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리우니빌레
Written by 로로
"형은 날씨도 추운데 왜 요즘 갑자기 아이스크림을 입에 달고 살아."
"그냐앙. 맛있어서. 너두 한 입 먹을래?"
"아니 난 됐어."
"후회 할 텐데 이거 진짜 맛있는데."
한 두어 달 됐을 거다. 성운이 진한 분홍 색의 아이스크림에 빠진 게. 턱을 괴고 앉은 민현이 제 앞에 앉아 과장 좀 보태 몸 만한 아이스크림 통을 비우는 데 열중하고 있는 작은 정수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형 그러다 또 배탈 난다. 그리 엄하지는 않은 타박이었다. 배탈 나면 네가 민현이 손은 약손 해주면 되잖아. 이주 전쯤에 아이스크림 때문인지는 알 수 없으나 정말로 배탈이 났을 때 배를 끌어안고 데굴데굴 구르던 성운을 아기 안 듯이 안고 민현이 손은 약손, 을 한 적이 있었는데 민현이 커다란 손으로 몇 번 배를 문지르자마자 거짓말처럼 통증이 싹 가신 적이 있었다. 그 날의 기억을 떠올리며 말을 내뱉은 성운이 어느새 싹 비운 통 안으로 일회용 수저를 넣었다. 맛있다. 또 먹고 싶어. 의자에 등을 완전히 기대고 반쯤 누운 자세를 한 성운이 오늘은 더 이상 안된 다는 말을 표정으로 하고 있는 민현을 힐끔 바라보다 실실 웃었다. 아이스크림은 다 먹고 밥은 또 안 먹으려고 그러지? 성운이 뭐 그런 당연한 걸 묻느냐는 얼굴을 했다.
"귀여워."
"고마워."
"근데 좀 춥지 않아?"
"아니 괜찮은데."
"몸 찰 거 같아."
상체를 숙여 성운을 끌어 온 민현이 손을 꼭 잡아보다가 이마를 짚어보다가 팔을 꼭꼭 주물러보다가 다시 손을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야 너 왜 자꾸 나 만져. 성운이 키득키득거렸다. 그 말이 끝나자마자 가볍게 만지던 손길이 조금씩 끈적하게 변해갔다. 왜 만지냐는 말이 어딨어. 좋아서 만지지, 예뻐서, 귀여워서. 이번에는 민현이 고개를 숙이고 웃었다. 자꾸만 눈이 맞았다. 그럴 때마다 웃음이 터졌다.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그저 눈만 마주치고 있는데 그렇게 되는 거였다.
성운이 자리를 피해 노트북 앞으로 가 앉았다. 나 게임 할 거니까 건드리지 마.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성운의 뒤에 자리를 잡고 앉은 민현이 허리를 끌어 안았다. 게임에 집중을 할라치면 목덜미에 입을 맞추고 다시 집중을 할라치면 옷 속으로 자꾸만 손이 들어오는 바람에 결국 성운은 게임을 끌 수 밖에 없었다. 꼬물꼬물 몸을 돌려 마주보고 앉았다. 민현이 얼굴을 내려 이마를 꼭 맞댔다. 나 게임 하는데 왜 방해해. 너 때문에 나 제대루 못 했잖아. 방금 진짜 중요했는데 나 레벨 업 할 수 있었… 툴툴거리는 말들이 민현의 뜨거운 입술 안으로 먹혀 들어 갔다. 혀가 섞이고 입 안을 훑을 때마다 또 달콤한 맛이 났다.
"달아."
"내가?"
"응."
"너 그 소리 하니까 옛날 생각 난다."
"언제?"
"우리 벚꽃 보러 갔을 때."
"아."
만개한 벚꽃이 성운의 머리 결 위로 떨어져 흩어지는 걸 보며 걷던 날을 떠올렸다. 아마도 그 날부터였다. 서로에게 말을 하지 못하고 있던 간질간질하던 감정을 확인함과 동시에 살랑살랑한 봄바람을 함께 맞자 약속을 한 때가. 형, 근데 그 때도 봄이었는데 왜 지금도 봄 같지. 입술로 닿아 오는 숨결 속에 민현이 뱉는 단 말들이 녹아 들었다. 정수리 위에 올라 앉은 벚꽃들을 털어주던 손이 이제는 단단하게 어깨를 감싸 쥐고 있었다.
