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도의 적기
Written by 다즐링
꿈이란, 참 이상하다. 이상 그 자체이자 그것을 좇게 하는 희망의 빛인 동시에 실현될 가능성이 희박하여 헛되다는 것을 알면서도 쉬이 포기할 수 없도록 발목을 잡아두는 잔인한 덫으로서 존재하기도 한다.
그래서 꿈이란, 참 이상하다.
파도의 적기(適期)
꿈을 꾸었다. 희미했다. 선명하다 여겼던 것이 희미해졌다. 짚어 말할 수는 없지만 무언가 찾아 헤매던 것이었다고, 성운은 생각했다. 떠올려보려 애를 쓸수록 희미해지는 것이 곧 기억이었고, 유일한 기억은 그날 밤의 꿈이었다.
성운은 종종 그에 관한 꿈을 꾸곤 했다. 꿈을 자주 꾸는 편은 아니었지만 꿈을 꾸었다하면 그를 보았다. 몽중에는 분명 낯익은 얼굴이라고 느꼈으나 깨어난 후에는 어설프게 조차 묘사할 수 없을 정도로 흐릿했다.
성운은 이제 막 스물이었다. 새로운 시작이 눈앞에 있었다. 홀로 기숙사 생활을 했던 성운은 집으로 돌아왔다. 포근하고 아늑했다. 붙잡으려 해도 그저 흘러가버리던 시간이 느닷없이 무량으로 주어지자 도리어 지치는지 벼르던 모든 일에 대한 흥미를 잃은 성운이었다. 침대가 놓인 방 내부는 그가 허용한 동선을 모두 담아내기에 충분했다. 그 즈음 성운은 꿈에 시달렸다. 휩쓸리지 않을 수 없었고, 잊을 만하면 또다시 꾸었다. 황혼이 깃든 어느 저녁 무렵, 선잠이 들었던 성운은 처음 그 꿈을 꾸었고 어떤 기시감과도 같은 것을 느꼈다. 그는 누구인가. 내가 아는 사람인가. 아니, 내가 그를 본 적이나 있던가.
성적이 제법 좋았던 성운은 고등학생이 되던 무렵 가족의 품을 떠났다. 새로 발을 들인 공간에서 그에 걸맞은 새로운 친구들을 사귀었고, 이전에 알고 지내던 친구들과는 점차 소원해졌다. 지극히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그리고 어쩐지 모르게, 지난 시간에 대한 기억들이 모래알처럼 성운의 손아귀를 빠져나가는 것만 같았다.
꿈에서 깨면 성운의 가슴에는 파도가 쳤다. 왠지 모를 설렘과 까닭 없는 불안함 같은 것이 들어차며 만들어내는 물결이었다. 꿈을 꾸는 동안은 그와 함께였다. 목소리도, 이목구비도 또렷했다. 하지만 꿈에서 깨고 나면 모두 무용지물이었다. 꿈과 현실의 막연한 괴리. 그것이 성운으로 하여금 그와의 만남을 바라게 했다.
어느 날의 성운은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저장되어 있는 그의 연락처, 그 열한 자리가 이상하게도 익숙했다. 꿈밖의 성운은 숫자들을 잊지 않으려 애썼고, 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꿈속의 성운은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곧 전화가 연결되었고 둘은 대화를 나눴다. 꿈에서 깨어난 성운은 머리맡에 두었던 핸드폰을 쥐고 금세 외워버린 열한 자리를 적어 넣었다. 번호는 저장되어 있었지만 함께 적힌 이름은 없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전화를 걸어보았지만 그의 목소리를 들을 수는 없었다.
기묘하다고 생각했다. 그를 만나게 되면 단번에 알아볼 수 있을 거라고, 기억나는 것은 그 무엇도 없지만 어떻게든 알아보게 될 거라고 예감했다. 그리고 성운은 그를 만나기 위해, 그를 만나기 위한 외출을 준비했다. 만날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꿈속의 공간들이 너무나 익숙해서, 둘러보기라도 하면 무언가 찾을 수 있을 것만 같아 나섰다. 그는 어쩌면 실재하지 않는, 허구의 인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단순한 기시감으로만 치부하기에는 너무나 익숙했고, 또 낯이 익었다. 꿈과 현실의 구분이 모호해지는 연유는, 바로 거기에 있었다.
