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린 그렇게
Written by 잔다
오후 6시 즈음이 되면 습관처럼 최신 음악을 있는 대로 들어보는 습관이 있었다. 어렸을 적부터 그래왔으니 꽤나 오래 된 습관이었다. 그냥 여러 노래들을 들어 버릇 했다. 음악 같은 걸 할 것도 아니면서. 한 때는 기다리던 목소리도 있었지만 이제 그런 건 놓은 지 오래였다. 붙잡는 건 줄 알았는데, 그러면 잊지 않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자꾸만 변해가는 게 참을 수 없었다. 뒤돌아도 어쩔 수 없는 것들이었다.
처음 듣는 인디 노래, 조금은 오래 된 아이돌의 솔로곡, 유명 밴드의 베스트 앨범, 이제 막 데뷔한 신인 아이돌의 노래. 여러 노래를 지나 익숙한 전주가 들려왔다. 잊으래도 잊을 수가 없을 피아노 소리. 나를 도려내야 잊을 그 목소리.
시린 여름 밤의 이야기
한 여름 밤의 꿈으로 남아
붙잡으래도 떠밀린 후에
나보다 큰 내가 되어 서 있네
너는,
어디에서 무얼 하며 지낸걸까
*
창문 너머로 학교에 몇 없는 벚나무 한 그루가 보였다. 본관과 체육관 사이, 작은 풀꽃들만 가득한 길에 유일하게 솟아있는 나무. 한창 흐드러지던 벚꽃이 입을 다물기 시작하고, 조금 세게 불러오는 바람에 그 잎이 흩날린다.
“그림이네..”
햇살이 참 좋았다. 3학년이 된 후로는 보충이 없어 기숙사생을 포함한 몇 몇을 제외하고는 모두 하교하고 있을 시간이었지만 태현은 가방을 교실에 둔 채로 학교를 돌아다니고 있었다. 공부는 해야 했지만 조용히 해야 하는 교실이나 독서실이 싫어 집으로 가기를 한 달 반쯤. 집에서 공부는 아니다 싶어 빈 교실을 찾아다니고 있었다.
일단 선생님들이 돌아다니는 본관은 제외. 체육관은 당연히 불가. 1학년 들이 쓰는 A동은 빈 교실이 많았지만 여기도 역시 돌아다니는 사람이 많았다. 그렇게 신입생이라도 된 마냥 온 학교를 돌아다닌 후 태현은 결국 특별동으로 향했다. 무용실, 소회의실, 과학실, 기가실 등 온갖 교실이 다 있었지만 보충시간 이후에 쓰는 곳이라곤 종종 연습이 있는 현악부실이나 무용실 쯤이 다였다. 그나마도 대회 시즌을 제외하면 동아리 시간이 다인지라 사람이 거의 없어 괜찮지 않나 생각했다.
1층부터 4층까지 모든 교실을 돌아다니다 4층에 올라가자 희미하게 피아노 소리가 들렸다. 같은 층에 있으면서도 이어폰에서 세어 나오는 소리처럼 들리는 게, 방음 시설은 꽤 잘 돼 있구나 생각했다.
“근데 지금 여기 사람이 왜 있어?”
음악 선생님도 퇴근 하신 시간에, 누군가 합주실에 있는 게 궁금해 합주실 근처로 홀린 듯 갔다. 문에 유리 창이 있었지만 피아노가 반대쪽을 바라보고있어 바로 눈이 마주치지 않을 수 있음에 약간의 감사를 표했다. 창문 너머로 눈이 마주치면 뭔가, 훔쳐보고 있었던 것 같으니까.
똑똑-
사실은 쿵쿵에 조금 더 가까운 노크 소리에 내가 하고도 내가 놀랐다. 이렇게까지 세게 두드리려던 건 아니었는데
“누구세요?”
“아-.. 안녕?”
얼빠진 소리를 냈다. 이렇게 빨리 나올 줄 몰랐던 탓이었다.
같은 눈높이. 2학년들의 녹색 명찰. 하얀 자수로 반듯하게 새겨진 세 글자, 하성운. 합주실 한 쪽 커다란 창으로 조금씩 보이던 나무의 꼭대기와 하늘을 얇고 넓게 덮은 구름. 지나칠 정도로 선명한 기억이었다.