형만 보면 너무 달아요. 뭐라고 해야 되지 기분이랑 머리 속이 전부 다 달아요. 괴로울 정도로요. 잠도 잘 못 자요. 그래서 저 그냥 이대로 살아가기가 너무 힘들어요. 그래서, 그게, 그러니까 형, 형은 저 어때요? 횡설수설 이어지던 고백을 마친 민현이 혀로 입술을 쓸다 고개를 숙였다. 참다 참다가 뱉어버리기는 했는데 너무 멋이 없는 고백이었나 하는 생각에 순간적으로 현타가 왔기 때문이었다. 그거 나 좋다는 말 인 거지? 나도 너 좋아. 성운의 한 마디에 녹아버린 마음이 또 한번 살랑 불어오는 바람에 흩날리는 벚꽃처럼 흩어졌다.
"민현아 고개 쫌 숙여 바."
"왜요?"
"아니 여기두 벚꽃 있어서."
성운이 편하게 벚꽃을 떼어 줄 수 있을 만큼 상체를 숙인 민현이 손을 붙잡았다. 민현아 이거 봐. 들뜬 목소리의 성운이 내민 벚꽃 잎의 모양이, 사랑 모양 이었다. 이거 완전 하트 모양 같지? 민현은 손바닥 제 위에 살며시 놓인 사랑 모양의 꽃 잎이 봄바람에 날아 갈 새라 손을 접었다. 형은 정말 사랑인 거 같아요. 꽃도 이런 모양이 형 손에 잡히잖아요. 성운이 작게 웃었다. 네 머리 위에 있었고, 난 떼어준 것 밖에 없는데? 그러니까 나보다 네가 더 사랑이지. 서로가 사랑이라고 우겼다. 결국은 전부가 사랑인 결론이 나질 않는 다툼은 한동안 계속 되었다.
그리고 걸었다. 벚꽃 나무가 흐드러진 거리 위를. 구경을 하러 왔을 때와는 확실히 다른 바람이 불었다. 아 형 잠깐만요. 성운의 손을 잡고 느리게 발을 맞춰 걷던 민현이 다른 손 안에 여전히 쥐고 있던 꽃 잎을 지갑 안으로 넣었다. 신분증 위의 얼굴 사진이 사랑 모양의 꽃 잎에 가려졌다. 꽃 땜에 네 잘생긴 얼굴 가려져서 어떡해. 다시 손을 잡은 민현이 수줍은 얼굴을 하고 조금 전 고백을 마쳤을 때처럼 고개를 숙였다. 이따금씩 웃기도 하다가 혼자서 고개를 절레절레 젓기도 했다.
"형 저 잘생겼어요?"
"어? 갑자기 뭐야."
"아니 아까 저 잘생겼다면서요."
"아…"
"…"
"잘생겼지 그럼."
"…"
"누구 건데."
수줍게 웃고 있던 민현이 눈을 깜빡깜빡 했다. 그냥 가끔 나오는 습관 같은 거였다. 그러다 다시 표정을 풀고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그랬지 나 형 거 되기로 했지. 속으로 몇 번이나 되뇌었다. 한 마디 한 마디에 모든 게 녹아 내렸다. 아, 민현아 잠깐만 손바닥에 땀 찬다. 성운이 내내 잡고 있던 손을 풀었다. 미묘하게 풀이 죽은 민현의 눈치를 살피다 팔을 잡고 늘어졌다. 가다가 맥주 한 잔 할까? 자연스럽게 팔짱을 껴 오는 성운에 두근거리는 심장 때문이었을까 길가에 굴러다니는 돌멩이들이 전부 알사탕으로 보였고 여전히 불어 오고 있는 바람을 타고 여기 저기로 흩어져있는 세상의 달콤한 향들이 전해져 오는 것 같았다.
