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바다의 세이렌
Written by 브리사시엘
태어날 때부터 폐가 기형이라고 했다. 그래서 엄마의 몸 밖으로 나오자마자 인큐베이터에 들어가야 했고, 그렇게 오랜 시간을 보내고도 폐의 기형은 어떻게 할 방법이 없어서 항상 조심하는 삶을 살았다. 부모님의 잘못은 아니었다. 엄마는 누구보다도 조심스러운 사람이었고, 좋다고 하는 태교는 전부 했다. 음식도 이렇게까지 가려 먹을 필요가 있냐는 말을 들을 정도로 가려 먹을 정도였다. 그런데 늦둥이로 얻은 아들의 폐가 기형이라는 것은 부모님에겐 상당한 충격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모님은 사랑과 정성을 쏟아가며 성운을 키웠다.
하지만 온전히 지우지 못한 부모님의 우울을, 성운은 기민하게 알아차렸다. 그래서 아주 어렸던, 기억조차 흐릿할 때부터 부모님이 슬픈 얼굴을 할 만한 언행은 하지 않았다. 특히 엄마가 울 것 같은 얼굴을 했던 언행은 두 번 다시 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런 성운에 대해서 아는 사람은 오롯이 성운, 자신뿐이었다.
성운은 가끔씩 생각했다. 자신은 왜 태어난 걸까 하고. 건강하게 태어나지 못할 거였다면, 이렇게 엄마 마음을 아프게 할 거였다면, 애초에 태어나지 않았던 것이 좋았던 거 아닐까 하고.
당연히 학교는 고사하고 어린이집조차 제대로 다니지 못했다. 주기적인 입원과 장기적인 치료. 해결책이 없는 길고 지루한 싸움이었다. 출석 일수는 항상 간당간당했다. 체육 수업은 고사하고, 음악 수업도 제대로 받아본 적 없었다. 힘든 일에선 항상 제외됐다.
프리패스.
누군가는 뒤에서 그렇게 욕하기도 했다.
아픈 게 벼슬이지.
악의를 가진 날카로운 말들에 억울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지만, 성운은 못 들은 척했다. 저런 말에 울컥해서 싸움이라도 하게 되면, 엄마는 또 숨어서 울 것이 뻔했다. 누군가의 잘못으로 이렇게 된 게 아니었다. 그저, 운이 나빴을 뿐이다. 성운은 언제나 주문을 외우듯 자신에게 그렇게 중얼거리곤 했다.
***
공기 좋은 곳에 가자.
그렇게 말한 엄마는 자신의 어머니에게 성운을 맡겨두고 서울로 돌아갔다. 어려서부터 강원도는 기본이고 충청도, 경상도, 전라도까지. 방학인데 입원을 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상태가 호전되면 공기 좋고, 물 맑다는 곳을 찾아 이리저리 표류했었다. 그때마다 항상 엄마가 함께였지만 이번은 달랐다.
성운은 이제 정말 자신의 엄마가 지쳐 버렸음을 알았다.
아빠 밥 챙겨주고 다시 내려올게.
응. 알겠어.
7살 난 어린애도 믿지 않을 거짓말에 성운은 희게 웃었다. 아마 엄마도 성운이 이 거짓말을 믿고 대답한 것은 아닐 거라는 것을 알 것이다.
엄마의 얼굴을 다시 보게 되는 건 아마도 개학 즈음일 것이다. 혹은 그것조차 잊고 지내다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성운은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슬퍼하거나 서운해하지 않기로 했다. 엄마가 지쳐버린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게 자신이었다. 그리고 그 지침의 원인 또한 누구보다 잘 알았다.
사막에 잘못 피어난 들꽃처럼, 엄마는 시들어버렸다.
과거의 언젠가는 엄마가 선인장처럼 강인했던 때도 있었다. 사막에서 어떻게든 물을 저장해 살아남아 꽃을 피우는 선인장처럼, 강인했던 때. 하지만 엄마는 지쳐갔다. 회사 일을 핑계로 자꾸만 빠져나가는 아빠와 조금만 무리하면 금세 호흡 곤란이 오는 아들. 같은 집에 사는 남자 두 명 때문에 엄마는 점점 메말라 갔다. 도와주는 사람은 없었다. 시댁 식구들은 나 몰라라 했고, 홀로 사는 친정어머니는 고향을 떠나올 수 없었다.
버석하게 말라버린 엄마의 마음은, 아마 회복하기 쉽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엄마는 집에 돌아가지 않을지도 모른다.
설령 그렇다 해도 성운은 엄마를 원망하지 않는다. 엄마와 자신이 이렇게 될 때까지 집을 방치했던 아빠는, 조금 원망할지도 모르지만.
할머니는 남쪽의 바닷가에서 혼자 살기 시작한 지 어언 20여 년이 되었다. 엄마는 몇 번이나 성운을 핑계로 할머니를 서울로 끌어오려 했지만 실패했다. 바다 냄새가 너무 좋다고, 그 냄새를 맡지 못하게 되면 죽을 것 같아서 안 되겠노라고, 할머니는 일관적인 핑계로 꾸준히 서울행을 거절했다.
