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Written by 우주선
“야, 황민현! 빨리, 들어와!”
“어, 어!”
연말에 학기가 끝나고 종강기념 파티를 하러 민현은 친구들과 식당으로 향하고 있었다. 사실 파티라기보다는 술잔치에 조금 더 가깝긴 하지만, 아직 대학생이 된지 얼마 안 된 새내기는 이런 작은 행사에도 빠짐없이 나가려고 노력했다. 긴 코트를 입고 나오긴 했지만, 그것으로는 부족했던지, 민현은 연신 빨개진 손을 부여잡고 입김을 불어넣고 있었다. 식당에 들어서자마자 들리는 왁자지껄함이, 민현의 두 귀를 감쌌다. 노란빛 속에서 사람들의 웅성거림은 왠지 따뜻하게 느껴졌다. 이렇게 1년이 또 지나가는 구나, 하고 민현은 자리를 잡았다.
“올해도 이렇게 솔로로 끝나가는 구나!”
“연애는 무슨 연애냐, 수업 듣고 알바 뛰는 것만 해도 바빠 죽겠는데.”
친구들이 나누는 대화에 민현은 한 마디 거들며 끼어들었다.
“그래도 좋은 인연이 있으면, 괜찮지 않나?”
친구들은 우우 소리를 내며 놀리듯 대화를 이어갔다.
“또 배부른 소리 한다. 지금까지 받은 고백도 다 걷어찬 주제에.”
“인연이 아니었던 거지.”
“인연은 무슨 인연? 연애하고 싶으면 하는 거지.”
“내 로망이야. 첫눈에 반하는 거.”
“그 얼굴 그렇게 쓰려면 나 좀 주던지~”
능청스러운 친구의 말에 민현은 미소를 지었다. 민현은 그랬다, 예전부터 연애에 대한 로망이 컸다. 대학에 오고 나서는 더 그랬다. 캠퍼스 라이프, 캠퍼스 커플, 그 두 단어가 주는 핑크빛 느낌은 얼마나 달콤했는지. 물론 현실은 전공책과 교수님들 사이에서의 씨름이었지만.
한창 그렇게 수다를 떨면서 마시다 보니, 열이 올랐다. 민현은 잠시 양해를 구하고 열을 식히겠다고 발개진 두 뺨을 붙잡고 식당 밖으로 나왔다. 찬바람을 쐬니 조금 정신이 깬 듯 했다. 식당 앞 벤치에 앉아 거리를 둘러보면서 잠시 생각에 잠겼다. 대학, 연애, 취업, 수업, 교수님.. 물론 친구들에게 말한 로망 같은 게 없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민현이 연애를 안 하는 것은 그것 뿐만은 아니었다. 민현은 잘 몰랐다, 좋아하는 게 뭔지. 연애감정이라는 것 말이다.
사람들이 그렇게 설명해주는 책이나 드라마 같은 걸 보면 부드러운 음악이 흐르고 매일 하늘에 무지개가 떠 있는 것 같고, 빨간색부터 분홍색까지 뭔가 열정이 있는 느낌으로 묘사를 한다. 호기심에 고등학생 때 몇 번 고백을 받고 연애를 했지만, 아무리 친절하게 굴어도 돌아오는 건 “넌 나를 좋아하지 않는 것 같아, 우리 헤어지자.”였다. 그들과 대화하는 것이 즐거웠고 함께 노는 것도 나쁘지 않았지만 뭐, 그냥 우정이라고 할 수도 있는 정도의 마음이었다.
대학에 와서도 꾸준히 고백을 받았지만, 마음에 확신이 서지 않았고 다시 돌아오는 말은 똑같을 것 같아 철벽을 쳤던 그였다. 술기운에 몽롱해 있을 때 쯤, 하얀 점들이 그의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어, 눈..?”
그 해 첫 눈이었다. 내리는 눈을 잡아보려고 손을 뻗어보면서, 민현은 중얼거렸다.
“크리스마스는 아직 인데 벌써 오네.”
