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nder the sky
Written by 잔디밭
큰 날개를 가지고도 하늘을 날 수 없는 새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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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턴트는 벽에 등을 기댄 채 가만히 앉아 있었다. 방 안에 들어서자마자 자신을 내보내달라고 죽일 기세로 덤벼들거나, 눈에 증오나 원한 같은 걸 담은 채 노려보았다면 차라리 그게 더 현실감이 있을 것 같았다. 온통 벽이 하얗고 한쪽만 강화유리로 된 작은 방에 갇힌 뮤턴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그저 다니엘과 그의 사수를 잠깐 쳐다보고는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다니엘은 작은 목소리로 사수를 향해 저 뮤턴트는 말을 못 하냐고 물었다. 작고 고요한 방 안에는 소곤대는 다니엘의 목소리가 그대로 울려 퍼졌다. 청력에 이상이 없다면 저 뮤턴트도 다니엘의 말을 다 들었을 것이었다. 뮤턴트와 사수를 번갈아 쳐다보며 눈치를 보는 듯한 다니엘과는 달리 누가 듣건 개의치 않는다는 듯 원래 가진 제 목소리 그대로의 크기를 내는 사수는, 이 뮤턴트가 말을 못 하는 건 아니라고 대답해주었다.
“말을 아예 못하는 건 아니고, 한두 마디 하긴 해. 나도 별로 들어본 적은 없는데.. 뭐, 그렇지.”
연구소의 중심부에서 뮤턴트들을 어떤 방식으로 데리고 있으며, 어떤 실험을 가하는지, 그 자세한 내용들은 철저히 비밀에 가려져 있었다. 신임 연구원인 다니엘이 연구소 가장 구석진 곳에 방치되다시피한 뮤턴트 하나를 관리하는 일을 맡게 된 것도, 아직은 중요한 일을 맡을 수 있는 위치가 아니기 때문일 것이었다. 다니엘은 동기인 연구원들과 제각각 자신들이 맡은 잡무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제가 맡은 뮤턴트에 대한 입소문을 조금 전해 들었다.
처음에는 연구소의 고위 관계자들이 해마다 그의 경과를 상세히 보고받을 정도로 지대한 관심을 가진 뮤턴트 중 하나였다고 했다. 하지만 지금은 연구소 가장 구석진 곳의 작은 방 한 칸에 갇힌 채 신임 연구원인 제게 떠맡겨지다시피 한 걸 보면 고위 관계자란 분들은 이 뮤턴트에게 진작 흥미가 떨어진 게 분명했다.
제 동기들이 전해주던 말들을 떠올리며 다니엘은 손에 들고 있던 리포트를 몇 장 들춰보았다. 전투의지 없음. 특이점은.. 등 뒤에 큰 날개가 달려있는 것 말고는 별다른 능력이 없는 뮤턴트인 듯했다. 한쪽 날개의 길이가 저 작은 뮤턴트의 키만큼이나 길다고 서술되어 있었지만, 그의 새하얀 날개는 묶여있는 채였다. 날 수는 있는 건가? 날개를 가진 뮤턴트에 대한 리포트인데도 내용은 허울뿐이라 그가 날 수는 있는지, 아니면 저 희고 눈부신 날개가 그저 장식용에 불과한지조차 적혀있지 않았다. 다니엘은 제가 담당하게 될 뮤턴트가 어떤 녀석인지, 어떤 삶을 살아왔을지 그저 넘겨짚어보는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저 뮤턴트에게 물어도 지금은 전혀 대답해줄 것 같지 않았기 때문에.
전투능력이 월등히 높거나 특별히 쓰임새가 있을법한 능력을 가진 게 아니면 도태되는 게 지금 돌연변이들이 처한 현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뮤턴트가 여기서나마 근근이 살아가고 있는 이유는 아마도 꽤 어린 나이에 돌연변이로 발현되어 그때부터 연구소에 갇혀 살았기 때문일 것이라고 다니엘은 추측했다. 아니면 이런 뮤턴트는 진작에 싸구려 서커스단 같은데 팔려가서 저급한 인간들의 구경거리가 됐을 게 뻔했으니까.
