벚, 로망스 다리
Written by Yiss
어디 보자... 카메라 챙겼고, 지갑이랑 핸드폰 챙겼고 다 된 거 같다. 오늘 같은 진해 군항제가 한창인 때 성운은 유독 바빴다. 제 연인인 민현의 학교인 해군사관학교를 자유롭게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날이었고, 올해는 해사 생도들의 분열 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고 했다. 그래서 군항제 날짜가 뜨면 날짜에 맞춰서 가장 먼저 기차표와 숙소를 예약했다. 제 연인인 민현은 무리해서 오지 말라고 항상 말려도 무리를 해서라도 일정을 미루고 뺐다. 그래야 민현의 모습 한 번이라도 더 보니까. 민현과 성운이 사귀게 된 시기는 진해 군항제 기간이었고, 장소는 여좌천의 벚꽃이 가득한 로망스 다리였다. 다리 위에서 떨어지는 꽃잎을 구경하던 성운을 붙잡고 떨리는 목소리로 저.....커피.... 한 잔 괜찮으십니까? 하던 민현이 성운 옆에 서게 된 것도 벌써 2년째다.
-여보세요.
-네 여보입니다. 자기야 언제 출발해요?
-아 뭐야아. 곧 출발해. 자기 퍼레이드 시작할 때쯤 도착하겠다.
-알겠어요. 조심히 와요. 오다가 남자 조심하고, 여자도 조심하고.
-아아아아아, 내가 애야?
-응 황민현 애기.
-아 끊어 끊어.
전화를 끊고 폰 화면 속에서 해사하게 웃는 성운의 얼굴이 떴다. 민현은 오랜만에 보는 성운의 얼굴이 너무 너무 보고 싶었다. 한동안 성운도 바빠서 못 내려왔고 민현은 서울 외출이 어려우니 꼬박 1달만의 성운이었다. 해군사관학교 입학하고서 제일 싫은 게 뭐냐고 물으면 민현은 서울과 너무 너무 너무 멀다는 점을 꼽았다. 다른 건 참을 수 있었다. 육지에서 하는 상륙작전을 체험하는 것도 바다 훈련이 고되고 짜증나도 참을 수 있었다. 처음엔 익숙하지도 않던 파도 타는 생활은 점차 나아져만 갔다. 불편한 제복을 매일 입는 것쯤이야. 이제는 평상복을 입는 게 오히려 어색했다. 해사 생도 대부분이 그렇듯 연애를 한다는 게 상대에게 못 할 짓이라고 혀를 내둘렀다. 상대가 멀리 살면 멀수록 보기 힘들었고 작전 훈련을 나가거나 해상에 있을 때는 연락이 안 되기 일쑤였으니까. 그래도 이 모든 생활을 버티게 해준 건 성운이었다.
-어이, 황씨 오늘도 성운씨 오나보네. 표정 좋은데~
-아, 방금까지 엄청 기분 좋았는데... 운이 사진으로 소독해야지.
-아, 난 정말 커플이 싫다.
-네, 솔로의 푸념 잘 들었습니다.
-넌 나중에 졸업하고 임관할 때 어쩌려고 그러냐.
-죽어도 서울 가까이 가야지.
-거기서 황민현을 소위로 받아준데?ㅋㅋ
-넌 내년 임관식 때 보자. 4년 내내 솔로로 지내서 임관식에 혼자 꽃목걸이 걸고 임관 반지에 뽀뽀하는 거 내가 동영상으로 남겨놓고 네 부대에 뿌릴 거야.
-와, 개 못돼 먹었어.
해사 동기와 농담 따먹기를 하는 동안 해사 분열퍼레이드를 시작한다며 전체 대기명령이 떨어졌다. 민현은 거울 앞에 서서 검정과 흰색이 조합된 예복을 바로 하고 모자를 눌러썼다. 오늘 성운이 와서 보기로 했으니 조금이라도 더 멋있는 모습으로 제가 하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수많은 생도들 사이에서 저를 잘도 찾아내서 사진에 담는 성운이었으니까.
[미녀나, 나 도착했어요~]
민현은 도착했다는 성운의 톡을 확인하자마자 전화를 걸었다. 드디어 성운과 한 공간에 있게 되었다. 빨리 공연 끝나기를 기도해야하나. 신호가 끊기고 성운의 목소리가 들렸다.
-웅, 나 여기 학교 안이야.
-어디쯤에 있어?
-엉? 잘 안 들려 민현아 크게 말해 봐.
-형. 어. 디. 에. 있. 어?
-........ 민현아, 여기 너무 시끄러워서 통화 안 될 것 같아. 톡 해 톡.
민현은 잘 안 들린다며 톡으로 얘기하라고 끊겨버린 전화에 입맛만 다셨다. 목소리 한번이라도 더 듣고 싶었던 건데. 안 들린다니 어쩔 수 없다며 톡으로 어디쯤에 있냐고 물으니 제 위치를 찍어서 보내주는 성운이 귀여웠다. 아, 민현은 제 모습이 그나마 보이는 건 오른쪽인데..
-생도들 나갈 준비한다.
