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운른
2019년 4월 30일
황민현X하성운
[1 HOUR LOOP / 1 시간] MINHYUN (NU'EST) - Universe (별의 언어)
왕의 기사
Written by Yiss
봄은 언제 오냐는 귀족들의 질문에 성운은 입술을 깨물었다. 봄. 저주받은 제 몸뚱아리를 어쩌면 좋을지를 묻는 게 더 빠를 텐데. 입 한쪽이 비려서 곱지 못한 시선으로 빤히 그들을 쳐다봤다. 주사위의 저주에 갇혀버린 성운이 선택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 저주를 알면서도 모르는 척 묻는 저 사람들도 하나같이 자신을 힘들게만 만들 뿐이었다.
-대답을 알면서 물으시는 겁니까?
-......
-제 저주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인지 묻고 있습니다.
제대로 말도 못하고 수염만 매만지는 공작의 입에서 볼멘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게 제 마음대로 된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성운의 똑 부러진 대답에 당하기만 한 공작의 표정이 썩어들어가는 걸 지켜봤다. 다 물러가시겠어요? 머리가 아프네요. 성운의 명령에 하나둘 빠져나가는 귀족들의 뒷모습이 역겹기만 했다. 한참을 텅 빈 공간에 남아서 턱을 괴고 창문 밖을 쳐다봤다. 하얗게 얼어버린 유리창, 새하얀 창밖의 풍경은 자신의 목을 옭아매고 있었다. 벌써 5년째였다. 성운이 다스리는 나라에 봄이 오지 않고 차가운 겨울만 남은 것이.
-머리 아파.
저주, 손안에 쥐어져 있는 두 개의 주사위에 성운은 비릿해졌다. 제 인생을 제가 선택한 적이 있던가. 선택의 순간에 항상 주사위는 돌아갔고, 자신을 알 수 없는 방향으로 이끌었다. 제가 죽으면 끝날까, 죽으면 이 모든 저주가 다 없어지는걸까. 아무 숫자도, 모양도 없는 주사위는 이런 질문에는 답을 주지 않았다. 대공들의 질문에 아무 답도 할 수 없는 왕자의 운명이 고작 주사위에 달려있다는 걸 안다면 얼마나 난리가 날지 불 보듯 뻔했다.
무엇 하나 제게 평범한 것은 없었다. 태어나자마자 쥐어진 주사위 두 개는 쉼 없이 자신의 운명을 결정했다. 던지지 않아도 선택의 순간에는 어김없이 돌아가는 주사위에 선택지마저 주어지지 않는 삶은 한 치 앞도 예상하지 못했다. 지금 제가 갖고 있는 이 주사위 두 개가 불러들인 일은 어마어마했다. 자신의 아버지인 왕이 병상에 누워있는 것도, 겨우 목숨만 유지하는 것도. 그리고 이 나라에 봄이 오지 않는 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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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할 수도 없었다. 주사위에 맡겨진 운명은 이미 성운의 손에 떨어져서 목을 조여왔다. 주사위 하나가 뱅그르르 돌아가고, 나머지 하나가 돌아가는 걸 보며 손톱을 물어뜯었다. 책상 위에 주사위는 오랜만에 돌아가고 있었다. 제게 무슨 일이 또 일어나는 걸까. 돌아가는 주사위에 적혀있는 내용을 확인해야 했는데도 한참을 망설였다. 이번엔 또 어떤 결과를 제게 만들어낼까. 망가져서 새빨간 피가 맺힌 손톱에 눈을 감아내렸다.
-왜... 내게 대체 왜.
답이 없는 질문이 반복되었다. 태어날 때부터 쥐어져 있던 주사위는 성운을 항상 괴롭혔다. 지긋지긋한 저주는 피할 수도 없었다. 돌아가는 주사위가 말하는 데로 모든 상황은 흘러갔고, 그 결과를 부정하고 돌리려 해도 결국은 더 안 좋은 결과를 가져왔다. 자신의 방 깊은 곳에 숨겨져 있는 일기장을 들어 주사위의 선택들을 훑어내려 갔다.