"좋아해요 형."
"나도."
"…"
마음 속에 서로가 피어난 날의 시간이었다.
그때 너 되게 귀여웠는데. 정신 없이 성운을 품고 있던 민현이 과거 형의 말에 발끈했다. 지금은 어떤데? 대답을 기다리면서 허리를 끌어안고 목덜미에 입을 맞추기 시작했다. 언제 입술을 대도 따뜻하고 달았다. 지금은 좀.. 뭐라고 그래야 하지. 성운이 말을 시작하자 민현은 잠시 입맞춤을 멈추고 상체를 세워 성운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눈이 맞자마자 또 웃음이 올라왔다. 성운이 손을 올려 민현의 얼굴을 양 손에 담았다.
"능글맞아 졌고, 그 때보다 많이."
"…"
"근데 좋아."
"섹시하단 소리야?"
"능글맞다는 게 왜 섹시하다가 돼?"
"그 때는 형이 팔짱만 껴도 덜덜 떨었는데 지금은 여기저기 다 만진다, 그래서 흥분 되고 그러니까 섹시하다. 이거 아니야?"
"개소리도 늘었지."
어느새 입술을 다시 대고 있던 민현이 피식 웃었다. 이렇게 밝히는 애 일거라고는 상상도 못했고. 티 안을 파고드는 작은 얼굴에 성운이 한 품 가득 민현을 끌어안았다. 마지막은 솔직히 나도 마찬가지다 형. 축축하고 단 숨결이 티 안을 채워가자 체온이 상승했다. 야 그래도 너보다는 아니야 진짜루우.. 슬슬 풀려가는 목소리로, 아, 아이스크림 먹고 싶다. 점점 더 얼굴이 깊이 들어 오는 것을 느끼면서 성운이 중얼거렸다.
보일러를 얼마나 세게 틀어 놓은 건지 온 집 안이 푹푹 쪘다. 일주일 전부터 추워 죽겠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더니 결국에는 감기에 걸렸는지 머리 끝까지 이불을 뒤집어 쓴 작은 인영을 가만히 바라보던 민현이 바닥 위에 깔린 두툼한 매트리스 위에 털썩 앉았다. 가까이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몸에서 나는 열이 퐁퐁 전해져 왔다. 인기척을 느끼지 못했는지 미동도 않고 있던 몸이 민현이 자세를 고쳐 앉느라 몸을 조금 움직이니 그제서야 끄응.. 앓는 소리를 내며 꿈틀거렸다. 형, 나 왔어. 괜찮아? 조심스럽게 이불을 걷어내자 식은땀을 매단 이마와 퉁퉁 부어 오른 눈이 드러났다. 응.. 민현아 와써? 나 괜차나. 열만 좀 있어가주구.. 다른 데는 다 괜찮아. 잔뜩 잠긴 목소리였다. 아직 찬기가 남아 있는 손으로 이마를 짚어 보았다. 아.. 차가워. 성운이 몸을 살짝 움츠렸다. 열에 취해 풀린 눈의 성운이 온통 제 열 기운으로 가득한 이불 안에서 손을 내서 민현의 손을 꼭 잡았다.
"나 먹고 싶어."
"뭘?"
"아이스크림.."
몸살에 걸려 움직이지도 못하고 있으면서 또 아이스크림 타령을 하는 성운에 민현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요 근래 무슨 일인지 아침 저녁 할 거 없이 아이스크림을 먹던 것도 오늘 이렇게 아픈 데에 한 원인이 되었을 거였다. 성운이 입술을 내밀었다. 그런 표정 지어도 소용 없어. 절대 안 돼 오늘은. 습관적으로 손을 살살 쓰다듬던 민현이 다시 이불 안으로 성운의 손을 넣어주었다. 나 진짜로 엄청 먹고 싶은데.. 성운이 말끝을 늘였다. 민현아.. 민현아. 열이 오른 눈에 눈물이 가득 담겼다. 그제도 한 번 민현이 손은 약손도 들지 않는 큰 배탈을 앓아 놓고 또 붙잡고 한다는 말이 아이스크림 먹고 싶어 라니. 그 때 역시 바로 또 아이스크림, 아이스크림, 하는 성운에게 원하는 타이밍에 아이스크림을 꺼내다 주지 않은 적이 있었는데 그 때와는 사뭇 다른 얼굴이었다. 제 엉덩이를 툭툭 발로 치면서 빨리 꺼내와 달라고 빽 소리를 지르다가 끝까지 안 된다는 말에 쿵쾅거리는 발소리를 내며 냉장고 앞까지 걸어가던 성운이 아니라, 그게 그렇게 먹고 싶은지 힘이 없는 손으로 제 손을 붙잡고 애원하며 울먹이는 성운이 있었다.