[우나 나 오릉ㄹ쪽에 마니ㅏ 나오ㅓㅏ]
오타를 확인할 세도 없이 급하게 보낸 톡이었다. 휴대폰을 가방에 쑤셔놓고서 민현은 대열에 서기 바빴다. 제발 성운이 자신이 방금 보낸 톡을 제대로 이해하길 바라면서. 우렁찬 악기소리가 시작되고 박자에 맞춰서 칼 같은 각도를 유지하면서 입장했다. 분열을 수백 번 연습하고 수십 번도 더 실전에 섰지만 성운이 보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떨렸다. 긴장해서 떨리는 건지 끝나고 나서 성운을 볼 생각에 떨리는 건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퍼레이드를 하는 동안은 집중을 하느라 사실 성운이 어디에 앉아있는지는 볼 수도 없었고, 대열을 맞추고 걷느라 정신이 없어 성운이 이 곳 어딘가에서 저를 보고 있다는 것만 인식할 뿐 찾는다는 건 무리였다. 퍼레이드는 끝을 향해 달렸고, 동작도 마무리만 남았다. 민현은 끝까지 실수 없는 클리어를 위해서 설레는 마음을 좀 더 눌렀다. 이 행사만 끝나면 성운을 볼 수 있다. 이 마음 하나로 버티고 달려왔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퍼레이드를 마무리하고 민현은 대열 안에서 고개를 들어 성운의 위치를 찾을 수 있으려나 재빠르게 눈을 굴렸다. 저 안에서 제일 예쁜 제 연인. 웃으면서 손을 흔드는 성운이 멀리서 콩알만 하게 보였지만 그래도 한눈에 알아봤다. 민현은 저도 손을 들어 인사해주고 싶었지만 참고 줄에 맞춰서 퇴장을 했다. 퇴장을 하고 제일 먼저 가방에서 휴대폰을 들어 성운에게 톡을 보냈다.
[운아, 오늘 더 예쁘다. 예복 갈아입고 곧 갈게 앉아있어.]
민현은 제 예복을 벗어 해사 정복으로 갈아입고 제 예복을 바로 밑 후배에게 챙겨달라고 맡기고서는 급하게 빠져나왔다. 예복을 누군가에게 맡기면 교칙 위반이라는 걸 알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그걸 들고 성운을 볼 수는 없었으니까. 마음이 급했다. 발걸음을 빨리 옮겼다. 숨이 차오르고 땀이 났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성운을 본다는 게 먼저니까.
-민현아!!!
-필승.
-필승. 오늘 짱짱짱. 저번 5월 옥포제 때 분열하는 거 못 봐서 아쉬웠는데 오늘 드디어 봤다
-안 추웠어?
-응 날 따뜻해서 괜찮았어. 밥은 먹었어?
-아니, 먹으러 가자 운아.
한 달 만에 본 성운은 약간 살이 오른 것도 같고, 전에는 갈색 머리였는데 이번에 볼 때는 검정으로 염색한 머리여서 새로웠다. 조그만 손을 맞잡고 운동장을 벗어나자마자 진해 온 시내가 벚꽃에 뒤덮인 풍경을 민현은 매일 보던 거지만 오늘따라 색달랐다. 운아 너랑 봐서 매일 보던 풍경도 다르게 느껴지는 걸까.
-내년에는 여기 벚꽃 피기 전에 오겠다. 그치?
-음... 임관식이 3월이니 아무래도?
-아쉽다. 매년 너랑 벚꽃놀이 오는 것 같아서 좋았는데.
-난 매년 너 혼자 먼저 보게 해서 미안했는데.
-대신 끝나고 제복 입은 멋있는 누가 에스코트 해주니까 좋아.
-...... 장교 배지 달면 제일 먼저 제복 단추 가져가.
-아 진짜? 여자 생도들 우는 거 아니야?
-지켜야지. 꼭 손에 두 번째 단추 쥐어줄게.
사관학교에서 벗어나 둘이 처음 만났던 여좌천 로망스 다리로 향했다. 언제 가도 사람이 많아서 정신없었지만 이런 정신없는 와중에 저에게 커피 한잔 괜찮겠냐고 묻던 민현이 생각났다.
성운은 재작년 4월에 혼자서 진해의 벚꽃을 즐기러 기차에 몸을 실었다. 그리고 유명하다는 여좌천 로망스다리를 제일 나중으로 미뤄두고 벚꽃이 만개한 기찻길로 유명한 경화역부터 시작해서 이곳저곳을 즐기고 있었다. 로망스다리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해가 져서 가로수 불빛과 알록달록 조명으로 색칠된 다리가 화려했다. 길가 담벼락에 예쁘게 그려진 벚꽃과 실제 벚나무에 핀 벚꽃이 예뻐서 한참을 쳐다보았다. 따뜻한 바람 사이로 느껴지는 벚꽃 향에 취했고 바람에 흩날리는 벚꽃잎 마저도 기분 좋았다. 그런 제게 하얀색 제복과 정모를 쓴 키가 큰 남자가 말을 걸어왔다.
-저...... 커피.... 한잔... 괜찮으십니까?
-네..?
-아... 너무 예쁘셔서..
-..... 혼자 즐기고 싶었는데..
-.....
-그래도 괜찮을 것 같아요. 해요 우리, 커피.
민현은 놀라서 눈을 크게 뜨고 성운을 보고 있었고 성운은 그런 민현을 보고 웃어보였다. 이래서 로망스 다리라는 걸까. 로망스를 만들어서? 성운은 제 앞의 제복남의 등을 떠밀고 앞장서라며 뒤를 따랐다. 밤이 되어도 벚꽃구경을 하느라 사람이 북적북적한 여좌천에서 성운은 민현의 모자 꼭대기를 보고 뒤를 따라갔다. 키가 커서 그런가 보폭 엄청 크네. 그런 민현이 뒤를 돌아서 성운을 기다렸다. 그리고 성운에게 제 제복 소매 끝을 잡으라며 손에 제복 끝을 쥐어주었다. 민현의 걸음이 성운과 맞추기 위해서 평소보다는 느릿해졌다.
-하성운이요. 그쪽 이름은 어떻게 돼요?
-.....황민현입니다.
-여기 해사생도에요?
-네.
-와 멋있다. 제복 멋져요.
-감사합니다.
-전 서울에서 이제 막 회사 다니는데... 민현씨는 그럼 해군 장교가 되는 건가?
-아, 2년 남았습니다. 임관까지.
-......나한테 궁금한 건 없어요?