성운은 할아버지의 얼굴을 직접 본 적은 없지만, 할머니의 자랑을 듣고 있노라면 제법 기골이 장대한 미남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할머니는 정신력이 상당히 강한 사람인 건지, 혹은 자기애가 강한 사람인 것인지 확실하게 알 수는 없지만, 혼자서도 건강하게 잘 지내셨다.
칠순이 코앞인데도 불구하고 성운과 달리 달리기도 잘했고, 동네에서 노래자랑이라도 열리면 1등으로 참가 신청을 해야 직성이 풀리는 분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1등을 거머쥐어야 하는 분이시기도 했다.
그런 할머니는 닮은 것인지, 성운은 노래를 잘했다. 물론, 폐가 허락하는 범위 내에서의 이야기였지만.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에도, 학교에 있을 때에도 성운이 노래를 부르면 많은 사람이 음색이 참 예쁘다고 칭찬해 줬었다. 폐 때문에 폐활량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 노래는 도전해 볼 수도 없었지만, 그랬다.
그래서 성운은 노래를 부르는 것이 좋았다. 노래를 부를 때만큼은 엄마도 세상 다시없을 만큼 환하게 웃어줬다. 학교에서는 폐의 기형을 핑계로 음악수업도 제대로 참여하지 못하게 했지만, 성운은 항상 혼자 있을 때면 노래를 불렀다. 노래를 부를 때면 자신이 ‘살아있다’는 걸 실감할 수 있었다. 그래서 성운은 노래가 좋았다.
할머니와 있으면 성운은 마음이 편했다. 다른 사람들과 달리 할머니는 성운이 질려서 그만두기 전까지는 노래를 그만 부르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들어주었다. 그래서 성운은 할머니의 곁에서만큼은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병원에서도 눈치를 보느라 마음껏 할 수 없었던 노래를 스스로 지칠 때까지 부를 수 있었다.
피는 어디 안 가는 갑다.
당연하지. 할머니 손준데.
자애로운 할머니의 목소리에 성운은 뿌듯한 얼굴로 대답했었다.
사실 엄마는 못 하는 축에 속했다. 성운은 엄마가 할아버지를 닮아서 그런가 보다 생각했다. 할머니는 엄마를 건너뛰고 노래를 잘하는 성운을 많이 아껴주셨다.
아이고 우리 강아지. 나의 작은 물고기.
할머니의 말버릇은 조금 특이한 축에 속했다. 어렸을 때는 강아지인지 물고기인지 하나만 하시라고 했던 것도 같지만 철이 들 무렵부터 성운은 아무렴 어떠냐 싶었다. 어차피 자신이 온전한 인간도 아닌데, 강아지면 어떻고 물고기만 어떻다는 건가 싶어서.
성운이 할머니의 집에서 하는 일은 몇 가지 없었다.
밥 먹기, 음악 듣기, 책 읽기, 노래 부르기, 잠자기.
겨울이라는 계절 탓도 있지만, 성운은 밖에 나가지 않았다. 이것은 엄마가 없어서도 아니었고, 친구가 없어서도 아니었지만, 할머니는 꽤 안절부절못했다. 성운은 그저 추위가 싫고 몸을 움직여 금방 지치는 자신을 확인받기 싫었을 뿐이었는데.
할머니는 어떻게든 성운을 집 밖에 내보내고 싶어서 온갖 이야기를 꺼내왔는데, 정작 성운은 따스운 온돌방에 앉아 책을 읽는 재미에 푹 빠져 있었다. 그래서 종종 할머니의 외출을 눈치채지 못할 때가 있었다.
오늘도 그런 날이었다.
성운은 할머니가 언제 외출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책을 다 읽어갈 즈음 들려오는 들뜬 발걸음 소리에 할머니가 집에 돌아왔음을 알았다. 발걸음 소리가 점점 가까워져 옴에 성운은 몇 장 남지 않은 책을 내려놓고 조금은 거칠게 미닫이문을 여는 할머니를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발걸음이 왜 그래. 무슨 일 있었어?”
“오늘 책방 아들이 돌아왔다더라.”
“그렇구나.”
대수롭지 않은 이야기에 성운은 다시 책으로 시선을 옮겼다. 흥분한 듯 살짝 톤이 높아진 할머니의 목소리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무엇인지 성운으로서는 알 길이 없었다. 책방 아들이 돌아온 것이 자신과 무슨 상관일까. 성운은 구석진 곳에 있는 이 작은 마을에 몇 있지도 않은 주민들에 대해서 큰 관심이 없었다. 서울에서도 그랬고, 엄마를 따라 이리저리 방랑할 때도 그랬다. 어차피 자신은 그들과 다르기 때문에.
“그 집 아들래미가 너랑 나이가 비슷하다. 여기 동무도 없어서 심심할 텐데 가서 친해지면 좋지 않나.”
