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과 바다
Written by 쿼츠
파랗다 못해 투명하게 부서지는 새하얀 여름 바다와 유리 같은 햇빛.
차에서 내린 관린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바다였다. 마을은 도시와는 조금 떨어진 곳에 있었고, 마을에 나 있는 길을 가로질러 한없이 나아갈 때, 그 끝에는 바다가 있었다. 관린은 그 자리에 계속 서서 바다의 모습을 바라본다. 몇 시간동안이나 쓸모를 잃은 골동품처럼 자동차 뒷좌석에 담겨있어서 그런지, 관린은 목적지에 도착했다는 것보다 몸이 피곤하고 굳어있는 게 더 신경 쓰였다. 손끝의 미세한 감각까지 제자리를 찾을 수 있도록, 온몸을 쭉 뻗어 신경을 이완한다. 햇빛은 여전히 유리 같았다.
관린은 여름방학을 맞아 외할머니가 사는 동네에서 생활하기로 했다. 오래 있어봤자 2주, 마지막 일요일이 지나고 그 다음 날이 되면 타이페이로 돌아가야 한다. 타이페이에는 친구들도, 익숙한 내 방과 나만의 세계가 있지만 도시의 안에서만 생활한다면 분명 권태를 느끼겠지. 가끔은 이런 작은 마을도 괜찮을 거야. 트렁크에 실은 짐을 챙기고, 바다의 지평선 너머를 바라보며 걸었다.
“외할머니는 좀 어때요?”
“덕분에 많이 괜찮아지셨나봐. 3일 전에 퇴원하시긴 했지만, 그래도 좀 쉬셔야 한다고 하시네.”
“제가 할머니에게 도움이 되어드려야 할 텐데…”
“너무 부담 갖지 마, 할머니랑 같이 생활하면서 옆에서 조금씩 도와드리면 되는 거니까.”
어머니와의 대화에서도 관린의 시선은 계속 바다에 머물러 있었다. 파란색 바다, 이 세계에 내려앉은 모든 색은, 비슷한 색은 있을지라도 같은 색은 없다고 누군가 말했었던 것 같은데. 그 바다를 보고 있으면, 자신의 세계를 스쳐지나갔던 모든 푸른색을 떠올리게 되는 것 같았다. 새벽 어스름이 지는 하늘에서 볼 수 있는 푸른색, 가장 좋아하는 니트의 푸른색, 어렸을 적에 쓰던 크레용에 들어있던 갖가지 푸른색. 그 색들에게는 모두 저마다의 이름이 있었다. 그렇다면 지금 보고 있는 이 바다에는 어떤 이름을 붙여야 할까. 관린은 생각에 잠긴다.
“예쁘지? 이 바다.”
“네? 아… 네. 보고 있으면 마음이 편해지는 것 같아요.”
“할머니도 이 바다를 특히 좋아하셔. 바다가 있어서 그런지, 마을도 탁 트이고 바람도 선선하다고.”
“이런 바다를 보면서 지낼 수 있다는 건 어떨까요?”
“글쎄… 어떨 것 같아? 네가 생각하기엔.”
“음… 아침에 눈을 떠서 창밖을 봤을 때, 가장 먼저 보이는 게 아파트가 아니라 바다라면, 기분이 좋아질 것 같아요. 저 너머, 바다의 지평선을 계속 보고 있으면 마음이 편안해지니까요.”
“엄마도, 그렇게 생각해.”
“그렇죠? 역시.”
“응, 그렇지.”
외할머니의 집은 바다와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곳에 자리잡은 하얀색 집이었다. 관린의 눈에 닿는 이 마을의 건물은 거의 대부분이 하얀색이었다. 아무도 쓰지 않아 가구 곳곳에 먼지가 조금씩 앉아있는 방에 짐을 내려놓고, 굳게 닫혀있던 창문을 연다. 창문을 열자마자 빛이 들어오지 않던 방에 화사한 햇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투명하게 부서지는 여름의 햇빛,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바다와, 일렁이는 파도는 깊은 푸른색. 짐을 정리해야 한다는 것도 잊은 듯, 관린은 그 자리에 서서 한참동안 바다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관린의 예민한 감각 끝으로 바다의 푸른색이 물든다. 이 바다에 매료되었을지도 몰라. 그렇게 생각했다.
