안 나요?
기억 안 나냐는 질문에 성운은 처음 봤는데 무슨 기억을 하냐며 망고 스무디만 쭉쭉 빨았다. 망고 스무디. 성운이 좋아했던 음료를 똑같이 들고서 살아있었을 때와 같이 성우를 톡 쏘아보는 게 좋기만 했다. 성우 앞에 서있는 성운을 보며 웃으면서도 눈물이 났다.
-아저씨, 울어요?
-정말 이름이 하성운이에요?
-네, 제가 하성운인데요?
그저 지갑 안에 놓여있던 성운의 사진을 꺼내 제 앞에 앉아있는 성운에게 보였다. 이게 뭐에요? 자기와 똑같은 얼굴을 한 남성이 환하게 웃으며 끌어안고 있는 모습에 성운은 놀라서 성우와 눈을 마주했다. 왜 여기 내가 있어요?
-걔도 성운이에요. 하성운.
하성운이란 이름이 흔한 것도 아니고, 동명이인이야 있을 수 있다고 하지만, 얼굴도 체격도 심지어 목소리마저 같은 제 앞에 서있는 어린 성운을 놓을 수 없어 성우는 어깨를 붙잡고 제 명함을 급히 꺼냈다. 아저씨 되게 좋은 회사 다니네요? 성운의 질문에 그저 웃기만 했다.
과거에 성우가 지금 다니는 회사에 다닐 수 있는 이유도 전부 성운 덕이었다. 서류 합격하고서 1차 면접 준비하는 걸 옆에서 성운이 질문을 해줘가면서 도왔다. '옹성우씨는 회사에 왜 지원하게 되었나요.' 성우가 솔직하게 돈 벌려고요. 답하려던 것을 성운이 등짝 때려가며 꽤 괜찮은 대답으로 바꿔가며 면접을 준비했었다. 그러고 받은 1차 면접도 합격하고 최종면접에서 떨지 말라며 응원해가며 끝내 최종합격에 옹성우 이름 석 자를 올릴 수 있었다. 제 일처럼 기뻐하는 성운을 꼭 껴안고 행복하자고만 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성운은 이유도 알려주지 않은 채 떠나버렸었다.
-아저씨!!!
기타를 등에 지고서 터덜터덜 멀어져가는 성운을 한참 쳐다보다 돌아섰는데, 갑작스럽게 뒤에서 부르는 성운이 성우에게 성큼성큼 다가왔다. 아저씨 손 줘 봐요. 성운의 손 달라는 소리에 오른 손바닥을 펴서 앞에 두니, 성운이 주머니를 뒤적뒤적였다. 까만 네임 펜으로 성우 손에 글씨를 쓰려고 하다 잉크가 점점 떨어져가는 걸 보고 당황해하는 모습이 웃겼다. 아, 안 되는데. 성운이 끄적끄적 계속 적어내려고 해도 점점 옅어지는 잉크에 울상을 지었다.
-전 명함 같은 거 없어서...
-전화번호?
-잘 안 보이죠? 뒷자리는 아예 안 보인다. 아저씨 머리 좋죠?
-.....
-마지막 번호 0825요. 외우실 수 있죠? 아저씨.
0825. 숫자를 듣자마자 굳어버렸다. 우연이겠지. 그 숫자가 뭘 의미하는지는 이 어린 성운은 알고 있을까. 진짜 뒤 번호가 그거에요? 성우의 질문에 성운은 놀라서 눈만 깜빡 깜빡였다.
-왜 그래요. 그 번호에 뭐 있어요?
-.....
-그날 제가 제일 좋아하는 날이란 말이에요.
어린 성운의 대답에 말을 잃었다. 8월 25일이 제일 좋아하는 날이라고요? 성운은 그렇다며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성우의 표정을 살폈다. 아저씨 왜 또 울려 그래요. 꾹꾹 참아냈던 감정이 아주 사소한 말 하나에 울려 퍼졌다.