가만히 책을 읽고 있는 성운의 정수리 위로 할머니의 목소리가 흘러내렸다. 성운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다시 할머니를 바라보았다. 할머니의 숨은 이제 정상적인 속도로 돌아왔으나, 눈에는 여전히 작은 열기가 있었다. 이 시골에 내려와 두문불출하는 하나뿐인 손자가 걱정되었던 것일까. 할머니의 눈빛에서 성운은 어떻게 해서는 자신을 밖으로 내보내고자 하는 작은 의지를 읽었다. 작게 한숨을 게워내며 성운은 천천히 책을 덮었다. 무릎 위에 덮은 담요를 걷어내며 아주 느릿한 움직임으로 몸을 일으켰다.
“책방은 어디로 가면 있는데?”
할머니의 눈이 마치 희망을 찾은 것처럼 반짝였다.
바로 옆 동네로 가는 것도 2시간에 한 번 올까 말까 한 버스를 타고도 십 여분을 달려야 하는 정말 작고 외진 곳에 있는 마을이었다. 식료품을 파는 것도 작은 구멍가게 하나뿐인 마을. 그런 곳에 책방이 왜 있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성운이 엄마와 함께 온갖 시골을 전전하면서 느꼈던 것은 식료품은 생존에 필요하니 구멍가게가 있을 수도 있지만, 그마저도 없는 마을이 태반이라는 것이었다. 그게 이 땅의 시골이라는 곳이 가진 이미지였는데, 생필품도 아닌 책을 파는 가게가 있다는 것이, 성운은 믿기지 않았다.
자그마한 시골 마을의 책방은 뭔가 도시 전설 같은 느낌이었다. 성운은 할머니가 알려준 대로 걸어가면서 손에 든 물건을 추슬렀다. 겸사겸사 책방 부부에게 전해주라고 할머니가 챙겨준 떡은 보기보다 무거웠다. 이쪽저쪽 손을 바꿔가며 들면서 처음으로 둘러본 마을의 풍경은 삭막하기 그지없었다.
겨울이라는 계절의 탓도 있겠지만, 확연하게 줄어든 주민의 숫자 탓이 제법 클 게 뻔했다. 언제 어느 마을을 가도, 하는 이야기들은 항상 똑같았다.
마을에 사람이 없어.
옛날엔 많았는데.
아이들 웃음소리가 없는 마을이 되었지.
왜 그렇게 되었는지에 대한 고찰은 없이, 과거의 영광만을 쫓으며 현재를 아쉬워하고 비난한다. 그런 어른들이 성운은 싫었다. 그래서 이런 곳에 남아있다는 책방의 부부도, 그들의 아들도 별난 사람들이라는 생각은 들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할머니의 바람대로 그들과 친해지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앙상한 가지를 드러낸 나무들이 늘어서 있는 곳을 바닷바람을 맞으며 한참을 걸었다. 너무 추워서 화가 나는 걸 넘어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감기 걸릴까 걱정하며 할머니가 둘둘 말아준 목도리도, 귀가 시릴 거라며 씌워준 모자도 소용없었다. 성운은 장갑을 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손이 시린 기분이라 얼른 전달만 하고 집에 돌아가 이불 속에 몸을 꼭꼭 접어 넣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들어가기도 전에 전면 유리를 통해 책방의 카운터에 앉아있는 남자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하얗고 단정한, 무표정한 얼굴에선 찬바람이 쌩쌩 부는 것 같은 착각이 일었다. 이런 동네의 허름한 책방보다는 서울의 큰 도서관이 어울릴 것 같은 사람이었다. 성운은 무슨 말을 해도 단답형의 대답밖에 돌려주지 않을 것 같은 남자의 얼굴을 한참 바라보다가 다시금 쌩하니 불어오는 바람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이대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랬다간 할머니의 시무룩한 얼굴을 봐야 할 것이 뻔했다. 할머니가 손에 쥐여준 것만 건네고 후딱 돌아가자. 마음속으로 다짐하며 성운은 책방의 문을 열었다.
“어서 오세요.”
“안녕하세요.”
차가운 미닫이문을 드드륵 밀어내자 바깥의 차가운 공기가 거짓말처럼 느껴질 정도로 후끈한 열기가 성운을 맞이했다. 안경을 끼고 있었다면 하얗게 김이 서려 앞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을 것 같은 열기에 성운은 살짝 인상을 찡그렸다.
“처음 보는 얼굴인데… 찾는 책이라도 있니?”
“아…….”
남자의 말에 성운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미닫이문을 닫았다. 열린 문을 통해 찬바람이 들어오고 있었음에도 남자는 인상 한 번 찡그리지 않고, 성운을 향해 온화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아까, 책방의 바깥에서 봤던 것과는 달라도 너무 다른 얼굴이었다.
“할머니가 이거 가져다주라고 하셔서요.”
