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gary
Written by 아롬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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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에서 들리는 끊임없는 질문이 거슬렸는지 성운은 인이어를 거칠게 뺐다. 그는 고개를 돌려 아무도 남지 않은 그 곳에 혼자 서 있는 한 인영을 바라본다. 관심 없는 듯이 시선을 돌린 성운은 자신의 짐을 정리하기 시작한다. 자신이 먼저 바라보았지만 먼저 시선을 돌리는 모순적임에 헛웃음을 지은 성운이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 고개를 숙이고 있던 그의 눈동자에 한 남성이 비친다. 성운과 비슷한 옷을 입고 있던 남자는 성우였다. 성운은 성우를 옆으로 밀치곤 지하에 주차된 차로 향했다. 성우는 익숙하다는 듯 발을 맞춰 걸으며 말을 걸기 시작했다. “오늘은 나 안 겨누고 잘 넘어갔네요?”, “인이어는 어디 갔어요?”, “거기 되게 정신없었는데 형 생각하면서 참았어.” 라는 등 하나같이 쓸데없는 말들이었지만 심장이 터질 듯이 빨리 뛰던 그 순간을 잊을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었다. 차에 도착하자 성우는 운전석으로 향했다. 성운도 뒷좌석을 열고 가방을 던진 뒤 조수석으로 향했다. 성우는 또 한 마디를 거들었다.
“형 뒷자리에 앉는 줄 알고 깜짝 놀랐네.”
“네가 내 기사도 아닌데 내가 왜 뒷자리에 앉겠냐?”
“오~. 그래도 파트너인 건 알고 있었나봐?”
“아직도 출발 안 했어?”
항상 틱틱 대고 새침한 성운이지만 그게 진심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성우는 성운과 알게 된 지 어연 7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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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전하는 내내 성우는 얼굴에 미소만을 남겨놓고 있었다. 그러나 보스의 집무실에서 나오자마자 미간을 찌푸리는 성우였다. 그리고 목소리가 서서히 커졌다.
“형한테 보디가드를 붙인 이유가 뭐겠어.”
“그러게. 내가 못 미더웠나?”
“장난해? 성운이 형, 제발. 장난치지 말고, 견제이자 불신이잖아요. 알고 있으면서 왜 그래. 나 아직 대답 기다리는 중이에요.”
“아니. 나도 항상 말하지만 안 돼. 너무 드라마 대사 같아서 말하기 거북하긴 한데 우리 너무 늦은 거 알고 있잖아?”
“...”
“난 너보다 일찍 이 곳에서 생활했어. 우리가, 아니 내가 손 턴다고 해도 난 이것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어.”
“그건 찾으면 돼요. 뭐라도 하면 될 거 아니야.”
“그렇게 찾다가 다시 이 일로 오게 될 텐데 뭐하러 그래.”
성우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7년간 본 형의 모습은 뱉은 말을 어기는 법이 없었기에 더 이상 같은 말을 해도 자신의 입만 아플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성우는 생각했다. 내가 이 사람을 지킬 수 있을까? 지켜도 될까? 이 곳으로 발을 들인 7년 전부터 항상 가지고 있던 생각이었다. 성우가 처음 성운과 마주한 날은 성우가 성운에게 반한 날과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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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보다 한 살이 많은 형이었지만 내 체격보다 작은 모습이 흥미로웠다. 그리고 작은 몸에서 나오는 다양한 분위기가 신기했다. 건물 곳곳을 돌아다니며 나에게 설명해주는 모습이 진중해 보였었다. 총을 쥐는 법과 보관하는 법 등을 가르쳐 줄 때에는 존경했었다. 어느 날 임무를 실패했다며 내 품에 안겨 우는 모습을 보였을 땐 기분이 좋았다. 이 사람이 드디어 나에게 기댈 수 있구나 라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말했다. 당신을 내가 좋아한다고, 내 목숨을 바쳐서 라도 당신을 구할 마음이 있다고, 그러니까 나와 이 일을 그만 두자고. 형은 아무 말이 없었다. 그저 내 눈을 바라보며 눈물을 닦아냈다. 난 아직 대답을 듣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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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성우는 더욱 화가 났던 걸지도 모른다. 이 바닥에서 ‘킬러의 보디가드’는 의심을 사기에 충분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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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운 성운의 집 복도에 한 남자가 서있다. 성운이 비밀번호를 누르며 입을 열었다.
