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B-Side)
Written by 잔다
1.
어쩔 수가 없다. 나는 꽃일 수밖에 없다. 나는 지금 질지언정 형은 상록수로 남아주길. 내가 형의 손에 상처만 남긴 장미였을지언정 저 산의 소나무가 되어주길. 내가 감히 바라본다.
2.
8년. 벌써 8년이 다 지난 일이지만 여전히 지금처럼 생생한 기억이 있다.
7살 적 엄마가 사라졌다. 집 한쪽에 마련되어있던 연습실에서 매일같이 들려오던 바이올린 소리가 끊겼다. 두려움이 엄습해 한참을 울었고, 그 작은 몸으로 현관 앞에서 밤을 새워 봐도 돌아오는 건 아빠뿐이었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달의 뒷면만 같은 그늘진 얼굴을 한 아빠에게 엄마의 행방을 물어도 돌아오는 건 없었다. 조금 더 자란 뒤에서야 알게 된 것이었지만, 엄마는 손가락을 다쳤다고 한다. 현이 끊어지면서 신경을 건드렸다고. 바이올린은 그대로 바닥에 곤두박질치며 산산이 조각 났고, 엄마 역시 그랬다. 다시 연습실에서 바이올린 소리가 흘러나오는 일은 없었다. 그리고 나의 엄마가 사라진 것도 그때 즈음이었던 것 같다.
3.
15살 콩쿨에 나갔다. 선생님을 포함한 모두가 선곡에 있어서 클래식을 추천했지만, 사실 강요했지만 결국 내가 선택한 건 영화음악이었다. 누가 뭐라고 해도 그냥 내가 싫었다 클래식은. Schindler’s List. 내가 봐도 콩쿨에 참가할 만한 노래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굳이 이유라 할 것은 그때 즈음 내가 꽂혀있던 곡이어서가 전부였다. 늘 그랬고 지금이라고 안 그렇겠느냐마는, 좋다고 이런 노래를 골랐던 걸 보면 참 우울에 빠져 있었다. 매일 같은 감정의 홍수에 오히려 상당히 무뎌져 있었기도 했고. 그때 당시의 나는 오히려 우울함을 몰랐다. 어두운 곡을 연주할 때면 모두가 경탄하고, 혹은 경외했지만, 나만이 무감정했을 뿐이었다. 그 이유는 머지않아 알 수 있었다.
4.
“야, 성운아. 넌 연습 계속하면 텐션 한 쳐져? 난 미칠 것 같던데.”
“글쎄요. 이 노래가 그런가?”
“어. 난 그래. 막 정신이 어그러지는 기분이야.”
“나는 딱히 그랬던 적은 없었던 것 같아요.”
“나는으로 시작해서 같아요로 끝나는 건 뭐야. 설레게 반존대 하는 거야?”
“설마 그럴 리가요.”
“근데 너 맨날 우울하고 어두운 것만 연습하지 않았냐?”
“그랬나? 근데 형이 그걸 어떻게 알아요?”
“몰라.”
“어느 포인트에서 모른다는 건지”
5.
“형은 형 첫인상 되게 이상했던 거 알아요?”
“내가 뭘 어쨌다고 이상해.”
“사실 형 좀 이름 날렸는데. 피아노과 망나니 빨간 머리.”
“망나니는 좀 심했다 야.”
“근데 형 염색을 좀 망나니같이 하긴 했어요. 무지개색 다 해보지 않았어요?”
“못했어. 보라색 안 해봤어.”
“아무튼, 연습 끝나고 집 가는데 형이 갑자기 부르는 거야. 다짜고짜 이름만 말하더니 협연하자고.”
“너 무슨 이미 다 알고 있었다는 것처럼 해줬잖아. 바로 번호 주고.”
“형은 고마운 줄 알아요. 나 하자는 사람 많았는데 다 내가 깐 거야.”
“그 유명하신 하성운이 같이 해준 거에 감사해라 이거냐?”
“그런 것까진 아니었는데 그렇게 받아들이고 싶으면 그래요.”
“감사합니다 하성운씨. 이 미천한 자와 함께 해주셔서.”
“그렇지. 나랑 같이해서 형 여기까지 온 거지.”
“1절만 하자 성운아.”
“넵.”