남자의 얼굴을 제대로 보지 않은 채, 성운은 자신의 손에 들고 있던 것을 카운터로 올렸다. 보자기로 싸둔 것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대충 먹을 것 아닐까 생각했다. 주기만 하고 가면 되겠지 싶어서 성운은 남자의 감사 인사도 제대로 듣지 않은 채 몸을 돌렸다.
“그럼 이만.”
“저기!”
“……네?”
“그냥 주고 가면 어느 집인지 모르니까, 학생 이름하고, 할머니 성함도 알려주지 않을래?”
남자의 다정한 목소리가 고막에 녹진하게 달라붙는 느낌이었다. 성운은 홀린 것처럼 자세를 바르게 하고 급하게 일어선 남자를 바라보았다. 자리에서 급하게 일어난 남자는 키가 제법 커서 꽤 올려다보아야 했다.
“난 황민현이야. 스물두 살. 대학생이고.”
“대학생인 건 알아요.”
“정말? 어떻게?”
“할머니가 머리가 좋아서 서울에 있는 대학에 간 형이라고 하셨어요.”
“하하.”
거침없이 튀어나온 칭찬이 쑥스러운 듯 남자는 멋쩍게 웃었다. 뒷머리를 긁적이는 동작이 유려했다. 별것 아닌 행동도 뭔가 달라 보이게 하는 재주가 있는 사람이었다. 성운은 할머니가 왜 자신과 이 남자를 만나게 해주고 싶어 했는지 알 것 같았다.
“……저는 하성운이고 열일곱 살이에요. 파란 지붕의 노래 할머니가 저의 외할머니세요.”
“아! 그 집 손주구나. 할머니가 자랑 많이 하셔서 나도 알아.”
“…그, 그래요?”
“응. 자기 닮아서 노래도 잘하고 목소리도 엄청 예쁘다고 하셨었어.”
이번엔 성운이 당황할 차례였다. 할머니가 여기저기 자신의 자랑을 했었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지만 이렇게 다른 사람의 목소리를 통해 확인받는 것은 처음이었다. 성운은 얼굴에 열이 몰리는 기분이 들었다. 잘생긴 얼굴이 수려한 미소를 지어 보임에 성운은 목도리를 끌어 올려 자신의 얼굴을 가렸다. 눈만 남기고 제 얼굴을 가리는 걸 가만히 보던 남자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할머니 말씀대로 귀엽네.”
“…….”
“이 동네에는 얼마나 있을 예정이야?”
“…잘 모르겠어요.”
엄마가 언제 데리러 올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성운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대답이었다. 남자는 아리송한 미소를 지어 보이더니 혼자서 뭘 납득한 것인지 고개를 끄덕이곤 성운을 향해 하얗고 단단한 자신의 손을 내밀었다.
“그러면 돌아가기 전까지 잘 부탁해.”
“……네?”
“아는지 모르겠지만, 지금 마을에 우리 또래는 너랑 나뿐이거든.”
“아…….”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지만 확인사살을 받자 성운은 시무룩하거나 서운하다기보다는 오히려 개운한 기분이 들었다. 누군가와 친구가 되기 위해 노력하라는 말을 듣는 것도, 실제로 친구가 되어야 한다는 압박감에 노력하는 것도 싫었다. 정신력이 있어야 하는 그 노력은 성운의 마음을 야금야금 갉아먹기 일쑤였다.
“네가 싫다면 어쩔 수 없지만, 그냥 가끔이라도 좋으니까 놀러 와줘. 굳이 나랑 대화하거나 할 필요는 없어. 그냥, 여기 와서 읽고 싶은 책을 읽다가 가도 괜찮으니까.”
여름날의 나뭇잎 사이를 노니는 바람처럼 남자의 목소리는 어딘가 살랑이는 느낌이 났다. 조급하게 말하는 것 같으면서도 어딘지 모를 여유로움이 느껴졌다. 거절의 말을 하고 싶었던 마음이 밖의 그늘진 어딘가에 남아있을지도 모를 눈이 예기치 못한 햇살을 만난 것처럼 녹아내렸다.
“너무 춥지 않으면요.”
“응.”
그거면 돼, 하고 대답하는 남자의 목소리를 멍한 머리로 들으며 성운은 의미 없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남자와 핸드폰 번호를 교환하고 책방을 나서고 나서야 성운은 제가 무언가에 홀렸던 것이 아닌가 잠시 고민을 했다. 찬 바닷바람에 정신이 확 돌아오는 느낌이었다. 뭐 언제부터 그렇게 다른 사람과의 교류를 좋아했다고 핸드폰 번호까지 교환한 것일까. 멍하니 손에 들고 있던 핸드폰이 부르르 몸을 떨어댐에 성운은 반사적으로 인상을 찡그렸다.