"나 밥두 못 먹구. 언제 먹었는지 기억도 안 나구."
"그럼 밥을 먹어야지. 형 열도 이렇게 높은데 무슨 아이스크림이야."
"입 맛이 없어서.. 입도 텁텁하구."
"그럼 내가 죽이라도 끓여줄게."
일어나려고 폼을 잡던 민현이 털썩 주저앉았다. 다급하게 옷깃을 부여 잡은 성운 때문이었다. 나 진짜 소원인데 안 돼? 맺혀 있던 더운 울음이 한 방울 툭, 떨어졌다. 먹고 싶은데.. 나 기운도 없어서 움직일 수도 없구. 그래서.. 너 오면 부탁 할라구 계속 기다렸는데.. 말을 하는 것마저 힘에 부치는지 뚝뚝 끊기는 음성이 퍽 안쓰럽게 귀에 박혀 들었다. 아니 뭐 또 그런걸 가지고 울어. 처음 보는 눈물이었다. 그러니까 관계를 가질 때 흥분 감에 눈물이 고여 들어 흘릴 듯 말 듯 하는 것 의외에 진심으로 뚝뚝 흘리는 눈물은 처음이었다. 그게 금세 눈물을 흘려버릴 만큼 서러웠나. 놀라기도 했고 귀엽게도 보여서 끝내는 민현이 항복을 선언하고 말았다.
"내가 형 때문에 못 살아."
"먹구 싶어어.."
"가져다 줄 테니까 그럼 내가 주는 대로 먹어."
"어? 먹여 준다구..? 으응.. 빨리."
분명히 그제 까지만 해도 냉동실이 꽉 차 있던 것 같은데 어느새 겨우 한 통 남은 아이스크림 통을 꺼내 앉은 민현이 겨우겨우 몸을 일으키려는 성운의 어깨와 등을 받쳐주었다. 축 늘어진 몸이 완전히 민현의 품 안에 들어 찼다. 몸도 뜨거운 거 봐. 진짜 괜찮겠어? 성운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머리가 띵하고 울려서 한숨을 크게 뱉었다. 민현은 제 가슴에 기댄 성운의 등을 잠시 끌어안아주고 있다가 이불을 끌어다 등에 덮어주고는 성운의 앞으로 가 앉았다. 혹시 앉아 있는 게 힘들까 해서 벽에 등을 기댈 수 있게 엉덩이 아래로 손을 넣어 몸을 옮겨주기까지 했다. 대신 열 번만 먹는 거야. 성운은 못마땅한 표정이었지만 더 고집을 부리지는 않았다.
"아 해봐."
"응.. 빨리 먹고 싶어."
"따뜻하게 해서 줄게."
