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
"성운이 형, 좋아해요."
드디어 말했다. 민현이 작게 떨리는 손을 말아쥐었다. 초여름 밤바람에 실려온 달큰한 꽃향기 만큼이나 수줍은 고백이었다. 이 날이 오기를 얼마나 기다렸는지. 학교 정원에 장미가 만개할 때까지, 성운을 향한 자신의 마음을 확신할 수 있을 때까지 섣부른 말을 밀어넣고 또 밀어넣었던 민현이었다. 좋아하는 사람을 향해 마음을 전하는 것이 이렇게나 가슴 떨리는 일이었구나. 초조함에 입술을 핥은 민현이 성운의 눈을 찾고는 살풋 웃었다. 민현은 저를 올려다보는 성운의 저 동그란 눈이, 깜찍한 귀 끝이, 통통한 입술이 자신을 선택해주기를 바랐다. 그리고,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성운의 입이 작게 열렸다.
"니가? 날?"
"네?"
성운의 그 얼굴은, 놀랐다기보다는 정말로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함께 전공 수업을 들을 때 보았던 표정이 왜 여기서 나오는지. 예상치 못한 성운의 반응에 민현은 당황했다.
"네, 네. 제가 형을…."
"왜?"
스물한 살의 여름, 민현은 생애 첫 고백과 동시에 차이는 굴욕을 맛보아야 했다.
장미의 가시는 아프지 않다
01.
"차였다고? 니가? 황민현이? 그게 말이 돼? 아니 그게…."
성우의 입이 크게 쩌억, 벌어졌다. 성우는 손짓 발짓을 하며 어떻게든 말을 이어가보려 했지만 온몸을 써도 그 충격을 말로 표현하지는 못했다.
"행, 턱 빠진다, 닫아요. 와 근데 진짜 신기하네. 민현이 형을 차는 사람이 다 있고."
주섬주섬 성우의 턱을 닫아준 다니엘이 순수하게 놀라워했다. '스윗-하다'라는 말이 동굴에 갇혀 100일 동안 인터넷소설, K-드라마, 로맨스영화만 보고 그대로 사람이 된 것 같은 저 황민현이 차이다니.
"와 씨 진짜 궁금해. 누구예여? 알려줌 안 돼? 힌트라도 줘요 궁금해 죽겠어."
재환이 신이 난 강아지처럼 추궁했지만, 민현이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시름시름 앓으며 카페 소파에 간신히 몸을 기대고 있는 것뿐이었다. 지성은 그런 민현의 눈치를 보며 커피를 홀짝였다.
"지성이 형은 안 궁금해여?"
재환의 질문에 화드득 놀란 지성이 커피를 마시다 사레가 들렸다.
"헙, 컥, 어, 어어… 아우, 뭐 좋은 일이라고 그래. 쟤 얼굴 완전 반쪽 됐잖아. 재환이 너 민현이 그만 괴롭히고 이리 와."
지성이 황급히 말을 돌리며 재환에게 면박을 주었다. 내가 언제 괴롭혔다고…, 재환은 꿍얼거리면서도 자리를 옮겨 지성의 옆자리로 갔다. 자리가 넓어지자 민현은 기다렸다는 듯이 액체처럼 미끄러져 소파에 엎드렸다. 앉을 힘도 없는 모양이었다.
"…고백을 했는데."
테이블 아래에서 들려오는 민현의 작은 목소리에 모두가 귀를 기울였다.
"왜냐고 묻는게 무슨 뜻일까."
민현의 말에 테이블이 일순 조용해졌다.
"…무슨 뜻이에여 그게?"
02.
'성운이 형, 좋아해요.'
뭐가 문제였을까.
'왜?'
무슨 뜻이었을까.
새벽이 되니 잠은 안 오고, 그날 생각은 나고, 결국 민현은 애꿎은 이불만 박차고 일어났다. 이제와 생각해보니 이상한 것 투성이였다. 어차피 차인 거 물어나볼걸, 답답한 마음에 후회만 늘어가는 민현이었다. 침대에서 일어나 냉장고로 간 민현이 찬물로 속을 달래보았지만 얼굴의 열기는 영 식지를 않았다. 운동이라도 하면 좀 나을까 싶어 한밤중에 덤벨을 들어도 보고 스쿼트를 해보는 등 별 짓을 다 해보았지만 안 되는 것은 안 되는 것이었다. 결국 다시 침대에 누운 민현이 집어든 것은 금단의 물건, 스마트폰이었다.
차이고 나면 새벽에 하는 SNS만큼 위험한 것은 없다고 친구들이 신신당부를 하며 말렸지만, 이 고요한 시간에 아무것도 안하고 침대에 누워 있자니 미쳐버릴 것만 같은 민현이었다. SNS만 안하면 괜찮겠지, 안일하게 생각한 민현은 갤러리로 들어갔다. 그런데 왜 첫 화면부터 성운과 함께 찍은 사진이 떡 하니 자리잡고 있는 것인지. 순간 민현의 손에서 핸드폰이 미끄러져 내렸다.
"읍!"
민현이 입술을 부여잡았다. 스마트폰에 어찌나 세게 부딪혔는지, 이에서부터 머리 끝까지 얼얼한 감각이 퍼지며 민현의 눈에서 눈물이 찔끔 났다. 민현은 얼른 손을 들어 입술을 매만져보았다. 다행히 다친 곳은 없어보였다. 그렇게 제 입술을 만지던 민현의 머릿속에 문득 과거 성운의 말이 떠올랐다.
'너도 입술 예뻐. 쩰리 같아가주구.'
