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으로 잘 부탁해.
Written by 강군
시끄럽다.
안그래도 시차 적응 때문에 죽겠는데 잠을 잘 수가 없다. 도대체 왜 이 집이 좋은 집인지, 비싼 집인지 나는 정말 1도 모르겠다.
조만간 할아버지께 얘기해서 이사가고 말리라 또 한번다짐하며 성운은 오늘도 말아쥔 주먹을 부들거릴 뿐이었다.
간간히 들리던 소음의 원인을 알게 됐다. 옆 집에 유명한 연예인이 산단다. 그의 팬들이 꺅꺅대는 소리였다. 도대체 저들은 뭐하는 사람들일까. 밥도 안 먹고 잠도 안 자나? 학교 안 가? 회사 안 다니냐구.
역시 이 집은 좋은 집일리가 없다고 성운은 생각했다. 이 정도 소음이면 보안업체에서 뭐라도 해야 되는 거 아닌가, 아니면 입주민 회의라도 해서 그 연예인인지 뭔지를 쫓아내던지. 이 망할놈의 슈퍼스타 이웃사촌 때문에 자신이 왜 이런 고초를 겪어야 하는지 성운은 정말이지 얼굴 한 번 보지 못한 이에게 처음으로 저주를 퍼부었다.
다른 나라에서만 십 몇년 살았더니 제가 그나마 어렴풋이 기억하는 한국 연예인이라고는 하나같이 옛날 사람들 취급이고, 아무리 잘 나가는 연예인이라고 해봤자 한국에 들어온지 얼마 안된 성운이 알 리 만무했다.
좀비처럼 침대에 누워 어떻게 하면 이 집을 벗어날 수 있을까, 아님 옆 집이 먼저 좀 나가게 만들 수 있을까 고민하던 것도 잠시 오늘은 좀 조용해진 바깥 소음에 성운은 어느새 까무룩 잠이 들었다.
이사 좀 보내달라 떼쓰러 갔다가 할아버지께 잔소리 폭격을 맞은 성운은 정신도 가출, 며칠간 수면 부족으로 육체도 가출, 오늘은 정말이지 딱 파김치 상태였다.요 며칠 난데없는 경영수업을 속성으로 계속 받아댄 탓에 술을 마신 것도 아닌데 절로 몸이 휘청댔다. 엘리베이터를 타자마자 층수 버튼만 겨우 누르고 한쪽 벽에 몸을 기댔다. 문이 닫히는 것도 채 보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가 인기척 소리에 겨우 부스스 눈을 떴다.
방금 전 파김치처럼 늘어졌던 몸과 천근만근 무거웠던 눈커풀이 번쩍 뜨일 정도로 잘생긴 남자가 성운의 옆으로 섰다. 한국에 들어와 김비서와 할아버지 말고는 만날 일이 없었던 성운에겐 오랜만에 좀 과한 눈요기였다.
우와.. 뭐야 저 얼굴은. 진짜 너무나 너무하고 엄청나게 엄청나다.
감탄이 절로 나오는 얼굴과 피지컬, 뒷모습 마저도 완벽한 그 남자를 멍하니 보다가 성운은 번뜩 잠시 잊고 있던 존재가 떠올랐다.
맞다! 그 연예인!!! 이름이 뭐더라? 황, 뭐였는데..
찔러도 피 한방울 안 나올것 같은 김비서에게 어렵게 얻어낸 정보였는데.. 다른 걸 하도 머리에 급작스럽게 집어넣은 탓에 그 이름이 도무지 기억나지 않았다.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폰을 꺼내들고 검색사이트에 ‘황’ 이란 글자 하나를 막 쳐내려가던 찰나, 고요한 엘리베이터 안에 낯선 음성이 들려왔다.
- 분명 연세 드신 분이라 했었는데.. 돈 많은 집 자식이였나? 이러려고 집 사달라 한 건 집에서 아나 모르겠네.
- .. ???