“다다음주 월요일에 올게. 그때까지 할머니 잘 돌봐드리구.” 그 말을 끝으로 어머니의 자동차는 외할머니의 집을 떠났다. 관린은 자동차의 모습이 아주 작은 점이 되어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손을 흔들다, 집으로 들어온다. 집으로 들어오는 길에도 시선의 끝은 여전히 바다에 머물러 있었다. 푸른 바다, 일렁이는 파도와 여름의 향기.
마을에서의 생활은 생각했던 것처럼 마냥 따분하지만은 않았다. 타이페이에서 생활하면서 봐왔던 것들 대부분이 그 곳에도 있었고, 권태를 느낄 때면 어김없이 창문을 열어 바다의 모습을 한참동안 바라보곤 했다. 기회가 생긴다면 꼭 저 바다로 달려가야지. 마침 그 날의 계절은 여름이었다.
그 날 관린은 마당 어귀에 자라난 능소화 나무를 돌봤다. 여름을 기다렸다는 듯 소담스레 피어난 능소화는 길게 자라 담장을 넘을 정도였다. 관린은 나무에 물을 주고, 필요없는 잎들은 가위로 잘라냈다. 처음 해보는 것 치곤 꽤 깔끔하게 정돈된 것 같아, 관린은 주홍빛 꽃을 보며 괜히 웃었다. 바다의 깊은 푸른색과 건물의 잔잔한 하얀색, 그리고 노을의 붉은 빛을 닮은 주홍빛은 이 곳에서 보는 새로운 색이었다. 가지치기를 끝낸 관린은 그 색깔을 눈 안에 담았다.
“할머니, 가지치기 다 했어요.” 관린이 마당의 능소화 나무를 가리키자 외할머니는 알았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고생했네. 정말 고맙다.”
“이제 나가봐도 될까요?”
“물론이지. 나가서 놀 만한 게 있을지 모르겠다만…”
“요 앞 바다로 갈 거예요. 너무 걱정 마세요.”
“그래, 너무 멀리 가지는 말고. 해가 지면 돌아오렴.”
조금 때가 타 있는 흰색 운동화를 신고 집 밖으로 나섰다. 평소였다면 햇빛을 가릴 검은 모자를 쓰고, 손에는 꼭 농구공을 들고 외출했을 텐데. 도시와 조금 동떨어진 곳이어서 그런 걸까, 이 곳은 햇빛마저도 그동안 느꼈던 햇빛과는 조금 다른 것만 같아서, 피부 위로 떨어져도 따갑지 않고 기분 좋게 녹아내렸다. 낯익은 골목을 걸어가면 자동차들이 지나가는 큰 길과, 그 길의 옆에는 바다가 있었다. 관린은 백사장으로 내려가는 계단까지 가벼운 걸음으로 뛰었다. 바다를 뒤로 한 채 뛰고 있으면 새로운 감각이 피어나는 것 같았다.
백사장으로 내려가는 철제 계단을 성큼성큼 밟아 내려간다. 하얀 모래를 두 발로 밟자마자 고개를 돌리자 눈앞에 펼쳐지는 것은 온통 바다다. 깊은 푸른색의 바다, 이 바다에게는 어떤 이름을 붙여야 할까… 바다의 위에서 파도가 일렁인다. 투명한 햇빛이 내리쬐면 파도는 빛을 받으며 넘실대고… 모래 알갱이의 빛은 어딘가의 보석 같았다. 관린은 이 곳의 바다를 사랑하게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이런 바다와 함께하는 사계는 어떨까. 관린은 파도 소리를 들으며 백사장을 걸었다. 뒤를 돌아보면 하얀 모래 위에 남은 발자국이 눈에 밟힌다.
