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Written by 잔다
1.
그 언젠가 했던 너의 말을 빌리자면 마라톤이었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언젠간 끝이 정해져 있는 길이라는 것이었다. 지금 뱉는 이 숨도,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유학 생활도, 우리를 여기까지 데려온 이 연주도.
홍수의 가운데 네가 내게로 오길 바란다. 이대로 잠겨 죽을 것임을 알아도 걸음을 뗄 수가 없다.
2.
그닥 크지 않은 공연장의 로비는 그래도 사람이 꽤나 북적거렸다. 오늘 다른 공연은 없는 것인 것 모두 같은 팜플렛을 손에 들고 저마다의 길로 향했다. 꽃다발을 든 사람들도 적잖게 보였지만 내게 해당 사항은 없었다.
두 달쯤 뒤 마지막 교내 공연이 남았다. 사실상 졸업 공연이었다. 후원이 붙고 괜찮은 고등학교에 가기 위해선 거기서 잘 해야 했다. 대입도 아닌 고작 고입을 위해 우리는 눈에 불을 켜고 협연자를 찾았다. 그래서인지 같은 학교 애들도 적잖게 있었지만, 누구 하나 서로에게 아는 척하는 사람 없었다. 3년을 봐온 얼굴들이었지만 유대는 없었다.
혹 괜찮은 사람이 있을까 해 간 연주회에서는 여느 때와 다름없는 사람들의 여느 때와 다름없는 소리뿐이었다. 그렇게 조금씩 집중력을 잃어갈 때 즈음 참으로 서러운 소리가 울렸다. 표정 없는 얼굴을 하고선 세상의 비애를 담은 연주를 했다. 너는 모르는 너와의 첫 만남이었고, 감정 없는 네 눈을 마주하게 된 건 조금 더 시간이 지난 후의 일이었다.
3.
“하성운?”
“누구세요?”
“아, 나는 노태현. 피아노 전공 3학년. 이번 졸업 연주회 협연 부탁하고 싶어서.”
“곡은 정했어요?”
“Maksim. Croatian Rhapsody.”
“왜 저한테 부탁하러 왔는지 알 거 같은 선곡이네요.”
“자기 객관화 잘하네.”
“꽤 들었어요. 번호 주세요. 연습 시간은 일정 봐 가면서 맞추게.”
“그래.”
4.
연습은 따지자면 순조로웠다. 서로 이미 알고 있던 곡이었고, 우연히도 해석하는 방식 또한 비슷했기에 크게 맞춰 갈 것은 없었다. 3평 남짓한 연습실에는 한껏 날이 선 선율이 울렸다.
“넌 무슨 15살이 그렇게 바이올린을 켜냐.”
“무슨 뜻이에요?”
“혼자서 세상 부정 다 끌어안은 연주를 해.”
“그럴 수도 있죠 뭐.”
“너 혹시 안에 한 맺힌 80살 노인 있냐?”
“설마요.”
“근데 뭐가 그리 노여워.”
“감정 표현에 있어서의 천부적인 재능?”
“웃기네. 너나 나나 둘 다 악기 하는 입장에. 그런 게 통할 거라 생각해서 하는 말은 아니지?”
“아닌 거 알면 그냥 넘어가죠?”
5.
“노태현?”
“뭐하냐.”
“전 하성운이요. 바이올린 전공 3학년. 이번 졸업 연주회 협연 부탁하고 싶어서요.”
“이거 데자부인데.”
“기억력이 영 쓸모없는 건 아니네요.”
“날 뭘로 보고. 선곡은?”
“Maksim. Croatian Rhapsody.”
“너 같은 선곡이네.”
“저도 알아요.”
6.
18의 3월 2일이었다. 단상에서는 입학생 대표로 한 명이 나가 선서문을 읽고 있었다. 귀염성 있는 얼굴에 부리 입을 하고 시선은 아래의 고정이었다. 마이크가 조금 높은지 뒤꿈치를 살짝 들고 서 있는 모습이 귀여워 슬쩍 입을 가리고 웃었다. 바이올린 전공이라 했다. 시에 하나 있는 예중을 졸업했다고. 괜히 놀리고픈 마음이 일었다.
“신입생 대표씨, 선서문 읽고 학교 입학한 소감은?”
“하성운인데 별 특별한 이벤트는 아니죠.”
“말 한 번 예쁘게 하네.”
“하루 이틀 일도 아니고.”
7.