===
올해 딱 스물이 된다는 어린 성운은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서른둘의 성우 껌딱지처럼 굴었다. [아저씨 나 토요일 날 정동길에서 버스킹 또 할 건데 올거에요?] 성운의 톡에 성우는 답을 보내지 못했다. 어린 성운을 볼 때마다 제 연인이었던 성운이 겹쳐보였다. 분명 차갑고 딱딱해진 성운을 확인하고, 그제도 성운이 잠들어있는 화장터에 가서 성운을 보고 왔는데, 이 어린아이가 살아 숨 쉬는 걸 보니 성우는 둘에게 모두 미안해지기만 했다. 톡을 보고도 답장이 없자 곧장 전화기에 어린 성운의 번호가 뜬 걸 보고 한참을 망설여 결국 전화를 받았다.
-왜 답이 없어요, 아저씨.
-.... -아저씨?
-응 말해요.
-바빠요?
-아니, 괜찮아요.
-토욜날 올 거죠? 나 그날 아저씨 들려주려고 노래 선택했는데.
어린 성운의 해맑은 목소리에 성우는 답답해져서 목을 죄는 넥타이를 풀었다. 아저씨 올 거죠? 다시 한 번 되묻는 질문에 답도 못 하고 지금은 좀 바쁘다는 핑계로 답을 미뤘다. 못할 짓이었다. 제가 먼저 연인인 성운을 닮아서 붙잡은 어린 아이여서 더 못할 짓이라 느꼈다. 분명 둘은 다른 사람인데, 하나부터 열까지 빼닮은 탓에 하나로 생각되는 게 성우는 혼란스럽기만 했다.
[아저씨 꼭 와야해요. 저 그날 진짜 아저씨 들려주려고 노래 선택했단 말이에요.]
그 날 결국 성운에게 답을 하지 못 하고,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토요일 아침부터 시끄럽게 울리는 전화에 성우는 폰마저 꺼버렸다. 1시부터 시작한다 했으나 성우는 가지 않으려 했다. 제 치기에 잡았던 어린 성운을 스스로 놓으려했다. 아무리 닮았다고 해도 제 연인이었던 성운이 아닌 다른 사람이었다.
전화를 받지 않는 성우에게 지금 몇 통째인지 셀 수 없었다. 아저씨한테 꼭 들려주고 싶은 노래가 있었는데, 오늘은 아닌가봐. 성운은 알고 있었다. 성우가 자신을 통해서 사진 속에 웃고 있는 그 분을 떠올리는걸. 그래도 좋았다. 그냥 나한테서 그분을 봐도 상관없는데. 자신과 있을 때마다 환하게 웃다가도 표정이 구겨지는 성우를 모른 척 했다. 스물의 어린 성운은 서른하나로 2년 전에 멈춰버린 성운이 고마우면서도 미웠다.
-성운이 너 그 노래 부를 거야?
-몰라.
-니가 모르면 어떻게 해.
-몰라, 모른다구. 몰라. 그 노래를 들을 사람은 따로 있는데, 오늘 오는지 안 오는지 모른단 말이야.
같이 버스킹을 준비하는 친구에게 괜한 투정을 부렸다. 성우에게 불러주겠다던 노래를 제일 마지막 순으로 바꾸고 성운은 입이 삐죽 나온 채로 정동길 한 편에 앉아 버스킹을 할 준비하고 있었다. 대낮인데 아까부터 날이 조금씩 흐려지는 게 비나, 눈이라도 올 것만 같아 불안한 성운은 날씨 앱을 켜서 몇 번이고 확인했다. 오늘 눈, 비 내릴 확률 20%라는데. 1시, 공연을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하늘에서 조금씩 눈송이가 떨어졌다. 진짜 오늘 날 아닌가봐. 눈송이가 점점 굵어지는 게 보이자 성운은 공연을 중단했다. 더 추워지기 전에 마지막 버스킹이었는데, 성운은 날씨 때문에 망쳐버린 공연과 끝내 보이지 않는 성우 때문에 속상하기만 했다.
