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법소년소녀, 그 말을 들었을 때 당신에게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무엇인가?
주제가 주제인지라 말하는 사람마다 나올 내용이 다 같진 않을 것이리라. 어떤 이는 지난 밤 본 애니메이션을 말할 수도 있을 테고, 웹툰, 소설, 다르다고는 해도 실제 존재하는 사람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겠지. 누군가 마법소년소녀 실재론을 가져오며 그들의 존재를 주장한다면 미친 사람이라는 소리를 들어도 이상하지 않을 것이었다.
“아이, 씨. 야자 째고 나오느라 식겁했네.”
“얼마 안 남았으니까 걱정하지 마요, 형. 이번 일은 추가 보너스도 나온대요.”
아무래도 우리 근처에서 찾아볼 수 있는 이미지, 라고 한다면 마법사보다는 히어로 쪽이 더 알맞겠지만.
“아…… 아이스 초코!”
“…누가 이런 걸 만든 거야 진짜. 아 맞다 지갑!”
되도 않는 주문을 외우며 겉모습을 바꾸고, 흔히들 말하는 ‘변신’을 한 마법소년 두 명.
오늘은 그들의 이야기를 조금 소개해 볼까 한다.
Magical Syndrome
w. 독
세상에는 여러 종류의 사람이 있다. 누군가를 위해 봉사를 하는 사람, 자신의 이익을 위해 물불 가리지 않고 달려드는 사람, 남의 행복을 위해, 웃음을 위해 발로 뛰는 사람, 그리고,
“이 시에서 화자는…….”
앞의 말과 정말 상관없는 것 같지만, 고등학생.
이렇게 굳이 따로 분류한 이유는 우선, 그 둘이 고등학생이었기 때문이다. 먼저 하성운. 나이는 열아홉, 무려 수험생. 처음 마법소녀가 된 때는 열일곱, 카페에서 아이스 초코를 사서 나오던 길. 지시자(그러니까, 둘에게 마법 능력을 준 사람을 뜻하는 말이다.)에게 마법과 관련된 이야기를 듣고, 운이 좋게도(사실 운이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 어디에도 없다. 본인 포함.) 마법 소년이 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는 마지막 말까지 전달 받았을 때, 변신 주문을 무엇으로 하겠냐는 그의 말을 흘려들었는지 어쨌는지 들고 있던 아이스 초코를 한번 읊었다가 3년째 변신할 때마다 아이스 초코를 외치고 있는 중. 이불 킥 한번 거하게 하고 있다는 말씀이다. 주 마법은 변신 주문과 일부러 비슷하게 한 건지 얼음마법. 얼음으로 여러 형상을 만들어 마수를 공격하는 모양새다.
공부는 원래 좀 잘하는 편이긴 했지만 마법 소년 일을 시작한 이후로 성적이 하향 곡선을 그리고 있다. 허나 일부 유명 대학에 마법 소년 특별 전형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마음을 조금 놓았다고. 그렇지 않더라도 애초에 마법사가 될 수 있는 사람의 수가 그렇게 많은 것은 아니었으므로, 원한다면 한국마법사연합(Korea Magician Union, KMU.)에 취직해서 일하게 해 주기도 한다더라. 보장된 취업 길이었다.
마법 소년이 되는 조건이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일단 저를 그 마법 소년으로 만들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주문이 조금 쪽팔리긴 하지만 적당히 마법사 일 하다가 취업하면 되는 거니까, 나름 괜찮지 않은 걸까? 이상 성운이 매일 하는 생각들.
그 다음은 황민현. 나이는 열여덟, 나름 창창한 고등학교 2학년. 학교는 성운과 같은 곳이고, 성적은 상위권을 달리고 있다. 처음 마법소년이 된 건 고등학교 1학년 겨울방학, 그러니까, 된 지 얼마 안 된 뽀시래기 마법소년이라는 말. 지시자에게 이것저것 설명을 듣고 주문을 뭘로 하겠냐는 말을 들었을 때 마침 두고 나온 지갑이 생각나서 아 맞다 지갑, 이라고 외쳤다가 그대로 굳어버린 케이스라고 한다. 하필 둘 다 주문이 이 모양 이 꼴인데 2인 1조로 움직이는 이 시스템에서 같은 학교인 둘이 같은 팀까지 되어 버렸으니 정말 가관 그 자체. KMU의 직원들이 오죽하면 이 두 팀의 업무를 처리할 때마다 웃음이 떠나지 않는다고 할까. 주 마법은 대지 마법. 식물과 같은 류의 컨트롤이 자유롭다. 줄기를 단단하게 만들어 무기로 사용한다든가, 가시를 이용해서 공격한다든가 하는 방식이다.