장미만큼이나 붉은 입술로 그렇게나 깜찍한 말을 속삭여주던 성운이었는데. 그랬던 형이 자신의 고백을 거절했다니, 아직도 믿을 수가 없어 민현은 이 새벽이 너무나 축축하고 차게 느껴졌다. 퍼렇게 멍든 마음을 달래려 민현은 이불을 꼭 끌어안았다. 이런 거 말고, 성운이 형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이불을 껴안고 한참을 뒤척이던 민현은 결국 다시 스마트폰을 찾아 카톡 앱을 켰다. 성우에게 연락을 하려고 했는데, 왜 민현의 손은 자꾸 화면을 아래로 내리고 있는건지. 어느새 꽤나 아래까지 내려온 카카오톡 화면에 성운의 이름이 걸렸다. 성운의 프로필 사진은 그새 또 민현이 모르는 사람들과 함께 찍은 사진으로 변경되어 있었다. 사진 속 성운은 따봉을 치켜들고 밝게 웃고있었고, 그 뒤로 장미 몇 송이가 보였다. 장미 정원이었다.
성운과 민현이 함께 꽃피운 장미정원에서, 민현은 차였고, 성운은 행복해 보였다. 나는 이렇게 힘든데 형은 뭐가 그렇게 즐거운지, 민현은 그 사실을 더이상 참기 힘들었다. 거절 또한 성운의 뜻이었기에 받아들이려 했던 민현이었다. 질척대지 말자고 몇 번을 다짐한 민현이었지만, 말이 쉽지, 벌써 5일째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한 탓에 낮밤이 바뀌고 있었다. 새나라의 어른이라 놀림 받을 정도로 규칙적이고 바른 생활을 지속해온 민현에게 생활 리듬의 붕괴는 치명적이었다. 그러니까 짧게 말해 제정신이 아니었다는 얘기다.
1 [ 형 }
1 [ 자요? }
1 [ 성운이 형 }
민현은 초조함에 잠시 손을 멈췄다. 그래도 말 풍선 옆의 숫자 1은 지워지지 않았다. 하긴 벌써 새벽 3시가 지나고 있었다. 묘한 안도감과 약간의 만용이 부풀어올라 민현은 용기를 내어 대화를 이어갔다.
1 [ 저 그동안 계속 생각해 봤는데요 }
1 [ 도저히 안 되겠어요... ]
1 [ 저번에 제 고백 }
[ 한번만 다시 생각해주면 안 돼요? }
그 순간, 그동안 민현이 보냈던 말 풍선 옆의 숫자 1들이 한꺼번에 지워졌다.
뒷목에 오소소 소름이 돋아 민현은 저도 모르게 자리에서 펄쩍 뛰었다. 정신이 들고 나니 그제야 제가 무슨 짓을 했는지가 보이는 민현이었다. 취소, 취소… 왜 카톡은 취소를 못하는지, 민현의 눈이 1초에 10번은 깜빡이는 것 같았다. 그렇게 민현이 어쩔 줄을 몰라 하는 사이, 성운에게서 짧은 답톡이 왔다.
{ 야 ]
{ 황민현 ]
{ 그만하고 ]
{ 잠이나 자 ]
03.
"저 내일 약속 있어서 오늘은 여기까지만 할게요. 네, 네, 끌게요."
게임을 끈 성운이 컴퓨터를 종료했다. 슬슬 침대에 들어갈 시간이었다. 내일 대학교 친구 놈들과 영화 약속이 있기 때문이었다. 민현도 포함해서.
성운은 침대에 털썩 몸을 던졌다. 황민현, 황민현… 민현아. 복잡한 머리에 괜히 속으로 민현의 이름을 불러보는 성운이었다. 내일 어떻게 이름을 불러야 할지, 어떤 얼굴을 해야 할지, 무슨 옷을 입어야 할지, 어디에 서서 걸어야 할지, 생각해야 할 것 투성이라 성운은 머리를 싸맸다. 머리 아프다고 게임을 하는 것이 아니었는데. 후회해도 이미 늦었다. 차라리 구라라도 쳐서 빠져볼까 생각도 해본 성운이었지만 그렇게 파투난 약속이 벌써 여러 개였다. 이번에도 모임에서 빠지면 그 눈치 없는 놈들이라도 슬슬 자신을 수상하게 여길 것 같아 성운은 울며 겨자 먹기로 영화를 보러 가겠다고 한 것이었다. 어쨌든 한번은 부딪혀야 할 일이었다. '아, 모르겠다. 잠이나 자자.' 성운은 몸을 웅크리고 눈을 감았다.
방에 불을 끈지 얼마나 지났다고, 스마트폰에서 작게 알림 소리가 들려왔다. 성운은 무시하려 했지만 카톡 소리는 간헐적으로 계속되었고 결국 작게 욕지기를 뱉은 성운이 스마트폰을 쥐어들었다. '이 시간에 누구야.' 상대가 누구든 따끔하게 한 소리를 해주려 했던 성운은 켜진 화면을 보고 굳어버렸다. 민현이었다.
'5일동안 아무 말도 없더니 갑자기 이 시간에 무슨 소리를 하려고? …근데 얘 지금 잘 시간인데.'
확인하고 싶은데 확인하고 싶지 않다. 이율배반적인 감정에 잠시 고민하던 성운은 이내 다시 울려오는 알림 소리를 듣고 톡방을 확인했다.
{ 형 ]
{ 자요? ]
성운은 잠시 입을 벌리고 말을 잇지 못했다. '어후 이게 뭐야아.' 밀려오는 공감성 수치심에 성운은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다. 스마트폰 시계는 새벽 3시가 넘어있었다. 매일 일찍 잔다더니 오늘은 술이라도 마신 것인지, 이쯤에서 말려줘야 할 것 같아 성운은 급하게 답톡을 보냈다.
[ 야 }
[ 황민현 }
[ 그만하고 }
[ 잠이나 자 }
침대에 털썩 누운 성운은 스마트폰을 머리맡에 던지고 눈을 꽉 감았다. 좀 더 살갑게 톡을 보낼걸 그랬나, 하는 후회도 들었지만 이미 보낸 톡을 번복할 수도 없었기에 성운은 그대로 다시 잠을 청했다.