제게 궁금한 게 없냐고 물어오는 성운 덕에 민현은 걸음을 멈추고 성운을 쳐다보았다. 궁금한 게 왜 없겠나. 너무 많아서 정리가 되지 않는 건데. 민현의 소매 끝을 잡은 성운의 손을 민현이 바로 맞잡았다. 아까는 민현이 놀란 표정을 하더니 이번엔 성운이 놀란 표정을 하며 민현의 손을 바라보았다. 민현은 혹시나 손잡아도 되냐고 성운에게 먼저 묻고 잡고 싶었지만, 행동이 빨랐다.
-아, 손잡는 거 불편하시면 빼겠습니다.
-아뇨, 따뜻하네요. 민현씨 손.
잡은 손 그대로 성운과 카페에 들어가 무엇을 마실지 묻고 제가 마실 자몽에이드와 성운이 마실 딸기 스무디를 시켰고 민현은 완성된 음료를 들고 벚꽃이 잘 보이는 창가에 자리를 잡았다.
-여기 한 눈에 다 보이네요. 예쁘다.
-음.... 여기 제가 좋아하는 곳입니다. 벚나무랑 로망스다리가 한 눈에 보여서 가끔 외출할 때면 여기 앉아서 책 읽고 시간 보냅니다.
-아.... 그렇구나.
-..아까는 많이 놀라게 해드려 죄송합니다.
-아, 아뇨 괜찮아요. 잘생긴 해사생도랑 언제 마주해보겠어요.
잘생긴 해사생도라니. 민현은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갈 것만 같았다. 분명히 귀 끝이 붉어졌을 텐데 모자에 가려서 티가 안 나길 바랐다. 성운에게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할까 긴장되어 민현은 제 손을 허벅지에 슥슥 닦을 뿐이었다.
-......민현씨, 왜 커피마시자고 했어요?
-.....성운씨가 봄 같았습니다.
-네?
-...처음엔 가만히 서서 벚꽃을 보는 성운씨가 눈길이 갔습니다. 그래서 말을 걸었는데 갑자기 바람이 불었고... 그 바람이 달아서 좋았습니다.
제 진심을 조심조심 이야기한 민현은 반응 없는 성운을 보기 위해서 고개를 들었다. 목과 귀가 붉게 물든 성운이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창가를 보고 있었다. 민현은 그런 성운의 모습에 또 반했다며 제 음료 빨대만 괴롭혔다.
-그....그..그래서요?
-....그리고 팝콘같이 톡톡 튀는 말투가 좋았고, 제 소매를 붙든 작은 손이 좋았습니다. 참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습니다.
-아...
-지금 제 앞에서 부끄러워하는 것도 좋습니다. 모든 게 전부 다 첫눈에 반한 건데... 저도 이런 게 처음이라...
민현의 진심에 성운은 더 어쩔 줄 몰라 했다. 이렇게 처음 본 사람한테 깊이 빠지기도 하나. 제 반응에 귀엽다는 듯이 웃는 민현이 얄미웠다. 그렇게 안 생겨서 사람 당황하게 만드는 재주도 있네 민현씨.
-.... 성운씨는 어떠십니까?
-뭐....뭐..가요?
-저 말입니다.
-민...민현씨요?!
언제부터 성운의 머리에 버퍼링이 생겼는지 버벅거리는 꼴이 창피했다. 나 되게 말 잘하고 리드 잘 하는 타입인데. 저렇게 직설적으로 나오면 어떻게 해야 할지는 모르겠어. 민현씨 생긴 건 여우같이 생겨서 하는 짓은 호랑이네. 직구야. 커브와 깜빡이가 없는 민현의 말이 성운을 설레게 했다.
-전... 일단 좋아요.
-네?!
-민....현씨 좋다구요...
-.....
첫 눈에 반한 건 3초면 된다고 했던가. 그리고 상대에게 빠지는 건 30초의 대화와 눈 맞춤이라고. 어쩌면 지금 부는 이 봄바람이 그걸 더 앞당겼을 수도 있겠다. 밖에 벚꽃은 예쁘게 펴있고 벚나무에 살랑거리며 떨어지는 벚꽃잎과 벚꽃향기. 그리고 당신에게 취했나보다.
-형, 우리 예전에 갔던 카페 갈까?
-어?! 나 생각하고 있었는데 너 처음 만난 거기.
-가자.
이제는 서로가 맞잡은 손이 당연하게 느껴졌고 바라보는 두 눈이 서로를 향한다는 게 어색하지 않지만, 2년 전에는 상상도 못 했을 일이었다. 2년 동안 민현의 옆을 지키면서 느낀 점은 군인 애인 아무나 못한다는 거였다. 훈련을 하는 과정에서 다치기 일 수였고, 개인 체력 증진으로 민현이 태권도를 선택한 덕에 겨루기를 한 날이면 아무리 보호대를 차도 허벅지나 갈비뼈 즈음에 멍과 통증을 달고 살았다. 처음에는 다치는 게 속상해서 그만하라고 떼도 써보고 몸 좀 아껴달라고 부탁했다. 그럴수록 민현은 제 몸의 부상을 숨겼고 그런 부상을 서로 사랑을 나눌 때서야 아는 게 더 싫었다. 또, 또 다쳤어. 성운의 가방 안에는 멍 연고와 대일밴드, 후시딘이 항상 들어있었고, 민현은 그런 성운에게 어쩔 수 없었다며 미안하다는 소리만 반복이었다.
-형, 나 임관하고 소위 달면.... 결혼하자.
-응?
-그때도 여기 여좌천 로망스 다리 위에서 손잡고 벚꽃을 배경으로 평생 같이 하자는 맹세하자.
-야아아. 뭐... 그런 걸 벌써 얘기해.
-올해 9월부터 해외 순항훈련으로 3개월 동안 한국에 없을 텐데.. 사실 이 전에 하고 싶은데 그럴 수는 지금 없으니까... 그래서 미리 말하는 거야. 우리가 만났던 벚나무 아래에서.
