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sparu été
Written by 잔다
“성운! 세션별 연습 날짜 봤어?”
“응, 오늘 스트링즈던데.”
“진짜? 혹시 나 비프 패티 하나만 사다 줄 수 있을까? 점심시간에 도서관 가봐야 돼서.”
“안 될 거야 없지. 1시에 도서관으로 갈까?”
“그래 주면 완전 고맙지. 이따 봐!”
락커를 정리하다 문득 10학년 초, 처음 텐진을 만났을 때를 떠올렸다. 2년 반쯤 전만 해도 영어를 몰라 말 한마디 안 하고 하루가 지나가는 건 다반사에 락 푸는 법도 몰랐었는데, 이번 학기에는 드라마 클래스를 듣는단다. 다들 참 많이도 변했음을 새삼 느꼈다.
그보다 벌써 세션 연습이라니. 이곳의 3월은 여전히 눈이 쌓여있어 콘서트 날이 다가왔음을 눈치채지 못했다. 오늘 아침에도 우박이 내려 두꺼운 자켓을 여며야 했지만 한 달이면 금세 날이 풀리다 못해 태양이 뜨겁게 작열하겠지. 반팔을 입어도 더울 텐데 콘서트를 위해 정장까지 입으면 분명 밖에 나가는 순간 그늘을 찾을 게 뻔했다. 이곳의 계절은 늘 그랬으니.
*
집에 들어가기 전 우편함을 들여다보는 것은 어느새 습관이 되어있었다. 커버가 덮이 지도 않을 많큼 커다란 통지서들 말고, 손바닥만 한 작은 우편. 그래서 찾아보지 않으면 알지도 못할 그런 작은 편지봉투의 존재를 확인하기 위해서. 내용물이라곤 사진 한 장과 뒷면에 적힌 짧은 메시지가 다인 그 편지는 3년이 다 되도록 계속되고 있었다. 국제 우편이면서 발신인 주소는 일전의 그 집. 이토비코크의 22번가. 발신인을 너무도 명확히 보여주는 그 주소에 늘 한탄한다. 이래서야 내가 답장을 할 수도 없지 않은가.
언젠가 뭉텅이로 구매한 편지지를 옆에 두고 편지를 열어 보았다. 이번 사진은 눈 덮인 하얀 거리. 그리고 桜咲いた。일본어를 써 놓으면 대체 나더러 알아들으라는 건지 말라는 건지. 여전한 그의 무심함에 한숨을 내쉬곤 펜을 쥐었다. 감정 같은 거, 원망도 화도 이미 무뎌진 지 오래다. 시간에 마음은 고요해졌다.
*
형, 나 또 편지 쓴다. 나 되게 꾸준하지 않아? 뭐, 형만 할까 싶긴 하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칭찬받을 만 하다. 나는 보낼 수도 없는 거잖아. 형은 진짜 나한테 고마워해야 돼. 알긴 해? 그리고 형 제발, 배려 없이 사진 한 장만 떨렁 보내고 답장할 주소도 안 알려주는 것까지는 넘어가겠는데, 그럴 거면 내가 알아볼 수 있는 언어로라도 써 주자. 나 번역기 돌려봤다고. 진짜 나 놀리는 것도 아니고. 사진은 한겨울이면서 벚꽃이 피긴 어디 폈는데? 삿포로 되게 춥다면서 봄은 또 빨리 오고 그래? 그래서 형은 벌써 벚꽃이 핀 거야?