6.
근데 뭐가 그리 노여워. 아무리 해봐도 나는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내 연주가 어떻길래 다들 그렇게 말하는 걸까. 답은 멀지 않은 곳에서 주어졌다. 형으로 이제야 알았다. 사랑받는 게 이런 거구나. 그동안 나 정말 혼자였구나. 참 외로웠던 거구나. 짧은 인생, 겪었던 시간 보다 모르는 시간이 더 많은. 기억하는 것이라면 거의 없다시피 한 그 시간이 그리워 위태로웠단 걸 이제야 알았다.
그런데 과연 내가 버틸 수 있을까. 짧은 시간이지만 처음은 늘 전부를 가져가 버려서 어쩌면 무서웠다. 형이 나의 구원 일 거라 멋대로 생각해버릴까 봐. 그때 두려움에 도망쳤더라면 우린 달라졌을까 생각해본 적이 있다. 16의 나는 구원받는 것이 두려웠다. 나는 여전히 나를 동정한다.
7.
“성운아 우리 미국 갈래?”
대답하는 데 그리 많은 생각을 필요로 하는 질문은 아니었다. 형은 미국에 갈 요량으로 물었을 테고, 형이 없는 한국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었으니까. 내가 그곳에서 버틸 수 있을지는 또 다른 문제였지만 형이 없는 곳에선 내가 사라질 것이라는 건 답이 참인 명제였다. 내겐 선택권이 없었다. 내가 이 삶을 살아낼 수 있을 때까지 어떻게든 형을 들어야 했다 나는.
8.
더위가 가신 8월의 마지막 수요일이었다. 잠은 자지 못했다. 특별한 일은 아니었다. 다만 생각이 나를 늦출 뿐이었다. 지금 와서 망설이는 것은 아니었다. 선택에 두려움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무언지 모를 상념에 뒤늦게 본 시계는 이미 많이 흘러버렸다. 급히 뛰어 버스를 탔다. 창밖의 세상은 태연했고 나의 세계는 던져졌다.
9.
나는 괜찮을 거라 기대했다. 그래도 사는 삶이 지속됐다. 이 모든 상황과 내가 종이 마을의 실험체가 된 듯한 느낌이 드는 건 한순간이었다. 그리고 이런 날 위해 형을 지워달라 나는 차마 말할 수 없었다.
그 날 밤 비가 왔다. 이젠 특별할 것도 없어진 잠 못 드는 밤은 비에 젖었고 나는 두려웠다. 타인과 공유되지 않는 한 번의 불행, 그로부터 기인한 끝없는 불안이 형을 잠식시켜버릴까. 처음 만난 순간부터 변함없던 빨간 머리를 하고선 형은 자고 있었다. 편히 자길 바랐다. 종교는 없었지만 잠시 하늘에 빌었다. 형은 부디 평안하길.
우산 하나 없이 밖으로 나갔다. 비는 늘 많은 것을 떠올리게 했다. 빗물이 얼굴을 타고 꼭 눈물같이 흘렀다. 참으로 외로웠다. 내가 붙들고 있는 고질적인 감정이었다. 형이 나의 구원이길, 내가 괜찮아지길 바랐지만 변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 과거로부터의 해방을 그토록 바라면서도 스스로 거부하고 있었다. 결국 나는 스스로에게 잠식될 뿐이었다.
문소리가 들렸다. 분명 자고 있던 형이 왜 지금, 형의 밤이 평안하길 빌었던 건 부질없는 짓이었나.
“형 안자고 뭐해요.”
마주한 형의 눈은 울고 있었다. 우산에 가려 빗물도 무엇 하나도 형의 볼을 타고 흐르지 못했지만 형의 눈은 감정의 사선을 담은 채 울고 있었다. 왜 형이 그런 눈을 하는 거야
“우리 여기 온 지 1년밖에 안 됐는데. 형은 이제 막 대학에 들어간 것뿐인데 말이에요.”
형을 보자 왜인지 울고 싶어졌다. 우리가 이곳에서 버텨내야 하는 시간은 아직 한참이 남았다. 싸늘히 나를 식혀가던 빗물이 아닌 조금은 따뜻한 눈물이 볼을 타고 흘렀다. 이질적인 느낌이었다. 마지막으로 울었던 게 언제였더라. 수년 전으로 올라가는 부질없는 회상이 한순간 머릿속을 지나갔다.