성운은 민현과 잡은 손을 다시 한 번 쥐고서는 눈을 맞췄다. 그래 그러자 민현아. 내년 3월 임관식 지나고 4월에 진해 내려와서 하면 되겠다. 그때는 해사 생도 정복이 아닌 해군 소위 정복을 입고서 황민현 소위배지를 달고 벚꽃이 가장 근사하게 핀 이 곳 벚나무 아래 로망스 다리 위에서.
*****
9월 해외 순항훈련을 앞 둔 어느 날, 성운은 민현과 3개월간 필요할 짐을 싸주면서 벚꽃을 배경으로 한 둘의 사진을 인화해서 민현의 지갑에 몰래 넣어두었다. 그리고 순항 훈련할 때 정박하게 될 나라 돈을 조금씩 환전해서 성운의 손 편지와 함께 흰 봉투에 담아 민현에게 주었다.
-이게 뭐야?
-배 타고나서 열어봐. 그 전에 열어보면 진짜 화낼 거야.
-뭔데 이렇게 두툼하지.
-....3일 남았나? 출항까지?
-응, 형 내일 올라가야지 서울로?
-출항하는 거 보고 싶은데... 회사에 허락 못 맡아서 슬퍼.
-난 다행이다 싶었는데, 괜히 출항하는 거 보면 마음 아파진다고 하더라고. 3개월 뒤에 곧 오잖아. 그리고 로밍해가니깐 전화 할 수 있구.
-로밍해도 93일을 떨어져 있어본 적 있어야 말이지. 전에 30일 떨어져 있었는데 그걸 어떻게 버텼나 몰라.
-오구오구, 우리 운이 힘들었어요~
-까분다 황민현. 가서 내 생각 많이 하구, 좋은 거 있음 내 생각하면서 훈련도 잘 받고 잘 지내고 그래야 해 민현아 알았지?
-알았어, 정박하는 나라마다 형이랑 닮은 물건 하나씩 사서 방에 넣어놓고 편지 쓸게.
제 연인의 출항을 못 본다는 게 성운은 정말로 아쉬웠다. 망할 회사. 허락 좀 해주지. 우리 민현이 정복입고 배 타는 것을 볼 수 있는 날인데... 그래도 앞으로 지겹도록 많이 볼 수 있을 것이라며 위로해주는 민현이가 있었기에 아쉬움을 달랬다. 성운이 서울로 올라가기 전 마지막 밤은 서로의 흔적을 남기는데 시간을 다 썼다. 오래도록 연인의 남긴 제 몸의 자국이 없어지지 말라며.
오전 6시 30분. 어느 때와 같이 눈이 떠진 민현은 제 옆에 누워있는 성운의 이마에 입을 맞추고 몸을 일으켰다. 깨지 말라며 조용하게 옷을 들고 화장실로 들어서서 거울에 비춰진 제 모습을 보았다. 허허, 이건 마크가 아니라 멍인데. 샤워실 따로 쓴다고 해야겠다. 가볍게 샤워를 마치고 머리에 묻은 물기를 털어내면서 옷을 챙겨 입고 화장실 밖으로 나섰다.
-우응... 벌써... 일어나써?
-6시 반 되면 눈떠지니까. 형은 좀 더 자.
-웅... 이따 8시 지나면... 깨워...
이불을 한껏 끌어 동그랗게 파묻힌 성운의 옆에 민현은 다시 누워서 성운의 머리를 간지럽혔다. 이런 연인을 3달 동안 못 본다니.. 오래도록 기억하려고 눈에 담아두었다. 요새 한창 잘 나가는 아이돌이 했던 애교처럼 내 마음속에 저장하고 싶었으니까. 성운이 웃을 때 방싯하고 생기는 인디언 보조개도 한껏 올라가는 광대도 유독 도톰하고 붉어서 예쁜 입술도 다 제 눈에 담아야 순항훈련동안 혹시라도 성운이 너무 보고 싶다며 제 동기들을 괴롭힐 수도 있으니까. 그런 동기들이 불쌍해서라도 오래오래 많이많이 담아두었다.
-미녀나, 몇.... 시야?
-응? 7시 반. 아직 30분 남았다.
-아냐, 나 일으켜줘. 씻구 너랑 밥 먹어야지.
손을 뻗고 일으켜달라는 성운의 행동에 민현은 품에 안고서 침대 위를 뒹굴 거렸다. 민현이 이 힘든 사관생활을 견디는 이유 중 하나가 또 추가되었다. 임관식 끝나고 같이 살게 되면 매일 이럴 수 있겠지. 성운은 답답하다며 민현의 등을 콩콩 때리고서야 품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숨 막혀. 나 일으켜줘 빨리.
-읏차. 일어나서 씻고 나가서 밥 먹자. 빨리 움직이면 창원역까지 내가 데려다 줄 수 있을 것 같아.
-아, 됐어. 창원역까지도 멀어. 그냥 역가는 버스까지만 있어줘.
-싫어. 오랫동안 못 볼 거니까 오랫동안 봐둘꺼야.
민현은 성운의 옷을 챙겨주면서 화장실 안까지 들여보냈다. 옷을 받아 든 성운은 화장실로 들어가 제 몸에 새겨진 붉은 자국에 기함을 토했다. 와, 이건 진짜 오래 가겠다. 누가 군인 아니랄까봐 대열 맞춘 것처럼 해놨어. 그 사이 민현은 구겨진 정복이 마음에 안 들었지만 별 수 없다며 제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성운이 화장실에서 나왔을 때는 이미 하얀색 정복을 입고서 침대위에 앉아있는 민현이 있었다.
-난 네가 정복 입은 모습 볼 때마다 반해.
아직 덜 마른 머리의 성운이 수건을 들고 민현 앞에 앉았다. 자연스레 수건을 받아들고서 성운의 머리를 말려주는게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니었다. 성운은 머리가 대충 마르자 옷을 껴입고서 나갈 준비를 했고 민현은 제 정모와 가방을 챙기고서 함께 방을 빠져나갔다.
-여기서 창원역 가는 버스부터 타자.
