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두일기
Written by 김사장
1
성운은 자다 일어나 까치집인 머리를 손으로 헤집었다. 전 남친 그 개새끼가 다른 놈을 만나고 있어 신명나게 까주고 온지도 벌써 10시간이 지났다. 그 쌍놈새끼들. 못 먹고 못 살아라! 속 시원하게 나름대로 복수는 해주긴 했지만 슬픈 건 어쩔 수 없었다. 열여덟부터 지금껏 만나왔으니 얼마나 오래 만난 거야. 성운에겐 첫사랑이나 다름없었다. 그놈은 아닐지 몰라도. 생각하니까 또 빡치네……. 성운은 퉁퉁 부운 눈을 손으로 꾹꾹 누르고 모자를 눌러썼다. 냉장고를 열어보니 먹을 게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근처 역 앞에 만두집이 생겼는데, 맛도 좋고 가격도 적당해 자주 들르고 있었다. 메뉴는 한결같이 김치만두다. 성운은 익숙하게 만두가게 문을 열었다. 김이 올라오는 것을 보자마자 히죽 웃음이 났다.
“안녕하……어? 아줌마 안 계세요?”
평소엔 아줌마만 있었는데, 오늘은 아저씨다. 남편이에요. 아내가 몸이 별로 안 좋아서 제가 대신 왔어요. 성운은 적당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집은 부부가 둘 다 만두 장사를 하네……. 어쨌거나 성운이 알 바는 아니었다. 성운은 늘 하던 대로 똑같이 주문했다. 김치 왕만두 한 개만 포장해주세요.
그 순간, 남자의 눈이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김치만두요?”
뭐야. 왜 이래. 흠칫 놀란 성운이 대답했다.
“네. 김치만두요.”
“안 돼.”
“네?”
성운이 표정을 구기며 되물었다. 뭐야. 그럴 거면 주문 왜 받아. 하지만 남자가 오늘 김치가 상태가 별로 좋지 않아, 고기가 훨씬 맛있을 거라고 꼬시는 바람에 홀랑 넘어가버리고 말았다. 제가 하는 게 아내 것보다 사실 더 맛있거든요. 만두 가게 20년 명예를 걸고 만든다는데 어떻게 안 살 수가 있나. 성운의 귀가 얇은 것도 한 몫 하지만, 애초에 남자가 김치만두를 팔 것 같지도 않았다. 성운은 후드 주머니에 왕만두가 담긴 종이봉투를 넣고 서둘러 집으로 뛰었다. 점심도 걸렀더니 배에서 나는 소리가 요란했다. 그때였다. 식탁에 놓여있는 종이봉투가 꿈틀거렸다.
- 야, 추워 죽는 줄 알았잖아.
뭔 소리야. 이게. 분명히 목소리였다. 성운이 고개를 돌리며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아무도 없었다.
- 야. 답답해, 꺼내 줘봐.
종이봉투가 자꾸 움직이더니 만두가 튀어 올랐다. 성운의 입이 떡 벌어졌다. 이거 꿈 아니야? 무슨 만두가 튀어나와. 탱글탱글한 고기만두는 표정이 심통이 난 듯 별로 좋지 않았다. 아니, 만두가 표정이 좋지 않는다는 것도 웃기긴 한데……. 아무튼 안 좋았다. 나라고 지금 이 상황이 믿기겠냐고. 성운은 손가락을 들어 꾸물꾸물 움직이는 고기만두를 쿡 찔렀다. 그러자, 고기만두가 빽 소리쳤다.
- 아 엉덩이 만지지 마!
“씨발 네가 엉덩이가 어딨어?”
- 그쪽이 방금 엉덩이 만졌거든.
성운은 착잡한 마음으로 마른세수를 했다. 내가 그놈이랑 헤어진 게 심적으로 데미지가 컸나……. 적어도 비굴하게 차이진 않았는데. 아니면 내가 죽을 때가 다 돼서 드디어 헛것이 보이는 건가. 볼을 꼬집었다. 아프다. 현실이었다.
“야…너 뭐야?”
- 고기만두.
씨바, 그걸 내가 몰라서 묻냐고.