그렇게 눈을 감기는 했지만, 생각할수록 어이가 없는 성운이었다. 성운의 입술 사이로 자꾸만 피식피식 웃음이 새어나왔다. 그 황민현이 두 시 남친짓을 하다니. 대박이야. 참지 못하고 아하항, 웃던 성운이 문득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과거 성운 또한 민현이 보내온 카톡과 비슷한 것들을 비슷한 시간에 보내곤 했던 것이다. 이 찬새벽에, 민현이 어떤 마음을 껴안고 있었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아 성운은 이불 속에서 몸을 뒤척였다.
'어쩌면…. 어쩌면 진짜로….'
04.
"그 행은 틱틱대는게 매력이다이가."
성운에 대한 이야기였다. 다니엘의 말에 의자에 앉아있던 모두가 '맞아, 맞아' 맞장구를 치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오직 민현만이 별다른 반응없이 차가운 자몽 주스 한 잔을 쭈욱 들이킬 뿐이었다. 이 모임은 항상 이랬다. 성운이 약속에 지각하거나 펑크를 낼 때면 '그 형은 왜 그래?' 하다가도 '그래도 그 형 귀엽지'로 끝나는 이상한 모임. 틱틱대긴 해도 사실은 정 많고 애교 많은 성운의 인성을 나타내는 것이었기에 평소라면 누구보다 신이 나 끼어들었을 민현이었지만, 지금은 성운과 만나면 무슨 얼굴을 해야 할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생각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성운이 형 귀엽지."
"그 형 안 그런 척하면서 귀엽다고 하면 좋아하드라."
"걔 귀엽다구 하면 자기 안 귀엽다고 발끈하는데, 그게 귀여워."
다니엘의 말을 간증하듯 민현을 제외한 세 사람이 성운을 귀여워하는 말을 주르륵 쏟아냈다. 가만히 듣고만 있던 민현의 입술이 비죽이기 시작했다. 다들 성운이 형의 뭘 안다고 저렇게 신이 났는지, 민현은 못마땅했다.
"그만해요. 성운이 형이 자기 안 귀엽다잖아요."
"너나 고만해. 여기서 성운이 형 제일 귀여워하는게 너인 거 다 알거든."
"그러고보니 오늘은 민현이 형 왤케 조용해여? 민현이 형 성운이 형 얘기만 나와도 막 허허 웃으면서 박수치고 좋아했잖아."
"내가 언제."
"얘 진짜 내 고민이라니까. 머릿속에 뭐가 들었는지 모르겠어."
"그게 아니라, 올바른 사실 정정이지. 성운이 형은 귀엽다는 말보다 멋있다고 해주는게 더 좋댔어. 멋지다, 잘생겼다."
"…니 입에서 나오는 말이면 뭔들 안 좋아하겠니 걔가."
"네?"
"어? 아냐 아무것도."
지성의 말이 잘 들리지 않은 탓에 살짝 눈을 깜빡이던 민현은, 이내 말하려던 내용으로 돌아갔다.
"아무튼, 알았죠? 입에 안 붙으면 외워요. 성운이 형 안 귀여워요."
"아, 그래?"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모임의 분위기가 갑자기 싸늘해졌다. 민현은 물론, 의자에 앉아있던 모두가 그 목소리를 알고있었다. 옹기종기 앉아있던 다섯 명이 뒤를 돌아보았다. 성운이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로 삐딱하게 서있었다. 퉁명스러운 표정은 얼핏 평소와 비슷해 보였지만, 평소와는 분명 다르다는 것은 모두 알 수 있었다. 민현의 눈이 빠르게 깜빡이기 시작했다.
"형 그게 아니라…."
"빨리 가요. 가자. 지금 가야 팝콘 산다."
성운이 앉아있던 다섯 명을 채근하며 앞장섰다. 민현은 얼굴을 감싸고 마른 세수를 했다. 망했다.
05.
왜 공포영화보다 무표정한 성운의 얼굴이 더 무서운 것인지. 초조함에 민현의 눈이 쉴 새 없이 깜빡였다. 옆에 앉아있던 성우가 정신 없다며 작게 툴툴댔지만 그렇다고 눈의 깜빡임이 멈추지는 않았다. 민현은 슬쩍 눈을 굴려 다시 성운을 훔쳐보았다. 지성과 다니엘 사이에 앉은 성운은 표정도 없이 영화를 보고있었다. 심지어 영화관 여기저기서 비명이 터질 때조차도. 그 모습을 본 민현의 머리가 쉬지 않고 굴러갔다. 대체 뭐라고 해야할까, 형 귀여워요? 아니, 형 안 귀여워요? 이 아이러니한 상황을 도대체 어떻게 타개해야 할지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터질 것 같아 민현은 도저히 영화에 집중할 수 없었다. 멍하니 스크린만 보던 민현은 문득 성운과 둘이서 영화를 보러 갔던 기억을 떠올렸다.
팝콘이 여기저기서 날아다닌다는 평 대로, 영화는 사람을 깜짝깜짝 놀래키는 재주가 탁월했다. 다만 성운과 민현 두 사람만큼은 남들 놀라는 틈을 타 귓속말을 하느라 바빴다. '저거 갑자기 왜 저러는거야?' '저 인형이 아까 다른 곳에도 있었대요' '아~' 유독 내용 파악이 느린 성운이 옆자리에 앉은 민현에게 물어보기 바빴기 때문이었다.
어느새 영화는 중반부를 향하고 있었고, 어김없이 또 한번 사람들을 놀래켰다. 그리고 어김없이 성운은 민현에게로 몸을 기울였다.
'민현아.'
'네?'
'아… 아니다. 너 영화 봐.'
'왜요? 괜찮아요.'
'아니이, 너 나 땜에 영화도 못 보구. 우웅, 됐어.'
성운이 왜 주저했는지 눈치 챈 민현은 괜찮다는 듯 살갑게 웃어주었다.
'형이 이 영화 보고싶다고 해서 같이 보자고 한건데, 형이 재미 없으면 무슨 소용이에요.'