-아 됐어. 그냥 여기서 먹구 버스 타는데 까지만 데려다 줘.
-서울 가는 기차 타는 것도 못 볼 것 같은데 이건 하게 해줘라 형.
-너 늦으면 혼날까봐 그러지 뭐. 외박도 겨우 허락 맡은 건데..
-그니깐 창원역에서 밥 딱 먹고 난 다시 복귀하러 가면 되지.
결국 성운은 민현의 고집에 져서 창원역으로 가는 버스에 같이 몸을 실었다. 민현아 진짜 안 늦는 거 맞지? 늦으면 말해야해. 밥 먹다가 중간에라도 늦겠다 싶으면 달려 나가도 괜찮아. 알겠지? 귀에 딱지가 얹도록 성운의 걱정이 계속되자 민현은 살며시 성운의 손을 잡고서 웃어보였다. 안 늦어. 그리고 밥 먹다가 중간에 뛰어 나가면 형 혼자 밥 먹는데 혼자 먹는 거 싫어하면서 그런 소리 하지마. 창원역에 도착할 때까지 조잘조잘 기분 좋게 얘기하는 성운의 목소리가 듣기 좋아 맞잡은 손을 깍지로 고쳐 잡았다.
창원역에 도착하고서 근처에서 밥을 먹고 성운을 서울로 보내는 것까지 기어코 보고서 해사로 복귀했다. 성운이 준 흰 봉투는 출항하면 뜯어보라고 했지만 너무 궁금하니까... 생활관 들어오자마자 열어봤다. 그 안에는 순항 훈련시 정박하는 나라라고 성운에게 이야기한 미국, 일본, 러시아, 베트남, 쿠웨이트, 아랍에미리트 등 외국화폐가 조금씩 들어있었고 성운이 쓴 손 편지가 제법 두툼하게 넣어져 있었다.
{짠, 우리 민현이 이 편지 열었으면 출항중이거나, 아니면 바다에 있을 때겠다 그치? 출항도 안 했는데 뜯었으면 진짜 화낼 거야. 그니까 혹시라도 먼저 뜯었으면 지금이라도 당장 편지라도 넣어둬. 알겠지? 편지에 쓰여 있는 글씨가 많이 못나도 내용은 진짜야.
난 내 옆을 채우는 네가 군인이라서 좋아. 훈련받다가 아파하고 다치는 건 좀 싫은데 그래도 훈련받는 기간 동안 힘든 것도 잊고 해냈다고 뿌듯해하면서 자랑하는 네 모습이 처음엔 귀여웠어. 난 물이 무서워서 네가 말한 수상훈련이나 인명구조 시뮬레이션은 들을 때마다 무섭고 겁이 나. 너가 수상 훈련한다고 동기들하고 찍은 거랑 동기가 너 수영하는 모습 동영상으로 찍어준 것 나 아직까지도 그 영상 매일 보잖아. 진짜 인어 같아. 너무너무 자랑스러워. 그리고 대함 훈련 나간다고 해상에서는 전화고 통신이고 전부 안 되니까 혹시라도 내가 널 걱정할까봐 매일매일 예약문자로 오전 9시 반 출근시간에 맞춰서 네가 찍은 셀카 오는 것도... 다정한 너가 너무 좋아 민현아.
이번 군항제때 우리가 처음 만났던 로망스다리에서 결혼하자고 한 말 생각해봤어. 난 아직 이르다고 생각했었거든 처음엔. 막 임관한 장교는 너무 바쁘다고도 했고 아직 내가 준비가 덜 된 것 같아서 좀 고민했어. 그런데 순항 훈련하러 한국에 93일 동안 없다고 생각하면서 널 못 본다니까 숨이 막히더라. 그때 마음을 굳혔어. 민현이 옆에 오래오래 함께 있고 싶다고. 네가 말한 것처럼. 졸업식과 임관식 3월에 치르고서 벚꽃이 만개한 4월에 우리 그때 그 자리에 다시 서서 평생을 약속하자. 그때는 네 왼손에 우리 반지와 임관반지 둘 다 예쁘게 껴져있으면 좋겠다. 많이 사랑하구 항상 고마워 민현아. 성운이가}
민현은 편지를 곱게 접어 출항시 가져가려고 한 가방 깊이 안쪽에 구겨지지 않게 잘 넣어두었다. 그리고서 다이어리를 꺼내들어 제 미래계획에 모두 성운과 함께 무엇을 할지로 빼곡히 채워놓았다. 그리고서 지갑 안에 넣어두려고 지갑을 열었다. 언제 이런 것을 넣어놨는지 벚꽃을 배경으로 둘이 예쁘게 나온 사진 한 장이 지갑 안에 고이 모셔져 있었다. 출항하고 한 달까지는 이것으로나마 버틸 수 있겠다. 그 뒤로는 성운이 써준 편지가 또 한 달을 버티게 해 줄 것 같고, 나머지 한 달은 성운이 틈틈이 녹음해준 노래들을 파일로 변환해서 넣어둔 걸로 버티면 어찌저찌 93일은 버티겠다 싶었다.
*****
3달이라는 시간동안 민현은 정박한 나라마다 사진을 찍고 엽서를 사서 성운이 있는 한국으로 보냈다. 그런 엽서가 오랜 시간이 걸려서 성운의 손에 쥐어졌을 때 성운은 민현이 보고 싶어서 민현의 생활관 주소로 편지를 보냈다. 지금 당장은 읽을 수 없더라도 돌아오면 가장 먼저 복귀하게 될 생활관이니. 하루에 하나씩 정말 보고 싶을 때는 두 개씩 썼다. 그러다보니 딱 100개의 편지를 보냈다. 그리고 민현이 돌아오기로 한 날이 하루 남았다. 이제 곧 실물로 본다 우리 민현이. 성운은 아침 일찍부터 부지런히 움직여서 기차를 타고 진해에 내려가 민현을 볼 생각에 잠이 안 왔다. 민현 역시 한국에 제일 먼저 도착해서 보고 싶은 가족들과 성운이 떠올라 잠을 못 이루고 있었다.
