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
Written by 잔다
禍
H.
그때의 나는 대인기피증이었다.
火
H.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애한테 쓰레기도 맞아봤어. 패드립도, 걸레 소리도 들어봤고. 내가 자기 때문에 이런 것들을 겪어도 나보고 피해망상이라던 전남친은 나랑 마주칠 때마다 수도 없는 폭력을 쏟아내. 그런 전남친 때문에 힘들어하던 거 다 옆에서 본 친구는 내가 힘들어할 때 이미 전남친이랑 붙어먹고 있었고.”
“…”
“가족한테 차라리 죽으란 소리도 들어봤어. 진짜 죽여버리고 싶다고. 더럽다고. 그런 일들 있고 나니까 누구한테 무슨 말을 들어도 상처 안 받더라. 그런 사람들이 싫지도 않아. 누가 나한테 뭘 해도 신경도 안 쓰여. 그렇게 된 게 17살이었는데.”
“…”
“내가 너무 불쌍한 거 있지.”
R.
성운이를 만나고 감정이 많아진 것을 느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 애의 감정이 나에게로 넘어오는 것을 느꼈다. 네가 그저 과거로 닫아 놓은 기억들을 하나둘 꺼내며 괜찮아지고 있을 때, 과거의 너의 감정들을 내가 느끼고 있었다. 너의 생각으로 수많은 나의 하늘이 젖었으며, 수 없는 나의 밤이 길을 잃었다. 그 안에서 네가 정의 한 너의 과거를 우리로 재정의 시키고, 지나간 감정은 길 잃은 밤을 밝혔다.
化
H.
“나 대학 갈까.”
“갑자기 왜.”
“그냥, 확신이 없어서.”
“대학 가면 없던 확신이 생겨? 어차피 앞일 모르는 거 하고 싶은 일 할거라고 온갖 미움 다 받아가면서까지 안가 놓고는.”
“그때야 다른 데 뜻이 있었으니까 그랬던 거지. 근데 지금은 모르겠어.”
“이게 하고 싶은 일인지를 모르겠는 거야, 아니면 이걸 계속해도 되는지를 모르겠는 거야.”
“전자 때문에 후자가 된 건지, 후자 때문에 전자가 된 건지도 모르겠다. 지금은.”
“어느 쪽이든 너도 많이 변했다.”
“그런가.”
“소나무인 줄 알았는데 버드나무가 돼가고 있어.”
R.
‘적어도 자기가 하고 싶은 건 계속 관철해 나가는 게 맞다고 생각해. 과거나 지금은 어떻게 대할 지 몰라도. 맨날 말하지만 미래는 모르는거라고. 지난날이 맘에 안들면 앞길을 바라보고, 앞길이 맘에 안들면 지난날을 되돌아 보고. 둘다 여의치 않으면 현재를 보고 살고. 결국엔 듣기 좋은 말이지만 적어도 이렇게 살면 덜 힘들걸. 난 그렇게 생각해.’
花火
H.
형이 늘 폭죽을 터뜨리던 때가 있었다. 내가 늘 폭죽을 터뜨리던 때가 있었다. 어느 순간 우리는 서로의 과거를 담아 하늘을 수놓았다. 나의 과거가 형에게로 넘어가는 것이 보였으며, 형의 과거가 나에게로 넘어오는 것을 느꼈다. 어째선지 우리는 본인의 과거에는 태연했지만 서도 서로의 과거엔 누구보다 조심스럽고 감정적이었다.
華
H.
그림은 잘 그리지도 못하고 별로 안 좋아하기도 하지만 얼마 전 굉장히 오랜만에 그림을 그려보려 시도한 적이 있었다. 행복한 꿈을 꿨는데 내용은 기억이 안 나고 단편적인 장면만 기억이 나서. 이대로는 잊어버릴 것 같아서 펜을 잡아봤다. 결과는 처참했지만.
