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편한 키스
Written by 으뭉
호- 갓 내린 아메리카노를 손에 쥐고 다시 거리를 찾았다. 아, 쓰다. 뜨거운 것도, 쓴 것도 잘 먹지 못하는 내가 습관처럼 아메리카노를 사 먹는 데 이유는 딱 하나였다. 이 거리만 오면, 아니 사실 그게 무엇이든 하나를 떠올리면 마인드맵이라도 작동된 듯 그 아이가 귀신같이 떠올랐다. 떠올리지 않아야지 할수록 폭풍처럼 몰려오는 과거라는 타이틀의 필름이 머릿속에 가득 차 더이상 손 쓸 수가 없었다. 사랑은 사랑으로 잊는 것이라든가 시간이 약이다 라든가 하는 말은 다 시발이다. 1년간의 자기성찰로 도출해 낸 결과였다. 아무리 다른 사람을 만나봐도 그 아이만큼 성에 차는 사람은 없었다.
비록 지금은, 곁에 없지만.
어두워진 하늘과는 상반되게 거리는 반짝이는 불빛으로 환하게 빛났다. 포장마차 하나가 그 많은 빛들을 뚫고 나와 눈에 꽂혔다. 파전 12000원. 참 좋아했는데. 비 오는 날 포장마차에서 먹는 파전에 소주를 좋아했다. 그리고, 아무 생각 없이 거리를 걷는 걸 좋아했다.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를 듣고, 그들이 사랑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왠지 모르게 마음이 편해진다고 했다.
장거리 연애는 아니었지만, 암묵의 룰이라도 정해진 듯 나를 만나러 온 건 그 아이 쪽이었다. 그 때는 마냥 좋았는데, 떠난 사람은 모른다. 첫 데이트 장소였던 그 카페에도, 겨울이면 항상 찾은 오뎅마차에도, 동네에서 유명한 맛집으로 소문났다고 해서 설레는 마음으로 갔다가 그 뒤로 한번도 가지 않았던 식당에도 그 아이의 흔적이 덕지덕지 붙어 있다는 것을. 더 사랑하는 사람이 진다고 했던가. 몸으로 더 노력한 사람이 더 사랑한 것이라고 친다면 이 말도 시발이다. 그 아이는 이 기분을 모를 것이다. 집 주변 어디를 가도 니가 있는데 내가 널 어떻게 잊겠냐고. 적어도 내가 이 곳을 떠나지 않는 이상 그 애를 잊기는 결코 쉬운일이 아니게 될 것 같았다.
사실 그 때 헤어지고 계속해서 붙잡은 건 오히려 그 애였다. 밤마다 연락이 오고, 집 앞에도 몇번 찾아 온 그 아이를 보며 상대적 우월감에 알 수 없는 쾌감을 느꼈다. 무슨 심보인지 나보다 더 힘들어하는 모습에 뿌듯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거기까지. 사랑은 장난이 아닌 걸 안다. 한번 시작한 건 되돌릴 수 없다는 것도. 그래서 연락 한 번 받아주지도, 만나주지도 않았다. 흔들지 말라고, 나는 이제 너를 떠나 보낼거라고. 끝이 이런거 보면 우린 인연이 아닌거라고. 지금에선 당연히 후회하고 있다. 그냥 모른 척 잡혀볼 걸. 그렇지만, 그럴 일은 없겠지만 니가 나를 다시 잡는다 해도 널 사랑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이런 짜증나는 외로움, 그리고 후회, 이거 한번이면 족하니까.
툭- 다 식은 커피를 반이나 남긴 채 쓰레기 통에 던져 넣었다. 나 이딴 거, 좋아하지도 않는다고. 괜히 기분이 나빠져 인상을 찌푸렸다. 오늘은 이만하면 됐다. 무슨 연유에서인지 평소보다 더 오래 방황했다. 찬 바람을 오래 쐬어서 그런지 몸이 오들오들 떨렸다. 코트를 감싸며 집으로 향하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더 있다가는 주책맞게 눈물이 날 것 같아서였다. 그러나 재촉한 발걸음도 얼마 안 가 멈춰야했다. 목을 감싸오는 단단한 팔뚝으로 인해서.