혼잣말이라 하기엔 분명 데시벨이 좀 높아 분명 저 들으라고 한 말임을 알아챈 성운이 검색하려던 손을 멈추고 남자를 스윽 쳐다봤다. 저를 내려다보는 시선 속에 경멸과 악의가 그대로 느껴져 성운은 방금 전 가시돋힌 말의 의미를 찾으려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그러니까 저 잘생긴 놈이 지금 날.. 뭐 스토커 같은 취급을 하는건가.
생각보다 쉽게 결론에 도달하자 성운의 미간이 잔뜩 찌푸려졌다.
잘생긴 건 알겠는데 자존감이 아주 하늘을 찌르시네.
어이가 없어서 성운이 헛웃음을 내뱉자 이번엔 그 남자 쪽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 이봐요. 지금 그거 나 들으라고 하는 말입니까?
- 그럼, 여기 그 쪽 말고 누가 있는데요?
- 푸핫.. 하하하.. 웃기는 남자네. 내가 누군줄 알고 그딴 취급이지? 당신, 나 알아?
- 알리가 있나. 이런 사람이 한둘도 아닌데. 나는 당신을 몰라도 당신은 나를 알잖아?
- 내가? 내가 당신을 어떻게 알아? 보자보자하니까 진짜.. 이 사람이..
- 그럼 내 이름은 왜 검색하고 있는데?
- 뭐???
발끈해 따지려던 성운의 말을 끊으며 남자가 고갯짓으로 성운의 손에 들린 폰을 가리키며 따지듯 되물었다. 그제야 성운은 깨달았다. 엘리베이터에 올라탄 남자는 타고 나서 자신의 층수 버튼을 누르지 않았다는 것. 그리고 같은 층에는 두 집씩 있으니 한 집은 성운의 집, 나머지 한 집은 그 망할 놈의 연예인이 사는 집. 그렇다면 이 남자가 그 망할 놈의 연예인이라는 것까지.
제가 한국에 없는 사이 한국 남자의 외모 평균이 엄청 높아졌다기엔 말이 안되는 얼굴이긴 했다. 어쩐지 더럽게 잘생겼다고, 그러고보니 머리부터 발끝까지 아주완벽히 세팅된 모습이 그제야 눈에 들어왔다. 잘생긴 얼굴에 눈길이 쏠려 다른 것까진 자세히 보지 못했으니까.
성운의 얼굴이 점차 깨달음으로 바뀌는 것을 확인한 남자가 그제야 정색하고 있던 표정을 풀었다.
그딴 취급을 받은 게 억울하고 기분 나쁘지만 충분히 그럴 수도 있겠다 백번 양보하며 생각한 성운이 아까보단 좀 부드러운 말투로 입을 열었다.
- 이봐요. 좀 오해가 있는거 같은데 저는 그 쪽 생전 처음 보는 얼굴이구요. 지금 이건 제 옆집에 하도 대단하신 분이 사신다길래 검색 해보려던 거..
‘ XX 층 입니다.’
그 순간 들려오는 안내음성과 함께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열심히 설명하고 있는 성운을 두고 남자는 더 들을 것도 없다는 듯 걸음을 옮겼다.
뭐, 저런.. 싸가지.. !!!!
극도의 황당함에 댕하니 얼어 붙어 버렸던 성운이 금세 닫히려는 문을 열고 뒤따라 급히 내렸다.
- 이봐요!! 사람이 말을 하는.. 어디갔어!!!
내리자마자 따지려고 손을 휙 올리던 성운의 목소리가 카랑카랑하게 복도를 울렸다. 이미 남자는 자신의 집으로 종적을 감춘 뒤였다.
- 아니!! 뭐 저런게 다 있어!!! 잘생기면 다냐!!
뒤늦게 발을 쿵쿵 굴리며 성운이 씩씩댔다. 당장 녹아내릴 듯 피곤에 쩔어있던 몸이 화르륵 열이 올랐다. 잘생긴 얼굴에 그저 잠시 감탄한 댓가가 이딴 스토커 취급이라니. 차라리 첫눈에 반해 들이댔다가 까여도 이보단 덜 쪽팔리고 덜 화났을건데!