'get''dark'
첫 번째 주사위가 스스로 돌았을 때 어둠이 찾아온다는 주사위의 예언을 그때는 그저 그런 시시한 예언이라 생각했었다. 깜깜해진다니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 여기며 성운은 주사위를 서랍 깊숙하게 두고서 잊고 살았었다. 그리고 기억에서 사라질 때 성운의 아버지인 한 나라의 왕은 눈이 멀어버렸다. 정확히는 전쟁에서 날아오는 칼날에 얼굴을 붙잡고 쓰러졌다. 그 장면을 생생하게 지켜본 성운은 그대로 울부짖었다. 악에 받쳐서 지켜낸 나라에 성운은 어느새 제일 위에 통치자 자리에 앉아있었다. 원해서 앉은 자리가 아닌 성운은 한 치 앞도 안 보이는 깜깜한 밤같이 제 미래도 암담하기만 했다. 그렇게 첫 번째 예언은 제 가족을 깜깜한 구렁텅이에 빠뜨렸다.
'red' 'flood'
가장 높이 앉자마자 성운이 제일 먼저 한 일은 서랍 깊숙이 놓여있는 주사위를 찾는 일이었다. 제 방 모든 곳을 다 뒤져서 결국 찾아낸 주사위는 계속해서 제 운명을 결정하느라 돌았는지 먼지 한 톨 없이 깨끗하기만 했다. 제 손에 쥐어진 주사위를 새빨갛게 타오르는 장작 위에 던져 버렸다. 보기엔 아무것도 안 적혀있는 나무로 만들어진 주사위 두 개는 불을 다 삼키고 재가 되어버린 나무 위에서 또 뱅그르르 돌아갔다. red, flood 빨간 홍수.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성운의 나라에는 역병이 돌았다. 병은 사람과 가축을 가리지 않고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가고, 온 나라를 역병으로 가둬버렸다. 별 다를 방법 없이 역병에 걸린 모든 목숨을 마을과 격리하도록 해놓고 그 곳을 소각하라 명했다. 매주 지속되는 탄내와 비명에 머리가 아파왔다. 그제야 알았다. 왜 빨간 홍수라 했는지. 제 궁 앞에 흐르는 새빨간 핏물들은 줄어들 줄을 몰랐다.
'destroy''castle'
왕위에 앉아서 하루도 편할 날이 없었다. 그을림 하나 없이 멀쩡한 주사위를 없애려고 부단히도 노력했다. 단단하다는 망치도, 휘두르기만 해도 모든 것을 벨 것 같은 칼날에도 꿈쩍도 하지 않는 주사위에 성운은 점점 날카로워졌다. 그때부터였나 보다. 성운이 저주에 걸렸다며 그들의 백성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한 것이. 귀족들은 제 눈치를 보느라 아무 말도 못 하고 있는 걸 성운은 그저 비릿하게 웃었다. 돌아갈 수 없게 쇠사슬로 묶어낸 주사위를 보며 성운은 제 손톱을 물어뜯었다. 절대 돌아가지 못하게 꽁꽁 묶어놓은 주사위는 기어코 쇠사슬에 묶여서도 돌아갔다. destroy, castle 성이 무너진다.
성이 무너진다는 주사위의 말에 성운은 모든 성벽을 감시하라 명하고 성문을 닫아버렸다. 굳게 닫혀버린 성문 안에 갇혀버린 성운은 점점 홀로 남겨졌다. 귀족들과 정해진 회의 외에는 아무도 만나지 않고 고립되어 가는 성운은 성이 무너질까 노심초사했다. 불안한 마음에 잠을 못 이뤘고 성운은 점점 피폐해져 갔다. 제 살을 갉아먹는 주사위의 저주에 성운은 그제야 깨달았다. 이 성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망가지고 있다는 것을. 그러고 책상 위의 주사위는 또 뱅그르르 돌았다.