다니엘이 몇 장 되지도 않는 리포트를 한참 뒤적이는 동안에도 뮤턴트는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아 투명한 창밖을 하염없이 바라보기만 했다. 오랜만에 먼지 없이 맑은 하늘은 눈이 부시도록 푸르렀다. 뮤턴트는 큰 날개를 가지고도 저 드넓은 하늘을 맘껏 날아다니지 못하고 좁은 방에 갇힌 채 그저 창밖을 바라만 봐야 했다. 다니엘은 불쌍한 처지의 뮤턴트에게 조금 동정심이 생길 것 같았지만, 그에게는 바깥세상의 먼지보다 연구소의 새하얀 벽이 더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다니엘이 리포트를 소리 나게 탁 덮을 때까지도 뮤턴트는 창밖에 시선을 고정한 채 여전히 말 한마디 없었다.
다니엘의 옆에서 하품을 쩍쩍 해대며 뮤턴트에게는 일말의 관심조차 갖지 않던 사수는 다니엘의 어깨를 몇 번 두드리고 그럼 앞으로 잘 부탁한다는 말을 하며, 저와 뮤턴트만 남겨둔 채 작은 방의 문을 열고 빠져나갔다. 신임 연구원으로 들어온 다니엘이 귀찮은 잡무에 해당하는 이 뮤턴트를 담당하게 됨으로써, 제 사수는 연구소에서 조금 더 중요한 일을 맡게 될 것이었다. 새로운 일에 대한 기대감으로 들뜬 채 방을 나서는 그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다니엘은 방문을 닫고 뮤턴트의 맞은편에 앉아 그제서야 그의 외양을 찬찬히 뜯어보기 시작했다.
지나치게 직관적이다 싶은 엔젤이라는 이름은 단순히 그가 크고 흰 날개를 가진 뮤턴트이기에 붙은 이름일 것이었다. 하지만 그의 모습을 마주하면 낯간지러운 이름도 전혀 위화감이 들지 않았다. 온통 하얀 방에 앉아있는 뮤턴트는 제 날개만큼이나 새하얗고 고운 피부를 가지고 있었고, 머리카락은 은빛으로 반짝여서,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흰색으로 작은 천사를 만든다면 그와 같은 모습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뮤턴트의 덩치는 다니엘보다 한참 작아서 리포트에 나와있는 나이는 저보다 두 살이 많았는데도 불구하고 마냥 보호해주어야 할 어린아이 같았다. 연구소에서 다른 뮤턴트를 본 적이 없는 다니엘은 이런 곳에 오래 갇혀 살다 보면 저렇게 다 자라지도 못하고 하얀색만 남게 되는 걸까, 하고 생각했다.
다니엘은 뮤턴트와 약간의 거리를 유지한 채 그를 정면으로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하지만 야속하리만치 창밖을 향해있는 뮤턴트의 시선은 움직이질 않았다. 그의 시선을 따라 창밖을 바라보면, 푸른 하늘 아래로 제각각 높낮이가 다른 성냥갑 같은 건물들이 줄지어 서있을 뿐이었다. 다니엘에게는 전혀 특별할 것이 없는 풍경이었다. 매일 밟는 땅, 들이내쉬는 공기, 마주치는 사람들... 뮤턴트가 아주 오랫동안 겪어보지 못했을 창밖의 모든 것들이 다니엘에게는 전혀 흥미롭지 않았다. 다니엘은 오히려 제 앞의 뮤턴트가 특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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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는 활달하고 건강했다. 친구들과 밖에서 뛰노는 것을 좋아했고, 다양한 운동도 곧잘 했다. 아이가 자랄수록 툭 불거져 나오는 날개뼈는 그저 젖살이 빠져서, 운동이 힘들어서, 그래서 야위어가는 것인 줄만 알았다. 어깻죽지와 등이 가렵다며 하루가 멀다 하고 긁어대던 아이는 날씨가 추워져 옷이 두꺼워지기 시작할 무렵부터는 더 이상 제 등을 긁지 않았다. 도톰한 옷 아래 가려진 날개뼈도 그리 도드라져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생각하고 믿으려 노력했다. 모두에게 비밀로 하면 잘 숨기고 살 수 있을 줄로만 알았다.