잊어버렸을 거란 생각은 안 하는데, 여긴 아직 겨울이야. 끝자락이긴 하지만 오늘 아침에도 우박 내렸어. 우박 내리는 거 보니까 처음 오케스트라 리허설하러 갔을 때 생각나더라. 그때도 우박 내렸었잖아. 그래서 형이 엄청 투덜댔었지. 무슨 4월에 우박이 내리냐고. 형은 추위도 많이 타면서 무슨 그렇게 추운 곳으로만 가. 근데 그거 알아? 형가고 여기 한 번도 우박 내린 적 없어. 오늘이 3년 만에 처음 내리는 거였어. 나 10학년 때는 크리스마스 다 지나도록 눈도 안 내렸었다. 그해에는 3센치도 안 쌓였었어. 나 토론토가 춥지 않을 수도 있단 걸 몸소 경험했었다. 삿포로는 그때도 추웠겠지? 여기보다 눈 더 많이 온다며. 건물에 벽 하나 더 생길 정도로 고드름도 얼고. 진짜 쓸데없는 짓이었는데 사실 나 형이 너무 추워할까 봐 걱정도 했었다. 형 가고 나니까 따뜻해진 거야. 너는 너무 안 추워서, 그래서 형 걱정했었어 바보 같긴 해도.
오늘 학교 콘서트 세션별 연습 날짜 떴다. 다음 달이면 벌써 콘서트야. 형이라면 충분히 잊어버렸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데, 나 올해 졸업이야. 이번 콘서트는 내가 쓴 곡 들어간대. 그것 때문에 정신없는데 올시티랑 컬티스도 준비해야 돼서 엄청 바쁘다 나. 그래서 요즘은 형 생각 별로 안해. …별로 안 한다면 사실 거짓말이고. 형이랑 콘서트 준비했던 건 한 번밖에 없었는데 그냥 온 군데 다 형인 거 있지. 벌써 3년 지났는데 그냥 온통 다 형이라서 좀 그래. 그래도 졸업하면 좀 괜찮아지지 않을까?
아무리 생각해봐도 형 인생에 나만큼 착한 사람은 못 만날 거다. 나 이젠 형 안 미워. 슬프긴 한데 화는 안 나. 원망하거나 후회하는 것도 없어. 난 진짜루 내 인생이 달라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다. 8학년 때 형 처음 만나고, 가디언도 안 온 졸업식에 형이 왔을 때.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너무 많은 게 달라지긴 했지. 근데 이런 식의 변화를 바란 건 아니었어.
그 여름에 갑자기 형 사라지고서 제일 슬펐던 건, 형이 일본 가는 거 나만 몰랐었다는 거야. 다시 형이 삿포로에 가는데, 다 아는 걸 나만 몰랐어서, 그래서 그게 제일 원망스러웠다. 절망적이었다고 하면 믿겠어? 그 후로 아직까지도 내 계절에 여름은 없어. 가을부터 봄까지 다 있는데, 여름에만 형이 없어서, 아무것도 떠오르지가 않아서. 나만 그래서 사계가 아니야. 삿포로에 가자고, 이번 겨울에는 같이 삿포로에 가자고 했으면서, 왜 그렇게 혼자 가 버렸어 형.
이번에는 나한테도 여름이 왔으면 좋겠다.
*
맨 구석에 있는 드럼 의자에 앉아 연습실을 보면 꼭 브라운관을 통해 세상을 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앞을 가로막고 있는 드럼과 높이 올라간 심벌들이 꼭 저들과 나를 구분하는 경계선 같아 외로울 때도 있었다. 그러다 보니 바로 앞자리의 콘트라베이스는 유독 더 커 보였고, 그 역시 드럼으로 구분되는 저 세계의 사람이 아닌 나와 같이 이곳에 머물러있는 것만 같았다. 불현듯 외로움이 찾아올 때면 자기 몸보다 커다란 베이스에 숨어 뒤돌아 나와 눈 맞춰주던 형이 사라진 지는 꽤 됐지만 베이스는 여전히 나의 위로가 되어주었다.
드럼의 너머에서, 둘만이 다른 세계에 머물러있는 듯한 느낌은 콘서트장에서 배가 되었었는데, 앞에 앉아있는 수백 명의 관객이 우리의 연주에 주목하는 것이 아닌 우리가 그들을 바라보는 듯한 느낌이 들어서 손이 떨릴 만큼의 긴장도 사그라들곤 했다.