미안, 잠깐만 이래 있자.
목에 쑥 감겨오는 촉감은 꽤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계속 되뇌던 그 때의 감정이 더 극대화되는 것만 같았다. 보지 않아도 그 아이란 걸 알 수 있었다. 익숙한 향기, 그리고 익숙한 목소리.
"여기있네, 내 애인."
조금 더 죄어오는 팔을 타이르듯 움켜쥐었다. 힘을 준 손이 살짝 떨려왔지만 그 아인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너 뭐하는,"
"웃겨 정말. 장난 그만해."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하얀 피부를 갖고 긴 머리를 한, 누가봐도 아 소리 나올 정도의 미모를 가진 여자였다.
"장난 아인데, 내 남자 좋아한다."
다니엘의 입에서 나온 말이 가관이었다. 이게 지금 무슨 상황인건지, 도저히 감이 잡히질 않았다. 둘이 무슨 사인지도 모르겠고,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고, 도대체 난 왜 여기 껴있는 지가 제일 의문이었다.
"야,"
"허, 참. 내가 니 말에 속을 것 같니. 그럼 키스해 보든가."
아니 저 여자는 무슨 소리를 지껄이는거야. 다니엘도 적잖게 당황했는지 머리로 느껴지던 일정한 숨결이 잠시 멈췄다.
"그것봐, 키스도 못하면서 무슨 애인이래. 얼어죽을 게이는 또 뭐야."
"아니 이봐요."
얼어죽을? 지금 게이 앞에서 뭐라는거야 시발. 안 그래도 짜증나던 기분이 한층 업그레이드 됐다. 얘는 이런 말 듣고 뭐하는거야, 뭔 소리라도 해야할 것 아니야.
운아, 내 좀 도와줘라.
귓속을 파고드는 따뜻함에 몸이 발끝에서부터 부르르하고 떨려왔다. 감겨있던 팔이 풀리고 비로소 자유로워진 목이 살짝 시려올 때쯤 왼쪽 어깨에 강한 힘이 들어가는 걸 느꼈고, 몸이 빙그르르 돌아가는 건 순식간이었다.
지금의 너는 더 잘생겼구나. 1년만에 마주한 너를 보며 떠올린 생각은 고작 이거였다. 좀 붙어있던 젖살은 늠름하게 빠져 턱선이 훤히 드러나고, 키는 더 큰 것 같네. 왜 또 그렇게 웃는건데. 눈을 마주치자 슬며시 올라가는 입꼬리가 얄미웠다. 강하게 부여잡은 어깨가 점점 아파왔다. 아프다는 생각을 하자마자 어깨가 가벼워지자 얘는 독심술을 하는건가, 하는 거지같은 생각도 했다. 어깨를 떠난 손이 그대로 내 얼굴을 향했다. 오랜시간 밖에서 있었는지 볼에 느껴지는 촉감이 차가웠다. 그리고 곧 맞닿은 입술에 안 그래도 힘이 잔뜩 들어간 눈이 더욱 커졌다.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얘는 항상 그랬다. 이렇게 막무가내야. 너무 놀란 탓에 잠시 잃었던 초점을 다시 찾으니 다니엘과 눈이 마주쳤다. 그렇게 진지한 눈으로 보면, 나는 어쩌란 말이야. 거부할 수가 없었다. 뭔지 모를 이끌림에 밀쳐낼 수가, 없었다. 그렇게 단조로운 입맞춤이 끝날 즈음 촉촉한 무언가가 입술에 닿는 것이 느껴졌다. 아니, 이건 아니다. 방금, 아니 1년동안 계속 다짐해왔는데, 너를 사랑하지 않을 거라고. 그러나 혼자서 하는 다짐은 너에게 조그마한 영향조차 미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좆같은 심장이 또 세차게 뜀박질하고 있었으므로.