“사람?”
관린은 저 앞에 앉아있는, 낯선 사람의 모습에 어깨를 움츠린다. 멀리서 보이는 낯선 사람은 관린의 또래로 보이는 소년이었다. 밝은 갈색빛 머리카락에 새하얀 피부, 너울대는 세일러복. 소년은 파도가 치는 백사장의 바로 앞에 앉아 파도가 치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처음 보는 사람인데, 누굴까…
그러고보니 이 마을에 어떤 사람이 살고 있는지 모른다. 마을에서 한 일이라곤 줄곧 잠을 자거나, 할머니의 일을 돕거나, 틈틈이 창문을 열어 바다를 바라본 게 전부였으니까. 저 사람도 이 바다를 좋아하는 걸까. 관린은 생각한다. 소년은 마냥 그 자리에 앉아 미동도 없이 파도치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무언가를 생각하는 건지, 파도의 소리가 듣고 싶은 건지, 아니면 파도의 모습을 바라보고 싶은 건지. 저 눈동자 안에 정말 파도가 있을까. 관린은 소년에게로 다가간다. 모래 위로 발자국이 남는다.
소년의 앞에 선 관린은, 소년과는 조금 떨어진 곳에 앉는다. 백사장 위에 관린이 앉자 모래 알갱이들이 사각사각, 소리를 냈다. 이렇게 앉아서 바다를 보면 특별하게 보이는 게 있는걸까. 지금의 관린은 바다의 모습도 중요하지만, 제 옆에 앉은 소년이 궁금했다. 매일 이 곳의 바다를 보는건지, 어디에서 왔는지, 이 마을에서 사는지…
“바다를 좋아해?”
“……?”
먼저 말을 건 쪽은 이름 모를 소년이었다. 바다와 어울리는 투명하고 맑은 미성… 관린은 소년의 목소리를 곱씹기도 전에, 소년이 먼저 말을 걸었다는 것에 짐짓 놀라 아무 말도 꺼내지 못했다. 이런 제 자신이 조금 바보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관린은 숨을 가다듬고 입을 열었다.
“응, 좋아해. 이 곳의 바다는 특히…”
“그렇구나.”
그 말을 끝으로 소년은 시선을 다시 바다로 돌린다. 시선을 어디에 둬야 할지 망설이던 관린도 소년을 따라 바다를 바라보았다. 바다는 여전히, 깊은 푸른색을 품고 있었고 그 위로 새하얀 파도가 넘실댄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매일 여기서 바다를 보는 거야?”
관린은 짧게 숨을 들이키고 입을 열었다. 소년은 관린의 말을 천천히 되짚기라도 하는 듯, 눈동자를 굴린다. “매일 오지는 않지만… 시간을 내서 하루에 한 번은 꼭 이 바다를 보려 해.” 소년의 목소리는 꼭 파도소리 같았다. 찰박, 찰박… 소년의 목소리는 작은 울림이 되어 관린의 귓전에서 뱅글뱅글 돌았다.
“그렇다면 역시 이 곳의 바다를 좋아하는 거겠네?”
“그런 거겠지?”
“그렇다고 생각해.”
소년은 관린의 대답에 키득키득, 웃는다.
“이름. 물어봐도 돼?”
“내 이름?”
“싫다면, 말해주지 않아도 되는데…”
“구름.”
“구름?”
“싫으면 말 안 해도 된다며? 그래서 별명을 얘기한 것뿐이야. 내 별명, 구름이거든.”
구름의 시선은 어느새 바다가 아닌, 관린의 눈동자로 향해 있었다. 그 사실을 알아챈 관린은 구름의 시선을 피하려다, 무언가를 결심한 듯 구름의 눈동자를 오롯이 바라본다. 서로의 시선의 끝이 맞닿는다. “내 이름. 내 이름은 라이관린이야.” 관린은 무언가 생각난 듯 급하게 말을 덧붙였다. 조급하게 굴 일도 아닌데. 하지만 여기서 말하지 않으면… 구름이라는 사람을 붙잡지 않으면 영영 못 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구름은 그의 이름을 곱씹기라도 하듯 잠시간 말이 없었다.