그와 함께 걸었던 공원에 다다랐다. 성운도 어릴 적엔 자주 찾던 곳이었다. 그네를 타거나, 벤치에 앉아 캔 음료를 마시곤 하던.
“이쯤이었는데.”
꿈속의 그와 성운이 낙서를 새기던 나무에는 눈이 쌓여 있었고, 사람이 오간 흔적이라고는 없었다. 별것 아닌 꿈에 얽매여 존재하지 않는 이의 흔적을 찾고자 하는 자신에 대한 회의감이 일었다. 그 후로 성운은 한동안 꿈을 꾸지 않았다. 두 눈과 손으로 직접 확인하고 난 후 그 누군가에 대한 흥미를 잃은 것인지도 몰랐다. 그렇게 시간은 흘렀고 여전히 겨울이었다.
성운은 졸업식을 치러야 했기에 학교로 돌아갔다. 오랜만에 본 친구 녀석들은 많이 달라져 있었다. 자신을 은근히 가두던 우리 밖으로 완전히 벗어난다는 설렘 때문인지 모두들 들뜬 모습이었다. 대부분 어른의 행색을 하고 있었으나 어른이 되었다기보다 그 겉모습에만 조금 가까워졌다고 표현하는 것이 더 적절했다. 어른의 그것을 좇는 행동만큼 아직 어른이 되지 못했음을 잘 드러내주는 것은 없었다. 그들과 달리 성운은 변한 것이 없었다. 그렇게 성운은 졸업을 했고, 더 이상 학교로 돌아갈 일이 없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성운은 다니엘을 만났다. 하마터면 알아보지 못할 뻔했다. 성운이 마지막으로 다니엘을 본 것은, 중학교 졸업식쯤 되었을 테다. 그때보다 훌쩍 자란 키와 한결 어른티가 나는 이목구비에 움찔했더랬다. 낯익은 얼굴에 본능적으로 손을 들어 아는 체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다니엘 역시 손을 들어 응답하기 전 짧은 찰나에 잘못 보았나 하는 생각을 할 정도였다. 긴 이야기는 나누지 못하고 헤어졌다. 연락처라도 알아둘걸, 하는 생각이 스쳤지만 다니엘의 번호는 저장되어 있을법했다. 집에 돌아와 핸드폰을 꺼내든 성운은 당황했다. 다니엘의 번호가 없었다.
다니엘과는 초등학교 때부터 알고 지낸 사이였다. 성운이 전학을 왔고, 같은 반이 되었다. 다니엘은 사교성이 좋았다. 언제나 주변에 사람이 넘쳤다. 성운은 그런 다니엘과 같은 학급에서 지낸 시간이 많았다. 중학교 역시 같은 곳으로 진학했고 자주 마주쳤다. 그 정도였다. 다니엘에 대한 성운의 기억은. 다니엘이 어떤 아이였는지에 관한 기억은 어렴풋이 존재했지만 다니엘과 어떻게 지냈더라, 하는 데까지는 생각이 미치질 못했다. 같은 반도 많이 했고, 대화도 나름 잘 통했던 것 같은데, 정도가 전부였다.
그리고 성운은, 다시 꿈을 꾸기 시작했다.
역시나 익숙한 공간이었다. 성운이 다니던 학교. 중학교를 졸업한지는 꼬박 3년이 넘었지만 분명히 성운이 지내던 교실 중 하나였고, 성운은 단번에 그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리고 그는, 그곳에 있었다. 성운은 그 사실에 제법 놀라면서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학교가 배경이 된 적은 없었다. 늘 성운의 동네, 그 언저리에 그쳤다. 공원, 편의점 혹은 영화관. 교실은 처음이었다. 그가 원래 성운과 같은 교실에 소속되어 있던 사람인지, 아니면 성운의 무의식이 그를 교실 속으로 불러들인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이번에도 역시나, 깨어난 후에는 그에 대한 어떤 것도 기억할 수 없었다.