어느 날 학교 수업이 한창일 시간에 아이가 겁에 질린 채 다급하게 집에 돌아왔다. 체육시간에 옷을 갈아입는데 한 녀석이 제 날개뼈를 건드렸다고 했다. 아마 툭 불거져 나온 것이 별나다고 여겨 생각 없이 손을 대본 것이었을 터였다. 하지만 녀석의 얼굴이 삽시간에 굳어지는 것을 보고, 학교에는 대충 아프다는 핑계를 대며 허겁지겁 집에 왔다고 했다. 자초지종을 설명하면서도 두려움에 떠느라 횡설수설하는 아이를 껴안고 괜찮다고 등을 토닥여주는 것 말고는 해줄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손길 아래 바들바들 떨고 있는 것은, 아이의 작은 등을 거의 덮을 만큼 자라난 날개였다.
결국 정부 산하 연구소에서 나왔다는 사람들이 집에 들이닥쳐 기어코 아이를 데려가고 말았다. 누구를 탓해야 했을까. 도드라져 보이는 날개뼈를 건드린 그 녀석, 소문을 퍼트렸을 또 다른 녀석들, 순순히 집 주소를 알려줬을 학교 선생님, 돌연변이 유전자를 남긴 이름 모를 조상님... 사람을 유독 좋아했던 아이는,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는 이유로 연구소에 갇혀 바깥세상과는 더 이상 접촉할 수 없게 되었다. 작은 날개가 단단히 묶인 채 방 안에 갇혀있는 아이를 연구원들은 동물원의 침팬지 대하듯 했다. 차라리 침팬지의 처지가 더 나을 수도 있었다. 저들 멋대로 엔젤이라는 이름을 갖다 붙인 연구원들은 몇 년간 꾸준히 아이의 각종 능력치를 측정하고, 강제로 싸움을 종용해보기도 하고, 알 수 없는 약물을 주입하는 등 여러 실험을 자행했다. 그러는 동안 아이는 자라서 성인이 되었고, 처음 연구소에 들어올 때는 작은 등을 덮는 정도의 크기였던 날개도 제 키만큼이나 자랐다. 까맸던 머리는 실험으로 인한 스트레스 때문인지, 이름 모를 약물의 부작용인지, 아니면 그게 본래 그의 머리카락이 가진 색깔이었는지 점점 하얗게 색이 바래고 말았다.
성인이 된 뮤턴트 엔젤은 커다란 날개를 가지고도 싸움은커녕 움직이고자 하는 의지조차 희박했다. 연구원들이 그를 살살 구슬리며 설득하고 때로는 화를 내보기도 했지만 나아지는 건 없었다. 인내심이 바닥난 연구원들은 결국 엔젤의 리포트에 1등급부터 5등급까지의 돌연변이 등급 중 가장 낮은 쪽에 해당하는 1이라는 숫자를 적어냈다. 엔젤은 곧 연구소의 가장 구석에 위치한 작은 방으로 옮겨졌다. 이전처럼 많은 연구원들이 그를 관찰할 필요가 없어졌기에 신임 연구원 하나만 붙여 형식적인 관리만 하려는 것이었는데, 그 형식적인 관리를 처음 맡게 된 사람이 바로 다니엘의 사수였다.
다니엘의 사수는 좋게 말하자면 눈치가 빠르고 야망이 있는 사람이었다. 고위 관계자들 눈밖에 난 최하급 뮤턴트 관리 따위에 열성적으로 임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진작 알고 있었던 그는 엔젤에게 형식적인 것 이상의 관심을 갖지 않았다. 그의 관심사는 오로지 연구소의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는 것에만 집중되어 있었다. 있으나 마나 한 리포트 몇 장만 다니엘에게 넘겨준 채 제 사수는 엔젤이 갇혀있는 작은 방을 떠났고, 뮤턴트는 이제 오롯이 다니엘의 몫이 되었다.