“그… 관린, 이라고 부르면 돼.”
“관린…”
“‘가을의 장마’ 라는 뜻이야. 엄마가, 알려줬어.”
“응, 기억하고 있을게.”
그 말을 끝으로 구름은 앉았던 자리에서 일어나, 바지에 묻은 흙을 털었다. 어디 가는 거야? 구름의 움직임에 관린도 따라서 일어났다. 관린보다 키가 작은 구름은 자연스레 그를 올려다본다.
“이제 가야 해. 가볼 데가 있거든.”
“하지만 해가 지려면 아직 멀었는데…”
“나도 알아. 오늘은… 갈 데가 있어서 그런 거야. 그 뿐이야.”
“내일도 여기 올 거야?”
구름은 그 말을 천천히 되짚는다.
“응. 내일도 올 거야.”
“나도, 내일 또 올 거야.”
“…”
“여기, 이 바다가 빛을 받아서 가장 반짝거릴 때.”
관린은 그렇게 말하며 손가락으로 바다를 가리켰다. 바다는 여전히 햇빛을 받아 반짝이고 있었지만, 시간이 좀 흐른 탓인지 아까에 비해선 반짝임이 조금 줄어들었다. 구름은 관린의 손가락을 따라 바다를 물끄럼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때 보자. 그때까진 안녕, 인거야.” 구름은 뒤를 돌아 백사장을 걸어간다. 구름이 걸어가는 곳마다 작은 발자국이 남는다.
그 날 밤 관린의 머릿속은 줄곧 구름에 대한 생각 뿐이었다. 구름의 말간 얼굴과 구름이 했던 모든 말들, 구름이 내뱉던 숨, 구름이 지나가는 자리마다 남던 백사장 위 발자국까지. 바다에서 돌아온 관린은 뭔가에 얻어맞은 사람처럼 계속 멍하니 앉아있기만 했다. 할머니가 관린에게 무슨 일이 있냐고 물어도 고개만 가로저었다.
한편으로는 어서 다음 날이 되기를 바랬다. 관린은 구름에게 말을 걸었을 때부터, 구름이 그 바다를 떠나기까지의 장면을 하나도 빠짐없이 기억한다. 관린의 세계에서 장면과 장면이 모여 하나의 영상이 완성된다. 그것은 아주 근사한 비디오였다. 비디오 속 자기자신은 조금 어리숙할지 몰라도, 두 사람 뒤에 펼쳐진 배경은 아름다운 바다였고, 제 앞에 서있던 정체모를 소년은 바다의 빛을 닮아 반짝인다… 어딘가의 영화같은 모습에 관린은 키득키득 웃으며 침대 위로 풀썩, 쓰러졌다. 구름이의 진짜 이름은 뭘까? 이 마을에서 사는 걸까? 이 바다를 정말 좋아하는 거겠지? 바다 말고도 또 뭘 좋아할까? 난 탄산음료가 좋은데… 관린은 그런 생각을 하며 잠에 들었다.
다음 날 관린은, 오후 한 시가 되기까지 기다렸다. 이 바다가 빛을 받아서 가장 반짝거릴 때. 사람마다 생각의 관점은 달랐지만, 이 바다에서만큼은 모두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거라 믿었다. 바다는 햇빛이 가득 내려앉는 오후 한 시가 되면 가장 밝게 빛을 냈다. 한 시가 되기 십 분 전에 바다로 가자. 그러면 구름이도 기다리고 있을 거야. 관린은 벽에 걸린 시계를 본다. 긴 바늘은 8에, 짧은 바늘은 1에 가까워진다. …나갈까? 나갔다가 구름이가 없으면? 아니, 그것도 아냐. 구름이가 날 기다리고 있다면 어쩌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더 커져가는 질문의 답을 내리기도 전에 관린은 이미 신발을 꿰어신고 밖으로 뛰어나갔다. 집 앞부터 바다로 내려가는 계단까지 쉼없이 뛰었다. 헉, 헉… 폐가 터질 것처럼 갑갑한 감각에 숨을 몰아 내쉰다.
