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왕자
Written by Yiss
친구가 좋으면 친구랑 놀아. 같이 있는 지금 이 순간까지 핸드폰을 붙잡고 친구와 연락하는 너를 나는 어떻게 하면 될까. 나랑 대화하기 싫어? 답도 없는 벽에 혼자 얘기하는 거에 지쳐서 목소리가 높아지니 그제서야 우진은 폰을 뒤집고서 성운의 얼굴을 쳐다봤다.
-형, 미안. 뭐라고 했어?
-.... 우리 그만하자.
-어?
-친구랑 사겨. 친구가 그렇게 좋으면.
-미안, 내가 잘 못했어.
또였다. 항상 별 감응없이 뱉는 미안하다는 말. 뭘 잘 못했는지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잘 못했다는 말을 뱉어내는 우진에게 이제는 상처 받을 만큼 받은 제 마음이 안쓰러웠다. 처음에는 잘 못했다는 말에 약해져서 넘어갔던 날들. 그게 쌓였다. 뭐를 잘 못 했는데? 사귀는 사이에 가장 싫다는 그 말. 뱉기 싫어도 뱉을 수 밖에 없었다. 그만두자 이제 진짜. 매번 성운이 하는 투정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정말 헤어지자며 카페를 뛰쳐나가 안 들어올 줄 몰랐다. 그냥 친구와 얘기한 것뿐인데 성운은 매번 날을 세우는 것만 같았다. 우진이 하고 있는 게임이 오늘 경험치 이벤트를 하는데 그것도 다 제쳐놓고 나온 거였다. 되는 게 없는 하루였다. 애써 공들인 머리를 헤집어서 헝클었다.
-박우진.
-왜 또.
-너 또 성운이 형이랑 싸웠지?
-알면 좀 끊어라.
-할 거 없으면 올래? 여기 니네 동네 PC방.
-....갈게. 기다려.
어차피 이렇게 된 마당에 경험치나 올리자며 친구인 영민이 있는 PC방으로 향했다. 성운과 이별한 건 아프지만, 그렇다고 못 견뎌낼 정도는 아니었다. 정신없이 휘몰아치는 게임을 하다 보면 제 이별은 별개의 문제였다.
-너 가서 형한테 빌어야 하지 않아?
-헤어지자는 데 뭐라 그래야 하는데.
-헤어지자 했다고 형이?! 그런데 오늘 이렇게 있다고?
-그럼 뭐 어쩌라고. 형이 왜 그러는지 진짜 모르겠는데.
오늘 하루 일진이 정말 최악이었다. 게임도 계속 안 풀리고, 머리는 복잡하기만 했다. 게임 하는 중이면 핸드폰도 잘 안 보던 우진이었는데, 오늘따라 아무 연락도 없이 잠잠한 핸드폰에 눈길이 더 갔다. 평소 같으면 톡이 몇 개씩 떠 있었을 제 폰을 툭툭 때렸다.
-영민아, 여기 전화되는 거 맞지?
-왜?
-나한테 전화 걸어봐.
영민이 우진의 번호를 누르자 바로 영민의 번호가 폰에 떴다. 통신은 잘만 되는데, 정말 조용히 시계 역할을 하는 제 폰을 보고 있자니 마음 한 편이 불편했다. 되지도 않는 오늘은 게임 그만 접고 성운에게 간다며 일어섰다. 성운의 번호를 몇 번이고 눌러도 꺼져있다며 연결되지 않는다는 목소리에 더 애탔다. 성운의 집 초인종을 누르니 깜깜무소식이었다.
-뭐가 불만인지 말 좀 해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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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살 차이. 이 나이라는 게 뭐라고 항상 걸림돌이었다. 이 걸림돌이 노력하면 다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게 성운만의 생각이었나 보다. 나이보다 어른스럽다고 생각한 우진은 영락없이 게임 좋아하고 친구 좋아하는 어린 스무 살이었다. 뭐가 먼저인지 나중인지 알지 못해서 날뛰는 어린아이 같아 보였다. 친구들에게 우진을 소개했을 때 반응은 축하보다 걱정이 먼저였다. 어린애랑 사귀는 거 괜찮겠냐고. 처음에는 그게 무슨 말인지 몰라서 스무살이면 성인인데 뭘 걱정하느냐며 반문했다. 그게 그런 뜻이 아니라는 건 시간이 많이 지나지도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금방 알아버렸다.