'winter''forever' 영원한 겨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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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일 꽁꽁 얼어붙은 나라. 성운은 저주를 풀 수 있는 방법을 사방으로 알아봐도 명확한 답을 얻을 수 없었다. 주사위는 몇 년째 잠잠했고, 살을 에는 칼 같은 바람은 점점 더 거세게 불었다. 모든 것이 얼어붙고 겨울만이 계속되는 나라의 저주받은 왕자. 성운은 혼자 남겨진 성 안에서 오지도 않는 봄을 하염없이 기다렸다. 지칠 때쯤 당신이 내게 왔다. 왼쪽 허벅지에는 긴 장검을 차고서 제 앞에 한쪽 무릎을 굽히고 날 올려다보는 당신은 참으로 올곧은 눈을 갖고 있었다. 어디선가 본 듯한 얼굴에 의자에서 일어서서 고개를 숙이고 있는 기사의 앞으로 다가섰다. 순식간에 성운은 기사의 왼쪽 허벅지에서 칼을 뽑아들고서 기사의 목에 날카로운 칼끝을 들이밀었다.
-무얼 하러 왔습니까.
올곧은 눈으로 자신의 목마저 내놓는 사내가 웃기기만 했다. 불과 얼마 전까지 칼날을 겨뤘던 나라의 기사였다. 가슴에 있는 휘장만 봐도 한눈에 봐도 알 수 있었다. 성운의 앞에서 제 무릎을 굽히고 휘장과 갑옷을 다 버렸다.
-....지금도 주사위를 갖고 계십니까?
주사위의 존재를 알고 있는 기사의 말에 눈이 커졌다. 아무도 몰라야만 하는, 아무도 알아서는 안 되는 주사위의 존재를 알고 있는 자의 목에 더 깊이 칼끝을 겨눴다. 숨 쉬는 소리마저 들리지 않는 고요함만이 공간을 채웠다. 아무도 알아서는 안 되는 비밀을 아는 기사의 눈을 쳐다보며 결국 성운은 칼을 저 멀리 내던져 버렸다. 딱딱한 돌바닥에 칼이 챙그랑 떨어지는 소리만 울려 퍼졌다. 조용하게 일어선 기사의 눈을 마주하면서 제 손바닥 안에 두 개의 주사위를 꼭 쥐었다.
-그저 도와드리고 싶었습니다.
-.... 어찌 압니까.
어찌 아냐는 성운의 질문에 기사는 제 손에 쥔 주사위 두 개를 펼쳐 보였다. 성운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기사의 손에 쥐어진 두 개의 주사위 또한 저와 같은 주사위라면 이 자도 저주받은 운명을 살고있는 자였다. 저와 똑같은 운명을 갖고 있는 자에게 마음이 기울었다. 자신의 손에 쥐어져 있던 주사위 두개를 같이 펴 보았다. 제 손바닥 안에 들어있는 똑같은 크기의 주사위 두 개. 총 네 개의 주사위. 똑바로 마주한 눈은 성운 혼자 흔들리고 있었다. 기사의 이름은 황민현이라했다. 한때 적이었던 나라의 기사를 밀어내야 한다고 머리로는 알아도 자신에게 도움이 되고 싶다는 민현을 밀어내지 못 했다. 민현의 손에 쥐어진 주사위도 올곧은 그의 태도도 모든 게 성운을 흔들리게 했다. 스르륵 주사위 네 개가 동시에 돌아갔다.
'fall' 'love' 'spring' 'come'
민현의 주사위에 적혀있는 사랑에 빠진다는 글자와 성운의 주사위에 적혀있는 봄이 온다는 표시. 확인하자마자 사라진 두 개의 표식에 둘은 눈을 마주했다. 정확한 뜻은 항상 나중에서야 알게 되겠지만, 성운은 봄이 온다는 글자에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드디어, 드디어 봄이 온다는 글자에 성운은 눈을 감아내렸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민현은 제 손 위에 놓여있는 주사위 두 개를 꼭 쥐었다. 두 사람의 주사위가 다시 스르륵 돌아가고 적혀 있는 글자에 둘 다 말을 잃었다.
'knight''death''kinght''death'
두 사람의 주사위에 동일하게 적혀있는 기사의 죽음. 말을 잇지 못하고 그저 제 앞에 서 있는 민현의 얼굴을 바라만 봤다.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이 고요하기만 한 기사의 반응에 성운은 갈피를 잡지 못했다. 주사위는 또다시 제게 어려운 말만 남기고 멈춰버렸다.