그 무렵 친구가 찾아왔다. 고등학교 때 제법 친하게 지내던 녀석이었다. 시내에서 친구를 만나고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버스 정류장에 간 성운이었다. 추운 날씨에 몸이 절로 움츠러들었다. 정류장에 놓인 벤치에 빈자리가 있기에 몸을 붙이고 앉았다. 그렇게 버스를 보내길 몇 번, 멀리서 타야 할 버스가 다가오는 것을 본 성운은 일어나 차도에 다가섰다. 성운은 서서히 멈춰선 버스에 가장 먼저 올라탔고, 내리는 문 근처에서 낯익은 인영을 발견할 수 있었다. 문이 닫히고 버스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할 때쯤 성운은 석양이 내린 창밖을 힐긋 내다보았고, 그 존재를 알아챘다. 다니엘이었다. 성운은 잠시 고개를 갸웃했지만 그뿐이었다.
집으로 돌아온 성운은 처음 꿈을 꾸었을 때처럼 잠시 선잠이 들었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꿈을 꾸었다. 낯이 익었다. 둘은 교복차림이었다. 성운은 버스에 올라탔고, 그는 내렸다. 성운은 드디어, 그 존재를 알아챘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다니엘이었다.
성운은 내달렸다. 그저 발길이 닿는 대로 땅을 밟았다. 금세 숨이 차올랐고 이마에는 땀방울이 맺혔다. 꿈이란, 참 기묘했다. 이상과 현실을 이어주는 희망이면서 동시에 헛된 희망을 심어주는 미몽이기도 했다. 성운은 깨어있지만 무의식에 한쪽 발을 걸쳐놓은 듯했다. 덕분에 맨 정신이었다면 절대 떠올릴 수 없을 곳에 다다랐다. 성운은 어느 현관 앞에 서는 순간 직감했다. 다니엘의 집이었다. 성운은 바람에 쓸려 붉어진 주먹을 쥐고 문을 두드렸다. 응답이 없었다. 다니엘의 집이라고 확신했지만 한 번 더 힘주어 문을 두드릴 용기는 없었다. 가쁜 숨을 몰아쉬다 걸음을 돌렸다.
그리고 정말 이상하게도, 동네에 위치한 작은 편의점에서 나오는 다니엘과 맞닥뜨렸다. 다니엘이 성운을 발견한 것이 먼저였다. 언젠가 꿈에서 마주했을 때처럼 다니엘은 어, 하는 소리를 냈고 성운은 고개를 듦과 동시에 다니엘의 손목을 그러쥐었다. 꿈에서 성운이 이러한 행동을 할 때면, 그는 언제나 야속하게도 성운의 손아귀를 빠져나가곤 했다. 그러나 이번엔 달랐다. 성운은 깨어있었고, 비로소 현실이었다. 다니엘이 성운의 손에 들어찼다.
성운은 그제야 깨달았다. 늘 다니엘에게 전하고 싶던 말이 있었음을. 꿈과 현실의 경계에서 이제는 용기를 내고 싶었다. 결과가 어떻든 전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성운의 가슴에 설렘과 불안함이 들어차며 파도가 쳤고, 어김없이 물결에 휩쓸렸다.
“좋아해.”
“어?”
“내가 너 좋아한다고.”
성운은 다니엘과 눈을 맞췄다. 파도는 번져나가 성운의 눈동자에 일렁였다. 다니엘에게도 파도가 일었지만 달리 물결쳤다. 다니엘의 얼굴에 당혹이 어렸다. 그러지 않는 편이 더 이상했다. 영 서먹한 사이는 아니었지만, 유달리 각별하다고도 할 수 없었다. 말을 꺼내기 전 다니엘의 반응을 한 번쯤은 예상해 볼 수도 있었겠지만, 그런 여유는 성운에게 허락되지 않았다. 그와 다니엘이 겹쳐지는 순간, 꿈에서 깨어나 내달렸을 뿐이었다. 그리고 가슴속에서만 일렁이던 것을 꺼내어 다니엘에게 보였다. 그것을 받아들이거나 밀어내는 것은 오직 다니엘에게 달린 일이었다. 다니엘은 선뜻 몸을 내던지지도, 성운을 밀어내지도 못했다.
“그게, 나도 널…,”
좋아했는데-, 그것이 다니엘의 대답이었다.