2
어쨌거나 조금 진정된 상태였다. 성운은 소파 한 가운데에 자리를 차지한 고기만두(꼴에 이름이 김재환이라면서, 이후에 야, 고기만두! 하면 성질을 내기도 했다.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이름 부르라고……. 존나 만두 주제에 까다롭다.)를 말없이 바라봤다. 재환의 표정은 여전히 언짢은 기색이 다분했다. 만두 표정이 보이고 내가 만두 눈치를 봐야 되는 것도 참 이게 좆같은 일이다!
상황은 그러했다. 말을 더 붙여보기도 전에 재환은 성운을 원망했다. 그러고 보니 너, 아까 포장되기 전에 생생히 지켜봤는데…김치만두 파더라? 그리고선 사납게 째려보는 것이다. 성운은 변명했다. 어쨌거나 고기만두 사왔잖아! 그러거나 말거나 고기만두를 택하지 않은 데에 재환은 상심이 컸던 모양이었다. 성운이 불러도 들은 체도 하지 않고 TV를 시청하고 있었다. 못생긴 만두 같으니……. 성운이 중얼거리자, 재환이 휙 째려봤다. 성운은 성큼성큼 다가가 재환을 두 손으로 감싸 들었다. 재환이 손바닥 위에서 통통 거리며 뛰었다.
- 놔라. 짜증나니까.
“야. 김재환이.”
- 왜.
성운이 음산한 목소리로 말했다.
“먹어버린다…….”
재환은 그 말을 듣자마자 입을 합 다물었다. 식탁에 내려주자, 재환은 조용히 종이봉투 안으로 다시 들어갔다. 꾸깃꾸깃…….
3
재환이 종이봉투 안에서 빼꼼 나오며 물었다.
- 야…근데 너 진짜로 나 먹을 거야?
“고민 좀 해보고. 근데 나 진짜 너 먹으려고 사온 거였단 말이야.”
성운의 말에 재환이 빽 소리 쳤다. 이 야만인! 성운은 결국 목소리를 내리까는 것도 포기한 채 재환의 앞에 털썩 주저앉았다. 재환이 씩씩거리면서 노려보는 게 같잖기도 하고 귀엽기도 하고, 일단 말도 안 돼서 결국엔 웃음이 터져 나왔다. 손가락으로 다시 재환의 만두피를 꾹 누르니 하얗고 동그란 만두피가 물컹하게 눌렀다. 말랑말랑.
- 내 볼 왜, 왜 누르는데……먹을라고?
“야. 안 먹을 테니까 걱정 마.”
그제야 긴장이 풀렸는지 잔뜩 동그랬던 몸이 조금 퍼지며 가라앉았다. 진짜 웃기네. 내가 만두랑 얘기를 다 하고. 성운은 냉장고 문을 열어 아쉬운 대로 우유를 꺼냈다. 사온 만두도 못 먹고, 배는 고프니 물배라도 채워야겠다는 심산이었다.
“근데 진짜 너 뭐야? 만두인데 어떻게 말을 해?”
- 만두왕국 출신이니까. 3일 뒤에 인간도 될 수 있어.
그 말에 성운은 마시던 우유를 그대로 뿜었다. 뭐야, 드릅게……. 성운은 손등으로 입가를 훔치며 재환을 바라봤다. 자신에 비해 평온하기만한 재환의 표정에 어이가 없었다.
“그건 무슨 소리야, 또?”
- 말 그대로야. 나 3일 뒤에 인간 돼.
“어떻게? 너 만두잖아. 만두가 어떻게…….”
- 애초에 내가 말도 하는데 못 될 건 또 뭐야.
그건 그렇지…….
4
재환은 그 말을 끝으로 3일 내리 잠만 잤다. 자기 전 인간이 되기 위한 일종의 과정이라는 말만 남기고 말이다. 성운이 손가락으로 찌르며 “자냐?” 물어도 미동 하나 없었다. 이대로 확 먹어버려?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구태여 그렇게 하진 못했다. 그건 너무 매정하잖아.
