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의 모순성
Written by 루댕
시작도 이랬던 거 같다. 비오는 날, 버스정류장. 아닌가? 기나긴 연애의 끝을 이미 맞이한 우리가 아니, 내가 시작을 기억하는 그 행위조차 이젠 모순이겠지. 성운은 작게 고개를 저었다. 이런 걸 미련이라고 불렀었나. 그래도 아직 생생한 기억에 그도 모르게 두 눈을 감았다. 그 거세던 빗소리보다 더 크게 들리던 심장 소리. 그 어떤 소리가 들리지 않아도 형 목소리 하난 또렷하게 들렸는데. 사실 부끄러워서 전하지 못했던 하고 싶은 말도 정말 많았는데. 아, 이러니까 나 진짜 구질구질한 구애인 같잖아. 피식 웃으며 버스가 언제 오려나 보는데 아무리 떨쳐내려고 해도 마치 어제처럼 생생한 기억이 기어이 발목을 잡는다.
'좋아해.'
'무슨 고백을 그렇게 멋없게 해? 형이 아저씨두 아니구.'
'그러게, 그래서 싫어?'
'아니, 누가 뭐래? 좋다구.'
잊어야 마땅했던 기억이 자꾸 생각이 나는 이유는 그 날과 똑같은 풍경, 그 날과 똑같은 사람이 없는 버스 정류장, 그 날과 똑같은 거센 비 때문일 것이다. 그는 입술을 꾸욱 물었다. 아, 짜증나. 버스는 오는 도중에 날아갔는지 아무리 기다려도 보이지 않았다. 비는 그칠 기미가 없고 계속 떠오르는 기억에 택시라도 잡으려고 버스 정류장의 의자에서 일어났다. 택시를 잡아서 탈 만큼 급한 일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더 앉아있을 기분은 더욱 아니었다. 드라마에선 꼭 이런 상황에서 주인공이 나타났는데. 아닌가? 안 나타나서 결국 새드 엔딩이었나? 의자에서 일어나 우산을 탁 펴는데 귀로 듣고도 믿을 수 없는 그 목소리가 들려왔다.
"성운아."
아, 안 좋은 상상은 꼭 현실이 된다더니 뭐 같네, 진짜. 오늘 일진 좋았는데 끝에서 왜 이러지. 차마 뒤로 돌 용기가 없어 가만히 서있는데 다시 들려오는 목소리에 그는 우산을 접었다. 성운아, 잘 지냈어? 아, 짜증난다. 들려오는 그의 목소리에 짜증이 나는 건지, 어쭙잖게 뛰어오는 자신의 심장 고동소리에 짜증이 나는 건지 그는 본인 스스로도 헷갈려 짐작할 용기조차 나지 않았다. 끝을 시작한 입장에서 네가 이래도 돼? 어디선가 들려오는 목소리에 그는 살짝 웃었다. 그러게, 내가 이래도 되는 걸까.
"안녕, 형."
"응, 안녕."
뒤를 돌자 여전한 그 모습에 어디선가 울컥하는 느낌이 드는 것 같기도 했다. 아, 괜히 서럽네, 진짜. 이제 인사두 했으니까 가도 되지? 성운은 접었던 우산의 손잡이에 다시 손을 가져다가 대었다. 그런 그의 행동을 다시 붙잡는 태현의 목소리에 그는 무언가 안도되면서 어딘가 철렁하는 느낌을 받았다. 으으, 이 느낌 너무 싫다.
"우리 어디 가서 얘기 좀 할래?"
"이제 와서?"
응, 이제 와서. 성운은 머리에 크게 내려앉는 두통을 느꼈다. 찡하고 울리는 두통에 그는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나 오늘 바빠, 안 돼. 그럼 내일. 성운은 저를 쳐다보는 태현을 보며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언가가 턱 끝에서 꿈틀대는 것을 느꼈다. 아, 정말 싫다.
"토요일에 만나."
"나 토요일에 일 있는 거 알잖아."
"그랬었나. 기억이 안 나네."
"너 답지 않네. 그럼 문자할게, 버스가 와서. 연락하면 답장해줘."
아깐 그렇게 기다려도 오지도 않던 버스가 이젠 잘만 오네. 괜히 버스정류장에 서는 버스를 노려보며 성운은 우산을 폈다. 오늘 왜 하필 이렇게 비가 와서, 왜 하필 이 정류장에서 이 버스를, 왜 하필 이 시간에 기다려서 피곤하게 진짜.