성운이 꾸었던 꿈은 그저 성운의 무의식이 만들어낸 환상에 그치는 것은 아니었다. 분명한 다니엘과 성운의 시간이었다. 성운이 느낀 것은 기시감이라 할 수 없었다. 겪지 못한 일이 아니므로. 굳이 따져 말하자면, 기억이었다. 떠올려보려 애를 쓸수록 희미해지는 것이 곧 기억이었고, 성운에게 있어 유일한 기억은 그날 밤의 꿈들이었다. 3년의 시간 동안 꺼내어 볼 일이 없어 묵혀두었던 기억이 일순간 무의식을 통해 다시 꺼내어진 것이라 하는 게 맞았다.
성운은 꿈속에서 행복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꿈속의 그, 그러니까, 당시의 다니엘은, 성운과 같은 마음이었다. 둘은 서로를 향해 있었고, 함께 파도쳤다. 성운은 이제야 그 소용돌이의 중심으로 들어선 것이었고, 다니엘이라고 하면 조금 달랐다. 성운은 떠나기 전 끝내 전하지 못할 마음이라 여기고 접었다. 그래서 잊을 수 있었고, 다시 마주할 수도 있었다. 다니엘은 잊으려 하지 않았다. 조금씩 계속 떠오르는 것을 그대로 두었다. 그러던 것이 무뎌졌다. 가슴속에 들끓는 파도를 혼자서 삭였다. 다니엘의 마음은 성운의 것처럼 잠시 접어두었다가 다시 펼쳐 보일 수 있는 것이 못 되었다. 성운의 마음이 파도 위에 떠있던 돛단배라면 다니엘의 마음은 이미 파도 속으로 가라앉은 후였다.
“지금은, 솔직히 잘 모르겠어.”
어떻게 집으로 돌아왔는지 성운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다니엘에게서 어떤 반응을 기대한 것인지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결과가 어떻든 이제는 전하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그래야만 한다고 생각했는데,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왜 이제야 깨달았냐고, 네 꿈에 나온 게 나인지 정말 몰랐느냐고. 다니엘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오길. 그런 허황된 꿈이라도 꾸었던 걸까. 성운은 스스로 자조했다.
성운은 다시 집안에 틀어박혀 지냈다. 더 이상 꿈도 꾸지 않았다. 꿈속의 그를 찾기 위해서라도 밖으로 걸음을 옮겼던 성운이지만,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꿈도 더 이상 성운을 괴롭히지 않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꿈이란, 참 이상하다.
며칠 집에 머물렀던 사촌동생을 배웅하러 나갔다 돌아오는 길에 다니엘을 만났던 편의점 앞을 지나쳤다. 그냥 지나치면 되었을 것을, 괜히 그날이 생각나 걸음을 멈추는 바람에 성운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다 문득 뭐라도 사갈까 싶어 편의점에 들어섰다. 그리고 밖으로 나오자, 다니엘이 있었다.
다니엘은 그날의 성운과 같이 숨이 차 있었다. 머리는 바람에 흩날렸고, 이마에는 땀방울도 맺혀있었다. 성운은 저도 모르게 그날의 다니엘처럼 어, 하는 소리를 냈다. 그 순간 성운의 손목을 잡아챈 다니엘의 눈동자에는 파도가 담겨 있었다.
“좋아해.”
나도 널 아직 좋아해.
성운은 그대로 얼어붙었다. 성운의 가슴에 다시금 파도가 쳤다.
꿈이란, 참 이상하다. 성운을 무던히도 괴롭히던 꿈은 성운이 꺼내 보인 파도와 함께 다니엘에게 건네졌다. 다니엘은 단번에 성운을 알아볼 수밖에 없었고, 파도 속으로 깊이 가라앉았던 것이 조금씩 계속 떠오르는 것을 그대로 두었다. 다니엘은 직시했다. 늘 성운에게 전하고 싶던 말이 있었음을. 그것이 비록 심해에 잠겨버렸을지라도 없는 것이 되지는 않는다는 것을. 꿈과 현실의 경계에서 이제는 용기를 내고 싶었다. 결과가 어떻든 전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가슴에 설렘과 불안함이 들어차며 파도가 쳤고, 어김없이 물결에 휩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