그리고 3일. 자고 있던 성운은 제 몸이 너무 무겁다는 생각을 했다. 뭔 놈의 몸이 이렇게 깔린 것 마냥 찌뿌둥하데. 성운이 몸을 뒤척여보았지만 무거운 것은 여전했다. 그때 침대 옆 테이블에 핸드폰이 요란하게 울렸다. 이 시간에 전화 걸 사람은 단 한 명밖에 없었다. 김상훈. 그 쌍놈새끼. 받을 때까지 걸 작정인지 전화는 끊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성운은 짜증스레 베개에 얼굴을 파묻으며 중얼거렸다.
“씨바, 핸드폰 전원을 꺼두든가 해야지…….”
그 말을 하자마자 순식간에 방안이 조용해졌다. 그리고 배터리가 분리되는 소리까지 들렸다. 뭐야. 이상함을 감지한 성운이 게슴츠레 눈을 떴다. 나 혼자 산지 3년 넘었는데…….
“야. 내가 껐다. 하성운.”
웬 외간남자가 빤스 바람으로 서서 절 바라보고 있는 게 아닌가. 성운의 동공이 정처 없이 떨렸다. 미친, 누구세요.
남자가 씩 웃으며 그랬다.
“야. 내가 3일 뒤에 인간된다고 했잖아.”
만두 말고 인간 김재환이었다.
5
둘은 나란히 침대에 마주앉아 있었다. 성운은 침착하게 불을 켠 뒤에 환해진 재환의 얼굴을 바라봤다. 다른 건 둘째 치고, 왜 옷도 안 입고 있냐고 따져 물었더니 재환은 태연하게 대답했다. 어제까지만 해도 맨 만두였는데 옷을 어떻게 입고 있을 수 있냐고. 만두피가 즉 재환의 피부였다. 그럼 내가 맨 엉덩이 만진 거야? 씨발……. 성운은 제 손을 바라보며 씁쓸하게 웃었다.
“그런데 너.”
“엉.”
“팬티는 어떻게 입고 있어? 옷은 없었잖아.”
재환이 웃으며 대답했다.
“이거 네 팬틴데.”
“미친…….”
성운은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재환은 성운의 팬티 한 장만을 걸친 채로 방을 자유롭게 돌아다녔다. 아예 맨몸으로 다니는 게 아니니 차라리 내 팬티를 훔쳐 입은 게 다행이라 여겨야 하는 걸까. 성운은 결국 침대에서 일어나 자신의 옷장으로 향했다. 그나마 제게 컸던 옷들을 꺼내 재환에게 건넸다. 물론 핏은 장담 못하지만.
“나 너보다 큰데.”
그러니까. 만두 주제에 나보다 왜 더 크냐고.
“어쩌라구.”
“그것도 더 커.”
“야, 네가 내 거 봤어? 봤냐고!”
성운이 발끈했다. 저 만두가 보자보자 하니까 진짜……. 재환이 눈을 접으며 능청맞게 웃었다. 장난이라며 제 어깨를 치는데, 영 장난 같지가 않았다. 확 팬티를 까뒤집을 수도 없고. 성운은 그런 재환을 외면했다. 빨리 입기나 해.
“바지는 추리닝이고 티셔츠도 그럭저럭 맞을 거야. 그대로 있을 순 없잖아. 입어봐.”
받아든 옷을 주섬주섬 입는데, 입는 폼이 좀 어설프다. 바지는 대충 입었지만, 티셔츠는 목을 꿰는 것을 어려워해서 성운이 결국 입혀주어야만 했다. 바지는 짧은 감이 있지만 티셔츠는 적당히 맞아 다행이었다.
“근데 누구야?”
“뭐가.”
“아까 전화했던 사람.”
제 침대인 것 마냥 태연하게 누우며 재환이 물었다. 얘한테 이런 얘기까지 해야 하나. 구태여 말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아 성운은 대충 둘러댔다. 그냥 아는 사람. 그 말에 재환의 눈썹이 휙 올라갔다.
“그냥 아는 사람인데 이름이 썅놈새끼야?”