-황, ....뉴스 봤냐?
-무슨 뉴스?
-서해 쪽에 중국 해적들 넘어와서 우리 하루 늦게 도착할 수 도 있다는데?
-......뭐?
-가족들한테는 연락 다 갔다는 거 같은데 성운씨 혹시나 오는 거면 성운씨는 아나 싶어서.
-아 그걸 왜 지금 얘기해.
-지금 들었으니까 그렇지.
-미치겠네. 너 통화 되냐?
-바다에서 되는 핸드폰이 있냐? 다 무전으로 치거나 통신기 신호 잡아서 통신하는 거지.
민현의 속은 까맣게 타들어만 갔다. 왜 하필 마지막 날에 이런 일이 생겨서 그 추운 날 성운이 혹시라도 항구에서 기다린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지금이라도 통신해달라고 무전을 쳐볼까. 아니면 조타석에 있는 부사관님께 그냥 한국으로 지금이라도 가자고 애원해볼까. 왜 해군이어서 군함을 타고 이런 훈련을 하는지. 어차피 신호도 못 잡을 휴대폰이라 생각하고 가방 안에 쑤셔 넣은 제 폰을 들고서 신호 한 칸만이라도 잡히라며 군함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황민현 생도 뭐하는 겁니까?
-필승. 전단장님. 죄송합니다.... 그런데 혹시 통신기 사용할 수 있겠습니까?
-가족들에게 쓸 거라면 학교 측에서 이미 문자 보냈습니다.
-아... 가족이 아니라... 죄송합니다. 곧 들어가겠습니다.
-......애인입니까?
-네. 그렇습니다.
-생도생 사적인 목적으로 군 통신기 쓰면 안 되는 거 압니까 모릅니까.
-압니다. 죄송합니다.
-..... 방으로 돌아가도록 합니다. 바로 불 끄고 취침할 수 있도록 하고 곧 점호 있으니 끝나고 제 방으로 오도록 합니다.
-...네? 네 알겠습니다.
-행동 빠릿하게 해서 돌아갑니다.
신호 한 칸도 못 잡는 이런 고물단지 같으니라고. 전단장님이 방으로 호출하셨으니 진짜 죽겠구나 싶었다. 기강이 헤이해졌다고 개인적으로 혼을 내시려나.. 군 물건을 사적으로 쓸려고 해서인가.. 이유가 어떠하든 한 소리를 들을 각오는 되어있었다. 성운이 12월 이 추운 날 진해항에 혼자서 기다릴 생각을 하면 민현은 혼나도 나오지 말라는 전보를 쳐야만 했다. 그것도 서울에서 기어코 회사에 휴가를 내고 내려오는 것일 텐데...
점호 시간을 알리는 호루라기 소리와 함께 전원이 방문 앞에 서서 인원체크와 공지사항을 듣는 내내 우울한 민현의 모습에 같은 방을 쓰는 동기는 아까 방을 나선 잠깐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 싶어서 민현의 얼굴을 살피면서 물었다.
-뭐야 왜 죽상이야.
-점호 전 이탈한 거 전단장님한테 걸렸어.
-.....으헥, 뒤졌네 황민현
-응원 고마워... 그리고 더 큰 일 날 짓 하나 했지.
-....너 혹시 통신기 부탁했냐?
-....응
-미친,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전단장님한테 부탁을 하냐. 넌... 이런데서 왜 이렇게 무모해.
-급하니까 그렇지.
-야, 너 이렇게 혼나고 징계 먹으면 성운씨가 퍽이나 좋아하겠다.
-그래도....
-.... 전단장님 호출하셨냐?
-응.... 징계 먹겠지?
-말이라고 하냐. 점호 전 이탈만으로도 충분히.
모든 점호가 끝나고 전원 취침 명령이 떨어지고서 민현은 조심스레 전단장님 방 앞으로 움직였다. 전단장님 방을 노크하고 들어오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방 안에 들어서자 민현은 관등성명을 하고 앉으라는 명령에 맞춰 단장님과 제일 멀리 떨어진 소파에 앉았다.
-....죄송합니다.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황민현 사관생도, 개인적인 질문 할 건데 괜찮습니까?
-네, 괜찮습니다.
-애인과 몇 년 만났습니까?
-....2년 되었습니다.
-애인이 진해에 거주합니까?
-아닙니다. 서울에 있습니다.
-그럼 매주 애인이 진해로 내려오는 겁니까?
-네. 그렇습니다.
-....사관생 2분줍니다. 통신기로 애인번호 적고, 추가 연락 부탁한다고 육지에 전보 넣습니다. 그리고 황민현 생도 이름 대신 제 성명 씁니다. 알겠습니까?
민현은 전단장의 배려에 놀라서 잠시 머뭇거리다가 빠르게 통신기에 제 연인인 성운의 번호를 적고 추가 연락 부탁한다는 짧은 메시지와 함께 사단장의 이름을 적어서 전보를 쳤다. 민현이 전단장에게 고개를 숙이면서 고맙습니다 그리고 정말 죄송하다는 말을 반복했다.
-그럼, 점호 전 이탈과 군 물건 개인적 사용에 대한 징계는 훈련복귀와 동시에 학교에서 정하도록 하겠습니다. 이의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럼 이제 방으로 돌아갑니다.
-필승.
인사를 마친 민현은 처음에는 성운에게 전보를 쳤다는 게 더 중요했었다. 제 징계가 어찌될지는 나중 문제였었다. 그러나 이제 막상 닥치고 나니 징계가 조금 무섭기는 했다. 징계 받으면 외출 금지는 기본에다가 혹시나 임관시 불이익이 있지는 않을까, 수도권에서 제일 멀리 발령 나는 것은 아닐까. 혹여나 제일 걱정 되었던 것은 내년에 임관을 못 하게 되고 1년 유급으로 학교를 더 다녀야 하는 것은 아닐 까였다.