[아저씨 나빠요.]
꽁꽁 언 손으로 자판을 꾹꾹 눌렀다. 덕수궁 돌담길 아래 손을 꼭 붙잡고 달려가는 연인들은 행복해 보이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공연은 아까 전에 끝나도 혹시나 늦게라도 성우가 올까 성운은 근처 카페에 앉아 창밖만 쳐다봤다. 다 미워, 다. 아저씨도 밉고, 아저씨의 형도 미워. 눈 안 온다고 했던 기상청도 밉고, 안 온다면서 펑펑 내리는 눈도 미워. 조그만 손가락으로 영수증을 찢어가면서 시간을 죽이고 있는데 성운 앞에 누군가가 앉았다.
-내가 왜 나빠요.
-....
-늦게 와서?
-.... 왜 이제 왔어요. 공연 아까아까 끝났는데.
-미안해요.
-저 여기 있는 거 어떻게 아셨어요?
-..... 여기 형이랑 자주 왔던 카페거든요.
매일 겹치는 우연에 성우는 놀랄 뿐이었고, 성운은 입술만 삐죽삐죽 나왔다. 그 놈의 형, 형, 형. 하늘의 별이 된 사람을 질투한다는 게 우스워 말은 안 해도 성운은 애가 탔다. 성우의 왼쪽 네 번째 손가락에 껴져있는 반지를 보며 어린 성운은 방금 단 음료를 마셨음에도 불구하고 입이 쓰게만 느껴졌다.
-아저씨 이거 진짜 말이 되는지 모르겠는데요. 그냥 나를 그 분이라 생각하면 안돼요?
-....
-안 되는 거예요?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 생각했다. 성운이라 생각하라니, 어린 성운의 입에서 나온 말에 성우는 가만히 쳐다만 봤다. 나 너무 어려서 안 되는 거예요? 아니면, 그 분하고 너무 닮아서? 대답할 틈도 주지 않고 뱉어낸 질문에 성우는 말이 없었다. 계속되는 침묵에 성운은 입술이 메말랐다.
-내가 어떻게 그래요.
-그럼 아저씨는 계속 그 분 그리면서 살 거예요? 나는요? 그날 그럼 나는 왜 잡았어요?
-....
-아저씨 진짜 미워요.
밉다는 말을 마지막으로 훅 떠난 어린 성운의 빈 자리만 덩그러니 남았다. 그 자리를 한참 쳐다보던 성우도 얼마 지나지 않아 밖으로 나왔다. 어쩌면 떠난 성운이 잊지 못하는 제게 준 기회라고도 생각했었다. 성운과 너무나도 똑 닮은 어린 성운을 제 눈앞에 똑 하고 떨어뜨린 건 아닐까 여겼다. 그렇게 생각할수록 미안해지기만 했다. 가끔가다 어린 성운에게 형이라고 말이 헛나가려는 걸 성우는 입술을 깨물어 말을 아꼈다. 성운이 제게 한 밉다는 말, 나쁘다는 말. 그 말 모두 맞는 말인 것만 같아서 쓰게 웃었다.
-진짜 짜증나요 아저씨.
-추운데 언제부터 여기 있었어요.
-나 나갔는데 왜 잡으러 안 와요.
-.....
-아저씨 사실은 안 밉단 말이에요. 안 미워진단 말이야. 나 어쩌라고 대체.
-....울지 마요 울지 마.
-밉다고 해서, 나쁘다고 해서 미안해요. 나 사실 아저씨 안 미워해.
엉엉 우는 아이를 달랬다. 안 밉다고 안 나쁘다고 반복해서 되뇌는 성운의 울음을 품에 안고 토닥였다. 착한 것까지 성운을 닮은 어린 아이의 등을 한참 토닥였다. 잔뜩 울어서 눈도 입술도 퉁퉁 부은 어린 성운의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아냈다.