만두 주제에 쓸데없이 눈치만 빨라. 성운은 한숨을 푹 내쉬며 베개에 얼굴을 파묻으며 대답했다. “언제 헤어졌는데?” 만두는 왜 이렇게 궁금한 게 많은지. 성운은 베개를 재환에게 던졌다.
“너 사오기 전에 딴 놈이랑 바람나서 깨졌다, 왜!”
그 말에 재환의 눈꼬리가 축 쳐졌다. 동정하지 말라구 투덜대니 그런 게 아니란다. 슬금슬금 눈치를 보다 성운의 옆에 앉은 재환은 조심스레 성운을 끌어안았다. 너무 슬퍼하지 마라, 하성운아. 그런데 그 순간, 바보같이 눈물이 다 났다. 사실은 아무렇지 않은 척 했지만, 마음 고생한 것을 누군가에겐 털어놓고 위로받고 싶었나보다. 성운은 팔을 들어 재환을 끌어안았다.
짜식……너 좀 좋은 놈이구나?
아침 댓바람부터 눈물과 위로의 콜라보다. 그것도 만두였던 놈에게 받는 위로. 절대로 평범하지 않은 하루의 시작이었다. 얘랑 이게 진짜 뭐하는 거지?
6
인간이 된 재환과 같이 산 지 이틀이 되었을 때, 성운은 고민에 빠졌다. 씻어야할 거고 옷도 갈아입어야할 텐데. 성운의 옷은 맞지도 않는데다가 재환이 또 팬티를 훔쳐 입으면 곤란했다. 내가 너랑 팬티 나눠입는 사이가 돼야겠냐? 그건 사절이었다. 결국 통장잔고를 확인한 성운은 한숨을 쉬며 재환을 돌아봤다. 이번 달은 좀 넉넉하니까 무리는 아니겠지. 어제 저녁에 라면을 끓여주자, 천국을 맛 봤던 재환은 얼굴이 땡땡 부은 채였다.
“얼굴 봐라. 진짜 만두같이 생겼네.”
“만두 맞는데.”
“하여튼. 야, 준비해. 나가자.”
눈을 끔뻑끔뻑.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는 소리다. 성운은 제 옷장에서 롱패딩 하나를 꺼내 재환에게 입혔다. 패딩 입었으니까 안에 반팔이어도 괜찮겠지……? 성운이 재환의 팔을 이끌고 밖으로 나서려고 했을 때였다. 문제가 하나 생겼다. 신발은 예상 못했는데. 재환이 신을 신발이 마땅치가 않았다. 넌 진짜 왜 이렇게 아무 것도 없이 인간으로 바뀌었냐구우. 성운이 투덜대자 재환이 어깨를 으쓱했다. 만두한테 뭘 바라. 웃겨. 그러니 할 말은 없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제 신발을 건넸는데, 다행히도 적당히 잘 맞았다. 그 와중에 발은 작네. 한시름 덜은 성운이 재환의 신발 끈을 묶어주었다.
“어헝.”
“웃지 마. 귀찮으니까. 내가 어쩌다 만두랑 살 게 돼선…….”
“그러게.”
잠시만. 그러게. 우리 왜 같이 살고 있는 건데? 이별의 쓴 맛 때문에 지금 상황 판단이 잘 안 되는 게 틀림없었다. 왜 내가, 내 집에서 얘랑 살고 있는 거지? 그것도 옷까지 사주러! 성운은 그제야 따져 물었다. 이거 내가 어떻게 받아들여야 돼? 그러자 재환이 잔뜩 불쌍한 체했다.
“네가 사왔잖아.”
“야. 나도 사기 당한 거야.”
“그래서 내쫓으려고……?”
재환의 말에 성운은 쉽게 대답할 수가 없었다. 막상 내쫓을 거냐고 물어보면, 마음이 약해졌다. 저 만두는 왜 만두같이 생긴 거야. 결국 성운은 한숨을 쉬며 재환의 패딩 지퍼를 목 끝까지 올려주었다. 만두 짜증나.