“미스 오? 저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뭐길래? 편하게 말해도 돼.”
“저 Disparu été 할 때 지휘하는 게 어떻겠냐고 하셨잖아요, 저는 그냥 드럼 하고 싶습니다.”
“그래? 그래도 문제는 없는데, 왜인지 물어봐도 될까?”
“좋은 기회이긴 한데, 저는 그래도 드럼이 좋아서요.”
“알았어 그럼.”
이 작은 세계를 벗어나기엔, 아직은 조금 두렵다.
*
“오늘 스케줄 표 다 받았지? 오전에는 여기서 인원 체크 하고 공연장 가서 드레스 리허설 할 거야. 세트 리스트 순서대로 멘트 빼고 다 갈 거니까 그 점 유의 하고. 그리고 끝나고 바로 보컬 클래스는 메이크업 받으러 갈 거고, 다른 친구들은 각자 밥 먹고 준비해서 6시까지 여기로 와. 옷 챙겨 입는 거 잊지 말고.”
콘서트 당일은 언제나 정신없었다. 더군다나 어제 총연습 뒤 악기를 공연장으로 옮기기 위해 바로 트럭에 실어 보내서 그 뒤로는 스틱도 잡아보지 못했다. 하루도 채 지나지 않았지만 긴장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아침을 걸렀지만 그렇다고 점심이나 저녁을 먹을 것도 아니었다. 지금 상태론 물만 마셔도 체할 것만 같았다. 리셉션 때나 간신히 먹겠지. 마지막 스프링 콘서트라는 사실에 부담감은 더 가중되었다.
*
“성운! 그거 들었어? 티켓 현장 판매 완료됐대.”
“진짜? 잘됐네.”
“그리고 태현 온 것 같다던데.”
“뭐? 걔가 여길 왜 와. 말도 안 돼.”
“비트리스가 티켓 부스에 있었잖아. 얘기해줬어, 잘은 모르겠는데 태현이랑 닮은 동양인 왔다고.”
“진짜 그냥 닮은 사람이겠지. 태현이 일본 간 지가 얼만데.”
“글쎄.. 뭐, 끝나고 보면 알겠지. 태현인데 그냥 갈 리가 없으니까.”
정말로, 정말로 있을 수가 없는 일이지만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에 감정이 동요했다. 그가 이곳에 올 리가 없지 않은가. 그는 그 곳에서의 봄을 맞이하고 있어야 했다. 형이 이 곳에 있을 리 없다. 애써 마음을 추스르며 주문처럼 그 한마디만을 스스로에게 말하고 있었다.
“오케스트라 무대 올라갈게요!”
시간이 이리도 흘러 무대에 올라야만 하는 건 내 감정의 상태와는 별개의 일이었다. 어쨌든 나는 무대에 서야 했으며, 드럼 뒤 작은 세계로 들어갈 것이다. 그리고 그곳에서 내가 관객이 되어 바라보는 객석에 형은 없겠지. 지금껏 그래 왔듯 그 어디에도.
*
“다들 콘서트 잘 즐기고 계시는가요? 부디 그랬다면 좋겠군요. 다음은 아주 특별한 무대인데요, 아직 세상에 공개되지 않은 곡이 처음으로 연주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바로 이 자리에, 작곡가님께서 와 계신다고 하는데요. Disparu été의 작곡가, 12학년 성운 하! 연주가 시작되기에 앞서 잠시 곡 소개를 들어보겠습니다. 뜨거운 박수로 맞아주세요!”