자기도 모르게 말아쥔 주먹에 부들부들 힘이 실렸다.
이사가고 말거야.. 이사가고 말겠어....
굳게 닫힌 문을 노려보며 성운은 한참이나 복도에서 중얼거렸다.
집에 들어온 민현은 씩씩대며 발을 동동 구르던 성운이 자신의 집으로 사라질 때까지 인터폰으로 고스란히그 모습을 지켜봤다.
반응을 보아하니 딱히 그의 말이 거짓말 같진 않았지만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맘은 쉬이 지워지질 않았다. 그러기엔 그동안 당한 것들이 어마어마해서.
앞이 보이질 않는 몇 년을 버텨낸 건 그저 꿈을 이루기 위해서 였다. 가수의 꿈을 이루고 나면 행복할 줄 알았지만 그 행복은 오래 가지 못했다. 감당 못할 정도로 행복한만큼 그 이면엔 역시 감당 못할 정도의 어둡고 힘든 일들도 많았다.
지극히 개인주의인 민현의 성격상 유독 참을 수 없었던 것은 사생팬이라는 이름 하에 삐뚤어진 애정을 표현하는 이들이었다. 게 중엔 돈 많은 집 자제들도 많아서 이따금 이런 식으로 민현에게 접근한 일들이 꽤 있었더랬다. 그래서 이번에도 그런 것들 중 하나라고 생각했다.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치자마자 저를 알아본 듯한 눈빛, 그리고 바로 제 이름을 검색하려던 그 폰 화면을 본 순간 역시나 하고 감정이 치밀어올라 참지 못했다.
그런데 반응이 조금 남다른 남자에 민현도 조금 당황한 터였다. 요새 새 앨범 준비로 쌓였던 극도의 스트레스가 괜한 곳에 터져나가 스스로 한심했다.
자신이 몸 담고 있는 곳에서 소문이란게 얼마나 무서운 곳인지 잘 알고 있음에도 답지않은 짓을 했다. 다행인 것은 성운은 그럴만한 인물은 아닌 것 같아 그나마도 다행이었다.
가만히 생각에 잠겨 성운을 떠올리던 민현이 별안간 풉, 하고 웃음이 터졌다. 경계심을 빼고 생각해보니 인터폰으로 지켜본 성운의 모습이 퍽 귀엽게 느껴진 탓이었다.
발을 동동 구르며 씩씩대다 빨개진 두 귀 끝이, 작은 체구에서 나오던 우렁찬 목소리가, 굳게 닫힌 제 집 문을 노려보던 하나도 무섭지 않은 커다란 두 눈이. 습관처럼 경계하긴 했지만 다른 상황에서 만났더라면 분명 저도 다른 반응을 보였을거라 생각했다.
엘리베이터에 들어선 순간 지쳐있던 민현도 성운과 마찬가지로 눈이 띄이고 조금 놀라긴 했으니까. 꾹꾹 숨겨왔던 제 정체성이 흔들릴만큼 성운은 정확히 제 취향의 집약체였다.
그럼에도 확실히 확인 해 둘 필요는 있을 것 같아 매니저에게 메세지를 남겨놓고 곧장 욕실로 향했다.
시원하게 씻고 나오니 스트레스로 복잡했던 머리가 조금 정리가 되는 듯 했다. 사실 씻는 동안에도 계속 떠오르는 성운의 잔상에 몇 번 피식, 피식 웃음이 새던 민현이 나오자마자 제 폰을 찾아들었다.
[ 형! 알아봤는데 그 집 소유주가 XX그룹 회장님이시래요! 지금 살고 있는 사람은 손자구요. 이름있는 집 사람이니까 우려하시는 일은 없을 것 같은데요.]
[ 더 알아보니까 외국에 오래 살다와서 한국 연예인은 잘 모를거라던데. 혹시 무슨 일 있으셨던 건 아니죠?]
[ 형! 바쁘세요? 정.. 걸리시면 이사할 집 알아볼까요?]
연달아 와있는 매니저의 메세지를 확인한 민현이 머리를 털던 수건을 내려놓고 답장을 써내려 갔다.