-다 울었어요?
다 울고나서 민망해진 성운이 얼굴이 안 보이게 고개를 푹 숙여 물기 어린 얼굴을 숨겼다. 창피하니까 얼굴 보지 마요. 성운의 투덜거림에 성우는 조그맣게 웃음이 터졌다. 안 봐요, 안 볼게요. 그러면서도 불쑥 얼굴을 들이대 코앞에 갖다 대었다.
-못됐어 아저씨.
-진짜요?
-아니, 아니에요, 취소. 못 됐단 말 취소.
귀엽게 구는 어린 성운을 보며 머리를 부볐다. 눈도 맞아 잔뜩 헝클어진 머리를 손바닥으로 슥슥 내리며 성우와 눈이 마주쳐 웃어보였다. 울다 웃으면 큰일 나요. 성우의 장난에 웃었던 것도 잠시 입술이 쀼하고 나와 성우가 매고 있던 목도리를 풀러 제 목에 칭칭 감았다.
-나 아저씨의 형 만나게 해줘요.
-.....
-인사만 할게요. 진짜.
===
어린 성운과 함께 형을 만나러 가는 길은 생각보다 차분하기만 했다. 차 안에서 무얼 골똘히 생각하는지 말없는 아이를 방해하고 싶지 않아 조용히 운전만 했다. 그렇다고 그 분위기가 어색하지는 않았다. 그 침묵을 깨고서 어린 성운이 성우를 쳐다보며 조곤조곤 질문했다.
-형은 아저씨 어디가 좋았데요?
-왜 나는 아저씨고 성운이형은 형이에요?
-아저씨가 그 분께 형이라 하니까 제가 입에 배서 그렇잖아요.
-그래서 계속 그렇게 부를 거예요?
-아저씨의 형한테 형이라 부르는 거요?
-아니, 나한테 아저씨라 부르는 거요.
-…….
-내가 성운이형보다 한살 어려요.
-형이라 부르기 이상해요. 아저씨는 아저씨해요.
새하얗게 변해버린 들판에 고독히 서있는 하얀 건물로 들어서면 찬 기운이 휩쓸었다. 위아래 전부 새까맣게 입고 온 성운이 성우의 코트 자락을 살포시 붙잡고 뒤를 따랐다. 어린 성운의 눈높이 보다 조금 위에 놓여있는 성우가 인사를 했다.
-형, 나 또 왔어. 형이랑 꼭 닮아서 예쁜 아이가 있어 소개해주려고 왔어.
-....
-요기 인사해요. 우리 성운이형.
어린 성운이 성우 등 뒤에 숨어있다 조심스레 나왔다. 하성운 이름 석 자와 십자가 표시가 되어 있는 함, 그 옆으로 예쁜 꽃장식과 성우와 찍었던 수많은 사진과 혼자 환하게 웃는 얼굴이 놓여있는 조그만 칸에 인사를 하고 성우를 잠시 밖에 나가 있으면 안 되냐며 밀었다.
-나 아저씨 형이랑 얘기하고 갈게요.
-.....
-별말 안 해요. 그냥 할 말 있는데 아저씨 앞에서는 창피해서 그래요.
알았다며 자리를 피해준 성우가 가고서도 한참을 어린 성운은 말이 없었다. 음... 할 말을 고르고 골라서 뱉으려 애썼다. 아저씨가 좋아했으니 형은 되게 좋은 사람이었겠어요. 떠듬떠듬 할 말을 이어내려 노력할수록 성운의 두 눈이 빨개졌다.