바다로 내려오자마자 관린은 어딘가에 있을 구름을 찾았다. 구름을 찾는 관린의 눈동자가 바쁘게 움직이다가, 어느 한 곳에서 멈춘다. 그 곳은 바다였다. 반짝이는 푸른색을 담은 바다와, 그 바다와 함께 서 있는 구름. 관린은 구름에게로 가까이 다가간다. 백사장 한 켠에는 구름이 벗어놓은 듯한 흰 양말과 검은 신발이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다. 먼저 와 있었구나. 관린은 시간 가는 줄을 모르고 바다에 들어간 구름을 바라봤다. 변함없는 세일러복 차림의 구름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바다에 와본 사람처럼 양손으로 바닷물을 담아 한참을 바라보는가하면 발로 물장구를 치기도 했다. 구름은 양손에 담은 바닷물을 손 틈 사이로 흘려보내더니, 고개를 들어 관린이 서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인기척을 느낀 걸까, 제 앞에 서 있는 관린의 모습에 놀란 듯 동그랗게 눈을 뜬다.
“그… 늦게 와서 미안.”
“기다리고 있었어.”
이 바다를 봐. 구름은 손가락을 뻗어 바다를 가리킨다. 조금 전까지 바닷물에 적셨던 구름의 새하얀 손 끝이 바다의 푸른색으로 물들어있었다. 관린은 구름의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옮긴다. 눈 앞에 펼쳐진 것은, 투명한 햇빛이 조각조각 부서져 내려앉은 오후의 바다였다.
“너도 들어올래?”
“그래도 돼?”
“네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어. 이 바다에서.”
“나도, 만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어. 그래서…”
“응, 그러니까.”
어서 들어와, 이 바다로.
구름은 바닷가 앞에 선 관린에게 손을 뻗었다.
구름의 손짓에 이끌리기라도 하듯 관린은 백사장 한 켠에 신발을 벗어두고 구름에게로 향했다. 발 끝으로 바스락대는 모래가 닿다가, 바다로 들어가자 발목에까지 바닷물이 일렁였다. 줄곧 눈으로 보기만 했던 그 바다에 처음으로 닿는 순간이었다. 피부에 닿은 바다는 기분 좋게 차가웠다. 투명한 바닷물 사이로 관린의 맨발이 보였다.
“꼭 바다에 처음 들어와본 사람처럼 행동하네.”
“이 바다는 매일 보기만 했으니까.”
“나는 자주 들어와봤어. 시간을 내서라도 하루에 한 번은 꼭 여기에 온다고 했잖아? 이 바다에 들어오면 기분이 좋아지니까.”
구름은 허리를 숙여 바닷물에 손을 넣었다. 새하얀 손 위로 투명한 바닷물이 어른댄다. “이렇게 하고 있으면, 감각 끝에서부터 바다를 느낄 수 있어.” 그러더니 손 끝에 묻은 물을 관린에게 튕겼다.
“아!”
“긴장하지 말라고 장난 좀 쳤어.”
그렇게 말하며 웃는 얼굴이 장난기로 알록달록 물들어있었다. 관린은 입고 나온 옷이 젖는 줄 모르고 구름과 함께 물을 튕기며 놀았다. 이렇게 시간을 보내는 건 꼭 어렸을 때 이후로 처음이었다. 구름은 이따금씩 기분 좋은 웃음소리를 냈다. 처음으로 들어보는 구름의 웃음소리는 능소화 색깔이었다. 어느 날 집 앞 마당에서 가지치기를 하며 봤던, 붉은 빛 꽃. 그게 아니라면 구름은 이 바다, 그 자체를 닮았다. 구름은 언어로는 번역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구름은 관린이 이 마을에 와서 봤던 것중에서 가장 아름다웠다.