-주사위가 말하는 기사가 당신은 아니겠지요?
흔들리는 성운의 눈을 걱정 말라는 듯이 웃어 보이는 민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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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사위는 그 후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고요하기만 했다. 성운의 나라 휘장을 가슴에 달고서 조용히 그 곁을 지키는 민현을 보며 귀족들은 점점 격하게 반발했다. 적국이었던 자, 그의 칼날에 얼마나 많은 백성들이 죽었는지 아냐며 성운을 채근할 때마다 성운은 그저 조용히, 그리고 가만히 민현을 내려봤다. 지금 병상에 누워있는 아버지의 눈을 멀게 한 자일수도 있다는 귀족의 말에 눈을 감고 관자놀이를 꾹꾹 눌러 내렸다.
-그래서, 지금 저를 지키는 게 말도 안 된다는 소리를 하고 싶으신 겁니까?
-어찌 저런 자를 폐하를 지키는 데 쓰실 수 있단 말입니까.
-제가 명했습니다. 문제가 있습니까?
-이 나라에도 수많은 기사들이 있습니다 폐하.
하나같이 뻔한 귀족들의 반발에 성운은 입술을 깨물었다. 올곧은 눈으로 회장을 천천히 쳐다보던 민현은 자연스럽게 회장 가운데로 걸어와 성운의 앞에서 한쪽 무릎을 꿇었다.
-제가 문제라면, 제가 보여드리면 되겠습니까?
민현의 말이 무슨 뜻인지 성운만 알아들은 듯이 미묘하게 웃어 보였다. 민현이 칼을 내들자 귀족 뒤로 서있던 기사들이 자신의 주인을 지키기 위해 칼을 빼 들었다. 흥미롭다는 듯이 내려보는 성운이 고개를 끄덕이자 민현은 저를 겨누는 수십 개의 칼날에 한치 망설임도 없었다. 간결한 동작으로 그리고 아주 간단하게 한 자리에서 제 등 뒤로 아무도 갈 수 없다는 듯이 칼을 겨눴다. 민현의 등 뒤에 가만히 지켜만 보던 성운이 손을 올리자 난장판이었던 회장에 모두가 행동을 멈췄다.
-당신들도 날 죽이려는 판국에...
-....
-적국의 기사였던 자가 날 지키려는 게 말이 안 된다는 이유를 모르겠군요.
간단한 말을 끝으로 회장을 벗어나는 성운의 뒤를 민현이 조용히 따랐다. 아까의 소동으로 얼굴에 조그만 상처가 나버린 민현을 보며 성운은 상처를 어루만졌다. 그 상처가 제 것이라도 되는 듯이 찡그린 얼굴이 한 나라의 왕이라는 지위와는 어울리지 않게 맑아 보였다.
-아프지는 않습니까?
의사를 부른다는 성운을 괜찮다며 막았다. 그럴 필요 없다며, 그저 약을 바르면 난다는 민현의 대답에 성운은 손을 끌고서 제 서재로 향했다. 서재 한구석에 민현을 앉혀 두었다. 성운은 서랍 안에 있던 약을 꺼내 들고 민현에게 다가섰다. 괜찮다며 제가 하겠다는 민현의 행동도 저지하고 성운이 직접 손끝에 연고를 짜내서 민현의 상처에 덧발랐다.
-다치게 해서 미안해요.
왕위에 있기에 강하면서도 여린 사람이었다. 민현이 한동안 지켜본 성운은 왕위에 앉아서 모든 일을 진행하기에 참으로도 여린 사람이란 느낌을 버릴 수가 없었다. 그걸 숨기려 애써 강하게, 행동하지만 결국에 뒤에 가서 제일 많이 신경 쓰고 있는 성운을 보며 민현은 안쓰럽기까지 했다. 그래서 그랬나 눈에 더 들어왔다. 성운의 행동 하나하나 눈에 담아갔다. 서재에 앉아서 공문을 보며 인상을 찌푸리는 모습, 하얀 눈으로 뒤덮인 뒤뜰을 편안하게 산책하는 모습, 얼어붙은 제 나라를 보며 걱정스러운 눈으로 쳐다보는 모습도 민현의 눈 하나씩 차곡차곡 쌓여만 갔다.