-내가 먼저였으면 좋겠는 거. 그게 그렇게 큰 바람이야?
지훈은 술도 못하면서 혀는 다 꼬여서 해롱거리는 성운을 챙기기 바빴다. 하성운의 가장 친하고 가장 아끼는 동생으로 괜히 잘못 묶여서 고생이라 생각했다. 반복이었다. 우진과 싸우면 성운은 지훈을 불러내서 밥을 먹이고 자기 자신은 이기지도 못하는 술을 찾았다. 처음에는 그 말을 주억거리며 다 받아주다가도 짜증이 났다. 그렇게 피 터지게 싸우고 아무리 말을 해도 안 들으면 헤어지면 안 돼? 지훈의 질문에 쓰게 웃는 얼굴이 더 슬퍼 보였다. 너도 아직 어려서 몰라.
-내가 뭘 몰라. 형 맨날 나 불러내서 이렇게 술만 먹을 거면 나 갈래.
-맞다, 맞다. 우리 지훈이 시험 기간이지. 형이 잘 못 했네.
도돌이표는 오늘도 반복이었다. 우진과 싸우고 애꿎은 지훈에게 속풀이하고. 푹 퍼져버린 성운의 폰을 또 뒤져서 우진의 번호를 찾았다. '짹짹이♥' 저장도 꼭 자기같이 했어. 까만 하트 가득히 지훈은 자신이 들어갈 수 있는 빈자리는 요만큼도 없어 보여 더 짜증이 났다. 신경질적인 마음에 번호를 꾹 눌러서 전화를 거니 금방 신호가 끊어지고 수화기에서 상대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보세요? 성운이 형 내가 잘 못 했어.
-..... 형 데려가.
-...어디야 거기?
-항상 먹었던 데.
전화를 끊고 자는 성운의 볼을 꾹 찔렀다. 대체 나한테 왜 그래요. 나 형 되게 오래전부터 좋아했단 말이야. 난 형을 항상 먼저로 생각할 수 있는데. 대답 없는 물음과 고백은 우진과 사귄 뒤로 계속이었다. 지훈의 마음을 알지도 못하면서 속을 긁는 성운이 미워서 볼을 꼬집었다. 지훈이 대학에 들어가서 제일 처음으로 사귄 우진을 성운에게 소개해준 것부터가 잘 못이었다. 친한 형과 친한 친구가 친해졌으면 하는 바람. 그저 좋은 의도에서 시작한 지훈의 행동으로 인해 둘이 사귈 거라 생각하지 못했다. 성운이 대학에 들어가서부터 시작한 이 떨림을 지훈은 밖으로 표현도 하지 못하고 삭힌 지가 벌써 5년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은 사람이 사람의 마음을 얻는 일이야.'
성운이 매일 같이 말하던 말. 처음에는 그 말의 의미를 몰라 지훈은 갸우뚱했었다. 그게 왜 어려워? 그냥 친해지고 싶다, 이렇게 말하면 되는 거 아닌가. 해가 지날수록 성운의 말이 너무 잘 이해되었다. 지훈이 바란 마음은 그저 그런 친한 형 동생의 관계에서 나오는 마음이 아니란 걸 알면서 더 슬퍼졌다. 나도 형의 마음을 얻고 싶어. 죽이려고 계속해서 노력하는 중이었다. 괜히 마음을 보였다가 지금의 이 소중한 친한 형 동생마저 하지 못 할까 봐 겁이 났다. 형의 웃는 얼굴을 볼 수 있으면 지금의 이 관계도 괜찮다고 자신을 위로하다가도 욕심이 났다. 나를 보고 웃어주면 안 돼? 나만 보고 웃어주면 안 돼? 나 때문에 웃어주면 안 돼?
-성운이 형 얼마나 마신거야 대체.
-....왔어?
-박지훈 넌 형이 이렇게 마시면 좀 말리던가.