손을 뻗어 펼쳤다가 눈 한 송이가 그의 손에 내렸을 때, 그의 시선은 그 송이를 따라 손 끝, 그리고 그 너머로 향했다.
“와, 진짜 하얗다..”
자기도 모르게 나온 탄식에 입을 틀어막고 민현은 잠시 서 있었다. 혹시나 저기 서 있는 사람에게 들린 것은 아닌지, 걱정하면서 표정을 살폈다. 민현의 탄식대로 그 사람은 정말 흰, 그 자체였다. 하지만 뭔가 밝은 흰색이 아니었다. 슬픈 흰색이었다. 주머니에 꼭 넣은 손과 하늘을 바라보려고 들어 올린 얼굴, 왜인지 모를 물기가 있는 눈까지 그 사람을 이루고 있었다.
세찬 바람이 그 둘 사이로 지나갔다. 민현은 시린 추위에 그제야 자신이 그 사람을 빤히 쳐다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눈길을 걷으려 했지만, 그 순간 그는 눈가를 손으로 닦으며 몸을 추스르고 바로 옆 식당으로 들어갔다. 그도 친구들과 함께 왔나보다 하는 생각이 스치면서 민현은 왜 자신이 그렇게 모르는 사람에게 신경을 썼는지 의문이 들었다.
그렇게 바람이 시려 어딘가 시큼해진 마음을 달래고 있던 날, 그는 첫눈처럼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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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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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민현은 숙취에 몸을 일으키며 냉장고를 열었다. 바로 생수 한 통을 비우고 난 뒤 식탁에 앉아 몽롱한 정신을 깨우려고 했다. 벌써 해가 중천을 지나고 있었다. 이렇게 많이 잤었나. 해장으로 뭘 먹을지 고민하다가 문득 머리를 스치는 것은 전혀 상관 없는 것이었다.
뭐였을까, 그 사람은. 민현의 머리를 가득 채우고 있는 그 색은 하얀색이었다. 그냥 하얀색이 아니었다, 마치 첫눈처럼 반짝반짝 빛나면서도 만지면 포근할 것 같은 그 느낌의 흰 색. 물론 그 날 민현이 본 장면은 그와는 거리가 멀었다. 너무 차가워서 다가갈 수 없고, 얼어붙어 딱딱해져버린 흰색이었다. 왜 그는 그렇게 막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얼굴로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일까.
생각에 빠져든 것도 잠시, 그는 잠도 깰 겸 집안 청소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청소하고, 자다가 좀 놀고. 하지만 역시 종강한 대학생은 움직이기 싫은 법이었다. 민현은 다시 침대에 몸을 맡기고 눈을 감았다.
***
민현을 일깨운 것은 전화가 울리는 소리였다. 창문을 슬쩍 보니 벌써 해가 다 져서 어두워진 시각이었다. 과 친구들 중 하나일거라 생각하고 민현은 느릿하게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야 황민현, 너 시간 되냐?”
“또 술?”
“종강했잖아~ 언제 놀아?”
“어디 가게?”
“클럽!”
“나 할 거 많아.”
“뭐?”
“대청소 해야 해. 종강 기념으로.”
“아 또 그놈의 청소! 그냥 오늘 하루만 나와 주면 안 되냐?”
에휴. 그럼 그렇지. 민현은 알겠다는 대답을 남기고 전화를 끊었다. 애들의 고집을 꺾긴 힘들었다. 안 그러면 자취방까지 찾아와서 데려가려고 했겠지. 민현은 침대에 굴러다니던 옷 중 아무거나 집어 들고선 집을 나섰다.