“마라톤이겠죠, 말하자면. 아직 많이 남았으니까. 앞으로 바이올린이랑 피아노만 죽어라 하겠네요.”
형의 완주는 언제쯤일까. 나보다는 길 것이다. 그래야 한다. 내가 억지로 당겨온 종착점이 멀지 않게 보였다. 내가 저 선을 넘고 나면 형은 어떤 걸음을 할까.
“우리 엄마가 바이올리니스트였어요. 나 여렸을 때 그만두긴 했는데, 엄마가 바이올린을 너무 사랑했나 봐. 그래서”
나는 안 보였나 봐.
소리를 그려내 세상에 던지기엔 내게 너무 지독한 말이었다. 바이올린이며 피아노며, 내가 가는 모든 곳마다 들려오는 소리가 나를 옥죄여오고 있다는 걸 형은 알까. 나에게 주었을 것이었던 우산은 형의 손에 들린 채였다. 너무도 시린 새벽이었다.
10.
미국 북부의 3월의 호는 얼음이 채 다 녹지 않은 채였다. 싸늘한 겨울의 한기가 안개처럼 내려앉은 호숫가에 사람이라곤 나뿐이었다. 어쩌면 처음부터 예견되어있던 끝이었다. 사실 알고 있었다. 그래도 마음은, 감정은 사람을 미련하고 둔하게 만들어 이곳까지 나를 데려왔다. 죽은 자의 세계는 뒤집어진다 했다. 나의 세계는
11.
형한테 편지는 처음 쓰는 것 같다. 오랜만에 한글 쓰려니까 좀 어색하네. 곧 여름이야. 작년엔 이상했다지만 여기 장마 때 장난 아니라니까 조심해. 형 강가로 자주 산책하러 나오잖아.
형, 나는 도망칠 거야. 내가 도망친 거야. 날 괴롭히는 사람도, 빡빡한 스케줄도 없는 곳으로. 여기랑은 낮과 밤이 뒤바뀐 곳으로 나는 갈 거야. 나는 도저히 자랄 수가 없으니까. 내 바이올린 소리가, 형의 피아노 소리가 내 숨통을 조였다면 이해해 줄래? 형은 잘못한 거 없어. 그냥 내가 그랬을 뿐이야. 형 어깨에 너무 많은 나를 지우게 했나 봐. 내가 감히 용서해달란 말을 꺼낼 수 있을까. 내가 잘못된 거였어. 그냥, 다.
처음 이곳에 발 디딘 순간부터 내 모든 밤은 형에게 닿기 위한 밤이었어. 설움이고 노여움이고 몰랐는데, 한없이 정적이었는데, 그랬던 내가 동적이었던 모든 순간에 형이 있어. 내 채도가 됐는걸.
내가 전에 마라톤이라고 했던 거 기억나? 우리가 뱉는 숨도, 이 유학 생활도, 연주도. 난 이제 완주야. 내 종점은 이미 눈앞에 왔어. 내가 끌고 왔어 내 눈앞으로. 그 새벽 비가 너무 시려서. 응. 조금 힘들었던 것 같아. 나는 형한테 내 세계의 전부를 내던졌는데, 그래서 내 불안이, 내 모든 부정이 나한테 그랬던 것처럼 형을 잠식할까 봐.
내 마라톤은 여기서 끝이지만 형은 좀 더 길기를 바라도 될까? 형한테 죄만 짓고 도망쳐서 미안해. 근데 나 더 이상은 여기에 남아있을 수가 없어.
내가 언제 다시 눈을 떠 형이랑 마주하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상록수가 되어 있을게. 형은 저 산의 소나무처럼 지내다 와줘. 나처럼 금세 시들지 않았으면 해.
내가 건네기엔 너무 파렴치한 말이지만, 잘 지내 형.
12.
어쩔 수가 없다. 나는 꽃일 수밖에 없다. 나는 지금 질지언정 형은 상록수로 남아주길. 내가 형의 손에 상처만 남긴 장미였을지언정 저 산의 소나무가 되어주길. 내가 감히 바라본다.
나의 세계는 뒤집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