따뜻하게.. 라고. 웅얼거리던 얼굴에 이내 웃음이 번졌다. 아이스크림 뚜껑을 연 민현이 간간히 붉은 덩어리들이 섞여 있는 분홍 색의 아이스크림을 한 숟갈 입에 넣더니 그걸 그대로 성운의 입 안으로 넘겨주기 시작했다. 입 안으로 들어 온 아이스크림은 차가운데 따뜻했고 따뜻한데 차가웠다. 묘한 감각이었다. 그래도 차갑지? 성운이 그렇다고 대답을 한 네 번째 숟갈부터는 넘겨주고 바로 입을 떼는 게 아니라 성운이 아이스크림을 완전히 다 삼킬 때까지 입 안을 혀로 꼼꼼하게 훑어주었다. 야.. 민현아 근데 너 이러다가 감기 옮으면 어떡해. 성운의 손가락이 걱정스럽게 민현의 허벅지 위를 훑었다. 나 걱정 하지 말고 형 빨리 나을 생각이나 해. 이게 뭐야 얼굴은 퉁퉁 부어가지고. 다정하게 대답을 마친 민현이 다시 달콤한 아이스크림을 넘겨주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게 무슨 맛 이더라. 민현은 평소에 성운처럼 아이스크림을 자주 먹는 편은 아니었다. 그나마 먹을 타이밍이 있는 때에는 슈퍼나 편의점에서 파는 아이스크림을 주로 먹었기 때문에 그런 민현에게는 유명 프렌차이즈 가게의 아이스크림 맛이나 이름들이 너무 어려웠다. 이게 딸기 맛 인가. 아니야 체리 인가. 이름이 써 있는 것도 아니라서 종 잡기가 더 어려웠다.
"나 딱 한 번만 더.."
"마지막이야."
"응.. 아, 미, 민현아.."
마지막 한 입은 그대로 긴 키스로 이어졌다. 성운이 민현의 옷깃을 꼭 붙잡고 더운 숨을 색색 내쉬었다. 형 오늘 따라 훨씬 더 달다. 장난스럽게 말을 건네자 성운이 힘 없는 주먹으로 가슴팍을 툭 쳤다. 이게 그렇게 먹고 싶었어? 울기까지 하고. 눈가를 부드럽게 스치는 손가락의 온도에 그대로 민현의 품에 이마를 기댄 성운이 팔을 뻗어 목을 끌어 안았다. 몸이 완전히 작게 말려 있어서 정말로 품에 꼭 들어 맞았다. 민현아 오늘 자고 갈 거지? 애틋한 목소리였다. 마치 자고 갈 거냐고 묻는 게 아니라 자고 가라고 말을 하는 것 같은 음성. 등을 부드럽게 쓸던 민현이 어깨에 턱을 기댄 채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형을 어떻게 두고 가."
"고마워."
"얼른 나아."
"응.."
성운을 다시 눕힌 민현은 먼저 씻고 편안한 옷으로 갈아 입었다. 성운의 옷장 한 켠은 이미 민현의 옷들로 가득했다. 그 쪽에 겉옷을 거는 손길이 익숙했다. 그러는 동안 성운은 다시 잠에 든 것 같았다. 이마에 다시 한번 손을 올려 본 민현이 좁은 원룸 안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며칠 안 오면 금세 이렇게 너저분해 졌다. 책상 의자에 아무렇게나 걸려 있는 옷가지들을 빨래 통에 넣고 바닥을 쓸고 닦았다. 아이스크림 말곤 정말 먹은 게 없는 지 몇 개 없는 설거지를 하고 찬장 청소에 집중을 하던 민현이 끙끙 앓는 소리에 얼른 성운에게로 가까이 다가가 앉았다. 왜 그래 많이 아파? 열 나? 성운이 가만히 눈을 떴다. 그러더니 얼굴을 만져주는 손을 꼭 잡고 민현을 자꾸 제 쪽으로 잡아 끄는 거였다. 민현아 나 꿈 꿨어. 나 안아 줘. 오늘따라 성운이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았다. 이렇게까지 어리광을 부린 적이 있었나. 성운의 손에 이끌려 얼굴을 바라보며 옆으로 꼭 누운 민현이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빗겨주었다.
"무슨 꿈 꿨는데."
"네가 아이스크림 사온다구 나갔거든."
"응, 응."
"근데 안 돌아 왔어."
"…"
"금방 온다고 했는데 안 오는 거야."