***
민현은 이런 공간이 익숙하지 않았다. 이제 막 1학년이 끝난지라 많이 가보지 못한 것도 있었지만, 집돌이라 집에서 나가는 것 자체를 즐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람들 사이에서 춤을 추고 싶지는 않아서 그는 구석에 있는 테이블에 앉아 혼자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친구들이 즐기는 것을 보면서 그렇게까지 즐겁나 하고 의문을 가지면서 주변을 살펴보던 와중이었다. 그의 눈에 띈 것은 바로 순수한 흰색 – 흰 머리칼을 가진 남자였다. 식당 앞에서 마주쳤던 그 남자가 생각나 민현은 그를 유심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저 사람은 무엇을 하고 있는 거지? 민현은 자기도 모르게 술잔을 들고 그 사람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그 남자는 길다란 바 의자 위에 앉아 혼자 술을 들이키고 있었다. 다리가 바닥에 닿지 않아 허공에 흔들리고 있는 것이 귀여워 보였다. 민현은 옆자리에 앉아 바텐더에게 새 술을 주문했다. 그러고선 힐끗 옆에 있는 사람을 쳐다보았다.
희다. 그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머리부터 얼굴 그리고 신발과 바지 사이로 보이는 발목까지 모두 희었다. 그 와중에 귀는 옅은 빨간색으로 채색되어 있었다.
“흐..”
민현은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왠지 모를 편안함이었다. 그러고선 다시 그 남자를 쳐다보려고 할 때, 상대도 자신을 쳐다보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흠칫 놀랐다.
“왜 쳐다보세요?”
“네?”
“그쪽이 저 계속 쳐다봤잖아요.”
“아니.. 그..”
“저도 그거 한잔 주세요.”
남자가 가르킨 것은 민현이 새로 주문한 술이었다. 민현은 선뜻 술병을 건네주었다.
“성운이에요.”
“네?”
“하성운이요. 그쪽은요?”
“아.. 저는 황민현이라고 합니다.”
“이름도 잘생기셨네요.”
“네?”
민현은 당황하면서 자신을 성운이라고 소개한 남자를 쳐다보았다. 만난지 몇 분도 안 되었는데 벌써 휘말리고 있다니, 이 신기한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그는 갈피를 잡지 못했다. 민현은 잠시 자신의 술잔을 쳐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그쪽도 잘생기셨어요.”
“감사합니다.”
“그런데 혹시 저번에..”
민현은 식당 앞에서 성운을 마주쳤던 날을 기억했다. 그 날 왜 그렇게 눈을 맞고 서 있었는지 그는 알고 싶었다. 그 슬픈 눈의 사연을 말이다.
“어젯 밤에, 저 그쪽을 봤어요. 식당가에서요.”
“그래요? 어쩐지 익숙하더라구~”
“혹시 애인 있으세요?”
“아.. 없어요. 그쪽은요?”
“저도 없어요.”
“그렇구나”
“그런데, 왜 그렇게 눈을 바라보고 계셨어요?”
능청스럽게 술잔을 잡으려고 손을 뻗던 성운의 손이 잠시 멈칫했지만, 민현은 그를 눈치채지 못하고 계속 순진무구한 얼굴로 성운을 쳐다보았다. 성운은 헛기침을 몇 번 하더니 표정을 고치고선 민현을 웃는 얼굴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에이, 그냥. 눈이 오니까 예뻐서 본거죠~”
“심각한 얼굴이었는데..”
“지금 그게 클럽까지 와서 할 얘기야?”
갑자기 성운이 정색한 어조로 말을 꺼내 민현은 흠칫하고 말을 멈췄다. 성운은 바로 얼굴을 풀고 술이나 마시자면서 능청을 부렸지만, 민현은 자신이 괜히 말을 꺼냈나 싶어 더 조심스럽게 행동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민현은 왠지 이대로 가다가 술자리가 파토가 나면 더 이상 성운을 보지 못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민현에게 그 날 성운의 사정을 알고 싶은 이상한 집요함이 생기기 시작했다. 자신도 왜 이러는지 모르겠으나, 민현은 입을 재잘거리던 성운을 멈추게 하고 간절한 눈빛으로 성운에게 말했다.
“성운씨, 번호 좀 주세요.”
***
취한 친구를 택시에 태워 보내고 자신도 집에 가자마자 잠들어버리고선 눈을 뜨자마자 생각난 것은 자신이 성운의 번호를 땄다는 것이었다. 왜 달라고 하는지 묻는 성운의 말에는 ‘친해지고 싶어서’만 무한 반복했다. 하지만 그 말은 맞았다. 친해지고 싶었다. 그러고선 번호를 따자마자 민현은 술에 취해 비틀거리며 자신에게 다가오는 친구를 보고 서둘러서 친구를 데리고 클럽에서 나왔다.