“당신인가봐요?”
“황민현입니다.”
“하성운입니다. 이미 알고 계시겠지만.”
그 후 성운이 먼저 말을 꺼내지 않자 정적이 성운의 집을 채웠다. 아무런 움직임 없이 눈만 마주치고 있자 현관등이 꺼졌고 성운은 그제서야 집 안으로 들어왔다. 평소와 다를 것 없는 움직임뿐이었지만 이 집에는 혼자가 아닌 둘이 있었다. 성운이 소파에 앉아 민현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제 첫인상이 어때요?”
“옷이 비싸 보이시네요.”
“또?”
“피부가 하야시네요.”
“더 없어요?”
“제 이상형이시네요.”
주고받는 대화가 처음 만난 사람들이라고 하기엔 자연스러웠다. 성운은 고개를 숙여 한 번 웃고는 입 밖으로 나오려는 말을 삼켰다.
‘다시 봐도 당신은 내 타입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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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현과 성운이 보디가드와 킬러의 관계를 가진지 한 달이 되어가자 둘의 관계는 약간의 진전이 있었다. 가끔 성운은 지루하다는 듯 자리를 피하거나 민현에게 직접적으로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민현은 그 모든 투정을 다 받아주었다. 보디가드라는 명목으로 같이 살고 있던 집도 성운만 살고 있었을 때 보단 활기가 돌았다. 그리고 2월14일이 되었다. 성운의 제안으로 오랜만에 민현은 검은 정장을 벗고 둘이서 길가를 걸어가고 있었다. 친구 또는 연인 같은 대화를 이어가던 둘이었다. 그때 민현의 시야 곁으로 한 사람이 보였다. 첫 만남이 아니었다. 성운이 자리를 파할 때는 항상 그 사람과 있었고 민현과 성운 둘만 있을 땐 자연스럽게 끼어들어 성운의 시선을 가져 가기도 했던 사람이었다. 민현은 속도를 줄여 성운과 멀리 떨어졌고 그제서야 그 사람은 민현에게 접근하기 시작했다. 성운의 파트너인 성우였다.
“보호가 목적인 건 맞는 겁니까?”
“죄송하지만,”
“발설할 수 없다 라는 당연한 말을 하시려나.”
“알고 계시면 길 좀 비켜주시겠습니까? 성운씨가 걸음이 좀 빠른 편이라서. 놓치면 보호 하기가 힘들 것 같은데.”
별다른 대꾸를 할 수 없었던 성우는 옆으로 한 걸음 물러났다. 고개는 앞을 향했지만 시선은 옆으로 두어 경계심을 표했다. 짧은 만남이었다. 둘만 있었던 것도 처음이었다. 좋은 인상을 남기지 못했던 둘은 그렇게 관계를 유지했다. 민현이 가볍게 뛰어 성운의 뒤로 향하는 것을 뒤에서 보고 있던 성우는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버리지 못했다. 확신에 찬 눈빛이었다, 그러나 지금 민현을 없앨 방도가 없었다. 약속한 시간은 아직 멀었기 때문에. 결국 성우를 뒤로 하고 민현과 성운은 성운의 집에 도착했다. 집으로 향하는 길 동안 아무 말도 없던 성운은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자 바로 입을 열었다.
“나 물어볼 게 있는데 해도 되나?”
“하시죠.”
“내가 당신 이상형이라고 했죠? 근데 왜 아무 짓도 안 해요?”