“안녕하세요, 12학년생 성운입니다. 제 마지막이 될 스프링 콘서트에서 제가 쓴 곡을 공연하게 돼 정말 기쁩니다. 우선 곡 제목은 Disparu été, 다들 아시다시피 사라진 여름이구요, 이 곡을 들으며 여러분 내면의 사라진 무언가, 보려 해도 볼 수가 없는 것을 떠올려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드럼 라인이 강조된 곡이어서 제가 지휘하지 않고 직접 연주하는 만큼 오로지 드럼으로만 채워진 베이스라인에 조금 더 집중해 들어주셨으면 합니다. 감사합니다.”
“그럼 Disparu été가 지금 공개됩니다!”
구석진 곳에 숨어 들어갔다. 역시나 저 앞은 세상은 두려웠다. 너무도 떨려 심장을 토해낼 것만 같았지만 잘하겠지. 잘해야 한다.
드럼 스틱을 잡음과 동시에 나의 세계는 고요해졌다.
*
콘서트가 끝난 뒤의 대기실은 어지러웠다. 수고 많았어, 고생했어. 다들 정말 훌륭한 무대였다는 격려의 말들이 특정한 목적지 이리저리 흩어졌고, 하나둘 악기와 짐을 챙긴 뒤 리셉션 장소로 향했다. 나 역시 악보만을 대충 챙긴 뒤 홀로 향했다. 콘서트가 끝나자 긴장이 풀리며 급격한 허기가 몰려왔다.
“성운! 오늘 진짜 잘했어!”
“너도, 고생 많았어.”
리셉션이 있는 홀은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그냥 보이는 사람에게 모두들 인사치레로 건네는 말들이었지만 그런 격려의 말조차도 부담스러워 음식만 조금 먹은 뒤 빨리 집으로 갈 생각이었다. 그랬는데.
“연주 잘 들었어. 이젠 작곡도 하나 봐?”
내게만 선명히 꽂히는 한국어가 들렸다. 들릴 리가 없는 목소리가 귀를 타고 내 고막을 진동시켰다.
“몇 년 만에 보는 건데, 이젠 나 안 반겨줘?”
몇 번의 봄과 가을, 겨울을 돌아,
“오랜만이야 성운아.”
나의 온 여름을 가져간 형이 나의 눈앞에 서 있었다.
*
“너도 많이 변했다. 이렇게 박력 넘치게 나 끌고 나오기도 하고.”
“지금 그게 중요해? 형 뭔데? 한 달 전만 해도 사진이나 보냈으면서 지금 왜 여깄는 거야? 뭐가 어떻게 된 건데?”
“질문은 하나씩이었으면 좋겠다만 뭐, 이해는 해줄게.”
“대답 안 해?”
“내가 말 했잖아. 桜咲いた。벚꽃 피웠다고.”
“그게 이거랑 뭔 상관인데.”
“너 이거 몰라? 생각보다 일본에 더 관심 없구나 너.”
“그럼 내가 형이 갔다고 일본까지 신경 써야 돼?”
“나 토론토대 붙었어. 이제 계속 여기 있을 거야.”
이게 무슨, 갑자기 너무 많은 것들이 들어온 듯 머릿속은 코마 상태가 되기 직전이었다.
“너 진짜 표정에 다 드러난다.”
“알면 좀 조용히 하는 게 어때?”
“싫어. 나 말할 거 더 있어.”
“뭔데.”
“우리 올겨울에는 같이 삿포로에 갈까?”
소리 내는 법을 잊은 듯 잠시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이제야 들여다본 깊은 눈 너머에는 참으로 시렸던 형의 겨울이 담겨있었다.
“너가 알 거라곤 생각 안 하지만, 그래도 진심이야. 우리 삿포로에 가자.”
형에게는 안타깝지만, 나도 삿포로에 갈까요? 같은 말은 알았다. 시간이 야속하고 이리도 갑자기 나타난 형이 미웠지만 괜찮을 테지.
“그래, 가자. 삿포로.”
다시 내게 여름을 안겨주었으니 형의 겨울을 찾아가자, 눈앞에 성큼 다가온 여름을 넘어서.
우리의 계절은 그 어떤 지난 날보다 찬란할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