성운은 이런 민현의 걱정을 알리가 없다는 듯이 자고 있다가 시끄럽게 울리는 제 폰을 들었다. 힘들게 눈을 비비며 액정을 보니 055로 시작되는 번호에 놀라서 전화를 받았다. 민현이가 있는 경남 지역번호는 무조건 받고 보긴 했는데 혹시 일정이 앞당겨져서 벌써 한국에 도착한 건가. 그럼 개인 폰으로 하지 왜 성운은 잠긴 목소리를 풀고 민현이냐고 물으려고 하는 찰나에 다른 남성의 목소리에 놀랐다.
-필승, 해군사관학교 행정관 김00입니다. 내일 있을 해사 해외 순항훈련 도착은 모레로 연기되었음을 알려드립니다.
-네? 왜...?
-현재 황해 근처 중국 해적 출몰로 인해 입항이 어렵다고 판단되어 연기되었습니다. 전단장님께서 추가연락 요청하셔서 급히 연락드립니다.
-아....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수고하세요.
성운은 급히 전화를 끊고 초록색 검색창의 제일 헤드에 뜬 중국 해적 출몰 소식에 마음이 철렁했다. 민현이는 잘 있는 걸까. 해적이라니. 혹여나 잘 못 되고 그런 건 아니겠지. 바다에 발이 묶여 오지도 가지도 못하는 민현의 군함이 공격이라도 받을까 걱정되었다. 가뜩이나 불안한 마음에 텔레비전을 틀었더니 '연평해전'이란 영화가 방영되고 있었다. 제길 불안하게 왜 하필 이런 영화야. 민현의 전화기로 전화를 걸었지만 역시나 해상 위여서 그런지 받을 수 없다는 기계음만 흘러나왔다. 성운은 불안할 때만 나오는 손톱을 물어뜯었다. 비릿한 피맛이 느껴지고 손을 보니 볼품없이 손톱 끝의 살이 떨어져나갔다. 아, 민현이한테 또 혼나겠다. 혼나도 좋으니까 제발 모레는 봤으면 좋겠다. 기도했다. 성운에게도 쉬이 잠이 들 수 없는 길고 긴 밤이었다.
*****
해상에서 맞는 아침이 얼마나 지났을까. 진해항에 도착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방송과 함께 사관생도와 장병들은 귀국을 준비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민현은 제복과 함께 가져갔던 동복코트를 챙겨 입고 제 짐가방을 챙겨 배에서 내릴 준비를 했다. 드디어 성운을 본다.
-황민현 생도는 오늘 기분 좋은 모양입니다.
-필승. 드디어 육지에서 볼 수 있어서 기쁩니다.
-애인 말입니까?
-네, 그렇습니다. 단장님.
-황민현 생도 저번 사건에 대해서는 해사에 따로 말하지 않았습니다.
-....네? 다시 말씀해주시겠습니까?
-따로 징계는 나가지 않을 거라는 말입니다.
-단장님...감사합니다.
-그러니까 애인 분한테 잘 하라는 말입니다. 저도 생도 시절 서울에서 진해까지 매번 기차로 왔던 지금 와이프가 생각나서 그런 겁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단장님
이번에도 예쁜 애인 덕에 나는 징계 없이 마무리가 되었네 형. 우리 형은 나한테 엄청 복덩이인가 봐 형 만나고 좋은 일만 생기고 나쁜 일도 좋게 바꿔 주는 게 우리 성운이네. 진해에 군함이 정박하고 모든 사관생과 장병들이 군함에서 내리라는 명이 떨어졌다. 민현은 진해항에 나와 있는 제 연인 성운이 보이자 발걸음을 빨리했다.
-민현아!! 황민현!!
환하게 손을 흔들면서 민현의 이름을 부르는 성운에게 한걸음에 달려갔다. 그리고 꼭 안았다. 형, 너무 보고 싶었어. 정말로 많이.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 형은 모를 거야.
-잘 다녀왔어?
-필승. 해사 72기 황민현. 94일간 해외순항훈련을 마치고 무사 귀환했음을 애인 앞에서 보고 드립니다.
-보고 싶었어. 많이.
-나도 형. 정말 많이 보고 싶었어.
민현에게 군함에서 있었던 일을 듣고서는 성운은 기함을 했다. 미쳤어 황민현. 전단장님이 안 봐주셨으면 완전 모가지였을 수도 있었잖아. 진짜 그러다 임관도 못 하고 생도생활 1년 유급하면 어떻게 하려고 했어. 그럼 또 장장 3달을 기다리는 이 훈련을 또 할 수도 있었을 거 아니야. 기다리라면 기다리겠지만... 멋모르고 겪은 것과 다 알면서 또 겪는 건 너무 다른 이야기란 말이야. 민현의 등짝에 성운의 손자국이 세대쯤 나고서야 겨우 민현은 짐짓 화가 난 성운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화 풀어요. 형..
-너 같으면 화가 안 나겠어... 나 때문에 징계 받을 뻔 했다는데.. 속상하게
-그래도 형이 제일 걱정되는 걸 어떻게 해.
-나는 네가 제일 걱정이 돼.
-그럼 서로 걱정 안하게 우리 같이 살아야겠다.
-....못 본 사이에 능글맞아졌어.
-이제 12월이니 언제 3월 되고 4월 되어서 우리 결혼하나 몰라.
-금방이다 너. 그거...