'그럼 너는?'
'저는 형이랑 이렇게 속닥거리는 것도 재밌어요.'
순간 영화 화면이 전환되며 밝은 빛이 극장을 덮쳤다. 민현과 눈을 마주친 성운이 스크린을 향해 홱 얼굴을 돌렸다.
'뭔 소리야.'
'하하. 궁금한 거 있으면 물어봐요.'
민현은 다시 스크린을 향해 고개를 돌리고 영화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이내 작게 들려오는 팝콘 먹는 소리에 픽 웃었다. 이제까지는 먹지도 않더니, 아무래도 성운은 영화에 집중하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하여튼 고집쟁이라니까, 자꾸만 새어나오는 웃음에 민현은 입을 가려야 했다.
영화는 어느새 클라이맥스를 향해 가기 시작했다. 성운이 조용해지자 영화에 꽤 깊게 집중하던 민현은, 이번에 나타난 귀신에 정말로 깜짝 놀라 저도 모르게 성운을 잡았다. 말이 잡은 거지, 성운의 체구가 작다 보니 민현이 성운을 반쯤 껴안은 자세가 되었다. 영화에서 귀신을 본 것보다 더 당황한 민현은 조심스럽게 성운을 놓아주었다.
'아, 와, 형 저 진짜 깜짝 놀랐어요.'
'야 뭐 그런 거에 놀라고 그러냐.'
민현을 보고 피식 웃는 성운은 영 놀라지 않은 눈치였다. 그 모습에 의심이 든 민현이 물었다.
'…형, 영화 잘 보고 있어요?'
'응? 어어…'
'진짜요?'
'진짜야 진짜. 진짜라고오.'
토라진 듯 홱 쏘아붙인 성운이 우적우적 팝콘을 부숴먹었다. 그런 성운에 자꾸만 실실 웃음이 새어나오는 민현이었다. '귀여워.' 민현은 이미 답이 없을 정도로 성운에게 빠져있었다.
영화가 끝난 뒤, 일행들은 2차로 노래방에 가기로 했다. 그전에 성운과 지성이 잠시 볼일을 보겠다며 화장실로 향했다. 로비에서 두 사람을 기다리던 일행들은 영화 이야기로 시끄러웠지만, 민현만큼은 성운이 나올 때를 기다리며 초조하게 타이밍을 재고있었다.
"나도 잠깐 다녀올게."
민현이 서둘러 화장실로 가는 통로로 들어섰다. 과연 화장실로 이어지는 복도 끝에서부터 성운이 걸어오고있었다. 하지만 민현보다 먼저 성운과 이야기하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성운아, 아까 그거 기분 많이 상했어?"
지성이었다.
"…좀 어이 없긴 했는데, 기분 상할 것도 없어가주구, 걔는 그렇게 생각하나보죠 뭐."
"성운아 들어봐. 너도 알잖아, 민현이 그런 애 아닌 거."
"형 나 진짜 괜찮아. 진짜 괜찮아요."
"민현이는 너가 귀엽다는 말보다 멋지다는 말을 더 좋아한다고 해서 그런거야."
"아잇, 됐어요. 제가 애도 아니고, 저 진짜 상관 없어요. 걔가 무슨 말을 하든 저 이젠 진짜 상관 없으니까 빨리 가요, 애들 기다리잖아요."
지성의 팔을 잡아끌고 로비로 향하던 성운이 앞장서 코너를 돌다, 그대로 민현과 맞닥뜨렸다. 민현과 눈을 마주친 성운의 눈이 커졌고, 뒤따라오던 지성 또한 놀라 굳었다.
"저, 잠깐 화장실 다녀오려고."
"어, 어어 그래 빨리 다녀와. 화장실 오른쪽 끝에 있더라."
당황해 버벅거리던 지성이 민현에게 화장실의 위치를 알려주었다. 민현은 화장실로 향하던 길에 뒤돌아 성운을 살폈다. 지성과 함께 로비로 향하는 성운의 어깨는 살짝 굳어있었다.
2차로 간 노래방에서, 민현은 어떻게든 성운에게 다가가 보려 노력했으나 어째 영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것이 성운의 의지임을 인지한 민현은 일단 오늘은 물러서기로 했다. 그렇다고 성운에게서 완전히 눈을 떼지는 못하는 민현이었다. 오늘따라 지성에게 딱 달라붙은 성운은 다시 기분을 회복한 듯 보였다. 하트 모양 입을 활짝 벌리고 지성과 무슨 농담을 그렇게 하는건지, 민현은 노랫소리에 묻혀 들리지 않는 성운의 목소리가 궁금하다 못해 입맛이 썼다.
그렇게 한참을 신나게 놀던 모임이 파했다. 인사를 한 민현이 일행들과 헤어질 때까지, 성운은 민현에게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오늘따라 성운 특유의 차가운 표정에 민현은 괜한 오기가 들었다.
"형, 잠깐 얘기 좀 해요."
"아, 아까 그거면 됐어. 지성이 형한테 다 들었어."
"…진짜로 제가 무슨 말을 해도 형한테는 상관 없어요?"
성운의 얼굴이 굳어졌다.
06.
그날 이후로 성운은 눈에 띄게 민현을 피하기 시작했다. 약속을 못 나간다고 하는 것은 물론이고, 단톡방에서도 잘 보이질 않으니, 친구 녀석들도 슬슬 눈치를 챈 듯 서로가 서로에게 성운이 형한테 뭐 잘못한 것 있냐고 묻기 바빴다. 그리고 그 만인의 만인에 대한 질문의 화살촉은 민현에게 날아가 꽂혔다.
"니가 그날 괜히 성운이 형 안 귀엽다고 해가지고 그런거 아냐?"
성우의 말에 제 발등을 찍고 싶어진 민현이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게다가 민현은 제 발등을 찍기 전에 먼저 찍어볼 다른 사람이 한 명 있었다. 단톡방에는 성운 말고도 수상한 사람이 또 한 명 있었으니, 바로 지성이었다.