바닷가를 걸어나온 두 사람의 옷은 이미 바닷물로 젖은 채였다. 구름은 제 옷이 젖어도 아랑곳하지 않고 백사장 저 너머를 걸어오더니, 무언가를 주워 관린에게로 왔다.
“손에 있는 건 뭐야?”
“소라 껍데기. 여기에 귀를 기울이면 바다의 소리를 들을 수 있어.”
구름은 팔을 뻗어 소라 껍데기를 관린의 귓가에 가져다댔다.
“여기, 여기에 귀를 대봐.”
“소리가 들려? 무슨 소리?”
“파도의 소리. 지금 우리가 서 있는 바다.”
“파도 소리…”
“어때? 들려?”
“지금은 네 목소리만 들리는데… 아냐, 들려. 파도 소리.”
“이걸 가지고 있으면, 언제 어디서나 이 바다를 떠올릴 수 있어.”
내가 너한테 줄 수 있는 선물이야. 구름은 소라 껍데기를 든 관린의 손을 잡았다.
“나는 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서 좀 쑥스러운데.”
“뭔가를 바라고 준 건 아니야. 신경 쓰지 마.”
해는 어느덧 저물어 바다의 위로 노을이 드리워졌다. 두 사람은 늘 해왔던 일처럼 백사장에 앉아 바닷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무릎을 끌어안은 자세로 파도치는 바다를 바라보던 구름은 선뜻 입을 열었다.
“바다를 좋아해?”
아, 이 말. 구름을 처음 만났을 때 들었던 말인데.
“이 곳의 바다라면 좋아해. 그리고…”
“응.”
“너랑 같이 이 바다에서 시간을 보내는 게 좋아.”
관린의 말에 구름의 눈동자가 일순간 커진다.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한참동안 말이 없더니, 무릎을 끌어안은 손에 힘을 실었다.
“괜히 그런 말 하지 마.”
“난 그냥… 생각나는 걸 말했을 뿐이야.”
“너가 이 곳에 오래 머무를 것 같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어.”
“내가?”
“머지않아 이 곳을 떠날 거잖아. 그래서 다른 곳으로 훌쩍 떠났을 때, 이 바다를 어느 여름의 추억, 정도로 적당히 떠올릴 것 아냐?”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나한테는 이 바다가 전부니까.”
관린은 다시 시선의 끝을 바다에게 두었다. 지금의 관린은 이 바다, 그리고 구름을 사랑하게 될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지금의 구름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관린은 고개를 돌려 옆에 앉은 구름을 봤다.
“돌아오는 월요일에 타이페이로 가게 됐어.”
“어느정도 예상하고 있었어. 넌… 내가 이 곳에서 본 낯선 사람이었으니까.”
“돌아가기 전에 네 이름을 알 수는 있을까?”
구름은 대답하지 않았다.
“오늘은 가볼게.” 구름은 앉은 자리에서 일어나 백사장 저 너머로 걸어간다. 구름이 걸어간 자리마다 발자국이 남았지만, 찰박찰박 파도가 칠 때면 구름이 남긴 발자국은 언제 있었냐는 듯 모양을 잃고 사라졌다. 구름은 그때 무엇을 걱정하고 있었던 걸까. 아니면 잠깐 생각이 많아졌던 걸까. 혼자 바다에 남은 관린은 파도를 보며 구름의 목소리를 떠올린다.