둘이 하는 일은 나름 간단하다. 마수를 무찌르는 것. (사실 전혀 안 간단해 보이지만.) 마수가 나타나는 때는 주로 저녁에서 새벽 사이, 수험생인 성운에게는 천금과도 같은 시간대. 주문을 외치면 외형이 변함과 동시에 전투가 시작되는 것이다. 마수의 형태는 이래저래 다양해서 무어라 말로 설명하기엔 무리인 감이 없지 않아 있다. 성운과 민현의 담당 구역은 학교 근처, 야자를 빼고 나와야 하는 것에 대한 편의를 봐주기 위함이었다. 소통 방법은 텔레파시. 마음속으로 하고 싶은 말을 하면 정해진 사람, 그러니까 서로의 말만 들려오는 그것. 학교에서도 한 층밖에 차이가 안 나기 때문에 아 공부하기 싫다, 집에 가고 싶다 따위의 쓸모없는 정보, 줄여서 TMI까지 다 들리긴 했지만 둘 다 나름 편하게 잘 써먹고 있는 듯했다.
그런 이 둘의 첫만남이 어땠더라. 사실 성운은 학교에서 발이 넓은 편이었으나 민현이 딱히 나서는 성격이 아니었기 때문에 넓은 성운의 발 범위를 벗어나는 곳에 속해 있었다고 해도 될 것이었다.
1년도 안 되는 몇 개월 전, 겨울방학을 시작하고 이젠 고3이라는 선생님의 말씀을 들으며 아 어떡하지 조때따, 따위의 생각을 하고 있던 성운과 중간에 낀 학년이 되어 모호하다는 말이 딱 어울리는 위치에 서 있었던 민현. 집에 가던 길, 민현은 지시자를 만났고, 만나자마자 마수가 나타났다는 지시자의 말에 물음표 이백만 개 띄운 표정으로 시키는 걸 했더니 어느덧 이리저리 모양새가 바뀐 채로 공중에 둥둥 떠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들려오는 말. 넌 누구야?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이리저리 둘러보는데 저와 같이 떠 있는 사람 하나가 시야에 들어온다. 너 누구냐고. 저 사람 분명 입도 뻥끗 안 했는데 왜 목소리가 들리지. 벙찐 상태로 가만히 있으니 제 앞으로 슝 날아와서는 뭐야. 신입인가? 하며 손에 얼음 창을 만들어 쥔다.
“저… 그게 이게 무슨 일인지…”
“보나마나 되자마자 끌려왔겠지. 망할 보스.”
“그러니까, 저기…….”
야, 얘 능력이 뭐야. 또 다시 들려오는 텔레파시. 어느 것 하나 제대로 파악 되는 게 없어 대략난감한 표정으로 둥둥 떠 있기만 하니 대지 마법. 하고 차분하게 들려오는 답. 대체 어디서 말하는 거야 이거, 진짜 설마 텔레파시? 머릿속으로 말하는 거? 내 머릿속에 사람이 여럿 들어있는 건가? 온갖 생각 다 하고 있으면 갑자기 제 손을 쥐더니 자, 마음속으로 식물 줄기 같은 걸 생각해 봐. 엄청 단단한 거. 하고 제 쪽을 쳐다보는 아까 그 사람이 있다.
“이게 무슨 상황이에요?”
“싸워야 하는 상황. 그러니까 빨리 하기나 해.”
“…….”
거 참 성격 한번 시니컬하네. 속으로 투덜거리는데 다 들려, 하는 답이 돌아온다. 아…. 민현은 거기서 상대에게 별 다른 답 없이 시키는 대로 따라하기 시작했다. 급한 상황이라는 걸 변명거리로 써먹은 셈이었다. 딱딱하고, 길다란 식물 줄기……. 어, 맞아. 손 뻗어봐 이제. 오른손을 앞으로 내밀자 쥐어지는 무언가. 상상하느라 감았던 눈을 뜨면 제 손에 안착해 있는 커다란 식물 줄기 하나. 와, 신기하다는 듯 쳐다보면 지금 신기해 할 시간이 어디 있어? 라며 저를 닦달하는 상대방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근데, 저, 왜 반말 쓰세요?”