"성운이가 괜찮아지면 알아서 연락하겠지."
"아 그니까 뭐가 안 괜찮아서 괜찮아지고 말아요. 행은 뭐 좀 알아요?"
"아니 내가 뭘 안다구…."
그렇게 답답한 시간만 흘러가던 어느 날, 지성이 민현을 불러냈다.
지성이 톡으로 보내준 약도를 따라가보니, 두 사람이 만나기로 한 카페는 학교 주변에서 약간 먼 곳에 위치해 있었다. 아마도 학교 사람들과 마주치면 껄끄러운 이야기이기 때문이겠지, 민현은 생각했다. 카페로 들어간 민현을 향해 인사하는 지성의 표정은 그리 밝지 않아 보였다. 팔자로 내려간 두 눈썹에서 그의 망설임을 엿볼 수 있었고, 음료가 나오고 나서 이야기하자는 그의 말에서 긴장을 엿볼 수 있었다. 하지만 민현의 인내심은 이미 바닥이 난 지 오래였다.
"성운이 형 때문에 그러죠."
급하게 본론으로 바로 치고들어가는 민현에 지성의 눈이 크게 뜨이다, 방긋 웃었다.
"응. 성운이 얘기야."
예상은 했지만 실제로 들으니 더 서운해지는 민현이었다. 정확히 누구에게 무엇이 서운한걸까, 민현은 제 감정의 행방을 따라가기가 힘들었다.
"형은 다 알고있었어요?"
"민현아, 그렇게 말하면 내가 대답하기 너무 어렵잖아."
살짝 삐딱한 민현의 말에 지성은 그저 어색한 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민현은 자세를 고쳐앉았다. 하기사 지금은 이런 소리를 할 때가 아니었다. 성운에 대한 실마리를 완전히 놓쳐버리기 전에 지성이 먼저 연락해준 것만도 민현에게는 감지덕지한 상황이었다. 때마침 나온 음료를 받아들고 자리로 돌아온 두 사람은 본격적인 이야기에 들어갔다.
"성운이 형 요즘 왜 자꾸 절 피해다니는 거예요?"
민현이 가장 물어보고픈 질문이었다. 내가 뭘 했다고, 생각하면 할수록 억울해서 잠도 오지 않는 민현이었다.
"음… 말은 안 하려고 하던데, 그날 네가 너무 무서웠나봐. 성운이 엄청 쫄아있던데."
"무섭, 무서웠다구요? 제가요?"
민현은 황당한 나머지 말을 더듬기까지 했다. 아니 그날 진짜로 무섭게 굳어있던 사람이 누군데. 오기가 생겨서 괜히 찔러보기는 했지만, 딱히 화를 낸 적도 없는 민현으로서는 너무나 억울한 답변이었다.
"걘 너 어려워 하거든. 딱히 너라서 어렵다는건 아니고, 아니, 너라서 더 어렵다고 하기는 했는데, 아, 정리하기가 어렵네."
"아니 제가 뭘, 고백한 것도 저고, 차인 것도 저고, 말 실수한 것도 저고, 사과하려고 한 것도 전데. 제가 대체 뭘 했다고 형이 절 어렵게 여겨요? 설마 고백한 것 때문에 그래요?"
왈칵 설움이 넘쳐 되는대로 쏟아낸 민현이었다. 지성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벌써부터 이 모양이니 너네 연애는 어떻게 할 지 모르겠다…."
"네?"
민현이 인상을 구겼다.
"너네 너무 안 맞는다고. 연애 방식이나, 경험이나, 하여튼 여러가지가. 너랑 걔랑 연애에 대한 생각이 너무 달라."
"형, 저 도와주려고 나오라고 한 거 아니었어요? 근데 형이랑 얘기할수록 더 모르겠어요."
"그러게…. 내가 너네 초 치려고 온게 아니라서 더 가슴이 아프다 민현아."
지성이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집어들었고, 그 모습을 본 민현도 자몽에이드를 집어들었다. 각자의 음료를 쭉 들이키고도 두 사람의 표정은 여전히 좋지 못했다.
"…너도 다 안다고 들었으니까 말할게. 성운이 저번 연애 끝이 안 좋았던건 너도 알지?"
지성의 말에, 그제야 민현은 성운과 장미정원에서 처음으로 만난 날을 떠올렸다.
"하지만…."
민현은 말을 멈추고 고민했다. 제가 하려는 말이 반박인지, 변명인지 민현 스스로도 확신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민현에게 지성이 괜찮다는 듯 가볍게 웃어주었다.
"그 놈은 그 놈이고 너는 너라고 말하고 싶겠지만, 성운이한테는 그게 문제가 아니야."
"그럼요?"
"글쎄, 성운이 성격에 그걸 말로 잘 정리해서 전할 수 있었을 정도면 널 무작정 피하고만 있진 않았을걸. 그냥, 추측을 해보는거지. 사람을 그렇게 좋아하던 애가 가시를 꽁꽁 두르고 제 마음을 파묻어버린 그 심정을."
민현은 하나 둘 성운의 말들을 떠올렸다. '니가? 날? 왜?' '그만하고 잠이나 자' '걔가 무슨 말을 하든 저 이젠 진짜 상관 없으니까' 새삼 너무한다 싶기는 했지만, 그 정 많고 애교 많던 성운이, 장미 정원을 관리하는 일에 두 팔 걷고 나서준 그 착한 성운이 고백과 동시에 변해버린 것은 분명 생각해볼만한 일이었다. 갑자기 어두워진 민현의 눈치를 보던 지성이 크흠, 목을 가다듬고 민현을 불렀다.
"그래도 너무 어렵게 생각하진 마. 힌트를 주자면, 내가 봤을 때 적어도 네가 문제는 아니라는거야. 오히려 너라서 너무 잘 됐지 뭐."