-체스 둘 줄 알아요?
-...네.
-그럼 저랑 한 판만 둘래요? 아무도 저랑 놀아주질 않네요.
성운의 체스를 같이 하자는 제안에 민현은 긴 칼을 벽에 세워놓고 성운의 곁으로 다가섰다. 딱딱한 체스판을 사이에 두고 마주앉아 성운은 하얀 말을, 민현은 까만 말로 시작했다. 오랜만에 하는 게임에 성운은 기분이 좋은 듯 아이처럼 해맑기만 했다. 민현의 말 하나씩 잡으면서 신나하는 성운이 귀엽게만 보였다. 민현의 반격에 끙 소리를 내며 계속 생각하는 성운을 보고 있자니 민현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귀엽다는 생각을 해서는 안 되는데.
-이렇게 하면 되나...
한참을 생각해서 수를 둔 성운의 말을 결국 민현이 잡아버렸다. 킹과 나이트만 남은 성운의 하얀 말과 민현의 까만색 나이트 두 개와 킹. 충분히 나이트가 킹을 잡을 수 있는 자리에 있으면서 그 옆에 말을 놓았다. 바보 같은 수라 생각하지만, 까만색 나이트 하나를 킹으로 처리한 성운이 환하게 웃어 보였다. 이길 수 있는 말을 갖고도 져버렸다. 성운의 웃는 얼굴이 계속되길 바라며 민현은 엉뚱한 수를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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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운의 곁에 머문 지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점점 녹아가는 땅을 보며 성운은 민현의 손을 잡고 성 뒤뜰을 같이 걸었다. 정말 봄이 올 모양인지 쌩쌩 불었던 찬 바람은 약해져갔고, 얼어붙은 유리창의 얼음이 어느새 녹고 없었다. 봄이 온다는 기쁨에 취해서 성운은 뒤를 잊고 있었다. 주사위가 말한 봄이 오고 난 그 다음의 저주를.
-천천히 걸으세요. 다치십니다.
민현의 타박에도 오랜만에 느끼는 따스함에 성운은 웃음이 잦아졌다. 드디어 봄이 온다며 백성 모두가 기분에 좋을 때 한 사람만 입매가 딱딱하게 굳어졌다. 언제부터였더라. 성운을 좋아하게 되면서부터였나. 자신도 모르게 성운이 마음에 들어올 때부터였나보다. 왕을 연모한다는 말은 꺼내지도 못하고 그저 곁에 지키는 것만으로 좋았다. 그 마음이 계속되면 좋으련만 점점 심해지는 고통에 민현은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처음에는 가벼운 기침이었다가 지금은 피가 섞여 나오는 기침에 민현은 눈을 감았다. 기사의 죽음. 그 기사가 저일 거란 예상은 했지만 참으로 얄궂은 주사위의 저주였다.
-요새도 기침해요?
-신경 써주신 덕에 괜찮습니다.
-내가 준 약은 잘 먹고 있어요?
걱정된다는 눈으로 지켜보는 성운과 이어진 손을 꽉 쥐었다. 한없이 다정하기만 한 제 군주의 눈에 비춰진 자신의 모습은 영락없이 사랑에 빠진 자의 얼굴이었다. 지키는 것만으로도 좋았던 사람에게 마음을 품어버린 민현은 점점 기침이 심해지고 있었다. 숨을 내쉴 때마다 비릿하게 올라오는 피 맛에 눈살이 찌푸려졌다. 갑작스레 터져버린 기침과 비릿하게 올라온 피가 민현의 손바닥을 적셨다. 제발 보지 말라며 고개를 돌리고 숨는 민현의 얼굴을 기어코 확인하고야 말았다.
-제발...