*
4시 25분. 보충 시작을 알리는 예비 종이 울릴 때 짐을 챙겨 합주실로 향했다. 그런 곳에서 공부가 되냐 물으면 뭐, 노래 들으며 공부하는 거나 다름 없지 않나 생각한다.
결론만 보자면 귀가 시간은 늦어지고 공부량은 늘었다. 고삼이라고 찔릴 건 없어 보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여기엔
“형, 나 이번에 곡 쓰는 거 형이 한 번 불러주면 안 돼?”
쉼이 있고, 여유가 있었으니까
“갑자기?”
“나 형 목소리 좋아. 형 노래도 잘 하잖아. 멜로디 쓰는데 딱 형 목소리 생각 났어.”
“너가 먼저 불러줘.”
이거 아직 싸비 밖에 안 쓰긴 했는데, 형이 듣고 싶다니까. 조용한 합주실에 금세 피아노 소리가 퍼졌다.
몇 번이고 돌아 헤집고 다시 또 꺼내어봐
보내고 싶지 않은 기억을 붙잡고 싶어서
한참을 아프고서 그제야 흘러가는 거야
가볍고, 먹먹하고. 쉬이 흘려보낼 수 없는 억만 겹의 감정이 그 짧은 순간 스쳐갔다. 네 소절뿐이지만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가, 순간 궁금해져서.
“중간은 뭐야? 가사 안 쓴거?”
“응. 계속 생각 해 봤는데. 괜찮은 게 생각이 안 나서.
“그런 건 그냥 버리고 있어야지. 쥐어짜면 오히려 더 생각 안 나더라.”
“맞아. 진짜 한 번 생각 안 나면 계속 안 나서 그냥 딴 거 하다보면 갑자기 딱 생각 나. 형 언제 갑자기 생각 나면 나 꼭 알려줘야 돼.”
“음도 모르는 데 뭘 어떻게 해.”
“이거 음 똑같아. 몇 번이고 돌아~ 이거. 나중에 생각 나라고 내용도 알려줄게. 붙잡아 보려고 했는데, 붙잡으려면 가는 대로 놓아줘야 됐던 걸, 한참 지나고서야 알게 딘 거야. 한참 아프고. 알겠지? 이거 한 번씩 생각해. 가사 던져줘 나한테.”
“요구가 왜 이렇게 자연스러워. 아까는 노래도 불러달라고 하더니.”
“아 왜, 형도 곡 작업 하는 거 좋아하면서. 그리구 이거 형이랑 완전 어울린다니까? 할 수만 있었으면 형한테 곡 줬다.”
“오바한다.”
“뭔 오바야. 형 빨리 데뷔하자. 내가 곡 줄게. 데뷔곡은 내가 줄게.”
“너 곡 작업해. 나 공부할래.”
“작사가 노태현 기대합니다.”
*
일상이었다. 다만 다른 것은, 항상 바뀌던 재생 목록이 한 곡 반복으로 되어있다는 것과 작은 머리통이 통 들춰보지 않던 과거를 떠올려보려 하고 있다는 것. 이사올 때 정리 하고선 몇 번 보지도 않은 책장을 뒤져 금세 낡은 노트 한 권을 꺼내 들었다. 시간이 지나 노트 가상은 누렇게 변색 돼있었고 표지 모서리의 코팅은 말려 벗겨지고 있었다. 표지를 넘기자 바로 보이는 면지에는 갖은 낙서가 되어 있었다. 굳이 살펴보지 않아도 같은 사람이 그렸을 것이 뻔한 그림들이었다. 종이 한 가운데에 그려져 있는 강아지 발바닥, 그 옆에 써져있는 ‘이 노트를 펼칠 때면 출석 도장을 찍고 가시오.’ 낙서의 주인도 큰 의미는 없었을 테지만 어째선지 정말 노트를 열 때마다 엄지 손가락보다 조금 큰 강아지 발바닥에 도장을 찍듯 손을 가져다 댔다.