【 추운데 조심해서 들어가 ^^ 】오후 5:13
답장의 여부에 대한 고민은 길지 않았다. 겨울바람에 얼어붙은 손은 장갑을 끼고 있었고, 장갑을 낀 손으로는 핸드폰의 타자를 칠 수 없었다. 성운은 핸드폰을 패딩 주머니에 넣은 뒤 할머니의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해가 빨리 떨어지는 겨울 바닷가의 저녁은 이미 충분히 어둑했고, 가로등 몇 개 있지도 않은 길은 익숙지 않은 사람에게는 제법 무섭게 느껴질 정도였다.
나는 무섭지 않다, 나는 무섭지 않다.
저도 모르게 소리를 내어 중얼거리며 성운은 발걸음을 빨리했다. 엄마 차를 타고 처음 할머니 댁에 온 날 이후, 이렇게 밖에 나온 것은 처음이었다. 집 안을 벗어난다고 해 봐야 할머니 집 앞마당이 다였던 성운에게 이 심부름을 가장한 외출은 꽤 험난한 미션에 가까웠다.
잘 돌아갈 수 있을까?
첫 번째 갈림길부터 덜컥 겁이 났다. 성운은 할머니에게 전화를 걸어 데리러 오라고 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진지하게 고민했다. 그렇게 무섭다고 칭얼대면 다시는 외출을 강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길목에 서서, 성운은 한참이나 왼쪽이 맞는지 오른쪽이 맞는지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정면을 노려보기만 했다. 조금,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성운아!”
“…누구…….”
갑작스러운 부름에 너무 놀라서 심장이 지구의 핵과 부딪힌 뒤 다시 튀어 올라 제자리에 돌아온 느낌이었다. 어깨가 흠칫거리며 위로 튀어 올랐던 것을 숨길 수는 없었겠지만 성운은 최대한 침착한 얼굴로 뒤를 돌아보았다. 지금과 같은 상황에 자신의 이름을 부를 사람은 단 한 명뿐이었지만 성운은 굳이 아는 척하고 싶지 않았다.
“가로등이 없어서, 혹시 길 잃을까 봐.”
얇은 코트 차림으로 달려 나온 남자는 얼마 뛰지 않아 숨이 벅찰 일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괜히 무릎에 손을 얹고서 숨을 골랐다. 살짝 웃어 보이는 얼굴이 매력적이라 성운은 다시 얼굴에 열이 차오르는 것 같았다. 애써 지금 자신의 얼굴이 뜨거워지는 건 눈물 탓이라고 중얼거리며 남자의 얼굴에서 시선을 뗐다.
“길도 험한데 어두워서 어디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면 할머니가 속상해하실 거야.”
“…….”
“내가 데려다줄게.”
“…….”
“아까 바로 생각했어야 했는데, 내가 미안.”
“…….”
“…성운아, 괜찮아?”
“……괜찮아요.”
왜 갑자기 이렇게 훅 치고 들어오는지 모를 일이라고 생각했다. 도대체 왜? 오늘 처음 본 자신보다 다섯 살이나 어린 애한테 왜 이런 다정함을 보이는 것일까. 어쩌면 태생이 다정한 사람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으로는 이 따스한 안정감이 다 설명되진 않는다.
“데려다줄게.”
다정하고 달콤한 목소리가 귓가에 휘감긴다. 눈앞에 내밀어진 하얗고 단단한 손은 아까 악수할 때와는 조금 다른 느낌이 들었다. 성운은 주춤거리며 장갑을 낀 작은 손을 그의 손 위에 얹었다.
***
그날 이후 성운은 그 남자, 민현과 많이 친해졌다. 거의 매일 얼굴을 마주했다. 성운이 책방에 가기도 했고, 종종 그가 할머니의 집으로 찾아오기도 했다. 할머니는 성운이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만으로도 제법 즐겁고 행복해 보였다. 그래서 성운은 민현이 자신을 찾아오는 것도 말리지 않았고, 기분이 내키면 그를 찾아가기도 했다.
민현은 무표정하게 있으면 상당히 냉랭한 느낌이 들었지만, 자신을 발견하고 웃을 때면 여름 바다의 해수면에 잘게 부서지는 햇살 같았다. 민현의 목소리에는 묘한 매력이 있어서, 성운은 그가 이야기를 시작하면 저도 모르게 집중하게 되곤 했다. 그가 고운 목소리로 노래를 흥얼거릴 때면 그 노래를 따라 부르기도 했다.
넌 정말 목소리가 예쁘다.
형이 할 소리는 아닌 것 같아요.
같은 반 아이들이 변성기를 지나며 목소리가 점차 낮아졌던 것과 달리 성운의 목소리는 항상 높은 편이었다. 말할 때와 노래할 때의 목소리 차이가 거의 없어서 성운은 목소리 톤이 낮고 멋있는 사람을 주로 동경해왔다. 자신과 같이 목소리가 높은 사람은 싫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 남자, 민현만큼은 자신과 견주어도 딱히 더 낮다고 표현하기 힘든 톤을 가지고 있음에도 좋았다. 하염없이 듣고 있으라고 해도 들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스물두 살의 황민현은 고향에 내려오면 책방을 보거나, 이따금 시내로 나가 수영을 하고 온다고 했다. 지금은 그만두었지만, 고등학교 때까지는 꾸준히 수영을 했고, 무려 도 대표로 뽑힌 적도 있다고 했다. 성운은 자신과는 궤적을 너무나 달리하는 민현의 삶에 어쩐지 조금, 질투가 났다.