“성운아 우리 미국 갈래?”
“응? 무슨 말이야?”
“몇 달 전에 최 교수님이랑 윤 교수님 가신 데 있잖아. 나 그쪽으로 가려고.”
“왜 더 좋은 데 안 가고.”
“교수님이 지원해주신대. 너도.”
“그래. 같이 가자.”
8.
클래식 악기를 전공하며 국내에만 머무르는 경우는 없다 봐도 무방했다. 이곳에 발붙이고 살아남기 위해 떠나는 건 나의 의지로는 컨트롤이 되지 않는다는 말이었다. 며칠 전 미국으로 불려 가신 교수님 두 분에게서 연락이 왔다. 간결한 말이었다. 학비와 생활비는 전면 지원해줄 테니 본인들이 있는 곳으로 오지 않겠냐고. 전제는 성운이와 같이 간다는 것이었다.
9.
“넌 가면 얼마나 있을 거야?”
“되는 데까진 있겠지. 가능하면 대학 졸업까지는.”
“오래 있네.”
“형도 대학은 거기서 졸업할 거잖아.”
“그렇긴 한데.”
“그러니까 나도 그런다고.”
“뭐야 그게.”
10.
더위가 가신 8월의 마지막 수요일이었다. 내 몸무게쯤 되는 이민 가방을 들고 승강장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예매한 자리에 앉아 하나둘 자리가 채워지는 것을 보다 버스가 출발하기 2분 전, 뛰어온 듯한 네가 숨을 고르며 내 옆자리에 앉았다. 창밖의 세상은 태연했다.
11.
창을 넘어오는 빗소리에 눈을 뜬 5시였다. 아직 어스름한 하늘, 가로등 불빛이 비쳐 희미하게 보이는 방 안에 너의 인영은 없었다. 너를 찾지 않으면 안 될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대충 자켓을 걸치고 나가자 너는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새하얀 옷을 입고 우산 하나 없이 비의 한 가운데 서 있는 너는 처음 너를 보았을 때와 같은 눈을 하고 있었다. 다시 마주한 너의 눈은 감정이 없는 것이 아닌 세상의 비애를 끌어안고 있었다.
“형 안자고 뭐해요.”
태연한, 태연함을 가장한 목소리였다. 얼음장 같은 빗속에서 지금이라도 스러져버릴 것만 같은 너를 보고도 나는 차마 네게 우산을 씌워줄 수가 없었다.
“우리 여기 온 지 1년밖에 안 됐는데. 형은 이제 막 대학 들어간 것뿐인데 말이에요.”
네 볼을 타고 흐르는 게 눈물인지 빗물인지 알 방법은 없었으나, 눈물을 흘리지 않는데도 네 눈동자가 이미 너무도 설피 울고 있었기에 빗물이라 나 홀로 정의 내렸다.
“마라톤이겠죠, 말하자면. 아직 많이 남았으니까. 앞으로 바이올린이랑 피아노만 죽어라 하겠네요.
우리 엄마가 바이올리니스트였어요. 나 어렸을 때 그만두긴 했는데, 엄마가 바이올린 너무 사랑했나 봐. 그래서”
뒷말은 빗소리가 삼켜버린 것인지, 네가 삼켜버린 것인지 들리지 않았다. 네 입술이 무언가의 소리를 그려내는 것은 보이는데, 그게 무엇인지는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12.
오후 4시 40분. 3월 초라하기엔 늦고 중순이라 하기엔 조금 빠른, 추웠던 겨울을 지나 영상으로 올라가는 때에 나는 음악실 앞에 앉아있었다. 학교가 끝나고도 1시간 반이 더 지난 시간, 선생님들도 퇴근한 조용한 학교에 조용히 울리는 현악기 소리. 그 안에 섞여 있는 네 바이올린 소리를 찾는다.
연습이 끝난 건지 음악 소리가 끊기고 분주히 움직이는 소리만이 들렸다. 피아노 커버가 닫히고 그 안에서 조용히 나오는 너를 찾는다.
“형 여기서 뭐 해?”
“너 기다리고 있었지.”
“말도 안 하고?”
“서프라이즈 몰라 서프라이즈? 뭘 모르네”
“학교 끝나면 자기가 제일 먼저 집으로 갔으면서 오늘은 뭔 바람이 불어서.”
시답잖은 얘기를 나누며 학교 건물을 나가려 문을 열자 채 다 녹지 않은 눈에 반사된 햇빛이 눈을 파고들었다. 봄의 따스함을 담은 바람이 잔잔하게 불어왔다.