"시발,"
점점 심해지는 몸의 이상신호에 재빨리 그를 밀쳐냈다. 방금 느껴진 혀의 촉감이 아직도 살아있는 것 같아 입술을 벅벅 문질렀다. 좆같았다. 나를 이용한거다. 내가 아무리 눈치가 없다고 해도 그거 하나는 확실했다. 나는 이렇게 좆같은데, 더 좆같은 다니엘은 내가 아닌 다른 쪽을 보고 있었다. 눈을 따라가보니 아까 그 여자가 있던 곳이었다. 언제 가버린건지 그 여자는 자리에 있지 않았다. 욕짓거리를 하는 소리를 얼핏 들은 것도 같았다. 순간 울분이 차올랐다. 그 여자 때문에, 나 엿먹인거지 지금?
"오랜만이네 운아. 그제."
입을 열지 못하게 주먹을 한 대 날려줬어야 했다. 근데 시발, 떨리는 심장이 뭐라고 그걸 못하게 만들어. 울분이고 뭐고, 허리를 숙여 눈을 맞추며 손을 들어 내 머리를 헝클어뜨리는 다니엘을 쳐다만 볼 수 밖에 없었다. 너는 왜, 아직도 그런 눈으로 나를 보는건데. 손은 또 왜이리도 다정한건데.
"아까는 미안. 내 사정이 쫌 있었다."
물어보고 싶은 게 많았다. 그 여자는 누구고, 왜, 도대체 왜 나한테 왜 키스를 했어야만 했는지. 그러나 앞에 놓인 멀뚱멀뚱한 눈동자를 보니 입에 지퍼라도 달린 듯 열리지를 않았다. 자존심이 상했다. 이 아이는 나를 이상하리만치 편하게 대하고 있는데, 나만 떨고 있다.
"너는.. 너는 내가 편해?"
떨리는 눈을 들켜버릴까봐 다니엘의 눈을 피해 바닥으로 시선을 꽂았다.
"뭔소리고."
다니엘이 내 머리에서 손을 떼며 말했지만 시선은 계속 내 눈을 향하고 있는 게 느껴졌다. 뭔소리냐니. 나한테 키스했잖아. 근데도 이렇게 아무렇지 않은 거 보면 내가 편한 거잖아.
"키스.."
키스라는 단어가 원래 이렇게 낯간지러운 단어였나. 아까의 부드러웠던 촉감이 다시 생각나 얼굴이 달아올랐다. 시발..
"키스 했잖아."
붉어진 얼굴을 차마 보여주고 싶지 않아 두 손으로 얼굴을 움켜쥐었다. 아 존나 쪽팔려.
"귀 빨개졌다 운아. 니 부끄럽나 지금?"
다니엘이 뜨거워진 내 두 귀를 부여잡았다. 습관이 무섭다는 말은 딱 이 때 쓰는 말이다. 부끄러울 땐 항상 귀를 먼저 붉히는 나와, 그런 내 귀를 잡고 눈을 마주치며 환하게 웃는 다니엘을 향해 쓰는 말. 얼굴을 가리고 있던 손이 저절로 시야에서 사라졌다. 앞에 놓인 얼굴은 여전히 환하게 웃고 있다. 공중에서 마주친 시선이 뜨거웠다. 안되겠다. 거울 속의 나와 했던 약속들을 지키지 못할 것 같다. 너와 헤어지고 했던 그 수많은 다짐들이, 한순간에 무너져버렸다. 너를 다시 사랑하지 않겠다고 했던 말이 머릿속 어딘가로 꽁꽁 숨어버려 찾을 수가 없다.
내가 원하지 않던, 아니 사실은 그토록 원했던, 나의 하늘이 다시 열렸다.
그걸 깨달아버린 이 순간, 다른 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눈에 들어오는 것, 그것 하나를 향해 한 발을 내딛었다. 천천히 감싸쥔 얼굴이 차가웠다. 앞에 놓인 초롱초롱한 두 눈이 소리내어 말하고만 있는 것 같았다.