“아직은 때가 아닌 것 같아서요.”
“당신이 말하는 때가 언제길래? 아무도 없는 곳? 내가 사라져도 아무도 모를, 지금? 그렇다면 나 오늘 기회 되게 많이 준 거 같은데.”
성운의 의미심장한 말이 끝나자 민현은 성운에게서 멀어져 벽에 기대섰다. 미소와 다정한 눈빛만 띠던 민현의 얼굴에 무표정이 들어선 첫 순간이었다.
“모를 줄 알았나 봐, 그런 표정을 짓는 걸 보니. 조준경으로 훑어 본 당신 얼굴도 참 맘에 들었었는데 실제로 보니까 더 괜찮더라고, 당신 얼굴. 그래서 놔뒀어. 내가 왜 죽어야 하는지 이유가 궁금하기도 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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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뜰 때까지 많은 시간이 남은 새벽 성운은 바람을 맞아 가며 옥상에 누워 조준경을 통해 한 남자의 머리를 겨누고 있다. 계획해 놓은 미션이 시작되는 3시가 되기까지 시간이 넉넉하기에 성운은 주변 사람들을 하나하나 관찰하기 시작한다. 그러다 발견한 한 사람은 검은 정장을 입고 있었다. 유난히도 긴 권총이 보관된 유틸리티 벨트가 그의 허벅지 라인을 더 돋보이게 했다. 조준경을 천천히 움직이며 그 사람을 훑어보던 성운의 조준경이 그 사람의 얼굴로 향했을 땐 총알이 성운의 귀 옆을 지나갔다. 성운은 당황해 총알이 지나간 곳을 쳐다봤고 그 뒤 총알이 날아온 방향을 쳐다봤다. 그 사람의 허벅지에 있던 권총은 총구가 성운에게 향한 채로 그의 손에 있었다. 곧이어 성운의 인이어로 성우의 목소리가 들렸고 성우의 목소리는 다급해 보였다. 함께 미션을 계획했던 사람들은 아무도 없었다. 함정에 걸린 듯한 느낌에 성운은 건물 옥상에서 내려와 지상으로 향했고 성우는 평소와 같이 성운은 데리러 갔다. 그 모습을 검은 정장의 남자와 성운과 성우의 타깃이었던 남자가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약 일주일 후 성운은 그 남자를 다시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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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 들으면 놀랄텐데. 나지막한 민현의 말이 휑한 복도에 퍼지고 메아리가 그 공간을 채웠다. 성운의 대답을 기다리는 듯 한차례 길었던 텀이 생기고 민현은 말을 이어갔다.
“일주일 전 3시 당신의 타겟이 누군지 알아? 그리고 당신이 이 곳에 오게 된 이유도. 그걸 알려면 시간이 너무 필요하려나?”
“넘어갈 생각 말고 제대로 말해.”
“네가 찾는 게 더 재밌지 않을까?”
말이 안 통할 것 같다는 걸 알았는지 성운이 손을 안주머니로 옮겼다. 그 안에 있던 것은 그 날 민현이 가지고 있었던 것과 같은 모델은 권총이었다. 살짝 깔아 내린 눈을 하곤 성운은 다시 물었다. “사람 죽고 죽이는데 이유가 없긴 한다지만, 좀 억울하잖아? 내가 죽는데 남이 돈을 받으면 쓰나.” 그래서 선물을 좀 준비했어. 이미 만난 적 있을텐데. 성운의 말이 끝나자 복도의 반대편에선 성우가 걸어나왔다. 그리고 민현에겐 두 개의 총이 겨누어 졌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성우에게도 하나의 총이 겨누어 졌다. 복도엔 더 이상 메아리도 들리지 않게 되었다.
우리의 발렌타인데이는 쓴 맛 뿐이었다. 잠깐의 달콤한 또한 쓴맛을 잠시 막아 놓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