“……내가 선배니까?”
“그래도, 초면인데.”
“알겠어요, 그럼 몇 살이세요?”
“열일곱이요. 곧 열여덟 돼요.”
“나는 너보다 한 살 많아요. 그럼 이제 반말 써도 되지?”
이름이 뭔데요? 하성운. 학교 어디 다녀요? 아진고. 어, 같은 학교네요. 시시콜콜한 말을 나누며 이리저리 옮겨 다니다가 발견한 마수. 아, 저렇게 생겼구나. (방금 전에) 설명만 들었던 존재인지라 어떻게 생겼는지 잘 짐작이 안 됐는데, 확실히 보니까 알겠더라. 민현의 인상이 살짝 찌푸려진다. 보기에 썩 좋지는 않다. 다른 사람들한테는 안 보여요? 어, 안 보여. 그럼 쟤네가 뭐 부수면 어떡해요? 우리가 돌려놔야지. 할 수 있어요? 어. 야, 봤다. 정신 바짝 차려. 사뭇 진지해진 낯의 성운이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마수를 무찔러야 한다는 것도 알겠고, 지금 상황이 어떤지 대충, 아주 대충 파악은 되겠는데 말이다.
민현은 그와 별개로, 좀, 반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든 것 같았다. 그것도 저 형한테.
어떻게 저렇게 예민한 사람한테?
이것도 마법인가?
이상했다. 그때 맞닿았던 손의 느낌이 꾹 쥐었던 길다란 식물 줄기보다 더 생생하게 남아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사람의 손을 잡는 것과 자신이 생각만으로 만들어 낸 것을 잡는 것, 둘 중 하나를 고르라면 당연히 후자가 더 신기하고 기억에 남아야 할 것인데. 왜 머릿속에는 자꾸 성운과 잡았던 그 손이 남아 뱅글뱅글 맴돌고 있는 건지, 생각이 날 때마다 괜히 주먹을 쥐었다 펴는 게 이제는 버릇이 될 지경이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속으로도 아무런 말을 할 수 없다는 게 제일 답답했다. 한 층, 그것도 바로 위 교실이었던지라 속으로 뭘 말하든 다이렉트로 들릴 게 뻔했거든. 실제로 성운이 하는 시시콜콜한 속마음 얘기들도 민현에게 곧바로 들려왔기 때문에 진짜 무슨 말이든 함부로 했다간 망해도 제대로 망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입 다물고 공부만 했던 민현이었다.
다시 지금. 고3 성운과 고2 민현. 민현의 짝사랑은 여전히 진행 중이었고, 지시자의 부름을 받고 마수를 잡으러 나가는 일에도 점점 익숙해져 가고 있었다. 종종 빠지는 야자에 선생님은 의아한 눈으로 민현을 보았지만 원래 공부 잘 하는 애니까, 하는 생각으로 그냥 넘기는 성 싶었다. 첫눈에 반한다는 게 말이 되나? 싶었지만 애초에 저 자신이 마법 소년이라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는 것 같아 애꿎은 머리만 헝클었다. 샤프를 쥐고 공부를 하는 와중에도 저보다 한참 작은 키에 선배랍시고 뽈뽈거리며 이것저것 알려주는 성운의 모습이 생각나면 두둑, 하고 샤프심을 부숴먹기 일쑤였다. 무슨 일 있냐, 라며 물어오는 친구들에게 아무 말 할 수 없는 이 마음을 어떡하면 좋을까. 심란한 민현의 그 마음은 뚝 떨어진 3월 모의고사 성적에 고스란히 드러났다.