7
집 앞에 대형마트가 있으니 거기서 팬티도 한 묶음 세일하는 걸로 사고, 추리닝 세트까지 사는 걸로 하자. 성운이 머리로 바삐 계산기를 두드리고 있을 때, 재환은 만두가게를 제외하면 바깥이 처음이라고 신기한 눈을 했다. 특히 자동차를 보면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성운아. 나 저거 태워줘.”
“나 차 없어.”
“왜?”
왜긴. 돈이 없으니까.
“아, 성운 가난하구나.”
재환이 씁쓸하게 웃었다. 참나. 성운은 조금 억울해졌다. 지금 지 옷 사주는데. 그러거나 말거나 재환은 다른 곳을 구경하기 바빴다. 마트에 들어서자 눈이 돌아가는 재환은 돌아다니고 싶어 몸이 근질거렸다. 이러다 잃어버리겠다. 생각만으로도 끔찍했다. 성운은 재빨리 재환의 손을 붙들었다.
“너 손 놓으면 절대 안 돼. 알았지?”
“응.”
손을 잡은 덕에 재환이 딴 곳에 한눈파는 것은 방지할 수 있었지만 왠지 기분이 이상했다. 꼭 육아하는 것 마냥……. 재환은 옆에서 쉴 새 없이 종알거렸다. 어젯밤 처음으로 라면 맛을 본 탓에 먹을 것을 보면 사족을 못 썼다. 성운아, 저건 뭐야? 저건 뭐야? 사실 그 싸가지 없던 만두를 생각하면 지금 모습은 나름 귀엽기는 하지만.
시식 코너인데, 너 먹어볼래? 성운이 묻자마자 시식하고 가라며 직원이 권했다. 그 말에 재환이 눈치를 보며 그쪽으로 다가갔다.
“먹어봐도 돼.”
…라고 말하기는 했는데. 성운은 재환이 멀뚱하게 그것을 바라보관 있자 이상함에 그쪽을 바라보았다. 미친. 시식이란 소리에 가볍게 보내준 게 잘못이었다. 성운은 입을 틀어막았다. 재환이 가만히 바라보고 있는 다른 만두 친구들……. 바싹 구워지는 만두들이여. 재환의 표정은 흡사……아니다. 말 안 할래. 하필 와도 만두 시식 코너에 올 게 뭐람. 성운은 어색하게 웃으며 재환을 붙잡았다.
“옷 사야지. 옷. 우리 옷 사러 온 거잖아.”
“……응.”
어떡해. 망했다. 성운은 재환을 끊임없이 달래며 최대한 빠르게 시식 코너에서 벗어났다. 재환에겐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게 나을 거란 판단이 들었다. 재환 역시 애써 모른 체하며 성운에게 다시 말을 건네긴 했지만, 성운은 알았다. 재환이 지금 얼마나 충격을 먹었는지. 진짜 미쳤지. 성운은 죽어도 시식 코너 쪽으론 재환을 데려가지 않을 것이라 다짐했다. 특별히 파란 맨투맨을 하나 더 집어 들었다. 미안하니까. 파란색을 입으니 얼굴색이 확 사는 것을 보며, 옆에 있던 직원도 재환에게 칭찬했다. 잘 어울린다는 말에 좋아서 씩 웃는다. 결국 성운은 복잡한 마음으로 재환이 입을 것들을 결제했다.
“내가 옷 사줬으니까 앞으로 내 팬티 훔쳐 입지 마? 네 팬티도 이만큼이나 샀어.”
성운이 묶음으로 판 팬티들을 들어보였다.
“응.”
재환의 대답이 영 시원찮다. 성운은 재환의 엉덩이를 두드렸다.
“그…… 괜찮아?”
“성운아.”
“어, 왜?”
어어, 큰일이다. 침울한 저 눈망울은 금방이라도 닭똥 같은 눈물이 떨어질 것 같았다.
“너 나 진짜 안 먹을 거지……?”
“그, 그럼. 당연하지!”
“난 인간이라도 됐지, 쟤네들 불쌍해서 어떡해…….”