왜 헤어졌더라. 누가 너네 왜 헤어졌는데? 라고 물어보면 뭐라고 간단하게 할 말이 없었다. 주야장천 긴 이야기를 늘여놓자니 뭔가 구차해보이고 그렇다고 간단하게 그 형이 뭘 해서 우리가 헤어졌다고 하기엔 애매했다. 태현은 누가 찾아와서 너네 왜 헤어졌는데? 라고 물어보면 그저 걔가 헤어지자더라 라고 짧게 대답했다. 성운은 제 방 침대에 누워서 가만 생각했었다. 왜 헤어졌더라.
바쁘고 힘든 나날의 연속이었다. 그런 삶에서 피어난 그 관계를 성운은 잃고 싶지 않았다. 사랑은 말해야 알 수 있었고 보여줘야 믿을 수 있는 관계라 믿었다. 사랑하는 것은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힘들어도 보면 힘이 나는 그런 사랑을 잃고 싶지 않았다.
바쁘고 힘든 나날의 연속이었다. 그런 삶에서 피어난 그 관계를 태현은 잃고 싶지 않았다. 사랑은 믿음으로 키우는 것이라 믿었고 그것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고 믿었다. 힘들어도 보면 힘이 나는 그런 사랑을 잃고 싶지 않았다.
누가 그랬던 거 같은데 사랑받고 싶다는 말을 사랑한다고 하는 것이 비극의 시작이라고.
성운은 휴대폰의 화면을 키지 않았다. 사실 볼 용기도 없었다. 연락도 없는 휴대폰을 보면 괜스레 올라오는 서러움과 서운함에 일부러 전원을 꺼도 10분도 채 지나지 않아서 혹시 모른다는 마음에 휴대폰을 켰다. 바탕화면이 뜨고 조용한 휴대폰에 내려앉던 그 마음을 얼마나 붙잡았는지 성운은 이제 그 횟수조차 기억이 나지 않았다.
'많이 바빠?'
'응, 미안.'
기대는 곧 실망으로 커졌고 실망은 상처가 되어 그의 마음에 내려앉았다. 상처는 곪아 눈물이 되었고 상처가 덧나고 덧날 때 더 이상 그에게 그 어떤 고통도 주지 못했다. 그제야 마르지 않을 거 같던 눈물이 마르고 마음에 결심이 서던 날, 성운과 태현은 헤어졌다.
띠롱, 띠롱, 띠롱. 시끄럽게 울리는 휴대폰에 성운은 잠깐 자던 잠에서 깨어나 휴대폰을 보았다. 누가 이 시간에 문자를 보내... 시계를 보니 벌써 새벽 2시하고도 30분. 아, 진짜 매너두 꽝이지... 과거가 생각나는 찝찝했던 꿈을 떨쳐내며 휴대폰을 보자 그토록 원할 땐 문자 하나 없던 그 사람의 이름이 보이는 알람에 성운은 제 잠이 호다닥 도망가는 것을 느꼈다.
'언제 볼래?'
'토요일은 나 일이 있어서 금요일 저녁 괜찮아?'
'아, 이 시간이면 잘려나. 미안, 잘 자고 내일 답장 줘.'
아, 지긋지긋한 사람. 성운은 휴대전화를 덮고 다시 침대에 누웠다. 서서히 온몸이 침대 밑으로 꺼지는 기분에 성운은 두 눈을 다시 감았다. 이 사랑이 힘든 줄 알았음 시작조차 안 했을 텐데. 영원하지 않다는 걸 알면서 왜 영원할 지도 모른다고 믿었을까. 짜증나. 저 문자에 다시 심장이 뛰는 거 같아서 짜증나. 그냥 차라리 마음 편하게 모든 걸 끝낼 수 있음 얼마나 좋아.
'금요일 저녁에 보자.'
벌떡 일어나 문자를 보낸 성운은 휴대폰을 끄고 다시 누웠다. 턱턱 막히는 숨이 목을 죄는 밧줄인 마냥 불편했다. 이 두근거림이 무엇인지 정확히 정의내릴 수 없어 그는 이를 악 물었다. 억울해서 형 다시는 안 좋아해. 미련 안 가져. 헤어지던 날 밤 펑펑 울면서 말하던 그 말들의 기억을 끌어안으며 성운은 오지 않는 잠을 청했다.
"성운아, 오랜만이네."