[ 아니, 괜찮아. 씻느라 못봤어. 수고했다. 내일보자-]
전송된 걸 확인한 뒤 다시 폰을 뒤집어 내려놓은 민현이 제 침실로 향했다. 아주 조금 남아있던 경계심마저 다 내려놓고 나니 자꾸만 웃음이 더 새어나왔다. 잔상처럼 남은 성운의 모습이 오랜만에 절 웃게 만들어줌에 문득 고맙다고 생각했다.
다음에 만나면 정중히 사과해야겠네.
다시 한번 성운을 떠올리며 생각을 정리한 민현이 아주 오랜만에 푹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아!! 진짜 생각할수록 열받네.
그 시각 성운은 녹초가 됐던 몸이 언제 그랬냐는 듯 화르륵 불타올라 분노의 샤워를 하고 나왔다. 그럼에도 내리지 않는 열기에 냉장고에서 병맥주를 따 벌컥벌컥 들이켰다. 속이 탔다. 아주아주 많이.
이사 가고 말거야. 이사 가고 말겠어.
같은 말을 중얼 거리며 성운이 노트북을 켰다. 아까 생각난 그 이름을 한자한자 꾹꾹 분노를 담아 쳐내려가며 남은 맥주를 마저 넘겼다.
황민현... 적을 제대로 알아야지! 할아버지께 브리핑 수준으로 너의 모든 것을 까발려 기필코 이사가고 말거야..
오랜만에 불타오르는 승부욕에 휩싸인 성운이 자세를 고쳐 잡았다. 이름 석자에 셀 수 없을만큼 붙은 여러 정보들을 드르륵, 마우스를 굴리며 계속해서 클릭했다. 그리고 그 밤, 성운은 이 짓을 시작한 자신을 원망하고 후회했다.
화가 나서 찾아보기 시작한 민현에 대한 것들은 어째서인지 성운의 화를 돋구긴 커녕 점점 가라앉히게 만들어주었다.
잘생기긴 더럽게 잘생겼네. 노래는 못하겠지.
어라? 목소리가 꽤 좋은데. 그래봤자 립싱크겠지.
라이브 잘하네.. 아아. 연기도 했어? 발연기 구경이나 할까.
뭐야.. 이 장면 너무 슬프잖아. 엉엉...
분명 원수 취급을 하며 이사를 주문처럼 중얼거리던 말도 어느새 쏙 들어가고 성운은 그 날 황민현에게 그렇게 빠져버렸다. 아무리 자신이 얼굴에 미치는 스타일이라지만 한국에 오자마자 만난 첫 남자가 하필 또 연예인인게 실수라면 실수라고 성운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 첫 만남 이후, 서로 바쁜 스케줄을 소화하느라 단 한번 마주치지 못했던 두 사람이 다시 만난 건 예상외의 장소였다. 속성 경영과외를 마치고 회사에 들어온 성운이 맡은 패션 브랜드에 이번 신규 모델로 민현이 발탁되었다.
그래서 성운은 언젠가 만날 것을 예상하던 상태였지만 막상 또 그 날이 오자 떨리는 맘은 어찌할 수 없었다. 그 뒤로도 꾸준히 민현의 활동 영상들을 찾아보던 성운인지라 이미 저도 모르게 마음이 꽤 깊어져 있었다. 그저 팬심이라기엔 지극히 주관적인 마음이 강해서 이미 제 감정에 대한 결론도 다 내려놓은 상태였다. 다시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치면 다른 인상을 심어주고 싶었는데 그게 처음이자 마지막이고, 이런 관계로 다시 만나게 될 줄은 몰랐다.
이럴 줄 알았으면 첫 인상 좀 좋게 남길걸.
그 망할 꺅꺅대는 팬들때문에 괜히 그에게 반감을 드러낸 것이 계속해서 맘에 걸렸다. 얼마 전까지도 망할 이웃사촌에서 사생에게로 쉽게도 넘어간 원망의 대상이 더 저주스러워지는 순간이였다.