지성의 그 한마디에 민현의 눈이 반짝이며 얼굴에 화색이 돌기 시작했다. 어린아이 마냥 표정을 숨기지 못하는 민현의 반응에 지성이 박수를 치며 웃었다.
"성운이한테 시간을 달라고 말하려고 했는데, 오늘 너 보니까 좀 어려울 것 같긴 하다. 그치?"
지성의 말에 민현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잖아도 민현은 지금 당장이라도 카페를 박차고 나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근데 그래서 다행이라고 생각했어. 사실 내가 너무 늦은건 아닌가 했거든."
"아뇨, 전혀! 하나도 안 늦었어요 형."
상기된 민현의 얼굴을 본 지성이 작게 킥킥 웃었다.
"그래. 다행이네. 민현아 성운이 좀 잘 잡아줘. 성운이는…."
"형."
민현이 다급히 지성의 말을 저지했다.
"그 뒤는 제가 직접 들을게요."
자리에서 일어나는 민현을 향해 지성이 활짝 웃어주었다.
"저 가볼게요. 오늘 고마워요 형."
인사를 끝으로 민현은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나중에 잘 되면 뭐라도 좀 쏘라고 할까, 손을 흔들며 배웅하던 지성은 퍼뜩 떠오르는 생각에 황급히 민현을 불렀지만, 민현은 이미 카페 문을 열고 나간 뒤였다.
"오늘 비온댔는데…."
07.
민현은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찾아 통화버튼을 눌렀다. 민현은 주소록을 찾을 필요도 없었다. 너무 눌러서 이제는 외워버린 그 번호. 성운의 전화번호 열 한자리. 정처 없이 흐르는 통화음을 들으며, 민현은 장미 정원에서의 첫날을 떠올렸다.
남학생 두 명. 시급 1만원. 봉사 시간 추가 지급. 너무 좋아보이는 조건에는 반드시 패널티가 따르는 법이었다. 이 더럽고 차가운 사회의 진리를, 민현은 학교 근로 아르바이트에 지원한 날 처음 알았다. 별로 안 넓으니까 걱정 말고 따라오라는 과장의 말만 믿고 따라간 그곳에는 말라비틀어진 장미 줄기들이 한가득이었다. 게다가 설상가상, 3일 뒤 함께 일하던 다른 남학생이 더이상 연락을 받지 않았다. 탈주하고픈 그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으나, 그 무책임한 행동으로 인한 피해는 고스란히 민현에게 돌아왔다. 과장은 대체할 학생을 빨리 찾아보겠으니, 그 때까지만 좀 더 수고해달라 말할 뿐이었다.
그렇게 민현은 초봄에도 홀로 땀을 뻘뻘 흘리며 장미 정원을 가꾸게 되었다. 상한 장미 모종을 하나씩 뽑고 있는데, 저 멀리서 작게 목소리들이 들려왔다. 일이 고되었던 탓에 민현은 처음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학교 부지인 줄도 모르는 학생들이 대다수인 이 장미 정원에도 숨어들어오는 사람들이 있기는 있구나, 정도의 생각이었다. 하지만 목소리들은 점점 가파르게 커지기 시작했고, '헤어지자고!' 외치는 소리를 끝으로 정적이 찾아왔다. 그제야 살짝 고개를 든 민현은 깜짝 놀라 저도 모르게 허리를 펴고 일어섰다. 아는 얼굴이 있었다.
'성운이 형!'
그 외침에 화들짝 놀란 두 사람이 민현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멀리서 보아도 알 수 있을 정도로, 성운은 울고있었다. 아주 엉망으로. 덩치 큰 남자 앞에서 어깨를 떨며 울고있는 성운은 그렇잖아도 체구가 작은 편이라 한층 더 위험해 보였다. 민현은 성큼성큼 말라비틀어진 장미들 사이를 가로질러가 성운의 앞을 막아 섰다.
'이 새낀 또 뭐야?'
'표지판에 여기 함부로 들어오지 말라고 쓰여 있는데, 못 보셨어요?'
남자는 오만상을 찌푸린 채 민현을 위아래로 훑다가, 어이가 없다는 듯 픽 웃었다.
'야 하성운, 너 지금 쇼하냐? 얘기 좀 하자고 그렇게 질질 짜더니, 너도 새 거 생겼다고 자랑하러 부른거야?'
남자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민현과 성운이, 서로를 동시에 쳐다보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남자는 발을 돌렸다. 그 때, 민현보다 먼저 상황을 이해한 성운이 화들짝 놀라 남자에게 외쳤다.
'무슨 소리…, 야 아니야. 그런 거 아니라고! 야!'
성운의 외침에도 남자는 멈추지 않았고, 장미 정원을 빠져나갔다. 그제야 엉망이 된 상황을 인지한 민현이 잠시 성운의 눈치를 보다, 사과했다. 남의 일에 함부로 끼어들면 안되는 거였는데, 민현은 눈치 없이 끼어든 제 죄를 반성했다.
'죄송해요 형…. 저 잘못한 거예요?'
시무룩한 민현의 표정을 본 성운이 한숨을 쉬며 앞머리를 쓸어넘겼다.
'아냐 됐다. 니가 무슨 잘못이 있겠냐. 남자 보자마자 딴놈이라고 생각하는 저 새끼가 병신이지.'
팔소매를 들어 눈물을 닦던 성운은, 문득 고개를 들어 다시 민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근데 너 얼굴이 왜 그래?'
성운과 민현은 서둘러 가까운 화장실로 뛰어들어갔다. 나트륨 알러지 때문에 민현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기 때문이었다.
'안 아팠어? 고개 숙여봐. 뒷목 완전 엉망이야. 다른 곳은 괜찮고?'
'알러지 올라온게 너무 오랜만이라, 햇살이 따가운 줄 알았어요.'