기어이 떨어지는 눈물에 성운이 탄식했다. 씨바. 냉동실에 냉동만두 있는데 어떡하지. 재환이 잘 때 버려버리든지 몰래 구워먹든지 해야겠다고 성운은 생각했다. 성운은 재환을 토닥이며 “난 이제 만두 끊었어. 진짜야.” 거짓부렁을 내세웠다. 얘 재우고 이따 만두집 다시 가야겠다. 그 썩을 놈……. 재환은 그 말에 감격해 성운의 품에 파고들며 잉잉 울었다. 다신 김재환 앞에서 다른 만두의 만자도 꺼내지 말아야겠다. 앞으로 시식코너는 웬만하면 패스다. 성운은 빠르게 주변을 돌아보았다. 아이스크림 가게가 성운의 눈에 띄었다. 저기다. 성운은 재환에게 가게를 가리켰다. 데리고 가서 좀 먹이든가 해야지. 길 한복판에서 성인 남자 한명은 울고, 다른 한명은 품에 안고 달래고 있으면, 그건 누가 봐도 그림이 이상하다.
“만두야. 저거 보여?”
“응.”
“저거 먹으러 갈래?”
재환이 고개를 끄덕이자 성운은 재환의 손을 맞잡고 뛰다시피 걸어갔다. 알록달록한 간판에 재환도 궁금한 얼굴이었다.
“너 만두 촌놈이라 아이스크림 안 먹어봤지?”
성운이 놀리듯 말했다. 재환이 요상한 얼굴을 했다. …먹어보는 게 이상한 거 아니야? 눈으로 그렇게 말하는 것처럼 말이다.
“먹어보고 싶지!”
“응.”
여러 가지 맛 중에서 재환에게 골라보라고 하니, 영 갈피를 못 잡는 얼굴이다. 아이스크림을 보면서 신기한 듯 눈만 데굴데굴 굴리고 있으니, 직접 주문하게 하는 것은 실패다. 그러다간 하루 종일 걸리겠어. 성운은 웃으며 재환의 엉덩이를 두드렸다. 두드리든 말든 사실 재환은 뭐, 싫은 것도 없다. 툭툭. 그렇게 때리면 엉덩이만큼 토실한 볼 살을 매달고선 냠냠 입맛 다시기. 성운은 그런 재환이 못내 귀여웠다.
“못 고르겠으면 그냥 나랑 같은 걸로 할래?”
“응.”
“체리 쥬빌레 하나 주세요.”
아이스크림 콘 두 개를 받아든 성운은 재환을 데리고 가게의 빈자리에 앉았다. 짐도 있고, 날씨도 춥겠다. 먹고 가야지. 재환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함께 자리에 앉았다.
“라면 먹었을 때 맛있었잖아.”
“응.”
“이것도 맛있을 거야.”
재환이 웃었다. 그리고 성운이 먹는 것을 따라 한입 베어 물었다. 그리고 그 순간 재환의 눈이 평소의 두 배가 되었다.
“어엇…!”
“어때, 맛있어?”
“어어엇……!”
재환이 한입 더 크게 베어 물었다. 눈이 동그랗게 떠져서는 계속 오물오물하는 게 아무래도 맛있는 모양이었다. 성운은 그게 괜히 뿌듯해, 저도 웃는 얼굴로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오랜만에 먹는 아이스크림은 달짝지근했다.
결국 재환이 아쉬운 얼굴로 입맛을 다시는 걸 보며, 큰 사이즈로 여러 맛을 골라 포장까지 해야 했다. 이건 정말…육아야. 어쨌거나 다시 기분이 좋아진 듯 빙긋 잘 웃는 토실한 볼을 보니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아휴. 시식코너 다신 안 가야지.
8
하성우운!
아 부르지 마아!
하성우운!
성운은 거의 죽을 것 같은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재환이 씻을 때가 문제였다. 성운이 씻고 나오자 소파에 멀뚱히 앉아있는 재환이 눈에 띄었다. 재환은 뽀송뽀송해진 성운을 향해 가까이 다가섰다.
“너 진짜 하얗다. 꼭 나 만두일 때 같아.”
“그거 칭찬 아니잖아.”
“으잉.”