한창 진행 중인 화보 촬영장 앞에서 성운이 머뭇대자 동행한 팀장이 슬쩍 눈치를 보며 조심스레 물어왔다.
- 저.. 본부장님..?
- 네, 네???
- 들어가셔야 하는데.. 혹시 뭐 불편하신 거라도..
- 아! 아뇨! 아닙니다.
- 그럼 들어가시죠. 마지막 촬영 컨셉은 본부장님이 내신 의견이라 아마 아직 진행 전일겁니다. 직접 보시고 싶으시다 했잖아요.
- 아.. 제가 그.. 랬었죠..
- 넵! 그럼 들어가시죠!
쓸데없이 패기 넘치는 팀장이 제법 큰소리로 문을 열자 안에서 한참 진행중이던 이들의 시선이 단번에 둘에게 꽂혔다. 성운의 등장에 외부진행 업체 팀장이 후다닥 달려와 인사하고 그 인사를 어색하게 받은 성운이 뒷머리를 갈작이며 고개를 들자 잠시 멈춘 촬영장 속 민현이 고개를 기울여 문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잘못한 것도 없는데 급히 제 손을 들어 얼굴을 가린 성운이 업체 팀장의 안내로 촬영장 뒷 편에 위치한 모니터 앞으로 자리를 옮겼다.
팀장님 인사 필요없으니까 스탭들 하던 거 하라고 해주세요.
제발.. 이란 뒷 말은 목 뒤로 넘긴 채 긴장한 성운이 딱딱한 어투로 말하자 광고주의 심기를 건들이지 말자는 신조를 가진 업체 팀장이 서둘러 계속 하란 제스처를 보냈다. 촬영은 다시 재개되었고 연신 터지는 셔터음과 조명아래 민현이 다시 집중했다.
그제야 제게 쏠린 모든 시선들이 거두어진걸 확인하고 성운이 작게 숨을 내쉬었다. 양 팀장의 설명을 들으며 모니터를 통해 민현의 모습을 실시간으로 확인하던 성운은 저 세상 잘난 남자를 가만 놔둘리 없는 팬들의 마음을 격하게 이해할 지경이었다. 그만큼 멋짐을 뛰어넘어 완벽했다. 저 자리에 오르기까지 그가 얼마나 노력했는지 이제 성운도 빤히 다 알고 있어 그런 팬들의 애정이 점점 삐뚤어짐에 상처받고 제게 날을 세우던 그 때 그 모습을 떠올리자 새삼 애잔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오롯이 민현에게 집중한 성운의 모습에 속마음까지 알길없는 양 팀장은 새로온 본부장의 프로패셔널 함에 고갤 끄덕이며 인정 중이였지만, 성운은 민현의 프로패셔널 함에 두번 치여 죽었다는 말을 실감 중이었다.
마지막 촬영 전, 준비를 하고 있던 민현에게 매니저가 다가왔다.
새로 부임한 본부장님이 직접 오셨다는데 인사 하셔야 되지 않을까요?
매니저에 그 말에 민현은 바로 직감했다. 성운은 민현이 자신을 보지 못했을거라 생각했지만 민현은 똑똑히 보았다. 닮은 모습에 좀처럼 눈을 떼지 못해 성운이 자리에 앉기까지 계속해서 지켜보고 있었으니까.
아까 잘못 본게 아니였구나.
이 패션 브랜드가 어느 그룹 소유인지 대한민국에 모르는 사람은 없기에 아까 문을 열고 들어오던 그 작은 인영을 보고 혹시나 했다. 그 이후로 매일같이 생각하던 그의 모습이 이젠 거의 각인처럼 지워지질 않아 너무 닮은 모습에 눈을 떼지 못했던건데 맞다는 걸 확인하자 어쩐지 또 비실대고 웃음이 새어 나올뻔 했다.
웃기게도 그 이후로 단 한번 마주치지 못했는데 여전히 성운의 모습은 선명히 남아있었다. 엘리베이터 문에 지친 듯 기대있던 하얗고 작은 그 남자가. 제 무례함에 억울하고 분해 귀가 새빨개진채 카랑카랑 소리치던 그 남자가. 그 이후로 보지 못해 텅빈 엘리베이터를 볼 때마다 아쉬움을 삼키게 만들었던 그 남자. 그런 그를 여기서.. 이렇게 마주칠 줄이야.