그래도 그 순간이 너무 편안해서. 옆에 있던 형의 숨이 따뜻해서. 그저 꿈이 아니었으면 했다. 문을 열고 나가봐도 혼자가 아닐 수 있음이 꿈에서 깨어나도 계속되었으면 했다.
R.
“우리 물놀이 갈까.”
“우리가 갈만한 데가 어딨다고.”
“왜. 그냥 아무 데서나 호스 끌어다가 놀면 되지.”
“어디.”
“학교?”
“막 나가는구나? 양아치가 되기로 한 거야?”
“아니 무슨 학교에서 물놀이하면 양아친가.”
“네가 하면 양아치야.”
“너무하네.”
“내가 뭐 어때서.”
“됐다. 그래서 안 나갈 거야?”
“귀찮아.”
“내가 귀찮다고 안 나간다고 하면 맨날 뭐라고 해놓고서.”
“알았다. 나간다. 난 옷만 챙긴다. 다른 건 네가 챙겨.”
“양아치 짓은 혼자 다 해요 아주.”
“나가기 싫어?”
“아니요.”
火話
H.
20XX.05.07
나는 왜 너에게 상처를 받는가.
20XX.05.08
나는 네가 무섭다, 솔직한 마음으로. 정말로 나의 잘못이었을까 봐. 그래서 내가 마음을 핑계로 악이었을까 봐.
20XX.08.10
실은 좀 서럽다. 괜찮을 줄 알았더니 좀 여기저기 많이 아프다. 시간이면 지울 수 있겠지. 그게 아니면 사람으로 지울 수 있겠지. 난 확답이 필요했다. 네가 날 증오해도 좋으니 이 혼란에서 벗어나길 원했다. 나는 더 이상 그 무엇도 기대할 수 없음을. 나는 네가 뭐가 그렇게 예뻐서 나를 위하는 법을 모르는 사람처럼 그렇게
20XX.08.22
끝나듯 끝나지 않는 겨울 안에 있던 나였지만 벌써 완연한 여름을 지나 아주 천천히, 조금씩 오는 겨울을 지나고 있다. 벚이 피면 보러 가자는 말에 긍정을 표할 너는 이제 없지만. 나는 아직 벚을 기다린다. 이젠 지워져 버린 약속들을 다시 그려내고 있다. 그 어떤 약속도 지켜지지 않을 것임을, 내 발목을 붙잡고 나를 더 괴롭게 할 것임을 누구보다 잘 알면서도 그런 말을 꺼냈던 건 너만은 다르기를 바라서였다.
花
H.
“형 나 노래 불러줘.”
“그럼 넌 춤 춰주게?”
“듣고 생각해볼게.”
“어이구.”
“그거 불러줘. 듣는 편지.”
“아주 당당하게 요구를 하는구만.”
“불러주라.”
“좀 기다려봐. 누르면 삑 하고 나오는 자판기가 아니라고 난.”
“가사가 기억이 안 난다면 알려줄게. 저 별을 가져 다로 시작해.”
“아, 오케.
저 별을 가져다 너의 두 손에 선물하고 싶어
내 모든 걸 다 담아서 전해 주고파”
“Sometimes I cry”
“널 잃을까”
“Sometimes I feel”
“내 품에 잠들어 있는너
I promise you 첫눈이 오는 날에
I promise you 너와 함께
두 손을 마주잡고 그 날을 거닐며 외쳐
I love you 잡은 두 손은 흐르는 세월 모르길”
“그 자리 니 온기 하나하나 담아두고 싶은 걸
내 맘이 그래 오래도록”
“Sometimes I cry”
“날 잊을까”
“Sometimes I feel”
“살며시 눈감아 주는 너”
“I promise you 첫눈이 오는 날에
I promise you 너와 함께
두 손을 마주잡고 그날을 거닐며 외쳐
I love you 잡은 두 손은 흐르는 세월 모르길”
“I promise you”
“두 손을 마주잡고 그 날을 거닐며”
“외쳐
I love you 잡은 두 손은 흐르는 세월 모르길”
“……”
“너 뭔데 불러달라고 해놓고 듀엣을 만드냐.”