그리고는 코를 박고 킁킁 냄새를 맡았다. 은은하게 장미향이 났다. 재환은 무슨 향인지도 잘 모르면서 성운이 냄새가 난다고 좋아했다. 재환의 코끝이 목과 어깨에 닿는 게 간지러웠다. 야, 뭐해! 재환을 밀어내는데 눈이 마주쳤다.
“오…….”
“응?”
“너도 좀 씻어야겠다.”
성운이 재환을 욕실에 밀어 넣은 뒤에 다 씻고 나오라 얘기는 했는데 재환은 제대로 뭘 씻을 줄 모르는 게 문제였다. 그래서 지금 애타게 성운을 빨가벗고 부르고 있는 것이고……. 내가 만두를 사온 게 죄지, 죄야. 성운이 심호흡을 하며 문을 열었다. 내가 하다하다 만두까지 씻겨줘야 한다니. 욕실 문을 열자 역시였다. 빨가벗고 욕실에 얌전히 앉아있는 재환이 보였다. 재환의 머리가 젖어있고 볼에 물기가 흥건한 걸 보니, 어찌 어찌 물 트는 데에는 성공했나보다.
“너 왜 이렇게 떨어?”
“차가워. 죽는 줄 알았어.”
물 온도 조절에는 실패한 모양이었다. 성운은 재환의 맨몸을 보다가, 생각보다 몸이 좋아서 당황했다. 무엇보다도 저보다 다부진 체격인 게 억울했다. 만두였으면서 왜 나보다 크냐고! 재환은 성운에게 벗은 몸을 보이는 게 별로 민망하지 않은 듯 했다. 나만 그렇구나. 나만. 어쨌거나 씻겨야 하니 샴푸를 머리에 문질렀다. 김재환 너…….
“진짜 못생겼다! 완전 못생겼어!”
“웃기지 마!!”
재환이 발끈했다. 샴푸 범벅인 머리로 화내는 만두가 웃겨서 성운은 배를 잡고 웃었다. 재환은 인상을 찌푸리고 성운에게 투덜대다가, 이내 거품이 들어가 눈을 꾸욱 감았다. 따갑다는 말에 더 이상 놀리는 것을 그만두기로 했다.
“눈 꼭 감아.”
“응.”
물로 머리를 헹궈주니, 재환은 그제야 눈을 슬금 떴다. 머리는 했으니까 이제 몸이 문제인데……. 차마 몸을 할 수는 없었다. 아무리 그래도 몸을 내가 어떻게 만져! 성운은 샤워볼에 바디워시를 잔뜩 문지른 다음, 재환에게 내밀었다.
“이거를 네 몸 구석구석에 문지르면 돼. 그리고 아까 내가 해줬던 대로 몸 씻고! 알았지?”
그 말에 착실하게 재환이 고개를 끄덕였다.
성운은 부리나케 욕실에서 나왔다. 욕실 문을 닫고 나니 몸에 힘이 풀렸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몸을 보는 게 민망했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성운은 머리를 헤집으며 재환이 마저 씻을 동안 청소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착한 생각! 착한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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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재환과 처음으로 마트를 다녀온 날 밤에, 성운은 재환을 먼저 재우고 난 뒤에 홀로 만두가게를 찾아갔었다. 내 이놈의 주인아저씨를 그냥! 어떻게 된 일이냐고 다시 데려가라고 책임지라고 말이라도 해볼 생각이었다. 너무 갑작스러운 상황에 성운이 알고 있는 거라곤 재환의 존재 하나 뿐이니까. 재환 말고는 아무런 상황도 몰랐다. 왜 재환을 자신에게 굳이 팔아넘긴 건지, 정말 아무것도 모르니까. 하지만 소용없었다. 몇 년 째 단골이던 그 가게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있었다. 꼭 꿈이었던 것처럼. 그것도 이틀 만에. 애초부터 아예 없던 것처럼 낡은 임대 슬로건이 유리창에 붙여 있었다. 성운은 허탈해졌다. 그리고 다시 돌아와 잠든 재환의 얼굴을 봤다. 만두 주제에 꿈 까지 꾸는지 웃으면서 잘도 잔다.