“손가락도 작고 희었어..”
민현은 혼잣말을 하면서 성운의 번호를 쳐다보았다. 어쩜 번호도 이리 오밀조밀한 것 같은지.. 연락을 할지 말지 민현은 그대로 침대에 앉아서 30분간 고민하다가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정신 차렸다. 생각해 보니, 자신은 성운에게 번호를 주었던가? 어제는 술에 취한 상태여서 잘 기억이 안 났다. 번호를 딴 것도 충동적이었던 것 같고..
그래서 민현은 메신저로 메시지를 보냈다. 일단은 지르고 봐야지라는 생각이 이미 머리를 지배하고 있었다. 이상하게 민현은 성운에 관해서만은 충동적으로 행동하게 되는 것 같았다.
[성운씨, 안녕하세요. 어제 술 같이 마셨던 황민현입니다.]
정중한 말투로 한 글자씩 적어가고 전송버튼을 누르고 그는 그대로 폰을 침대에 집어 던졌다. 이렇게 정중한 말투라니.. 갑자기 후회가 밀려왔다. 완전 재미없는 사람처럼 보이면 어떡하지?
그때 폰이 지잉하고 짧게 울렸다. 민현은 그에 반응해 바로 폰에 무슨 메시지가 왔는지 확인했다. 성운이었다.
[??]
[아ㅋㅋ 그렇게 내 번호만 갖고 튀기야?]
[지금 일어났나보네]
민현은 그렇게 번호만 따고 서둘러서 나왔나 보다. 민현은 답장을 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잠시 성운의 말들을 곱씹어보면서 읽고 있었다. 성운은 자신의 허락도 없이 반말을 하고 있었지만 왠지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그냥 자신을 더 친근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아서 그냥 받아들였다. 그 때 민현이 보는 화면에서 새로운 단어들이 기존의 단어들을 밀어 올리고 등장했다.
[1사라졌는데 왜 답장 안해??]
[이거 읽씹이냐]
민현은 지금 성운이 지금 이 순간 폰을 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다시 정중하게 메시지를 보냈다.
[죄송해요. 지금 막 일어나서 정신이 없네요.]
[ㅋㅋ해장할래?]
“네?”
***
그렇게 육성으로 대답을 하고 같은 말을 메시지로도 보낸 민현은 성운을 기다리고 있었다. 멀끔하게 빗어 넘긴 머리에 무난한 청바지와 깔끔한 셔츠. 신경 써서 입고 싶었지만 해장이라는 목적에 옷차림이 과한 것 같아 민현은 사실 가디건을 벗고 나온 옷차림이었다. 핸드폰을 보다 길거리를 기웃거리는 민현은 주변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에 충분했는데, 민현은 그걸 신경 쓸 겨를도 없이 성운이 올 것 같은 길만 주시하고 있었다.
“야아~! 황민현!!”
멀리서부터 하성운은 눈에 띄었다. 황민현을 발견하자마다 그 높은 목소리로 크게 불러대면서 방방 뛰어오고 있었다. 민현은 그 소리에 고개를 돌려 성운에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왜 이렇게 성운만 보면 기분이 좋은 것인지 그는 자각도 못하고 있었다.
“왔어요?”
“야 너도 그냥 반말 써. 나만 쓰니까 어색하잖아~”
“그럼.. 알았어.”
“나 좋은 곳 알아 저쪽으로 가자.”
민현의 손을 잡아 이끄는 성운은 누가봐도 이제 막 집에서 나온 차림이었다. 회색 츄리닝 바지에 회색 후드집업이라니, 어떻게 깔맞춤을 입어도 이렇게 귀엽게 입는 거지, 하고 민현은 생각하고 있었다. 민현은 성운에게 이끌리면서 자신이 성운의 생각만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에? 뭐야, 닫혔잖아!”