-이름도 얼굴도 같다구 했을 때 반신반의했는데... 진짜 같네요 형. 저두 하성운이에요. 형이랑 똑같이 생겨서 놀랐죠. 저도 놀랐어요 되게 많이. 아저씨가 그랬거든요, 형도 덕수궁 돌담길 그 길 되게 좋아했다고. 저도 좋아해요. 그런데 아저씨한테는 말 못했어요. 아저씨한테는 형밖에 없대요. 그래서 내가 좋다는데도 안 된데요. 나쁘죠? 아저씨 앞에서는 안 나쁘다고 했으니까 비밀로 해줘요. 오늘은 형한테도 아저씨한테도 인사하러 왔어요. 아저씨가 하도 예쁘다고 자랑해서 궁금했거든요..... 맞다, 나보다 아저씨가 더 보고 싶을 텐데. 아저씨 불러올게요.
로비 의자에 앉아 기다리는 성우를 보고서 달려가고 싶은걸 참고서 성우 옆 자리에 앉아 성우를 쿡쿡 찔렀다. 아저씨 형 보러 갔다 와요. 성우가 일어나는 소리에 울지 않으려고 고개를 들어 천장만 쳐다봤다. 그래도 새어나오는 눈물에 성운은 재빠르게 손등으로 눈물을 훔쳐냈다.
-울었어요?
-형한테 벌써 갔다 온 거예요?
따뜻한 캔 커피 두 개를 쥔 성우가 하나를 건넸다. 손가락을 꼬물꼬물 캔을 따지도 않고 보기만하는 성운을 보며 성우는 제가 먹으려 오픈한 캔 커피를 성운과 바꿨다.
-아저씨, 나 진짜 마지막으로 물어보는 거예요.
-.....
-나하고 있으면서 형 생각 하지 않은 적 단 한 번이라도 있어요?
미련하리만큼 형을 그려낸 것 맞았다, 그런데 이 아이와 있으면 잠깐잠깐 형을 잊고 행복하기도 했었다. 그게 못내 형에게 미안해서라도 더 딱딱하게 굴려 했었다.
-대답 못 하는 거 보니까 진짜 없었나 보네... 나만 열심히 삽질했었네....
-....
- 아저씨 나 그만할게요. 아저씨 좋아하는 거.
-....
-아저씨 잘 생겨서 좋았는데, 지금 보니까 별로여서 내가 차는 거예요. 알았죠?
-.....
-나 할 말 끝. 빨리 형한테 갔다 와요.
제 할 말만 하고서 차에 먼저 가있겠다고 나선 아이를 뒤쫓았다. 한파 주의보가 삐용삐용 울리는 날씨에 차키도 안 갖고서 차에 가있겠다고 밖으로 나간 아이를 찾으러 뛰었다. 어디로 숨은 건지 방금 나간 성운을 찾기 위해서 숨이 차게 달렸다. 불러도 대답 없는 아이는 추모공원 안 조그만 정자에 쪼그려 앉아 있었다.
-왜 대답도 안 듣고, 할 말만 하고 가요.
-.....
-형이 아니라 너와 함께인 게 좋았던 적 많았단 말이야.
-....
-바람 차요. 차에 가요.
성우가 내민 손을 꼭 잡고 뒤에 졸졸 따라오면서 제 눈치를 보는 성운이 귀여워 웃음이 퍼졌다. 형한테는 인사는 한 건가... 들릴랑말랑 작은 목소리로 혼잣말하는 성운을 보조석에 태우고 성우는 운전석에 앉아 히터를 틀었다.
-인사 못 했어.
-....여기 가만히 있을게요. 도망 안 갈게 진짜 약속.
-다음에 오지 또.
-....
-그때도 같이 와요.
-응?
성우의 왼 손 네 번째 손가락에 항상 껴있던 반지가 사라지고 없었다. 습관처럼 반지 만지는 행동에 허전해진 왼손을 어린 성운에게 보였다.
-형한테 아까 반지 돌려줬어요.
-.....
-오늘 돌려주면서 물어보려고 했거든요. 형 말고 다른 사람 만나도 괜찮겠느냐고.
-아저씨 진짜...
-정말 나 좋아하는 거 그만둘 거예요?
-이러면 내가 어떻게 그만둬요. 나빴어 진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