사실 엄청 미련 남았었어. 성운은 태현의 얼굴을 보자마자 어딘가 무너지는 느낌을 받았다. 실은 몇 날 며칠을 울었는지 몰라. 미련이 자꾸 남아서. 누가 미련이 남는 건 그만큼 내가 진심이었다고, 난 정말로 좋아했다는 뜻이라서 미련이 남아도 된다고 그랬는데 난 왜 그 미련에 짜증이 났을까.
굳이 카페나 식당이 아니라 버스정류장에서 만나자는 저 사람을 어쩌면 좋을까. 분명 다 알면서 그러는 거야. 성운은 지끈거리는 거 같은 머리를 붙잡으며 태현의 옆에 앉았다. 왜 불렀어. 너 얼굴 보면서 얘기하고 싶어서. 헤어진 지 2주가 되어가는 이 시점에서 태현의 대답은 성운의 짜증을 불러일으키기에 적당했다. 사실 이 감정을 짜증이라고 불러도 괜찮은지 성운은 확신이 서지 않았다.
"우리 별로 할 얘기 없잖아."
"난 있는데."
하늘에 달조차 제대로 보이지 않던 밤이었다. 성운은 그 날 달이 보였는지 기억도 잘 나지 않았다. 눈은 울기 바빴고 머리는 생각을 정리한다고 이미 지친 상황이었다. 우리 그만하자. 왜? 성운은 이 이야기마저 얼굴을 보지 못한다는 사실에 울컥 눈물이 났다. 왜 이렇게 덤덤해 이 형은? 눈에서 후두둑 떨어지는 눈물이 대신 타자를 쳤다. 힘들어서. ... 그래, 알겠어. 4개월의 연애의 종지부가 이렇게 내려졌다.
"이제 와서?"
"응, 이제 와서."
대체 왜? 성운은 두 주먹을 꽉 쥐며 고개를 숙였다. 짜증나. 그 땐 그렇게 날 좋아하지 않는다는 듯이 굴어놓곤 왜 이제 와서? 성운은 태현을 쳐다볼 마음조차 들지 않았다. 애매한 자신의 마음이 싫은 건지, 그가 싫은 건지 구분조차 가지 않았다. 실은 그 둘 다 미워서 허공에 욕을 퍼붓고 싶었다. 아, 답답하네.
"내가 그 땐 너무 놀라서 그냥 알겠다고 했는데..."
생각해보니까 널 이렇게 보내긴 싫어서. 시간이 좀 지나긴 했는데 그렇다고 이대로 있을 순 없을 거 같았어, 성운아. 성운은 고개를 들고 하늘을 봤다. 맑은 하늘, 버스정류장. 그 땐 형 목소리만 또렷하게 들렸는데 이젠 아무것도 안 들리는 기분이야. 그는 숨을 크게 들이쉬고 내셨다. 아, 나 이제 알겠어.
성운은 저를 쳐다보고 있는 태현을 향해 고개를 돌려 그를 가만히 쳐다봤다. 이젠 애매하지 않아. 확실한 느낌이네. 처음부터 얼굴을 보고 했어야했나. 안에서 무언가 가라앉는 느낌에 그는 태현에게 작게 말을 건넸다.
"형, 우리가 헤어지구 나 진짜 힘들구 미련도 많이 남았었는데 그렇다고 그 때로 돌아가면 안 헤어지진 않을 거야. 계속 만나면 계속 힘들 테니까. 사람은 그렇게 쉽게 변하는 게 아니니까. 미안. 나 먼저 갈게."
비도 안 오는데 왜 자꾸 손에 물이 떨어질까. 축축하게 젖어오는 손을 차마 어찌할 수 없어 성운은 아래로 떨궜다. 얼굴이 젖어가면서 시야가 흐릿해졌다, 또렷해짐을 반복했다. 이젠 진짜 마지막으로 울 거야. 더는 울 일도 없겠지. 이제 진짜 마지막이네.
안녕, 형아.
태현은 버스 정류장에 앉아서 제 무릎만 쳐다보고 있었다. 어쩌다가 이렇게 됐더라. 비오는 날, 버스 정류장. 서랍 속 낡고 헤진, 더 만지면 이젠 찢어질 것 같은 그런 사진처럼 그 기억은 이젠 더 회상하면 찢어질 만큼 수도 없이 꺼내본 거 같았다. 그 땐 널 절대 놓치고 싶지 않았는데. 정말 영원을 기약했는데. 태현은 잔잔히 눈을 감았다.
그는 사랑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고 믿었다.
그의 애인은 말하지 않으면 알 수 없다고 믿었다.
비극은 이미 와있던 걸지도 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