성운은 여전히 민현의 손을 잡고 있었고, 민현은 그 손을 바라보고 있었다. 성운이 추천한 식당은 오늘 휴일인지 닫힘 팻말을 흔들며 서 있었다. 옆에서 툴툴거리는 성운을 보면서 민현은 성운을 어딘가에 넣어서 간직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딘가에 간직해?’
“성운아.”
“응?”
민현은 굳게 결심한 듯 성운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고, 성운은 자신을 내려다보는 민현의 눈을 마주치고선 궁금증 어린 얼굴로 쳐다보았다.
“우리 집에 가서 라면 먹을래?”
***
“ㅎㅎㅎㅎ. 누가 아침부터 라면 먹을래를 시전하냐?ㅎㅎㅎㅎ”
성운은 컵라면을 한 젓가락 집은 채로 웃고 있었다. 민현은 성운의 말에 귀가 빨개져 고개를 숙이고 애꿎은 라면만 휘젓고 있었다.
“나 진짜 깜짝 놀랐어~ 뭐야 나 유혹하는 것도 아니고ㅋㅋㅋ”
민현은 조용히 라면 국물을 들이켰고 성운은 그 앞에서 재잘거리면서 면을 집어 흡입하고 있었다. 둘 다 빠르게 라면을 다 먹자마자 민현은 습관대로 상을 치우기 시작했다. 자연스럽게 청소를 하고 있는 민현을 쳐다보면서 성운도 거들었다.
“너 되게 깔끔하게 산다.”
“맞아.”
“혼자 자취하는 거야?”
“응.”
“자주 놀러 와야 겠네.”
“그래.”
“원래 그렇게 말이 없어?”
“응.”
“야, 우리 서로 안 지 이틀밖에 안 됐다. 근데 벌써 이렇게 네 집까지 오고.”
“...”
민현은 대답이 없었다. 그러네. 솔직히 이틀도 아니지. 어제 통성명 하고 오늘 우리 집에서 해장하고. 만 하루 정도인가. 그럼 뭐 어때. 몇 년 사귄 친구보다 민현은 성운이 편했다. 툴툴거리면서도 남을 신경써주는 것 같았고, 말을 많이 하는데 예쁘게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민현이 먼저 친해지고 싶다고 했는데 이렇게까지 응해줬다.
“내가 먼저 친해지고 싶다고 했잖아.”
“맞아. 처음엔 당황했는데, 뭐, 하루 만에 친구할 수도 있지.”
“난 좋아.”
“나도 좋아. 성격 잘 맞는 것 같아.”
성운은 그렇게 말하고선 민현의 침대에 풀썩 앉았다. 푹신한 듯 침대를 몇 번 치다가 민현을 쳐다보았다. 마침 설거지를 마친 민현은 수건으로 손의 물기를 털어내고 있었다. 그러고선 자신도 성운의 옆에 앉았다. 민현은 사실 아까부터 들떠 있었다. 성운을 볼 때마다 들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서는 민현은 확신했다. 성운은 그냥 친해지고 싶은 사람뿐인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그리고 자신도 알고 있었다. 이렇게 빠르게 친해진 것도 신기하지만, 더 나아가면 성운도 부담스러워 할지도 모른다는 것을. 그런데도 그는 참을 수가 없었다. 지금 이렇게 터질 듯한 마음을 어떻게 가라앉혀야 하는지도 모르겠고, 눈 앞에 성운이 앉아 있으니 바로 말해버리고 싶었다. 그래서 민현은 그렇게 운을 띄었다.
“좋아해요.”
“응?”
“첫 눈에 반했어요, 성운씨에게.”
***
민현은 푹 가라앉았다. 이제는 해가 지고 저녁이 다가와 어둑해졌지만 민현은 불을 키지 않았다. 그냥 아무것도 하기 싫었고 그냥 가만히 앉아있고 싶었다. 방 안을 비추는 것은 핸드폰 빛뿐이었다. 아침에 성운에게 고백을 하자마자 돌아온 것은 당황한 성운의 얼굴이었다. 심지어 어색하게 존댓말로 해버렸다. 왜 주체하지 못했을까하고 민현은 자신의 말을 후회하기 시작했다.