입술에 빨갛게 묻은 피와 손바닥 가득한 피. 그때서야 성운은 잊고 있었던, 잊고 싶었던 주사위의 저주가 떠올랐다. 'knight', 'death' 기사의 죽음이란 말에 수많은 기사 중 그게 민현일거라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민현의 손에 툭툭 떨어지는 투명한 물방울은 민현 제 것이 아니었다. 성운의 눈에서 떨어지는 눈물에 쓰게 웃었다.
-왜 우십니까.
-....
-울지 마세요. 안아서 달래 드릴 수도 없습니다 폐하.
농으로 꺼낸 말이지만, 전부 농담은 아니었다. 왕을 안아서 달랠 수는 없는 일이니 서글프게 우는 성운의 눈물을 닦아 줄 수도 없었다. 민현의 품에 파고들어서 깍지로 꽉 안은 성운의 행동에 민현은 그저 피로 더러워진 손을 등 뒤로 숨길 수 밖에 없었다.
-아프지 마세요. 기사님, 당신이 아픈 걸 보기가 힘듭니다.
성운의 말이 무슨 뜻으로 제게 다가오는지 성운은 알지 모르겠지만, 너무나 애틋하게만 들려서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봄이 오려나 봅니다. 조용하고 나긋한 민현의 음성에 성운은 눈물로 망가진 얼굴을 들어 민현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당신이 아니길 바랐습니다.
-... 울지 마세요.
-떠나세요 이곳을.... 그리고 돌아오지 마세요.
-.....폐하를 연모합니다. 그저 지금처럼 지키게만 해주세요.
-제발... 떠나줘요... 명입니다.
쏟아지는 눈물을 꾹꾹 참아내며 민현의 품에서 떨어졌다. 엉켜있던 두 개의 그림자가 하나만 남겨두고서 궁으로 사라졌다. 성운은 뒤뜰과 이어진 문을 잠그고 딱딱한 벽을 따라서 무너져 내렸다. 마음을 주지 않으려 몇 번을 자신을 모질게 대했는지 머리가 아팠다. 민현의 처음 눈과 마주할 때부터 이미 민현을 마음에 품어버렸었다. 연모하고 있다는 민현의 말에 행복도 잠시였다. 욕심을 내서는, 내서도 안 되는 제 위치에서 단 한 가지 욕심을 내고 싶은 것이 민현의 안위였다. 당신이 날 지키지 않아도 좋으니 건강만 해달라는 부탁에 당신은 그저 지키게만 해달라며 예쁘게도 웃었다. 당신의 미소가 너무 예뻐서 오히려 더 슬펐다. 이 나라의 봄이 오지 않아도 좋으니 당신만, 당신이 행복했으면 좋으련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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꽁꽁 얼었던 땅이 녹으면서 질척거리던 게 또다시 얼어붙기 시작했다. 세찬 바람이 불어오고 채 다 녹지 못한 얼음들이 더 꽁꽁 얼어버렸다. 바다마저 얼어버린 성운의 나라에 봄이 오고 있다는 기쁨은 아주 잠시였다. 민현을 궁에서 억지로 쫓아내고서 성운은 매일 밤을 아파했다. 억지로 끊어낸 연에 성운은 너무 많이 힘들어했다. 민현..... 항상 제 곁을 지키던 이를 부르면 보기 좋게 웃던 그 미소도, 조그만 웃음소리마저 그리워서 입을 틀어막고 울었다. 어찌 안 것인지 왕의 울음소리가 매일밤 계속된다는 저잣거리의 소문에 민현은 마음이 닳았다.
-기사님은 폐하를 뵌 적이 있으세요?
어린아이의 순진한 물음에 민현은 미소만 지었다. 폐하는 왜 매일 우실까요? 그 물음에 답도 못 하고 입술을 꼭 깨물었다. 저 울음이 저와 관련된 게 아니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기사님 그거 아세요? 봄이 다시 떠나려 해요. 봄이 떠나려 한다는 아이의 말에 민현은 쓰게 웃었다. 움트려던 새싹이 차가운 바람에 얼어가고 있었다.