지금이야 대부분 랩탑으로 작업해 안 쓴지가 오래 된 작업 노트였다. 가장 최근에 썼다고 해봤자 4년 즈음 전일 게 뻔한 내용에 잠시 망설여졌다. 좀, 오글거리는 것도 있고, 별로 과거를 찾고 싶지 않은 것도 있고.
집으로 돌아오는 내 들었던 탓인지 노래는 껐음에도 불구하고 머리 속에서 맴돌았다.
몇 번이고 돌아 헤집고 다시 또 꺼내어봐
보내고 싶지 않은 기억을 붙잡고 싶어서
한참을 아프고 그제야 흘러가는 거야
떠내려가는 걸 볼 수 있게 된 거야
원래는 이 가사가 아니었던 것 같은데. 애초에 본인이 쓴 가사가 아니어서 쓰기도 뭐 했겠지만. 노트를 넘기다 보니 얼마 지나지 않아 익숙한 가사가 나왔다. 언젠가 네가 흘러가듯 부탁했던 그 노래. 딱 한 소절뿐이었지만 참 많이 생각하고, 고민해서 썼던 기억.
변해버린 기억 돌아봐 놓아줘야 했던
새기듯 남아있던 가사도 잊어버린 걸 보면, 정말 그냥 그렇게 떠내려가는 구나 싶기도 하고
*
“형 나 뭐 하나만 물어봐도 돼?”
“뭔데?”
“형은, 음악 하는 데 미련 없어?”
“설마. 없을 리가. 당장 세 달 전까지만 해도 진짜 이러면 안 돼는 거잖아- 하고 있었는데. 근데 뭐, 내가 어쩔 수 없는 거잖아. 상황들이.”
“……”
“부모님이 노래하는 거 되게 안 좋아하셨었거든. 연예계를. 나한테 직접적으로 말 한 적은 없었는데, 차마 못 말하겠더라고. 지나가듯이 말 했을 때도 그런 건 나중에 취미로 하라고. 그러시는데. 그 말 들으니까 오히려 더 못 하겠는 거 있지. 진짜 내가 나중에 내가 내 돈 벌어서 곡 쓰고, 부를 수 있게 되면. 그만큼 재능이 있었다는 거잖아. 그러면 오히려 더 슬플 것 같아서. 그래서 그냥 포기하게 되더라. 인정해야 될 것들도 너무 많고 그래서.”
그 때, 그 애의 눈에 어설픈 동정이 비치지 않아 참 다행이었단 생각을 했다. 주변에 음악 하는 사람이 적지 않았고, 작업실에 발길이 뜸해지면서 받았던 미안함이 담긴 눈빛들이. 괜스레 나는 어쩔 수 없는 것들을 상기시키는 것만 같아서. 차라리 대놓고 슬퍼하거나, 동정하거나. 그런 류의 반응이 덜 힘들지 않았을까 싶었다.
“그래도 난 지금으로 충분히 좋아. 살만해. 곡은 계속 쓰면서 살고 있잖아. 너도 있고.”
정말로, 살만하다고 생각했다. 전만큼은 아니지만 이만큼 음악 하고 살면 숨 쉬고 살 수 있겠다 싶었다.
그리고, 과분하지 않나 싶었다. 쉼을 찾아 왔더니 집이 되어서. 그토록 찾아 헤매다 포기해버린 나의 집이 되어 주어서. 살아내지 않아 싶었다.
*
언젠가 만나지 않을까 하는 상상 만으로도 평생을 숨쉬게 하는 그런 사람은 누굴까 생각한 적이 있었다. 정말로 내게 그런 사람이 있다면, 있다는 그 사실 만으로도 사람이 부족하여 숨막히는 일은 없을 것 같았다. 그렇게 사람 없이 혼자여도 나름 슬프지 않은 삶이지 않나 싶었다.
그런데 정말 만났다니. 어쩔 수 없는 일이고, 사실 슬플 것도 아니었지만 너무 붙잡고 싶어져서. 그 날 네가 했던 그 말처럼, 한참을 붙잡고 뒤돌아봐 나아가는 시간에 부딪혀 아프고서. 그제서야 붙잡으려 놓는 걸, 떠내려 보내는 걸 한참 지난 후에야 알아서.
네가 명명한 우리의 기억 처럼,
우린 그렇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