“아이 뭐 상관없잖아.”
“그래라. 너 좋음 됐다.”
R.
“나로 하여금 좀더 나은 인간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사람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다.”
“형은 그런 생각 하시나 봐요?”
“한다고 해줘?”
“안 한다고 해도 아니까 상관없어.”
“굉장히 자신이 넘치네.”
“내 자신감과 자존감은 어디 내놔도 빠지지 않는다구.”
“이제 예전의 하성운이 아니다?”
“당연하지. 그런 김에 벚꽃 구경 가자”
“그런 김에 라기엔 굉장히 뜬금없긴 하지만 같이 가줄게 특별히.”
“특별히는 뭔데”
“내가 아무하고나 벚꽃 보러 가는 사람이 아니야.”
“서쪽 강변이 벚꽃 예쁜데. 이런저런 빌딩 없고 벚나무만 쭉 있어서.”
“아주 시원하게 무시를 해 버리는구만.”
哇
R.
너와의 기억이 시작되기 전부터 너의 손목은 늘 무언가로 감춰져 있었다. 아대, 팔찌, 시계. 그것도 아니면 손을 덮고도 한 뼘쯤 남는 큰 카디건. 그랬던 네가 아무것도 하지 않은 맨 손목을 보이기 시작한 건 한순간이었다. 시간이 지난 만큼 상처는 아물고 흉터도 희미해져 불 보지 않는다면 알아채지 못할 정도였지만 내 눈에는 피투성이였을 손목이 선명히 그려졌다.
그 후로 5년이 더 지난 지금까지 너의 손목이 다시 감추어지는 일은 없었지만 나는 늘 아파했으며, 목이 메었다.
和
H.
“20XX년 9월 19일 일기.”
“? 뭐하냐?”
“내가 진정 원하는 단 한 가지는 스스로를 불쌍하고 가여이 여기게 되는 이 상황의 끝이다.
20XX년 9월 24일 일기.
아직 무너지지 않은 나에게 찬사를 보낸다. 나의 구원은 어디 있지.
시바 그냥 다 망했으면 좋겠다.”
“뭐야 그게.”
“일기. 파일 정리하다 찾았어.”
“일기도 쓰다니. 너 감성적인 소년이었구나?”
“말투 왜 그래 갑자기.”
“그냥 한번 해보고 싶었어.”
“이상해 이 형.”
“근데 그거 5년 전 거 아니냐? 열일곱 때.”
“그렇지.”
“벌써 옛날 일이다, 다.”
“옛날 일이지 다. 지금은 이때 어땠는지 잘 기억도 안 나.”
R.
‘사실 본인은 내가 모를 거라 생각하겠지만 처절히 무너져가던 순간을 알고 있었다. 워낙에 독특했던 너는 꽤나 유명했으니까. 층수도, 과도 다른. 너는 그들이 존재하는지도 알지 못할 듯한 우리 반 애들조차 네게 수많은 말을 쏟아내던 이들 중 하나였을 만큼 많은 이들이 너를 배척하는 것에 동조했고, 나는 철저한 타인이자 방관자였다.
그러했던 너의 17이 지나가고,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나를 찾아오던 네게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없었다. 사실 나의 오지랖이었겠지만 전학을 가도, 자퇴를 해도 놀랍지 않을 일들을 겪어 놓고서 학생회장을 한다며 참모를 해달라는 너를. 몸에서 사리가 나와도 신기할 일은 아닐 거라 생각했었다. 속이 없는 건가 싶어 조금은 화가 나기도 했다. 이미 수년이 지난 일이지만 그때의 기억은 여전히 선명하다. 입 한번 열지 않고 그 어떤 반응도 하지 않으며 뱉어지지 못한 감정들이 내게 밀려온 것만 같았다.’
話
H.
그때의 나는 대인 기피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