그 뒤로 관린은 타이페이로 돌아가기 직전까지 바다에 가지 않았다. 대신 타이페이에서 했던 것과 비슷한 방법으로 시간을 보냈다. 느즈막하게 일어나 할머니의 일을 돕고, 방에서 음악을 들었다. 그게 질리면 마을을 산책하거나 게임을 했다. 모든 게 무료하다는 생각이 들면 습관처럼 바다를 바라봤지만, 얼마 안 가 시선을 다른 곳에 두었다. 문득 관린은 자신이 했던 자잘한 행동들이 낭비인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2주의 시간이 꼭 이틀처럼 흘러간 것 같았다. “손주 덕분에 심심하질 않아서 좋았는데, 다시 쓸쓸해지겠어.” 할머니의 말에 관린은 다음 방학에도 찾아뵙겠다고 말했다. 관린은 늦은 저녁을 먹고 짐을 챙겼다. 옷은 옷대로 개어두고, 잃어버리기 쉬운 물건은 눈에 잘 보이는 곳에 정리해둔다. 농구공과 휴대폰 충전기까지 챙긴 관린의 손은 협탁 한 쪽에 놓인 조개 껍데기에 닿았다.
“이건…”
구름이 선물해준 하얀색 소라 껍데기였다. “이걸 가지고 있으면, 언제 어디서나 이 바다를 떠올릴 수 있어.” 관린은 소라 껍데기를 귀에 대고 창문 너머의 바다를 바라본다. 이 곳에서 구름을 다시 한 번 만날 수 있을까. 그 생각이 미치자마자 관린은 소라 껍데기를 두고 무작정 밖으로 뛰어나갔다. “해 지기 전에는 꼭 돌아올게요!” 관린은 다시 한 번 바닷가까지 뛰어갔다.
관린이 예상대로 구름은 바다에 있었다. 이번에도 백사장 한 켠에 신발을 벗어둔 채였다. 백사장까지 뛰어온 관린은 구석에 놓인 구름의 신발을 보자마자 지체할 것 없이 바다로 뛰어들어갔다. 이 앞에서 이것저것 재다가는 앞으로 구름을 볼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관린의 신발에서부터 무릎까지 파도가 일렁였다.
“구름아, 구름아.”
관린의 부름에 구름이 고개를 들었다. 구름의 갈색빛 눈동자 위로 관린의 얼굴이 비춰진다.
“나, 내일 타이페이로 돌아가.”
“아쉽네.”
“다시 올 거야. 무슨 일이 있어도 이 바다에 다시, 돌아올 거야. 가을이 됐든, 겨울이 됐든. 그러니까… 이름을 알려줘.”
“이름…”
“이름을 안다면 만나기 쉬워지잖아. 구름아, 우린 다시 만날 수 있어. 만나야만 하는 사람들인 거야. 봐, 지금도. 특별한 약속 없이도 널 만나기 위해 달려왔잖아.”
구름은 관린의 손을 붙잡았다. 마주 잡은 손 사이로 바닷물이 흘렀다. 관린의 손을 타고 구름의 체온과 바다가 전해진다. 지금 이 곳은, 이 곳에서만 볼 수 있는 색으로 가득 메워지고 있었다.
“하성운이야. … 내 이름.”
관린의 손을 잡은 성운은 그 말을 끝으로 잡은 손을 잡아당겨 관린의 뺨에 입을 맞췄다.
“관린아, 뭘 했길래 신발이 이렇게 젖었어?”
“사정이 좀… 있어서요.”
“어차피 버릴 때가 된 신발이긴 했지. 돌아가면 신발부터 사자.”
“아, 그건 안돼요! 절대! 제가 어떻게든 보관할게요!”
“뭐? 상관은 없지만… 공간 차지 안 하게 잘 생각해두고.”
캐리어를 트렁크에 싣은 관린은 자동차의 뒷자리에 앉았다. “할머니, 또 놀러올게요.” 창문을 살짝 열어 할머니와의 인사까지 끝냈다. 이어서 어머니가 운전석에 앉았다. “여기가 마음에 들었나봐?” “뭐, 그렇죠.” “다음엔 엄마도 여기로 요양이나 올까…” “나쁘지 않아요.” 앞으로 타이페이까지 도착하기엔 시간이 많이 남았다. 관린은 뒷좌석에 누워 눈을 감는다. 손이 닿는 곳에는 하얀색 소라 껍데기가 있었다. 자동차의 엔진 소리 너머로 아득하게 파도 소리와… 구름… 아니, 성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느덧 완연한 여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