해줘, 그거.
그대로 입술이 맞붙었다. 뒷꿈치는 들 필요 없었다. 모든 것이 이미 나에게 맞추어져 있었기에. 입속으로 들어온 말캉함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입술의 촉감와는 다른 이질감에 다니엘의 혀를 살짝 깨물자 그의 입에서 피식-하고 웃음이 터져 나왔다. 입 안 구석구석을 훑는 그의 혀가 마치 한참동안 나를 기다려왔다고 말해주고 있는 것 같았다. 오랜만에 맛 본 다니엘의 키스는 여전히 짜릿했다. 하긴, 연애하는 동안 그와 하는 키스가 질린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다니엘은 키스에 있어서 항상 능숙했다. 과장을 더해 말하자면 다니엘과 키스를 할 때마다 매번 다른 쾌감을 느낄 수 있었다고 할 수도 있겠다. 여기까지 생각을 하고나니 문득 얘가 지금 왜 나랑 키스하고 있지 하는 생각이 들었고, 본능에 미쳐서 보지 못했던 주변환경이 보이기 시작했다. 우리가 서 있는 이곳은 사람들의 유동이 적지 않은 거리였다. 그나마 사람들이 잘 지나다니지 않는 골목에 발을 들이고 있어 눈에 잘 띌 것 같진 않았지만 누구라도 관심을 가진다면 쉽게 보일 것이었다. 누군가 우릴 보고 있다고 생각하니 헤아릴 수 없는 창피함이 순식간에 파도처럼 몰려왔다.
지금 나, 뭐하고 있는거지.
원래부터 받아들였던 적 없다는 듯 다니엘의 혀를 밀어내고 동시에 그의 가슴팍을 세게 쳐냈다. 빠르게 들이마쉬는 공기가 차가워 목이 따끔거렸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벙쪄있는 그의 눈과 다시 한번 마주치자 떠오른 건 하나였다. 시발, 도망가야겠다. 여기가 어디더라. 크게 들리는 심장소리 덕에 방향감각을 잃어버린 것이 틀림없었다.
후우. 비밀번호를 누르는 손길이 바빠졌다. 귀에서부터 얼굴 전체가 시뻘게진 나를 누군가가 볼까봐서였다. 떨리는 손으로 겨우 문을 열고 들어오자 온몸에 힘이 빠져 그대로 신발장에 기대었다. 멍 때리려고 하니 아까의 촉감이 다시 느껴지는 듯 해 입술을 엄지로 문질렀다. 내가.. 강다니엘이랑 키스했다. 미친거지. 미친 게 분명했다. 사랑하지 않을 거라면서, 그렇게 다짐을 해 놓고 이미 심장은 온전히 그에게로 돌아서버렸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쓸 데 없는 고민들이 머릿속을 헤집어 놓기 시작했다. 그래 다시 연락한다고 쳐. 아니 그 전에. 전화번호는? 집은, 어디사는 지 알아? 어떻게 만날건데. 모르겠다. 그런 것도 생각 안하고 무작정 들이박았으니. 제일 큰 관건은 다니엘이 아직 나를 사랑할 지, 나를 사랑해줄 지였다. 나 혼자 만나고 싶다고 그럴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 게다가, 내가 차버리고 다시 붙잡기까지 시도했다가 거절당한 다니엘이 나를 다시 받아줄까. 아 시발 모르겠다. 사랑이고 사람이고 존나 모르겠다. 신발장에 기댄 불편한 자세로 눈을 감았다. 다니엘이.. 나를 사랑해줬으면 좋겠다. 어쩌면, 아니 당연히 이기적인 생각이다. 내가 그렇게 거부해놓고 이제와서.
삑삑삑삑-
어정쩡하게 기대있던 몸이 용수철처럼 튕겨났다. 뭐, 뭐야? 아무리 생각해봐도 지금, 우리집 비밀번호를 알고 들어올 사람은 그 아이 하나였다. 다니엘.
"그렇게 먼저 가버리면 우야노, 운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