"…"
이제는 꿈에서마저 아이스크림이냐고 타박을 하는 목소리가 조금 전 입에서 입으로 아이스크림을 넘겨줄 때보다 달콤했다. 내가? 왜 그랬지. 성운이 정말 서럽다는 듯이, 슬프다는 듯이, 겁을 먹은 얼굴을 하고 안겼다. 우리 형이 그게 무서워서 깼구나. 내가 안 와서. 애정이 그득 담긴 눈과 볼을 쓰다듬는 엄지와 귀여워 죽겠다는 표정까지. 성운이 그 하나하나를 눈에 꼭꼭 담았다. 그리고는 저도 손을 뻗어 민현의 얼굴을 붙잡고 쪽쪽 소리가 나도록 입을 맞췄다. 입술이 뜨거웠다. 형 아프니까 진짜 귀엽다. 원래도 귀엽기는 했는데 이건 좀.. 달라. 빨리 나아야 되는데 귀여워서 계속 보고 싶어. 성운이 아 몰라아.. 놀려? 나 힘 나면 너 주겄어. 작게 중얼거렸다. 그리고 다시 시작된 쪽, 쪽, 소리가 나는 입맞춤을 민현은 가만히 받고 있었다. 아까 나던 아직도 정확한 맛을 모르는 아이스크림 맛이 나는 거 같기도 하고 그랬다.
"잠 다 깼어?"
"응 모르겠어 지금은 괜찮아."
"밥은? 계속 못 먹었잖아."
"…"
"뭐 좀 줄까?"
"…"
표정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성운이 말을 꺼내기도 전에 민현이 안돼. 먼저 대답을 했다. 성운이 히잉.. 이불 안으로 고개를 파묻었다. 드러난 작고 귀여운 정수리가 심통이 났다고 시위라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어차피 먹을 것도 없어 아까 남은 거 다 먹은 거야. 성운이 조심스럽게 고개를 빼 민현을 바라보았다. 네가 사다 주면 되자나. 아이스크림을 사러 간다고 해놓고 돌아 오지 않는 꿈을 꿔 불안에 떨며 눈을 뜰 땐 언제고 아이스크림을 사다 달라는 투정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형 나 아이스크림 사러 나갔다가 안 돌아 오면 어쩌려고. 툭 뱉은 말에 성운이 왜 그런 말을 하느냐고 살짝 울음 기가 섞인 목소리로 툴툴거렸다.
"아 왜 그러는데 진짜루.."
"귀여워서."
"모야 진짜. 낫기만 해 봐 너어.."
"그럼 내가 죽도 같이 사올 테니까 죽 먼저 먹고 먹자."
"…"
"어?"
"아라써.."
그러겠다고 하지 않으면 이번에는 단호한 민현을 이기지 못할 거 같아서 성운이 끝내는 알겠다고 대답을 했다. 착하네 우리 형. 민현은 몸을 일으키기 전에 뚱한 성운의 얼굴 곳곳에 입을 다 맞췄다. 형 이십 분만 기다려. 금방 올게. 말을 마친 민현이 늘어진 몸에 이불을 꼭 덮어준 후에 대충 겉옷만 챙겨 입고 집을 나섰다.
쌀쌀한 날씨에 몸이 절로 움츠러들었다. 죽 집에 먼저 가서 포장을 부탁하고 근처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아이스크림을 사서 돌아오는 길에 죽을 가져가면 되겠다. 민현이 머리 속으로 생각을 정리했다. 죽은 며칠을 제대로 밥을 먹지 못한 성운이니 최대한 자극이 없는 맛으로. 걷는 내내 성운의 울먹거리는 얼굴이나 찡찡거리는 목소리가 떠올랐다. 평소에 볼 수 없는 모습이라 지금 떠올리는 것만으로 심장이 아픈 느낌이 들었다. 귀여워, 사람이 귀여워도 너무 귀여웠다. 사람이 힘 없이 늘어지는 어쩌면 그리 귀여울 수가 있지. 실실 웃음을 터뜨리며 죽 집에 도착한 민현은 잣죽 포장을 부탁하고 먼저 결제까지 마쳤다. 시간이 걸린다는 말에 생각을 했던 대로 잠시 아이스크림 가게에 들렀다. 환한 조명 아래에 수많은 종류의 아이스크림들이 눈에 들어왔다.
"뭐지.."