그리고 그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얘는 정말 나밖에 없겠구나. 쓸데없는 책임감이라고 해도 할 말 없었고, 오지랖이라 해도 맞는 말이었다. 재환에겐 저 뿐이니까. 제가 함께 살아야한다고. 성운은 조심스레 손을 뻗어 재환의 볼을 쓰다듬었다. 전혀 불편한 기색 없이 잘도 잔다. 나한테 얹혀살면서, 완전 편하게도 자네……. 치. 성운은 재환의 옆에 조용히 누워 자신 역시 잠을 청했다. 참 복잡한 마음이 들던 밤이었다.
재환과 함께 산 지 한 달이 넘었다. 인간으로 사는 것에 적응이 된 재환은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잘도 먹었고, 옷도 혼자 잘 입었고, 씻기도 잘 씻었다. 물 온도도 맞추지 못해 얌전히 욕조에만 앉아있던 모습이 무색할 만큼. 재환이 적응할 만큼 성운도 즐거워졌다. 함께할 수 있는 게 많아졌으니까. 그런데. 그런데……!
“하성운. 너 키스해봤어?”
성운이 외출하고 난 뒤, 문득 그런 말을 던지는 것이다. 키스는 갑자기 왜. 아니 그런 말은 어디서 배운 거야. 성운이 당황한 얼굴로 바라보자 재환은 그저 어깨만 으쓱했다. 따로 만난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고 노트북은 아직 쓸 줄 모르니 TV로 배웠을 것이라 지레 짐작했다. 아닌가, 키스는 원래 알던 걸 수도 있나.
“어. 해봤지.”
“그거 진짜 좋아하는 사람이랑만 하는 거라던데…….”
재환이 말을 흘렸다. 어쩐지 우울한 기색이 다분하다. 뭔데, 왜 그러는데! 그러거나 말거나, 재환은 고개를 끄덕이며 이불 안으로 들어갔다.
쟤 뭐야……지금 삐친 거야?
10
우울함이 +10 되었습니다.
성운은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재환이 3일 째 말도 제대로 안 하고 우울한 얼굴이기 때문이었다. 재환이 삐친 이유를 알 것도 같긴 한데……. 성운의 입장에서는 ‘왜?’였으니까. 하물며 첫 키스는 10년 전인데 이제 키스해봤냐고 하는 건 애초에 무의미한 거 아닌가? 내 나이가 몇인데! 하지만 재환에겐 나름 충격이 큰 듯 했다.
“야. 김재환 밥 안 먹을 거야?”
“안 먹어…….”
내가 꼭 죄인 된 것 같잖아. 성운은 재환의 이불도 뺏어봤지만 재환은 그럴수록 더 꾸물꾸물 몸을 동그랗게 말았다. 성운이 재환의 엉덩이를 팡팡 쳤다.
“진짜 왜 그래? 너 내가 그 키스했단 것 때문에 그래?”
“…….”
“야, 키스 그거는…….”
미친. 재환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그럼 나 너랑 못하잖아.”
“……어엉?”
“진짜 좋아하는 사람이 그 전 남친이지? 그래서 키스한 거지……그럼 좋아하는 사람이랑만 하면……난 너랑 평생 못하구……나는 너랑 할 거였는데……나는 못하구우…….”
우느라 정신없어 말이 횡설수설하다. 고백인가. 나 좋아한다고. 근데 그 개새끼 안 좋아한단 말이야! 만두는 만두인가. 너무나도 순진했다. 그럼 내가 그놈이랑 뽀뽀도 한 번 안하고 사귄 줄 안 건가. 더한 것도 해봤다고 하면 만두 까무러칠 게 틀림없다. 그건 말하지 말아야지. 성운은 재환의 양 볼을 움켜잡았다. 눈물이 그득그득해서 쳐진 눈 끝이 귀엽기도 하고, 나름대로 짝사랑 중이었는데 마음 고생한 게 안쓰럽기도 하고. 성운이 웃으며 대답했다.
“재환아.”
“응.”
“해도 돼.”
“…….”
“나랑 안 할 거야?”
재환이 성운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그 뒤론 비밀. 만두랑 비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