티를 안 낸 게 아니었다. 분명 민현은 제 딴엔 많은 티를 냈다고 생각했다. 중심을 잃고 떨어질 뻔한 성운에게 다급하게 날아가 안아주듯 받아준 적도 있었고, (물론 그 상태에서 아무 말 없이 빤히 쳐다보다 뭘 보냐는 성운의 말에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하며 놓아주긴 했지만.) 성운이 모르는 문제가 있다고 혹여나 저를 찾아올까봐 고3 범위까지 다 공부까지 해 두기도 했다. (물론 성운이 공포자였던지라 저를 찾아오는 일은 없었지만.) 거의 졸졸 따라다니다시피 하다가 고3이니까 방해하면 안 될 것 같아 그만뒀었는데……. 왜 진전이라는 게 눈곱만큼도 보이지 않냐 이거다. 답답해 죽고 싶을 지경이었다.
하지만 답답한 건 성운도 마찬가지였다. 이 답답한 눈새 후배를 어떡하면 좋지. 안겼을 때, 귓가에 닿은 가슴팍에서 울렸던 심장소리와 제 심장소리의 빠르기는 누가 들어도 똑같았는데. 아니, 오히려 제 쪽이 더 빨랐던 것 같기도 한데. 빨개진 성운의 귀는 발견하지도 못한 채 어버버거리며 저를 놓아준 민현을 보며 성운이 속으로 얼마나 가슴을 쳤는지 모를 것이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마음에 들었었는데. 아래 학년에 저렇게 잘생긴 애가 있었는데 내가 몰랐다고? 하는 호기심에서 시작해서 행동 하나 하나 배어 있는 매너와 예의에 심장 졸이면서 살아야 했던 성운을 민현이 알았다면 적어도 이러지는 말아야 했다. 졸졸 따라다니는 민현이 사실 조금 귀찮기도 했지만 그래도 귀여워서, 봐 줄 만 했는데. 그마저도 끊겨버리니 만날 타이밍이 마수 무찌를 때밖에 없다는 게 섭섭해도 너무 너무 섭섭하잖아.
어떻게든 하루 날을 잡아서 황민현이랑 결판을 짓든 말든 해야겠다.
형한테 제대로 하루 잡아서 차이더라도 고백은 해 봐야지.
누가 텔레파시 쓰는 사람들 아니랄까봐, 디데이 설정도 똑같이 해버린 둘이었다.
4월 1일이 만우절인 줄 몰랐지. 바본가 진짜. 일어나자마자 든 생각에 성운은 제 이마를 팍팍 내리쳤다. 하성운 진짜 바보야? 멍청이야? 어떻게 디데이를 이렇게 잡아? 보이는 곳마다 머리를 한 번씩 박고 도착한 학교에선 이미 이마는 빨개진 상태였다. 계단을 오르고 있는데 어, 구름이 형. 하고 들려오는 목소리. 이 호칭으로 부를 사람은 하나밖에 없으므로 순간적인 표정관리를 하고 여상스런 그 표정으로 돌아다본다.
“형 이마 왜 이래요?”
“아니 뭐…… 오다 좀 박았어. 어디에.”
“아팠겠다.”
손을 뻗어 제 이마를 한번 감싸더니 가까이, 그것도 훅 다가와 호오, 불어주는 민현의 행동에 화들짝 놀란 성운은 표정관리고 자시고 거기서 얼음이 된 채 쳐다봐야 했다. 굳어버린 성운을 보는 민현은 고개를 슬쩍 기울이고 아파요? 하고 묻는다. 아, 아니, 그게 아니라, 너 지금, 마음속으로 무슨 말 한 줄 알아……?
오늘도 예쁘다.
만우절 거짓말 이렇게 치기 있냐고요. 진짜였으면 좋겠는데, 사람이 왜 이렇게 간사해.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성운은 속으론 아무 말 않은 채 제 머리만 다급하게 쓸어 넘기고 간다, 한마디 남긴 채 뽈뽈뽈 돌아섰다. 가만히 그 자리에 서서 제가 사라질 때까지 지켜보고 서 있었던 민현을 뒤로 한 채.
되는 게 하나도 없는 날이라고 생각했다. 적어도 이 둘에게는 그랬으리라. 하필 잡은 디데이가 4월 1일, 만우절이었고, 그래도 진심이라고 하면 되겠지, 하는 마음으로 기다렸는데 야자 시간 도중도 아니고 야자가 끝난 직후, 하루의 끝을 얼마 안 남겨둔 시점에서 마수가 나타났다는 지시자의 말에 진짜 지시자가 있는 방향 쪽으로 엿이라도 날려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왜 이놈의 마수들은 밤중에 나타나고 난리들이신지. 빨리 끝내고 가버려야겠다, 싶은 마음이었다. 보너스고 나발이고 다 필요없는데. 민현은 울상으로 나타났고, 다 죽여버리겠어. 성운은 잔뜩 찌푸린 인상을 하고 나타났다.