“형은 건강해서 좋겠다.”
“내가 부럽니?”
“당연하죠.”
걷는 것도 힘들고, 뛰는 건 당연히 무리고. 친구들하고 맘 편히 놀아본 적도 없고. 아니다, 애초에 친구도 없고. 내 삶이란 게 이래요. 태어날 때부터 폐가 기형이라… 인큐베이터에 있었고. 학교도 늦게 입학했는데, 제대로 다니지도 못하고. 체육 수업? 해본 적도 없어요. 학교 운동장을 밟아본 기억부터가 없어.
“바다에서 수영해 본 적은?”
“당연히 없죠. 수영할 줄 몰라요. 물에 들어가 본 적도 없고.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애를 누가 물에 넣어줘요?”
“형이랑 해볼래?”
“이 겨울에요?”
성운의 황당함을 담은 질문에도, 민현은 눈꼬리만 접어가며 웃어 보이기만 했다.
이따가 밤 11시에 빨간 지붕 너머 방파제에서 만나자.
성운은 이 추운 날 무슨 바다에서 수영이냐고 생각하면서도 민현과 자신만의 비밀이 생긴 게 이상하게도 좋았다. 할머니는 9시면 잠드는 전형적인 시골 할매였다. 성운은 언제나 늦게까지 책을 읽다가 잠들었기 때문에 할머니는 자그마한 의심 한 조각, 내어 보이지 않았다.
할머니가 잠든 지 1시간 반 경과. 성운은 중무장을 하고 조심스럽게 할머니의 방문 근처를 서성였다. 우렁찬 코 고는 소리가 집을 울렸다. 성운은 안심하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집을 나섰다. 대문을 나선 순간부터는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발걸음을 조심할 이유도 없었다. 성운은 미친 듯이 달렸다. 집에서 방파제는 그리 멀지 않았지만 조금이라도 빨리 도착하고 싶었다. 마음이 급한 만큼 다리가 움직이는 속도도 빨라졌다. 폐부 깊숙한 곳까지 바닷바람의 짠 내가 퍼지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지만,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숨을 몰아쉬며 도착한 장소에, 민현은 없었다. 시계를 확인해 보아도 늦지도 이르지도 않은 시간에 도착했는데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음에 성운은 조금 초조해졌다. 오랜 시간 봐온 사이는 아니지만, 짧은 시간 동안 겪은 것만으로도 그가 말도 없이 약속에 늦을 사람이 아니란 것을 알 수 있었기에 성운은 당황했다.
뛰어오느라 헐거워진 목도리를 다시 추스르며 성운은 하늘을 향해 입김을 토해냈다. 올려다본 하늘엔, 서울에서는 볼 수 없었던 별이 총총히 빛나고 있었다.
그렇게 30분이 지났다. 뺨을 베어낼 것 같은 추위에 발을 동동거리며 딱 10분만 더 기다리겠노라 다짐한 성운의 앞에 철썩, 하고 물고기가 뛰어올랐다 다시 떨어지는 것 같은 소리가 났다. 가까운 곳에서 들려오는 위협적이고 낯선 소리. 아무도 없는 어두운 방파제. 성운은 무섭지만 동시에 운명과도 같은 이끌림을 느껴. 소리가 난 곳 가까이 가야 할 것만 같은, 그런 느낌에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방파제의 가장자리로.
그곳에서 성운이 마주하게 된 건, 달빛을 받았음에도 까맣게 물든 수면에 어깨 바로 아래까지 잠겨 있는 새하얀 피부의 남자였다.
“형!!! 그러다 얼어 죽어요!! 어서 나와요!!!”
성운의 절규에도 불구하고 민현은 나른하게 웃으며 여유롭게 헤엄을 칠뿐이었다.
“성운아.”
“…….”
“들어올래?”
유혹하듯 속삭이는 목소리가 어쩐지 이 세상의 것이 아닌 것만 같았다. 성운은 민현의 목소리에 이끌려 조심스레 방파제를 내려가기 시작했다. 이런 곳을 내려갈 일이 이제껏 없었던 터라 움직임은 조심스럽고, 손에서는 절로 식은땀이 났다. 위험하다는 생각은 있었지만, 귓가에 울리는 경보음을 들으면서도 성운은 민현의 앞으로 가는 걸 멈출 수 없었다.
“안 추워요?”
“안 추워.”
거짓말.
바닷바람은 아주 차가웠다. 성운은 민현의 말이 거짓말이라고 생각했지만, 평온한 표정 때문에 그럴 리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정말 안 추운 걸까? 하고 잠시 고민했다.