"…"
"뭐가 이렇게 많아."
진작에 이름을 물어보고 올 것을. 서른 개가 넘는 종류들 앞에서 고민을 하던 민현이 아까의 기억을 겨우겨우 꺼내 가장 비슷해 보이는 종류 두 가지를 마음 속 후보로 올렸다. 먹을 때도 생각을 했지만 실제로 보니 더 긴가민가했다. 그게 이거고 이거 그거 같았다. 뭐야, 대체. 후보에 올린 두 가지 역시 하나는 딸기 맛이었고 하나는 체리 맛이었다. 분명 둘 중에 하나 인 건 분명할 것 같은데 도저히 성운이 요즘 푹 빠져있는 그 맛이 뭔지를 알 수가 없는 거였다. 저, 혹시 고르기 어려우시면 맛보기 스푼으로 맛 보실 수 있으시니까 편하게 말씀 해 주세요. 상냥한 말에 민현이 머쓱하게 머리를 긁적였다. 엄청 고민을 하는 게 다 티가 난 것 같았다.
"아 저 그러면 저기 체리쥬빌레 한 번 먹어볼 수 있나요?"
"예 잠시만요."
게다가 꽝꽝 얼어있는 색만 봤더니 고르는 게 더 어려워서 민현은 모 아니면 도라는 마음으로 제 앞으로 내밀어진 작은 스푼을 받았다. 이게 맞나. 고민 끝에 입 안으로 아이스크림을 넣었을 때, 온 입 안에 달달한 성운의 맛이 퍼졌다. 그러니까 오후 내리 나누던 키스의 맛이 확 나는 거였다. 아.. 꼬물거리고 있을 성운 생각이 간절해졌다. 저 제일 큰 통에다가 체리쥬빌레로만 가득 채워주세요. 이거였구나. 진하게 남은 향은 민현이 결제를 마치고 미리 주문을 해 놓은 죽을 받아 집을 향해 걸을 때까지 계속 입 안을 맴돌았다. 걸음이 다급해졌다. 돌겠다, 미치겠다, 를 몇 번씩이나 반복하며 빠르게 걸어 현관 비밀번호를 누르고 들어 서 이불 위에 앉아 있는 성운의 앞에 다가 서 앉을 때까지도 계속. 형 왜 일어 나 있어. 누워 있지. 무릎 위에 턱을 대고 있던 성운이 다짜고짜 민현을 끌어 안고 매달렸다. 야 너 뭐야아.. 진짜. 이십 분만 기다리라더니 뭐야아.. 너 나간 지 지금 삼십 분도 더 넘었잖아. 민현이 바로 등을 토닥거려 주었다.
"걱정 돼서 일어 나 있었어?"
"내가 꿈 꿨다구 그랬잖아 근데 안 오니까 그랬지."
"귀여워서 어떡하지. 하성운."
"…"
"…"
"몰라 빨리 가서 아이스크림 넣어 놔. 녹는단 말, 읍.."
아이스크림은 녹고 죽은 다 식어버릴 거였다. 그래도 민현은 당장의 감정을, 체리 맛이 나는 키스를 도저히 멈출 수가 없었다. 그대로 성운을 편하게 눕히고 도톰한 아랫입술을 쪽 빨고 물고 늘어졌다. 성운이 퐁퐁 열을 뱉어 냈다. 아아, 갑자기 뭐, 뭐야. 갑작스러웠지만 따뜻한 품이었고 부드러운 손길이었다.
"한 번도 안 단 적이 없어 형은."
"…"
"처음부터 그랬어."
"야."
"…"
"내가 단 게 아니라 네가 단 거야."