뭐야…… 저거야?
그런 것 같죠?
공중에 떠 있는 벚꽃나무는 없으니까, 그렇지? 요즘 들어 너무 말도 안 되는 일들이 제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 같다고 생각하던 민현이 고개를 내저었다. 이건 꿈이 분명해. 그것도 미칠 대로 미쳐버린 꿈. 저걸 사람들이 다 봤어야 했는데. 괜히 억울해진다. 그리고 외쳐야 하는 주문에 두 번 억울해지고. 아이스 초코, 아 맞다 지갑! 동시에 울리는 주문에 빛이 일제히 사방으로 퍼지더니 둘의 외형이 바뀌기 시작한다. 검던 둘의 머리는 성운은 자몽색, 민현은 금색으로 바뀌었고 눈동자는 노란색, 회색으로. 복장은 조금 더 활동하기에 편한 차림으로. 주먹을 두어 번 쥐었다 편 민현이 가시가 가득한 장미 줄기를 크게 만들어냈다. 성운은 다 패버리겠다는 마음인지 얼음으로 야구 배트를 만들었고. 다시금 시야에 들어오는 벚꽃나무의 크리피함에 심호흡을 두어 번 하던 성운이 민현 쪽으로 신호를 보낸다.
셋 하면 가는 거다.
알았어요.
하나, 둘,
셋. 신호가 떨어짐과 동시에 양쪽으로 퍼지는 둘, 그리고 순식간에 그 근처로 다가가서는 장미 줄기로 나무를 푹 찌르는 민현과 신경질적인 표정으로 꺼져어어어!!! 하고는 세게 한 대 후려치는 성운. 화가 났는지 벚꽃나무의 가지가 이리저리 움직인다. 그러다가 차마 피하지 못한 성운이 복부 근처를 긁혔고, 일전에 있었던 일마냥 균형을 잃고 추락하기 시작했다. 민현은 줄기를 여러 개 만들어 나무를 사정없이 찔러버리고서는 빠른 속도로 성운의 아래까지 내려가 떨어지기 직전에 몸을 받쳐 안아냈다. 가쁘게 내쉬는 숨에 아찔한 시야. 큰일 날 뻔 했다고 생각하던 민현은 성운의 상태부터 다급하게 살폈다. 놀랐구나. 피부보다는 옷만 찢겨 나간 게 전부인 것 같아 가쁜 숨 내쉬는 와중에 한숨이 섞여 나왔다.
끄어어어, 하는 소리가 멎은 걸로 보아 마수는 소멸된 것 같아 보였다. 한번에 너무 많은 마력을 쏟은 탓에 좀처럼 힘이 들어오지 않는 모양인지 땅에 성운을 내려두자마자 변신이 풀린 민현이 계속해서 빠르게 숨을 내뱉는다. 이정도로 많은 힘을 쓴 건 처음인데. 마찬가지로 변신을 풀고 다가온 성운은 살짝 긁힌 제 옆구리를 확인하고서는 에이씨, 하고 곱지만은 않은 말을 읊조린다. 그러다가도 생각난 민현에 다급하게 달려가 괜찮아? 하고 양 볼을 쥐더니 여기저기 살펴본다.
죽을 뻔한 건 형이잖아요.
“그런 나 살리려다 네가 죽을 고비 맞이한 것 같은데.”
그러던 와중 툭, 어? 뭐지. 제 머리맡에 떨어지는 무언가에 시선을 돌리면 벚꽃잎이 시야에 들어온다. 벚꽃나무 죽였다고 지금 벚꽃잎 떨어지는 거야? 그제야 하늘을 올려다보면 꼭 비가 내리는 것처럼 떨어지기 시작하는 벚꽃잎들. 그림 한번 환상이네. 형, 지금 몇 시예요? 제 상태와 아무 상관없는 것 같은 질문을 하는 민현에게 성운은 야이, ……. 하며 무어라 한마디 하려다가 한숨만 폭 내쉬고선 휴대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한다. 12시 1분. 왜. 나 빨리 가서 공부해야 하는데. 되도 않는 핑계를 대며 되물으면 더 가까이 와 보라며 손짓하는 민현이 있고.