말리라는 타박에 아무 말도 못 하고 우진의 등에 업히는 성운만 눈에 쫓았다. 지금 나가면 바람이 찰까 싶어서 지훈은 자신이 하고 나온 목도리를 성운의 목에 칭칭 감겼다. 우진이 성운을 집에 데려다주고 술 안 마셨으면 자신과 한잔 하자는 말에 지훈은 말을 아꼈다. 두 사람 사이에 껴서 뭐하는 짓이야. 애꿎은 핸드폰만 만지작거렸다. 성운을 집에 잘 데려다줬다는 우진의 톡에 지훈은 자신의 가방을 들고 성운과 같이 앉아 있었던 술집을 벗어났다.
[박우진 나 급한 일 생겨서 술 못 마실 거 같아.]
이 늦은 밤에 급한 일이라는 건 있을 리 없었다. 우진과 마주하고 술을 마시다 보면 지금 성운을 향한 자신의 마음이 툭 튀어나올까 피했다. 편의점에 앉아서 맥주 한 캔을 뜯었다. 훤하게 드러난 목이 유난히도 시렸다. 그 시리고 시린 찬 바람이 지훈의 마음에도 불었다. 이제 정말 마음을 끝내야지. 다짐만 수백 번을 하고 방황했다. 우진과 사귀고 처음에는 행복해 보이던 성운을 보며 쓰게 웃었다. 형이 행복하면 됐어. 얼마 지나지 않아서 성운의 얼굴에 환한 웃음이 보이지 않았다. 예전에 작은 것 하나하나에 미소를지었는데. 속상했다. 오늘따라 새까만 밤하늘에 유난히도 혼자 반짝이는 별이 슬퍼보였다.
===
-지훈아 나 술 얼마나 마셨어?
-형 많이 마셨지. 기억 안 나?
-으응, 혹시 우진이가 나 데려다줬니?
-.....아니.
-그래?... 알았어. 푹 쉬고.
금방이라도 들통 날 거짓을 말한 건, 괜한 질투심이었을 지도 모른다. 헤어졌다고 말한 마당에 끝난 관계가 혹시라도 제 말 한마디로 다시 이어질까 봐. 간절했다. 성운이 자신의 친구인 우진이 아닌 자신을 보길. 지금 아픈 성운의 곁에서 머물면 자신을 봐주지 않을까. 말도 안 되는 단 몇 퍼센트의 희망이었다.
-박지훈 너 뭐해.
-어?
-시험 끝났는데 PC방 가야지.
그 일이 있고부터 2주가 지났다. 기말고사는 끝났고, 우진과 성운은 더이상 어떻게 된 일인지 지훈은 알 수 없었다. 우진도 성운에 대해 더이상 말하지 않았고, 성운도 지훈에게 우진의 안부를 묻지 않았다. 정말 끝이 난 건지 물어보기 조심스러웠다. 혹시라도 다시 만난다는 이야기를 듣는다면 자신이 너무 비참하기에 지훈은 말을 선뜻 꺼내지 못했다.
-나 약속 있어.
-누구랑?
-...내가 말하면 너가 다 아냐.
-성운이 형이랑 있지. 너.
-.....
성운과 연락이 되지 않은 지도 일주일째였다. 연락이 되지도 않는데 약속이 있을 리도 없었다. 그냥 우진과 단둘이 있으면 더 성운이 생각나서 둘러댔을 뿐이었다. 성운의 이름이 우진의 입에서 들으니 더 마음이 죄여왔다. 맞다 아니다 대답도 못 하고 그저 우진을 쳐다봤다. 화가 나 보이는 우진의 표정에서 지훈은 더 입을 닫았다.
-형이랑 연락이 돼?
-.... 끝났다며.
-뭐?
-형이랑 너 끝났다며. 왜 자꾸 연락하는데.
-야!
-형한테 연락하지 마.
참고 눌렀던 마음이 결국 비집고 가시처럼 삐죽 솟았다. 우진과 대화를 채 끝내지도 않고 성운의 집으로 내달렸다. 형, 나 좀 봐줘. 나는 형에게 길들여져 형밖에 볼 수 없나 봐. 성운의 집 문을 두드리고 난리를 쳐도 아무런 반응 없는 침묵이 길어졌다. 등을 문에 기대서 쓰러져 내렸다.