성운은 민현이 보기 힘든 곳을 구석구석 확인하고 씻겨주었다. 민현은 제 뒤에 선 성운의 눈을 훔쳐보았다. 민현의 등을 확인하는 그 눈은 눈물을 그친지 얼마 안 된 탓에 발갛게 부어올라 있었다. 자기 눈부터 챙기지, 되게 좋은 사람이구나, 민현은 생각했다. 민현과 동기이기는 해도 함께 노는 그룹이 달랐던 탓에 얼굴만 아는 사이였던 성운이었다. 그런 성운이 자신을 이렇게 챙겨줄 줄이야, 그것도 눈치 없이 끼어들어 애인과 헤어지게 만든 자신을. 미안하고도 고마운 복잡한 감정에 민현은 별 불만 없이 성운에게 뒷목을 내어주었다. 성운이 왜 과에서 그렇게 인기가 많은지 이유를 알 것 같은 민현이었다.
민현의 알러지가 겨우 진정되자, 두 사람은 건물을 빠져나와 다시 정원으로 향했다. 두 사람이 정원에 도착하자 언제부터 와있었는지 과장이 정원을 살피고 있었다. 어딜 다녀왔냐며 추궁하는 과장에게 민현이 자초지종을 설명하던 새에 성운은 멍하니 장미 정원을 바라보고 있었다. 민현의 알러지 이야기를 듣고 고민에 빠진 과장을 향해 성운이 제안을 했다.
'이거, 저도 하고 싶슴다.'
그렇게 민현과 성운은 함께 장미 정원을 관리하게 되었다. 경기도에 있는 할아버지네 밭일을 자주 도와드렸다던 성운은, 의외로 밭일을 익숙하게 해냈다. 다만 몸에 뭔가가 닿는 것을 싫어하는 예민한 성격 탓에 발성 연습을 자주하기는 했지만. 성운이 발성 연습을 할 때마다 민현은 자지러졌다. 사실, 성운이 무슨 말만 해도 민현은 자지러졌다. 성운의 어깨를 퍽퍽 치면서.
'아이잇, 아퍼! 왜 그르냐 진짜!'
'아 형 너무 웃겨서 그래요. 진짜 취향 저격.'
'내가 너랑 비슷하게 웃음 장벽 낮은 애를 알거든. 걔도 웃을 때마다 날 못 괴롭혀서 안달인데.'
'아, 혹시 다니엘? 걔요? 1학년이요.'
'어? 너 걔 알아?'
'네, 형이 맨날 달고다니는 커다란 애 말하는거죠?'
달고다닌다는 표현이 마음에 들었는지, 빵 터진 성운은 그날 민현을 다니엘 일행과 소개시켜주었고, 그렇게 민현도 성운을 귀여워하는 모임의 일원이 되었다. 한창 즐겁게 수다를 떨던 어느 날, 문득 민현은 친구들 중 누구도 성운의 연애에 대해 자세히 알고있는 사람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행은 맨날 우리 모르는 사이에 연애하다, 깨졌다고 술 마시자카고 그래요.'
다니엘의 그 말이 민현은 왜 그리 신경이 쓰이던지. 아무도 모르는 성운의 연애를 혼자만 알고있다는 생각에, 민현은 왠지 모를 우월감을 느꼈다.
'형, 그날 그 사람이랑은 어떻게 됐어요?'
'완전히 끝났어.'
'아… 그날 저 때문에….'
'어? 아냐아, 너 때문에 아냐.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내가 존나 구질구질하게 굴었는데, 새벽에 보낸 톡에 웬일로 답톡을 보내나 했더니, 좆이 심심해서 그랬나보더라. 하룻밤 자고 정 떨어져서 그대로 끝냈어.'
상상했던 것보다도 화끈한 성운의 투 머치 인포메이션에 민현은 입을 다물고 일에 매진했다. 성운 또한 조용히 장미 모종을 뽑는 일에 열중했다. 근로 시간이 거의 끝나갈 때쯤, 또 흙이 튀었는지 성운이 '악!'하고 소리를 질렀다. 정적을 깨는 날카로운 소리에 민현이 자지러지게 웃으며 성운의 어깨를 팡팡 쳤다.
'아이잇 아프다고! 너 다른 애들한테는 왕자님처럼 굴면서 나한테는 왜 그래!'
'싫어요? 그럼 왕자님처럼 대해줄까요?'
'야 됐어, 그거 재수 없으니까 하지 마.'
'저 재수없어요?'
성운의 말에 시무룩해진 민현이 젤리같은 입술을 내밀었다. 그 모습에 성운이 픽 웃었다.
'…학교 황민현은 좀 재수 없는데, 정원 황민현은 좀 귀여워.'
'저 귀여워요?'
민현을 들었다 놨다 하는 성운이었다. 만면에 미소를 띄고 제가 귀엽냐고 물어오는 민현을 지긋이 바라보던 성운이 쑥 손을 내밀어 민현의 턱을 살살 긁어주었다. 마치 고양이를 쓰다듬는 것처럼.
'엉.'
성운이 활짝 웃었다. 그 웃음에 민현은 잠시 말을 잊었다. 사르르 접히는 동그란 눈에, 하트모양으로 벌어지는 깜찍한 입에, 살짝 비스듬히 꺾인 고개에 민현의 심장이 너무 빠르게 뛰었기 때문이었다.
‘형두 귀여워요.’
‘하지마라.’
‘귀엽다는 소리 싫어요?’
‘어. 남자는 멋있다는 말이 최고지.’
몇 번이나 통화에 실패한 끝에, 성운이 전화를 받았다.
- 여보세요?
"성운이 형, 장미 정원에서 기다릴게요."
핸드폰 너머에서 성운이 먼저 전화를 끊었다. 그 매정한 소리를 머릿속에서 지우고, 민현은 천천히 장미 정원의 한가운데로 걸어들어갔다.
08.
- 형, 장미 정원에서 기다릴게요.
핸드폰 너머에서 들리던 민현의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아 성운은 괴로워했다. 침대에 누워 눈을 감고 있던 성운의 귀에 작게 토독, 토독 불길한 소리가 들려왔다. 성운은 불안한 눈으로 창 밖을 바라보았다.