“우리 좀 놀다 가자.”
“늦었어. 집에나 가.”
“사람이 왜 그렇게 단호해? 이런 날에는 좀 놀아줘야 되는 거야. 오늘 같은 날이 며칠이나 있다고 그냥 보내버리는 건 낭비라니까?”
“그럼 뭐 먹을 거라도 가져오든가. 맨입으로는 재미없어.”
“아침에 학교 올 때 편의점 같이 들렀으면서 그런 말 하네. 먹을 것도 꺼냈는데 그냥 간다 그러면 너 진짜 나쁜 사람이다.”
“그래. 좀 농땡이 피우다 가자.”
환풍구 위로 올라앉아 과자 두어 개를 꺼내 펼쳐 놨다. 별다른 얘기 없이 바람에 나뭇잎이 부딪치는 소리만이 우리 둘 사이를 채웠다. 어쩌면 대화보다 더 편했을 침묵을 깬 것은 나였다.
“우리 이러니까 예전 생각난다.“
그건 고작 2년 전의 일
여느 때처럼 학교가 끝난 오후였다. 우리가 할 일이라곤,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저 연습실에 가는 것뿐이었다.
-연습 가기 싫다.
-형은 맨날 그 얘기지?
-그래도 가기 싫은 걸 어떡해. 오늘은 특히 더 가기 싫어.
-매일이 특히 더 가기 싫은 날인데 어떻게 살아요 형은?
-그러게 말이에요. 그런 김에 오늘 학원 쨀까?
-그럴까요. 한 번쯤은 무단결석도 해보고 해야지.
예상외의 답변에 나는 조금 놀라 너를 쳐다봤었다. 아무렇지도 않은 듯 덤덤한 얼굴이 다시 하늘을 바라보며 조금은 어색했던 침묵을 찾았다.
“그땐 우리가 여기까지 올 줄은 몰랐는데.”
“형이 여기까지 날 데려올 줄은 몰랐지.”
“그때 내가 너 때문에 얼마나 혼났었는데.”
“무슨 헛소리야. 먼저 말 꺼낸 건 형이면서.”
“진지하게 받아들일 줄은 몰랐지.”
“그래도 연습 짼 건 그게 다인가. 지금은 뭐, 나름 추억이네.”
조금 추억에 잠긴 듯한 너의 눈에 나도 다시 하늘을 바라봤다. 다시 침묵을 깬 건 너였다.
“고작 2년 지났는데 지금 훨씬 더 한가해졌네.”
나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네 여유의 이유를 알면서도
13.
그 언젠가 했던 너의 말을 빌리자면 마라톤이었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언젠간 끝이 정해져 있는 길이라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절은 흘러 여름의 가운데로 데려 와버렸다. 어쩔 수 없는 장마철이었다. 집 앞의 강이 범람하여 다리도 소용없어질 것만 같은 비가 계속됐다. 이대로 잠겨 죽을 것만 같아도 걸음을 뗄 수가 없었다.
결국 나는 도망치지 못했다. 이곳에 남는 것이 너를 향한 죄악이 될 것임을 알지만 나는 겁쟁이였다. 잘 지내라던 네 마지막 말이 나의 유일한 면죄부였다. 용서를 구해야 할 것은 나인데. 내가 잘못됐을 뿐이었다. 이제 너라곤 하나 없는 이곳이지만 모든 게 너를 떠올리게 해버려서.
우리 늘 같은 마음이었음을 왜 나는 신경 쓰지 못했던 걸까. 조금 더 빨리 너의 눈을 바라봐 주었다면, 그때 네게 우산을 씌워 주었더라면 우린 지금 달라졌을까. 나는 왜 네게로 달려가지 않았을까 라며 내 모든 일에 후회를 해 보아도 온몸으로 오열하던 너조차도 이젠 없는데.
네 앞에서 감히 솔직해지자면 매일이 절망이다. 나는 네게 구렁텅이였고, 너는 내게 별의 몰락이다. 우는 것도 쉬이 허락되지 않는 이곳에서 나는 어떻게 해봐도 내일을 마주할 자신이 없다. 모든 것이 너를 떠올리게 하지만 하늘을 바라봐도 너를 찾을 수가 없는데.
홍수의 가운데 네가 내게로 오길 바란다. 이대로 잠겨 죽을 것임을 알아도 걸음을 뗄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