‘민현아, 미안해.’
‘...’
‘나 갈게.’
성운은 민현에게 첫사랑이었다. 첫 눈과 함께 내려와 민현의 첫 눈에 들어온 사람. 민현이 첫 눈에 반한 사람. 그런 사람에게서 민현은 별로 듣고 싶지 않은 말을 들었다. 미안해. 왜 미안한걸까? 오히려 미안한 것은 자신이었다. 괜히 성운을 불편하게 만들어버렸다. 다시는 만나지 못하는 걸까? 첫 만남부터 고백까지 민현은 운명을 만났다고 생각했다. 목소리, 몸짓, 성격, 말투, 그 흰 느낌마저 모두 민현을 가득 채워 목까지 차고 넘쳤는데, 지금은 한 방울씩 흘러나가고 있었다.
창문 밖을 쳐다보니 어느새 쌓였던 눈들은 녹아 없어지고 있었다.
***
그렇게 크리스마스도 지나고 새해가 다가오고 있었다. 크리스마스는 친구들이 톡방에서 메리솔크를 보내면서 자기들끼리 웃고 떠들며 지나갔다. 사실 그런 말들은 민현에게 아무 감흥이 없었다. 중요한 것은 그런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친구들이 술 한 잔 하자고도 많이 불러냈지만 그럴 때마다 민현은 가라앉은 목소리로 거절했다. 친구들도 힘 없는 민현의 모습을 보면 모두 수긍하고 발을 돌렸다.
며칠 동안 민현은 무기력하게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이 기분을 떨쳐내고 싶었지만, 매일 침대 속에서 폰을 보며 의미 없는 실시간 검색어들을 쳐보고 있었기에 별 큰 변화는 없었다. 새해가 다가오니 인터넷에서는 이를 축하하는 문구들이 많이 붙어있었다. 그래봤자 큰 차이도 없을 텐데, 왜 사람들은 이렇게 난리일까. 12월 31일 저녁에 민현에게 든 생각이었다. 그래도 호들갑이라도 떠는 사람구경이라도 하면 기분이 나아질까, 민현은 얇은 코트 하나를 걸치고 밖을 나섰다.
큰 광장 주변에는 사람들이 카운트다운을 위해 모여들고 있었다. 민현은 이런 곳을 와본 것이 막 성인이 되어 20살로 넘어가는 해 말고는 없었다. 사람들 사이를 헤집고 들어가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에 그는 구석에서 멀찍이 서서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사람들이 움직이는 모습은 느릿한 달팽이가 흘러가는 것 같았다. 춥고 어두운데 사람들은 굳이 또 몇 개 안 되는 불 빛 사이에서 저렇게 모여들고 있다는 것이 새삼 신기했다.
그때 민현의 눈에 띈 것은 흰 머리칼이었다. 그것은 민현이 잊을 수 없는 색이었다. 갑자기 두근거리고 긴장되는 마음에 민현은 냅다 그 흰 색을 향해 뛰어갔다. 카운트다운은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물론 그 소리는 민현에게 들리진 않았다. 그저 멀어져가는 흰 머리칼이 더 멀어지지 않도록 노력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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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조금만 더 가까이 가면 닿을 것 같은데! 민현이 사람들을 헤집고 들어가면서 죄송합니다를 연발할 때, 그 작은 생명체는 사람들 사이를 자유롭게 휘젓고 다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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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 저 멀리서 흰 머리칼이 멈춘 것을 보았다. 민현은 그 때 그 뒷모습을 보고 확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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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이 성운이라는 것을.
와!! 새해다!!
“하성운!”
여기저기서 새해를 축하하는 탄성이 흘러나왔지만, 민현의 입에서 나온 것은 하성운이라는 이름이었다. 그 소리를 듣고 놀란 성운 또한 새해를 축하하는 말을 할 수는 없었다. 그는 민현을 발견하고는 놀랐는지 눈을 크게 뜨며 민현을 바라보고 있었다. 민현은 뒤돌아 자신을 보고 있는 성운을 보며 숨을 헐떡였다. 이렇게 뛰어와서 드디어 만나다니. 그런데 민현은 막상 성운을 불러놓고 자신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망설였다.