어쩌면 민현은 ‘건강한 사람’이라 자신과 추위를 느끼는 지점이 다른 것일지도 모른다. 얼마 전 텔레비전에서 본 모 프로그램에 나온 스웨덴 사람들은 한국의 겨울 바다가 춥지 않다며 수영을 하지 않았던가. 민현도 그들과 추위에 대한 감각이 비슷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지금은 과연 정말 그럴 확률이 얼마나 되겠는가에 대한 것은 조금도 중요하지 않았다.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그가 춥지 않다고 말하고 있다는 것과 성운 자신이 그 말을 믿고 싶다는 것이었다.
눈앞에 내밀어진 손을 잡고 바다에 들어가면 추위에 심장이 얼어버릴지도 모른다. 심장마비로 고통 없이 죽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그 모든 가능성을 떠올리면서도 성운은 나쁘지 않은 선택일지도 모른다고, 스스로에게 속삭였다. 어차피 오래 살 수 없는 몸이다. 건강하게 살지도 못한다. 이어지는 삶은 계속해서 타인이 정한 기준에 맞춰 수많은 제약을 받을 것이다. 그럴 바엔 하고 싶은 것 하나, 원하는 때에 욕심을 부려서 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성운은 다시 민현에게 시선을 옮겼다. 그는 여전한 미소로 성운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얀 달빛이 떨어져 내리는 뽀얀 손. 그늘진 손등이 엄마의 액세서리 함 속 진주 목걸이처럼 반짝였다.
“정말 안 추운 것 맞죠?”
“응. 하나도 안 추워.”
그린 듯한 여유로운 미소와 노래하듯 울려 퍼지는 목소리가 철썩이는 파도 소리에 어우러져 한 폭의 유화를 보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게 했다. 성운은 천천히 장갑을 벗었다. 조급해지고 싶지 않았다.
마지막일지도 모르니까.
어느새 길어진 그림자를 따라서
땅거미 진 어둠 속을 그대와 걷고 있네요
손을 마주 잡고 그 언제까지라도
함께 있는 것만으로 눈물이 나는 걸요
바람이 차가워지는 만큼 겨울은 가까워 오네요
조금씩 이 거리 그 위로 그대를 보내야 했던
계절이 오네요
자신이 좋아하는 노래를 부르는 좋아하는 목소리. 술렁이던 마음이 차츰 침착해져 간다. 민현의 목소리엔 정말 무언가 마법의 힘이 숨겨져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렇게나 성운의 마음을 안정되게 해주고, 편안하게 해주는 목소리는 처음이었다. 다른 사람은 중요하지 않았다. 성운의 작고 좁은 세계는 항상, 오롯이 자기 자신이 기준이었으니까.
지금 올해의 첫 눈꽃을 바라보며
함께 있는 이 순간에
내 모든 걸 당신께 주고 싶어
이런 가슴에 그댈 안아요
약하기만 한 내가 아니에요
이렇게 그댈 사랑하는데
그저 내 맘이 이럴 뿐인 거죠
목도리만 풀었는데도 엄청 추워서 성운은 민현에게 거짓말쟁이! 하고 소리치고 싶었다. 하지만 본인이 결정한 일이었다. 누가, 어떤 말로 꼬드겼다 하더라도 본인이 선택해서 행동하고 있는 거라면 절대로 타인의 탓을 하지 말자는 것이 성운의 신조였다.
패딩까지 벗자, 이제 정말 겨울바람에 살이 에일 것만 같았다. 방파제에 부딪혀 부서지는 파도의 하얀 거품에 어쩐지 얼음도 섞여 있는 것만 같아서, 성운은 조금 울고 싶어졌다. 민현의 노래는 클라이맥스를 향해 가고 성운이 신발을 벗는 순간, 눈이 마주쳤다.
같이 부르자.
목소리가 아닌,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해 머릿속에 직격으로 날아온 민현의 말에 성운은 반사적으로 눈을 크게 떴다. 민현이 웃었다. 노래를 부르며, 유혹하듯 웃는 것에 성운은 결국 자신의 앞에 다시금 내밀어지는 손을 향해, 몸을 던졌다.
처음으로 느낀 감각은 ‘아프다’였던 것 같다. 제대로 된 준비 없이 뛰어든 겨울 바다는 성운의 온몸을 갈가리 찢을 것처럼 차갑고 아프게 성운의 나약한 몸을 난도질했다.
거짓말쟁이. 역시 거짓말이었어.
그 짧은 순간에도 성운은 민현에게 소리치고 싶었다.
거짓말쟁이!
코와 귀, 입을 통해 짠 바닷물이 사정없이 성운의 기도를 괴롭혔다. 귀가 먹먹했다. 가뜩이나 나약한 폐는 완전히 기능을 상실했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느끼는 바다는 너무 잔혹했다. 어린 시절 할머니가 말해주던 이야기가 생각났다.
밤바다, 겨울 밤바다는 사람을 잡아먹는다는 이야기. 그러니까 절대로 겨울밤에는 바닷가에 가지 말라는 이야기. 그 이야기가 왜 이제야 떠오르는지는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진즉에 떠올랐더라면 민현의 제안을 거절했을까? 성운은 확신할 수 없었다. 항상 자신은 민현의 말에 약했다.