*****
[민현아 오늘 임관식 잘 하구 오늘 회사에 일이 있어서 못 가는 게 너무 아쉽다 나쁜 회사.ㅠㅠ]
민현의 졸업식이 있는 3월의 진해는 어느 때와 같이 따뜻했고 짜쪼름한 바다냄새가 불었다. 민현에게 며칠 전부터 임관식에 불참할 것 같다며 거짓으로 이야기했다. 처음에는 실망한 표정을 하더니 그새 괜찮다고 회사일 때문인데 어떻게 하냐며 이해하려하는 모습에 피식 웃음이 세어 나오려던 것을 겨우 참았다. 성운의 손에 들린 한 쌍의 실반지가 유난히도 반짝이는 것 같았다. 고백과 결혼하자는 말은 민현이가 했으니까 임관식 끝나고 민현이 손에 반지는 꼭 성운이 제 손으로 끼워주고 싶었다. 식이 열리는 해사로 향하는 발걸음이 바빴다. ‘해군사관학교 72기 졸업식 및 임관식’이라는 현수막이 정문에 걸려있는걸 보고 성운은 카메라를 들어 한 장 찍었다. 오늘이 마지막이구나. 이 문을 들어서는 것도.
[괜찮아 형. 오늘 일 잘 하구 임관식 끝나고 전화할게.]
성운은 졸업임관식 준비가 한창인 해사 연병장 앞바다에는 이미 민현이 탔었던 군함들이 즐비해 있었고, 민현이 소위로 나서면 제일 많이 타게 될 해상초계기가 보였다. 성운은 생도들이 다들 졸업임관식에 맞춰서 꽃목걸이를 걸고 있는 모습에 제 연인인 민현을 찾으려고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나도 꽃목걸이 준비했는데 우리 민현이 목에 아무것도 없으면 어떻게 해...
-황....
생도들 사이에서 제 연인이 보이자 민현의 이름을 부르려던 성운은 잠시 멈추었다. 어쭈 황민현 여생도들 사이에서 웃는 거 뭐야. 당장이라도 밑으로 내려가 민현을 끌고 오고 싶었지만 곧 있으면 식이 시작한다는 방송에 성운은 입술만 짓이겼다. 나빴어. 내가 안 온다고 했다니까 바로 여자생도들이랑 놀고. 꽃목걸이고 뭐고 기분 나빠져서 당장이라도 서울로 올라가고 싶었다. 준비한 결혼반지가 왜 이제야 초라해 보이는지. 알 있는 걸로 할 걸 그랬나.
졸업임관식에서 우수한 성적을 받은 졸업생에게 주는 국방부장관상 수상자로 민현의 이름이 불리자 성운은 연신 카메라로 민현을 찍기 바빴다. 저랑 만나면서도 공부는 언제 했는지 최우수 생도 6명으로 선발되어 상도 받고 단상 위에 늠름하게 서있는 민현의 모습에 자랑스러웠다. 지금 상 받는 저 사람이 제 연인이에요 자랑하고 싶었다.
시상이 끝나고 이어지는 축하비행과 해군 해상 강하공연과 군함 시연이 있고 재학생들의 분열 퍼레이드로 졸업임관식이 끝이 났다. 성운은 재빨리 밑으로 내려가 민현을 찾았다. 그런 성운을 오히려 민현이 먼저 찾았지만.
-형, 못 온다며!
-서프라이즈 해주려고 그랬지. 이거 지금 해도 되는 거지?
-그럼.
성운이 민현을 생각하면서 맞춘 보라색 꽃들로 구성된 꽃목걸이를 민현에게 걸어주었다. 그리고 성운은 주섬주섬 반지케이스를 꺼냈다. 오른손에 있는 커다란 알이 박힌 임관반지와 대조되는 실반지 이지만 민현의 왼 손 네 번째 손가락에 끼어주고서야 성운은 남은 반지를 민현에게 주었다.
-내 옆에 민현이 너가 있었으면 좋겠어.
-.....
-아까 여생도들과 웃으면서 이야기하던 모습 더는 못 보겠다는 뜻이기도 하고.
-...아니, 내가 하려고 했는데.. 이걸 언제 준비했어.
-고백도 민현이 니가 하구, 네 옆자리를 채워달라는 소리도 니가 먼저 했으니 나도 하나정도는 해야지. 4월 로망스 다리위에서 벚꽃잎 맞으면서 우리 미래도 이 반지로 시작했으면 좋겠어서.
-..... 난 아까 여생도들이 내 제복단추 달라고 하기에.. 지금 형한테 줄 수 있는 건 형 주려고 지켜낸 제복 단추 밖에 없는데...
민현이 반지를 받아들고서 성운의 왼손 네 번째 손가락에 끼우고서 제 제복에 매달려있는 단추를 끊어내서 성운의 손 위에 올려주었다. 결혼하자 형. 내 옆을 채울 수 있는 사람은 형밖에 없는 것 같아. 우리가 만났던 그 로망스 다리위에서 형 말대로 벚꽃잎을 맞으면서 우리의 미래를 약속하자. 이야기를 끝내고서 성운을 끌어안았다. 언제 주변으로 생도들이 모였는지 모르겠다. 어쩌다 공개청혼이 되어버려서 성운과 민현을 둘러싼 생도들의 환호에 성운의 귀와 얼굴이 당황해서 빨갛게 물들었다.
-형, 하나 둘 셋 하면 뛰어.
-응 알았어.
-하나. 둘. 셋 뛰어
민현이 성운의 손을 잡고 생도들 사이를 헤집고 뛰었다. 뒤에서 들리는 제 동기들의 환호성과 잘 살으라는 소리에 민현은 뒤를 돌아 손을 흔드는 걸로 대답했다. 성운은 그런 애 같은 민현의 모습에 눈을 한번 흘기고 웃으면서 따라 정문 밖을 나섰다.
*****
진해의 4월 어느 날. 군항제가 시작되기 전,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어있고 로망스 다리 위 하얀색 예복을 입은 성운과 하얀색 해군제복을 입고 소위 배지를 단 민현이 벚꽃잎을 맞으며 미래를 약속했다. 어느 때와 같이 제 옆을 채워줄 서로에게 웃어 보이면서. 각자의 손에 끼워있는 실반지와 함께.
-옆에 항상 있어줘서 고마워 형.
-옆을 항상 지켜줘서 고마워 민현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