평소 이런 인사치레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민현임을 알기에 눈치를 보고 선 매니저의 푹 꺼진 어깨를 어느새 준비를 마친 민현이 일어나 툭 치며 앞장섰다.
가자. 광고주가 오셨는데 당연히 가서 인사 드려야지.
- 안녕하세요. 황민현입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군더더기 없는 멘트와 바른 자세로 숙인 예의 바른 인사. 매니저와 함께 성운 앞에 선 민현의 행동에 양 팀장이 앞다퉈 성운을 소개하는데 갑자기 들이닥친 상황에 당황한 성운은 그대로 얼어붙었다.
인사를 받고도 멍하니 앉아있던 성운에 양 팀장이 본부장님? 하고 부르자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일어나 성운이 큼큼, 목을 가다듬었다.
처음 만난 척, 아무렇지 않은 척, 마인드 컨트롤을 하고 민현에게 제 손을 내밀었다.
- 네. 반가워요, 황민현씨. 하성운이라고 합니다.
다행히 떨리는 마음만큼 떨리지 않는 성운의 손을 덥썩 마주 잡은 민현이 성운을 내려다보며 살풋 미소지었다. 처음 만났을때와 다른, 그 언젠가 영상 속 민현처럼 다정한 그 얼굴에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 하던 성운의 멘탈이 단번에 와장창 깨져버렸다. 겉으로는 티나지 않는 그 미묘한 변화를 알아차린 건 민현뿐이었다.
귀 끝이 붉게 달아올라있는 성운을 보며 민현은 한번 더 직감했다. 씩씩대며 붉히던 그 때의 귀 끝과는 전혀 다른 느낌이란 걸.
평소에도 촉이 남달라 늘상 예민한 취급을 받던 민현은 맞잡은 손에서 전해오는 성운의 작은 떨림을 느끼며 꽤 오래도록 손을 흔들었다.
오늘 어떻게 시간이 갔는지도 모를만큼 멘탈이 무너진 성운은 집에 도착해서도 한참을 멍하게 앉아있었다.
마지막 촬영까지 완벽했던 민현을 떠올리며 헤벌쭉 했다가, 마주잡았던 고운 손의 감촉이 생생히 느껴져 부르르 몸을 떨었다.
와아.. 나 미쳤다. 이렇게 금방 빠질 일이야? 싸가지 없다고 바락댈때는 언제구. 진짜 하성운 쉽다, 쉬워.
이제는 다른 의미로 심각하게 이사를 해야 되는거 아닌가 싶을만큼 성운은 다시 만난 민현에게 더는 헤어나올 수 없음을 느꼈다.
하여간에 잘생긴 것들은 너무 위험해. 건강에 해로워.
불규칙하게 뛰어대는 제 심장을 부여잡고 숨을 고르던 성운이 멍하니 앉아있던 몸을 일으켜 부산스럽게 움직였다. 콩콩 제자리에서 뛰어대며 운동해서 뛰는거다, 숨차서 뛰는거야. 중얼거리면서.
딩동 -
슬금슬금 삐질대며 땀이 나올 즈음 별안간 울리는 초인종에 놀라 성운이 쿠당탕 소리를 내며 넘어졌다.
누가 올 일이 없는 집인데.. 더구나 이 시간에..?
쿵 찧은 엉덩이를 문지르며 성운이 인터폰으로 걸어갔다. 인상을 찌푸리다 화면을 확인한 순간, 성운은 제 입을 두 손으로 급히 틀어막았다.
히익!!! 뭐, 뭐.. 왜... 여기에..
뒷걸음질 치며 제가 본 게 맞나 몇번을 확인하던 성운이 땀에 젖은 머리를 대충 쓸어 넘기고 급히 현관으로 걸어갔다. 현관 앞에 달린 거울을 보며 잠시 문을 열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는데 이번엔 초인종이 아닌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현관 앞에 서있던 성운이 한번 더 깜짝 놀라 우당탕 소리를 내며 뒷걸음질 쳤다.