반듯하고 단정한 얼굴을 하고서, 자신을 볼 때마다 묘한 열기를 띤 눈을 하는 그가 견딜 수 없을 만큼 좋아서, 항상 숨이 막혔다. 그 눈빛의 의미를 묻고 싶으면서도 물을 수 없어서.
성운아.
허우적거리는 것을 멈추고 천천히 겨울 바다 아래로 침잠해 가고 있었다. 온몸의 세포가 얼어붙은 것인지 추위도, 아픔도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다. 성운은, 이대로 자신이 죽는다고 생각했다. 그때 들려온 목소리에, 성운은 번쩍, 눈을 떴다.
손끝에 타인의 손가락이 닿아왔다. 천천히 타인의 손가락이 자신의 손가락, 손등을 타고 올라와 손목을 잡아챘다. 차갑게 얼어붙었다고 생각했는데 상대방의 서늘한 체온이 느껴짐에 성운은 느릿하게 눈을 깜박였다. 그 와중에 자신의 속눈썹에 붙어 있다 떨어져 나가는 공기 방울이 보였다.
이제 괜찮아.
붉은 입술이 움직였다. 하얀 얼굴, 날렵한 눈매, 다정한 얼굴. 자신이 알고 있는 그 남자가 맞음에도 불구하고 성운은 묘한 이질감을 느꼈다. 죽어서도 이 남자가 보고 싶었던 걸까 싶어 울고 싶은 기분이 되었다. 성운은 자신의 손목을 잡은 남자의 손을 떨쳐내려고 했다.
성운아,
남자의 손은 쉽게 떨어져 나갔지만, 이번에는 뺨을 감싸 안아왔다. 다정한 손길이 눈매를 어루만진다. 천천히 감자 남자가 훌쩍 다가오는 것이 느껴졌다. 양 뺨을 남자에게 붙들린 채, 이마가 맞붙었다.
노래를 부르자. 여기서는 네가 원하는 만큼, 네가 원하는 노래는 전부 부를 수 있어.
다정한 말을 속삭인다. 듣고 싶었던 말을 속삭이는 것은 이것이 꿈이거나, 혹은 자신이 죽어 마지막 소원을 들어주는 과정이기 때문일 것이다. 성운은 가볍게 도리질을 쳤다.
노래하고 싶지 않아.
거짓말이지만, 조금쯤은 진심일지도 몰랐다.
성운아, 이제 안 아프지?
아픈가? 아프지 않은가? 성운은 알 수 없다고 생각했다. 죽었는데 아픔을 느끼면 그게 더 이상한 거 아닌가? 죽어서도 폐의 기형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다면 너무 슬플 것 같았다.
눈을 뜨고 나를 봐. 성운아. 제발…….
눈을 뜨지 않으면 당장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은 남자의 목소리에 성운은 천천히 숨을 들이켰다. 분명 여전히 물속인 것 같은데, 코로 물이 들어오는 느낌이 없었다. 뭔가 이상하단 생각에 성운은 그제야 눈을 뜰 용기가 생겼다.
성운아.
눈앞의 남자, 민현이 환하게 웃고 있었다.
역시, 너는 나와 같을 거라고 생각했었어.
민현은 성운이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했지만, 성운은 아무렴 어떠냐는 생각에 과감하게 팔을 뻗어 민현의 목을 끌어안았다.
민현이형…!
성운아.
……네.
너는 나와 같아.
…….
너는 이상한 게 아니야. 어디가 아프거나 부족한 것도 아니야.
…….
너는 그저, ……바다가 필요했을 뿐이야.
너는, 바다의 아이야.
귓가에 속삭여지는 민현의 목소리가 솜사탕처럼 가볍고 달콤하게 녹아내렸다. 성운이 그의 말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이해하기도 전에, 성운의 입술 위로 민현의 입술이 맞닿았다. 성운은 자신이 새롭게 다시 태어난 기분이 들었다.
성운아. 옛날에 이 바다에는 인어가 살았다고 해. 성운이가 좋아하는 그 동화책에 나오는 그런 인어. 아름다운 노래로 뱃사람들을 바다로 끌어들이는 일은 없었지만, 오히려 그 아름다운 외형과 아름다운 목소리 때문에 사냥의 대상이 되었다고 해. 그래서 그들은 깊고 깊은 바닷속에 숨어버렸어.
그러면 그 인어들은 이제 볼 수 없어요?
우리 성운이가 이렇게 보고 싶어 하니 언젠가는 한 번쯤 만날 수도 있지 않을까?
나는 인어랑 만나면 같이 노래를 불러보고 싶어요!
그래.
같이 노래도 부르고 헤엄도 치면 좋을 것 같아요!
그런 날이 올 거야. 언젠가.
할머니?
아마도 올 거란다, 그런 날이. 나의 작은 물고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