처음 그 날처럼 또 서로가 단 거라고 티격태격하기 시작했다. 끝이 없는 다툼이었다. 난 정말로 형 입 안에서 단 걸 느꼈어. 성운이 지지 않고 받아 쳤다. 나는 네 입에서 느꼈는데? 방금 사 온 아이스크림이 현관 앞에서 녹아가고 있는 것도 잊고, 나는 처음에 형 봤을 때부터 그런 느낌이었어. 나 그 날 아무것도 먹은 거 없는데 속이 달아서 죽을 거 같고. 그랬어. 그러니까 내가 아니라 형이 단 거지. 제발 이제 인정해, 반박 하지 마. 안 받아 줄 거니까. 달달한 논쟁은 계속 되고 있었다. 이제는 제법 진지하게 변한 민현의 얼굴을 가까이로 당긴 성운이 입술에 쪽 가벼운 입맞춤을 했다. 민현도 가끔씩 혀를 섞어주며 장단을 맞추다 깊은, 훨씬 더 깊은 키스로까지 이어졌다.
달콤한 기분이 사르르 퍼졌다.
"너 진짜 좋아."
"…"
"나 너 때문에 이제 다른 사람 절대 못 만나."
"만나게 안 해."
"…"
"그럴 리가 없잖아."
지갑 속 벚꽃의 사랑 마음과 현관 앞의 아이스크림의 단 기분이 논쟁 끝에 이내 웃음을 터뜨리며 다시 입술을 겹친 둘 이었다.
"내년에도 벚꽃 보러 가자."
"응. 민현아 근데에.."
"어. 왜?"
"우리 지금 이럴 때가 아니야. 내 아이스크림.."
"…"
다 녹았겠다고 속상해하는 성운을 달래고 아이스크림을 얼른 냉동실에 넣은 민현이 죽이 든 쇼핑백을 먼저 성운의 앞에 두었다. 아.. 먹기 싫다 이거. 이것도 열 번만 먹으면 안 돼? 아예 먹지 않는 것 보다는 나으니 민현이 그럼 그렇게 하라고 말을 했다. 한 번 받아 먹을 때마다 뽀뽀 해줄게. 이건 내가 넘겨주기가 좀 그러니까. 죽을 한 숟갈 뜬 민현이 후후, 입 바람을 불었다. 뽀뽀는 나 말구 네가 좋은 거잖아. 성운이 괜히 투덜거리는 소리를 했다. 왜 그러면 형은 뽀뽀 말고 다른 게 더 좋은 가봐? 또, 또 그 능글맞은 얼굴이 됐다. 식힌 죽을 받아 넘기며 성운이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는 무릎을 끌어안은 팔에 힘을 더 주고 또 한 숟갈 떠 먹여주려고 대기를 하고 있는 민현을 바라보다 입술을 죽 내밀었다.
"뽀뽀."
쪽, 뽀뽀, 쪽, 뽀뽀 열 숟가락만 먹겠다던 성운은 죽을 절반이 조금 못 되게 비워냈다. 민현이 만족한 얼굴로 머리를 쓰다듬었다.
"지친다."
"아이스크림 안 먹어?"
"쫌 이따가 먹을래 그냥.."
성운이 팔을 뻗었다. 나 일으켜 줘. 죽 통을 치우고 온 민현이 성운의 손을 잡아주는 대신 눈을 맞추고 앉았다. 왜 뭐, 나한테 말 해. 일어나지 말고. 아이스크림 가져다 줘? 처음보다는 훨씬 진정된 숨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아니 나 양치 할라구. 같이 하자 민현아. 성운이 제 이마에 손을 대고 열을 짚어 보는 민현의 손을 꼭 잡았다.
"그리구 나 한 시간만 더 자다가."
"…"
"아이스크림 주라."
"…"
"아까처럼."
성운을 가볍게 일으킨 민현이 등 뒤에서 허리에 팔을 감고 걸었다. 내가 주는 따뜻한 아이스크림이 먹고 싶다 이거지? 우리 성운이 형 솔직해서 너무 좋아. 능글능글 거리는 말에 성운이 팔꿈치로 배를 치려다 실패를 했다. 아직 힘이 다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너느은.. 그 자세 그대로 세면대 거울 앞에 선 둘의 눈이 거울 속에서 마주쳤다. 다 나으면 주거써 진짜루. 민현이 마음껏 죽여 달라고 너스레를 떨었다.
매운 치약으로도 사라지지 않을 만큼, 체리를 닮은 성운의 맛은 강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