-.....형 제발.
꾹 닫혀 있는 문이 꼭 성운의 마음 같았다. 제가 아무리 들어가려고 발버둥을 쳐도 열리지 않는 문에 지훈은 항상 목이 메말랐다. 성운이 말해준 사람이 사람의 마음을 얻는 일이, 그게 세상에서 제일 힘든 일이라는 말. 이 말이 어린 왕자에 나오는 말이라는 걸 알고 지훈은 그 책을 몇 번이나 반복해서 읽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나를 좋아해 주는 건 기적이야.'
기적을 바랐다. 같은 곳을 바라보는 친한 형 동생 말고, 서로를 바라보는 사랑이 하고 싶었다. 땅으로 꺼진 것인지 하늘로 솟은 것인지 알 수 없는 성운을 하염없이 기다렸다. 그게 얼마나 지났는지 해가 바뀌려 했다. 차디찬 눈이 내리는 겨울. 그 날도 어김없이 닫혀있는 성운의 집에 가려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띵동- 울리는 초인종 소리에 나가보니 택배 하나가 지훈의 앞으로 배달되었다. 누가 보냈는지 쓰여있지도 않는 그런 택배. 택배 상자를 조심히 여니 많이 보던 물건 하나가 눈에 띄었다.
-..... 제발.
어디서 들킨 걸까. 언제 들킨 걸까. 성운이 우진과 헤어지자며 싸우고 지훈을 불러내 술을 마신 그 날. 그날 제가 성운에게 매준 목도리만 덩그러니 안에 들어있었다. 아무런 쪽지 이런 거 하나 들어있지 않고 그냥 목도리 단 하나만.
===
드문드문 끊어진 성운의 기억에 단 하나 기억나는 건, 지훈이 취한 제게 했던 말이었다. 자신을 좋아한다는 지훈의 말에 언제부터였는지 물어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어쩌면 아주오래 전부터 눈치채고 있었던 마음을 애써 친한 형 동생으로 가둬둔 거였으니. 성운은 어찌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해서 도망쳤다.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그날 기억이 안 나. 그 말로 지훈의 마음을 모른척했다.
-지훈아 나 술 얼마나 마셨어?
-형 많이 마셨지. 기억 안 나?
-으응, 혹시 우진이가 나 데려다 줬니?
-.....아니.
-그래?... 알았어. 푹 쉬고.
그날 그렇게 술을 마시고 제집에 들어서서 우진과 침대 위에서 입을 맞췄다. 헤어지자고 말해놓고 목을 감싸서 떨어지지 않았다. 밤을 같이 보내고 다음 날 아침에 시험 때문에 일찍 간다는 우진의 쪽지까지 확인했다. 그리고서 지훈에게 전화를 걸었었다. 다 알고 물은 질문이었다. 아니라고 대답하는 지훈의 목소리에 눈을 감아내렸다. 바닥에 아무렇게나 뒹굴고 있는 지훈의 목도리를 들어 올렸다. 조심히 먼지를 털어내고서 소중하게 걸어두었다. 누군가가 자신을 위한 마음의 한 조각이니.
[형 일어났어? 속은 괜찮아? 내가 잘 못했어.]
우진에게 온 톡에 마음이 답답해졌다. 아무것도 모른 척 굴고 싶은데 표정은 그게 되지 않았다. 자꾸 미간이 구겨지고 목이 메어왔다. 자꾸 지훈이 한 말이 떠올랐다. 얼마나 오래전부터인지 가늠할 수도 없었다. 항상 제 곁에서 잔뜩 아픈 눈으로 지켜봤던 게 언제부터였더라. 머리가 아파져 왔다. 둘 사이에서 저만 빠지면 모든 게 다 괜찮아질 일인 것 같았다. 모든 게 전부. 지금은 우리 모두 다 슬프겠지만, 그 슬픔이 가시고 나면, 그러면, 우리 모두 웃을 수 있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