“하성운..”
“왜..”
“너가 없는 동안.. 내가..”
민현은 벅차올라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너무 머릿속이 복잡했고,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민현이 말을 못하자 성운이 입을 열었다.
“또 이렇게 만나네.”
우리 운명인가 봐. 인연이 있나 봐. 자꾸 이렇게 만나는 것을 보면. 민현은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자신이 꿈꾸던, 로망을 가지던 사랑과 지금의 성운은 같았다. 그런데 두려웠다. 또 거절당할까봐. 첫사랑은 안 이루어진다는 그런 속설이 떠올랐다. 그런데 말하고 싶은 걸 어떡해.
“하성운..”
“응?”
“너 없는 동안, 나 너무 힘들었어. 정말 며칠도 안 됐는데,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더라. 나 진심으로 네가 좋은가 봐. 네가 너무 좋아, 성운아.”
“...”
“너를 처음 본 날부터 네 생각밖에 안 했어. 너의 흰 색이 내 머릿속을 점철하더라. 다른 생각을 할 수가 없더라. 다른 생각을 해도 다 너로 가더라.”
민현은 말을 다 하고 성운을 쳐다보았다. 성운이 무슨 대답을 해 주길 바라는 것은 아니었다. 그냥 이렇게 다 쏟고 싶었다. 한 번 더 성운을 보고 말을 하고 싶었다. 잠시 기다렸지만 성운은 말이 없었다. 민현은 이제 됐다고 생각했다. 속이 후련했고, 후회는 없었다. 조금 슬펐을 뿐.
“그럼.. 이제 나 갈..”
그때 몸을 돌리려는 민현의 손을 성운이 홱 잡아채었다.
“나도 네가 좋아.”
“어?”
얼떨떨했다. 예상치 못한 답변이 나와 어떻게 반응해야할지 몰랐다.
“그날 거절한 건, 무서워서 그랬어. 이렇게 갑작스러운 만남으로 시작하면 더 가벼운 관계가 될까봐 걱정했어. 사실 네가 나 처음 봤다는 그 날, 나 다른 사람한테 차인 날이었어. 그래서 너랑 보낸 시간이 더 따스했어. 그래서 더 소중하고, 즐거운 시간이었다. 마치 하늘이 나에게 위로해 주러 보낸 사람 같았거든.. 그래서 아무렇게나 시작하고 싶지 않았는데, 그..”
“이제 됐어요.”
“어?”
내가 뭘 해야 할지 알았으니까.
민현은 성운을 꼭 끌어안았다. 성운이 곧 울먹거릴 것 같은 얼굴로 민현은 쳐다보았다. 꼭 끌어안으니 품 속에 성운이 들어왔다. 성운은 고개를 내려다보면서 성운을 이리저리 살폈다. 어느 각도에서 봐도 이렇게 사랑스럽고 맑은 지, 민현은 아까부터 하고 싶은 것을 시도했다. 성운은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민현의 얼굴에 눈을 질끈 감았다. 입술에서 뭔가 느껴지자 성운은 긴장이 풀렸다. 이내 풀어진 눈으로 민현의 움직임을 받아들였다. 둘은 서로의 달콤하면서도 끈적이는 젤리를 먹는 느낌이었다. 그렇게 한참을 그들은 서서 서로의 애정을 확인했다.
민현은 뭔가 차가운 것이 얼굴에 닿는 것이 느껴졌다. 눈이었다. 하얗고 포근한 눈 한 송이. 그것은 첫 눈이었다. 새 해의 첫 눈. 사람들은 겨울이 다가오면서 12월쯤에 오는 눈이 첫 눈이라고 말하겠지만, 민현은 지금 새 해를 맞이하면서 오는 것이 첫 눈이라고 지금만큼은 굳게 믿고 싶었다. 자신의 앞에 있는 사람이 첫 눈과 함께 왔으니까.
어서 와요, 나의 첫사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