이미 제가 안에 있다는 것을 눈치챘을만큼 큰소리라 성운은 비주얼은 포기하기로 하고 조심스레 다시 문 앞에 섰다. 후우- 하고 깊게 뱉은 숨소리와 함께 잠금 장치를 해제하고 빼꼼 문을 열었다.
아까 마지막 컨셉 착장 그대로 민현이 웃으며 눈인사를 했다. 겨우 붙들었던 멘탈이 다시 깨지기 전에 성운이 가까스로 표정관리를 하며 입을 열었다.
- 민현씨가 여긴 어쩐 일로 오셨어요?
- 본부장님 뵈러 왔죠.
- 네? 저를 왜요?
- 음.. 사과드려야 될 것 같아서요.
- 무슨 사과요?
- 제가 전에 무례한게 군 것에 대한 사과요.
- .. 아..
- 이렇게 높으신 분인줄은 몰랐거든요.
처음 만났던 그 날이 마음에 걸린건 저뿐만이 아니구나 내심 기뻤던 성운은 뒤이어 붙이는 민현의 말에 금세 시무룩 해졌다. 아마도 광고주로 만난 제 위치를 생각해서 앞으로 일이 껄끄럽지 않기위해 하는 행동쯤으로 성운은 결론을 내렸다.
그에 사과를 받아주겠다고 말하려는 차 민현이 먼저 입을 열었다.
- 이제 촬영장 아니니까 성운씨라고 해도 되죠?
- 네? 네.. 뭐, 좋을대로 하세요.
- 그런데 저, 성운씨.
- 네.
- 저 계속 여기 서서 말해야 되나요?
- 네???
- 혹시.. 와인 좋아하세요? 뭘 좋아하실지 몰라서 사과선물로 와인을 좀 준비했는데.. 물론 안주도 같이.
- ... 그, 그게.. 지금..
- 아.. 뭐 불편하시면 선물만 두고 가구요.
- 아뇨, 그런게 아니라.. 그.. 크흠.. 일단 들어오세요.
- 고마워요. 그럼, 실례할게요.
알딸딸한 성운은 계속 제 정신을 차리려 노력했다. 제 눈 앞에 가까이 와있는 이의 얼굴이 취기 때문인지 자꾸만 울렁거리며 잘 보이지 않았다. 그 순간 성운의 귓가를 녹아내릴 듯 달콤하고도, 익숙한 음성이 들려왔다.
- 성운씨. 눈 좀 떠봐요. 나 보여요?
- ... 미, 민현..씨?
- 네. 저 인거 알겠어요?
- 아니, 민.. 민현씨가 여길 왜에..
- 기억 안나요? 우리 같이 와인 먹고 있었는데 갑자기 먼저 이렇게 취하는게 어딨어..
- .. 네?.. 아아.... 맞다.
그제야 전 상황이 어렴풋이 생각난 성운은 다시 한번 제 머리위로 물음표가 띄워졌다. 어색한 분위기가 싫어서 먼저 한잔, 두잔 따라마시긴 했는데 취한 건 둘째치고 너무 가까워진 거리에 잠시 흠짓했다. 분명 마주보고 앉아있었던 것 같았는데 어느새 민현은 성운의 옆자리에 앉아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보려고 해도 그럴수록 머리만 빙글빙글 돌아갈 뿐 도무지 생각이 나질 않았다.
나 대체 무슨 짓을 하고 있던걸까.
제 허리를 받치고 있는 민현의 손을 가만히 내려다보다 성운은 마치 꿈인지 현실인지 확인하기라도 하는 양 그 손을 살짝 잡았다. 그러자 그 손가락을 얽히며 민현이 성운에게 더 가까이 다가왔다.
올라오는 취기 때문에 이게 제 상상인지, 실제인지 더 분간을 할 수 없었진 성운이 제 옆자리에 앉은 민현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저를 내려다보는 민현의 눈을 바라보다 성운은 취기를 핑계삼아 단단히 봉해두었던 마음의 문을 기어코 열었다.