비가 내리고 있었다.
09.
"너 바보야?! 다 젖었잖아!"
민현을 향해 장미 정원을 가로질러온 성운이 서둘러 제가 쓰고 온 우산을 씌워주었다.
"형 올 때까지 기다린다고 했잖아요. 잠깐 한눈 판 사이에 형이 오면 어떡해요."
"야, 내가 안 왔으면? 내가 안 왔으면 어쩌려구 했어? 사람이 안 온다 싶으면 바로 들어가야 할 거 아냐! 너 여기서 그러구 있는거 진짜 꼴불견이야, 알아?!"
"그래도 이렇게 왔잖아요. 형이."
만면에 가득한 민현의 미소에 성운의 눈이 잠시 길을 잃고 헤맸다.
"오늘은, 비가 왔잖아…."
작게 기어들어가는 성운의 말에 민현이 하하, 소리를 내 웃었다.
"아무튼! 이거 쓰고 가. 미친 놈처럼 비 맞고 돌아다니지 말고."
성운은 서둘러 민현에게 우산을 넘기고 우산 밖으로 빠져나가려 했다. 하지만 그런 성운을 민현이 다급히 붙잡았다.
"형! 비 맞아요! 형 우산은요?"
그제야 성운은 제 몫의 우산을 들고오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성운이 당황한 사이, 민현의 손이 우산 손잡이를 든 성운의 손을 감쌌다. 겹쳐오는 커다랗고 따뜻한 손에 놀란 성운이 황급히 손을 빼려 했으나 민현은 놓아주지 않았다.
"아 뭐야, 놔 봐 쫌!"
"놓으면 형 비 맞고 갈거잖아요. 왜 형 혼자 가려고 해요? 같이 가면 되잖아요."
"야 내가 너랑 왜."
성운이 민현의 눈을 피했다. 그런 성운의 태도에 결국 민현이 마음 속에만 담아두고있던 말들을 와르륵 쏟아냈다.
"뭐든 혼자 끙끙대고, 혼자 단정짓고, 혼자 끝내버리고, 왜 그래요? 같이 하면 되잖아요. 저랑 같."
"너는 나랑 같지 않으니까!"
성운이 이어지는 민현의 말을 매몰차게 잘랐다.
"니가 어떻게 나랑 같아. 키도 크고 잘생긴게 성격도 좋아서 여기저기 불려다니고, 너 왕자님 같다고 여자애들한테 인기도 많잖아. 나처럼 아무한테도 말 못하는 거지같은 연애할 일도 없고, 버림 받아도 어디다 하소연하지도 못할 필요도 없고, 구질구질하게 매달리지 않아도 되잖아. 게다가 뭣보다, 너는, 게이도 아니잖아."
물기 어린 성운의 목소리는 곧 빗소리 같은 울음을 터트릴 것만 같았다. 민현은 목 안쪽이 먹먹해져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이제 알겠지? 그럼 나 간다."
성운은 민현이 제 말을 이해했다고 생각했는지, 다시 우산을 빠져나가려 했다. 하지만 순간 민현의 손이 성운의 허리를 감싸 그 작은 몸을 그대로 제 품 안에 넣었다.
"누가 제가 게이 아니래요?"
"너, 너 게이 아니잖, 아…."
귓가에 바로 들려오는 민현의 낮은 목소리에 성운이 움찔 몸을 떨었다. 성운의 어깨에 고개를 묻었던 민현이 다시 고개를 들어 성운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 눈에는 분명 두려움이 가득했다. 무엇에 대한 두려움일까. 적어도 저를 향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민현은 알고있었다. 당연했다. 민현을 보는 성운의 눈은, 성운을 바라보는 민현의 눈과 똑같았으니까.
"제가 형을 좋아하잖아요. 그럼 게이인가보죠."
민현의 말에 성운의 입이 점점 벌어졌다. 머리를 망치로 한대 얻어맞은 듯한 표정이었다. 그 바보같은 표정이 왜 그리 사랑스러운지, 민현은 자꾸만 새어나오려는 웃음을 막을 수 없었다.
"이거 놔 봐, 그런게 어딨어!"
"제가 모쏠이라고 할 때 형이 '넌 그럴 것 같다'고 했잖아요. 그동안 형을 못 만나서 모쏠이었나보죠."
민현의 말에 성운의 귓가가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제가 한 말을 이렇게 돌려받을 줄은 꿈에서도 생각하지 못했던 것 같았다. 정원에 핀 장미들보다도 더 새빨갛고 예쁜 그 색은 주홍빛 가로등 아래에서도 민현의 눈 안에 선명히 피어났다.
“저랑 연애하면, 형은 저 좋아하는 거 빼고 아무 것도 안 해도 돼요. 가슴 아픈 연애도 제가 다 하고, 다른 사람한테 하소연 하는 것도 제가 다 하고, 구질구질하게 매달리는 것도 제가 다 할게요. 진짜예요.”
“내가, 내가 널 좋아하는데 그 꼴을 어떻게 보냐 이 사기꾼아.”
민현이 하하, 웃으며 성운의 턱을 들어올렸다..
"제가 어떻게 해야 믿어줄까요, 형이."
민현이 성운의 통통한 입술을 향해 서서히 고개를 내렸다.
"잠, 잠깐만."
더 이상은 참아줄 수 없다는 듯, 성운을 바라보는 민현의 눈빛이 날카로웠다.
"만약에, 했다가 기분 나쁘면 어떡해."
"형, '만약에'는 없어요."
사르르 웃는 민현의 대답에 성운의 눈이 곧 울 것처럼 일렁였다.
"그러니까 눈 감아요.”
우산 속에서, 두 사람의 인영이 서서히 하나로 겹쳐졌다. 성운의 입술처럼 붉은 장미들이 부슬부슬 내리는 초여름 비에 젖어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