“왜 불러.”
“나 형 구하다가 이렇게 됐으니까 소원 하나만 빌게요.”
“구해 달라고 한 적 없는데.”
마음과 다른 말을 하는 건 성운의 버릇이었다.
“그냥, 내가 이렇게라도 명분을 만들고 싶었어요. 이기적이라고 욕해도 괜찮긴 한데.”
“그래서 뭐.”
“말은 하고 싶어서.”
“…….”
좋아해요.
마음속으로 들려오는 그 말과 동시에 조금 더 많이 쏟아지기 시작하는 벚꽃잎. 벚꽃나무 마수 장난하냐. 너 이거 다 지켜보고 있는 거지. 애꿎은 마수만 탓하던 성운이 뒤늦게 귓가에서 느껴지는 후끈함에 제 귀를 급하게 가려버렸다. 가리면 내가 모를 줄 알고. 벽에 기대어 앉은 채 저를 비웃기라도 하는 듯 하하하, 하고 나직히 웃는 민현이 더없이 밉기만 했다.
“그래서 시간 물어본 거야?”
“네. 혹시나 만우절 거짓말이라고 생각하면 어떡할까, 해서.”
“사실 나도…….”
“……,”
“……어제 고백하려고 했거든. 멍충아.”
머리를 털면 벚꽃잎이 우수수 떨어질 것 같은 느낌. 여러모로 간질거리는 심장에 성운은 괜히 못된 말만 내뱉었다. 이거 꿈 아니죠. 형 지금 만우절 아니에요. 알아요? 어, 알아. ……아, 나 소리내서 말 못하겠어요. 답잖게 얼굴을 가리고 수줍어하는 민현. 그런 모습을 쳐다보는 성운은 조금은 기가 찬다는 듯 헛웃음을 터뜨린다. 너 뭐해?
아니, 너무 꿈 같아서…….
…….
……나 마법소년 된 것도 다 운명이었던 걸까요?
운명은 개뿔. 그래서 너 나 싫어?
아뇨, 좋아요. 사람 뺏는 마법도 있나?
……아 씨. 그런 거 없어. 다 진짜야.
마법이어도 상관없어요. 좋아요, 좋아해요. 구름이 형. 성운이 형. 하성운. 좋아해요. 꼭 귓가에서 속삭이는 것만 같은 말이 빙그르르 돌다 못해 머릿속으로 퐁당 들어와 매끄럽게 유영하고 있는 것 같은 기분. 벅차오르는 감정을 내비칠 길이 없어 성운은 그대로 다시금 하늘을 올려다본다. 언제까지 이 벚꽃비가 내릴 작정인지. 사실, 집에 돌아갈 때까지 그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도 없잖아 있다. 벚꽃잎이 이렇게 많이 떨어지면 가로등 불빛에 비춰져서 너나 나나 다 핑크빛으로 보이니까.
붉어진 제 뺨과 귀가 조금은 가려지지 않을까, 하고.
몰라! 나 갈 거야. 너 일어날 수 있지 이제?
네, 다 나았어요. 조심해서 가요, 형. 데려다 달라고 하고 싶은데, 부끄러워하는 것 같으니까 참을게요.
닥쳐!
사랑해요.
망할, 망할. 성큼성큼 내딛는 걸음과, 뒤에서 들려오는 듣기 좋은 웃음소리, 빠르게 뛰는 심장. 쟤가 정말 나한테 마법이라도 걸어버린 건 아닐까, 혹시나 싶어 해 보는 실없는 생각들. 은은하게 비춰오는 핑크빛 조명, 형, 하고 부르는 소리에 뒤돌아보면 어느새 눈앞에 나타나 제 손을 끌어다 잡고 입을 맞춰 오는, 이제 더 이상 아는 후배가 아닌, 사랑하는 애인이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
따뜻하게, 혹은 기분 좋게 불어오는 봄바람까지.
그 어느 것 하나 마법 같지 않은 일이 없다고, 성운은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