- 민현씨..
- 네, 성운씨.
- 왜 그러케.. 잘생겨써요?
- 네..?
- 왜 그러케 잘생겨가지구.. 사람을.. 하아.. 아니, 노래도 되게되게 잘하던데... 연기도 대따 잘하구.. 내가 다 찾아봐써.
- 아.. 고마워요. 나 잘 모른다더니 이제 잘 알게 됐네요?
- 그러치.. 내가 아주 잘 알지이.. 잘생긴 것들은 너무 위험해.. 알아요? 나 원래는 이사 가려구 했는데에.. 이 집 너무 싫어서..
- 이사? 왜요?
- 민현씨네 팬들이 너무 시끄러워가주구... 내가 한국에 와가지구.. 시차 적응도 못해서 막.. 잠도 못자구.. 그래서 옆 집 남자는 도대체 뭐하는 놈인가아 했거든? 근데 그게 민현씨자나.. 그래서 인정해써어. 저 정도면 팬들이 돌고도 남겠구나아..
- 아.. 미안해요.
- 그래요.. 미안해해야돼.. 잘생긴건 엄청 미안해야 되는거야아.. 건강에 해롭거든.
- .. 풉.. 성운씨. 취하니까 더 귀여워지네.
- 응?.. 나.. 귀여워요?
- 네. 귀여워요.
민현의 말에 꾸벅대며 제 말을 잇던 성운이 잠시 멈칫했다. 다시금 올려다본 민현의 얼굴이 흐릿했다가 초점이 맞춰진 순간 안그래도 달아올랐던 성운의 얼굴이 더 화르륵 달아올랐다. 민현의 표정이 꼭 드라마 속 사랑을 고백하던 그 절절한 얼굴과 같아서. 성운이 제 얼굴을 가리며 고개를 돌리자 민현이 다시 바로 잡아 저를 보게 만들더니 드라마 속 대사 같은 말을 뱉어냈다.
- 예뻐요.. 지금.
- ...........
- ...........
성운이 흔들리는 눈으로 어떻게든 초점을 맞추려 애썼다. 제가 들은 말이 부디 상상이 아니길 바라면서 열어두었던 마음의 문 밖으로 한발을 조심스레 내밀었다.
- 남자한테 예쁘다는 말 되게되게 실례인데.. 또 실례 했으니까아.. 그럼 또.. 와인들구 놀러와요?
- 또 놀러오면 좋겠어요?
- 네에.. 매일 왔으면 좋겠어요..
- 그럼.. 이사.. 안 갈거에요?
- 응. 안가요, 이사. 그리구.. 어차피 못가. 할아버지가 안된대.. 힝..
- 푸.. 푸핫.. 성운씨.
취한 성운을 받치고 있던 민현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허리를 바짝 잡아 당겨 안은 민현에 당황한 성운이 왜 웃냐며 빨개진 얼굴에 부채질을 했다.
그 손을 잡아 제 목 뒤로 두른 민현이 똑바로 성운을 마주했다.
- 나 더는 못참을 것 같아요. 싫으면 피해요.
- ...무, 뭐라.. 읍!!
뭐라 하려던 성운의 입술을 훅 집어삼킨 민현이 부드럽게 성운의 허리를 끌어 안았다. 그제서야 성운은 취기를 핑계로 놓았던 정신이 번뜩 불이 켜지듯 돌아왔다. 상황을 인지하며 기억을 더듬다가 민현의 농밀한 입맞춤에 성운은 금세 생각해내려던 걸 멈췄다. 목에 둘러준 팔에 힘을 줘 민현을 꼭 끌어안으며 지금 이 꿈같은 입맞춤에 집중하기로 했다.
촉, 하는 소리와 함께 떨어진 입술이 번들거리며 빛났다. 그 입술에 다시 한번 입을 맞춘 민현이 웃으며 성운에게 말했다.
내일도, 모레도 놀러올게요.
앞으로 .. 잘 부탁해. 성운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