-아빠가 화가 많이 났어요. 봄이 오길 기다렸는데, 저주받은 못된 폐하 때문에 다시 겨울이 왔다고요. 사람들이 왕을 죽일 거래요.
-그게 언제인지 아니 꼬마야?
-아빠가 보름달이 뜨는 날이라고 말했어요.
보름달이 뜨는 날. 당장 오늘이었다.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이 촉박하기만 했다. 성운을 지키기 위해서 한시라도 빨리 돌아가야만 했다. 어린아이의 말에 민현은 칼을 꽉 쥐었다. 폐하 곁에서 눈을 감는 한이 있어도 제가 섬기는 왕을 지켜야만 했다. 성으로 들어가려 해도 꽉 닫혀버린 성문과 높이 쌓여있는 성벽에 민현은 초조하기만 했다. 점점 어두워지고 환하게 달이 성을 비추기 시작할 때 이미 성 아래 언덕에서부터 붉은 횃불이 올라오고 있었다. 칼을 꺼내 들었다. 제 왕을 위해서 모든 걸 바칠 준비는 전부터 되어 있었다.
-혼자 감당하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기사님.
제일 선두에 서 있는 귀족의 비웃음에 민현은 비릿하게 웃었다. 한눈에 봐도 무리인 머릿수에 민현은 검을 더 꽉 쥐었다. 마지막으로 얼굴을 한 번이라도 더 보면 좋으련만 여기까지인 것도 괜찮았다. 폐하를 지킬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전장을 방불케 했다. 피와 불이 가득한 성문 밖 소란에 성운은 대피하지도 않았다. 성 안의 기사들을 모두 내보내 민현의 목숨만 붙어서 데려오라 명했다.
-폐하, 자리를 피하셔야 합니다.
-저분이 나를 지킨다고 저기에 서 있습니다. 어딜 가겠습니까.
신하의 다급한 음성에도 성운은 성 밖이 환히 보이는 위치에 서서 나라를 내려다보았다. 전장을 방불케 하는 횃불과는 다르게 밤은 너무나 고요하기만 했다.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싸움은 성을 지키려는 기사들에 의해서 점점 잠잠해졌다. 제일 먼저 민현을 찾았다. 다친 곳은 없는지, 괜찮은 것인지 제일 먼저 확인을 해야 마음이 편할 것만 같았다.
-폐하. 왜 몸을 피하지 않으시고..
목숨만이라도 건재해서 민현을 데려오라 명했거늘. 이미 많이 다치고 망가진 민현의 몰골과 피로 물든 칼날과 갑옷을 보고 성운은 한참을 울 것 같은 눈으로 민현을 쳐다보기만 했다.
-....당신이 아프지 않길 바랐습니다. 이렇게 다치는 걸 원치 않았습니다.
-.....
-왜 명을 어기십니까 결국. 왜 다시 돌아오시는겁니까.
제 군주의 떨리는 음성에 민현은 걱정하지 말라는 듯이 웃어 보였다. 제가 걱정되셨습니까. 숨을 몰아쉬면서도 제 걱정을 하지 말라는 민현의 따뜻한 음성에 성운은 상처를 매만지려 손을 뻗었다. 더럽습니다 폐하. 피로 물든 갑옷과 제 꼴은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그럼에도 성운은 손을 뻗어 민현의 얼굴을 손으로 어루어 만졌다.
-보고 싶었습니다.
-......
-매일 그리웠습니다.
기꺼이 성운을 위해서 몇 번이고 제 목숨을 바칠 수 있었다. 성운의 입에서 터져 나온 보고 싶었다는 말, 그리웠다는 말. 그 말로 몇 번이고 바칠 각오는 예전에 되어 있었다. 울지 마세요 폐하. 힘겹게 내뱉은 말에 처음으로 성운의 얼굴에 맺힌 눈물을 닦아냈다.
-봄이 오면... 잊어주세요.
자꾸만 감기는 눈을 억지로 뜨게 하려 성운은 민현의 몸을 흔들었다. 떨어지는 민현의 손바닥 안 주사위 두 개가 뱅그르르 돌더니 조각나버렸다. 밖에서는 한없이 따뜻한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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