한참 동안이나 저를 빤히 쳐다보는 시선에 엔젤은 창밖으로만 향했던 시선을 거두고 다니엘을 바라보았다. 선명한 그의 눈동자는 오히려 속에 아무것도 담고 있지 않은 듯 텅 비어 보였다. 분명히 얽힌 시선에도 다니엘은 엔젤이 저를 보는 것인지 아닌지조차 알 수 없어 가만히 그를 불러보았다.
“엔젤...?”
제 이름을 들은 뮤턴트는 오히려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돌려버렸다. 단단히 묶인 날개가 가늘게 떨리기 시작했다. 이곳에서의 네 삶은 도대체 어땠기에 너는 네 이름이 불리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애처롭게 떠는 걸까. 다니엘은 작은 몸의 떨림이 잦아들 때까지 이름도 부르지 않고 그저 그의 앞을 지키고 앉아있었다.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뮤턴트는 감고 있었던 눈을 살며시 떴다.
“니가 싫어하는 이름으론 안 부를게.”
내내 아무런 표정도 짓지 않던 뮤턴트는 다니엘의 말에 조금 놀란 듯 눈을 크게 떠 보이다가 표정을 굳혔다. 굳은 얼굴은 이내 찡그려지고, 아이처럼 구겨진 얼굴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의 얼굴근육이 이토록 다양한 표정을 만들어내는 것을 처음 본 다니엘은 잠시 멍하니 그가 우는 것을 바라만 보다가,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어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었다. 뮤턴트가 놀라지 않도록 천천히 뻗은 손은 눈가를 부드럽게 훑었다. 연구소에 갇힌 이후 처음으로 느껴보는 따뜻한 손길에 뮤턴트는 눈물샘이 고장 난 듯 눈물을 쏟아냈다. 다니엘은 제 하얀 가운의 소매로 넘쳐흐르는 눈물방울을 연신 찍어냈다. 방류하는 댐처럼 한참을 울던 뮤턴트는 눈물을 다 쏟아부었는지 다시 얼굴을 굳혔고, 발갛게 부은 눈은 이내 창밖을 향했다.
“원래 이름은 뭐였는데?”
다니엘은 제 뮤턴트를 조금 더 많이 알고 싶었다. 하지만 뮤턴트는 젖은 속눈썹으로 눈동자에 그늘을 만든 채 여전히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사실 제 뮤턴트의 무표정하지 않은 얼굴을 처음 본 것만으로도 다니엘은 적잖이 놀랐지만, 우는 게 아니라 웃는 얼굴이었으면 더 좋았을 거라고 생각했다. 내일은 더 많은 얘기를 나눌 수 있기를 바라면서, 다니엘은 제 뮤턴트에게 아쉬운 인사를 건네고 그의 방을 빠져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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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하는 날들이 쌓여갈수록 다니엘이 뮤턴트에게 건넨 말들도 잔뜩 쌓여갔다. 다니엘은 제 얘기를 해주기도 하고, 이따금씩 뮤턴트에게 질문을 하기도 했지만 대답은 하나도 듣지 못했다. 그러나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제가 하는 이야기들을 제대로 듣고 있는지 알 수는 없어도 그는 눈앞에 앉아있었고, 그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괜찮았으니까. 하지만 연구소에서의 하루하루가 늘 그리 평화롭게만 지나가지는 않았다.
갑자기 연구소 전체에 울리는 경보음에 놀란 건 다니엘뿐이었다. 뮤턴트는 그 상황이 익숙한 것인지 미동조차 하지 않고 늘 그렇듯 창밖만을 주시하고 있었다. 다니엘만 허둥지둥 그에게 잠시만 있어봐라, 하고 채 숨기지 못한 사투리 억양으로 다급하게 말하고는 몸을 일으켜 작은 방을 빠져나갔다. 뭐가 그리 급했는지 문은 제대로 닫히지도 않은 채였다. 작은 틈 너머로 복도의 하얀 벽이 보였다.
일 년에 두세 번씩은 꼭 연구소에 갇힌 뮤턴트를 구해내려는 시도가 벌어지곤 했다. 나쁘게 말하자면 연구소를 향한 테러이기도 했다. 연구소에 끌려와 갇히게 된 뮤턴트들은 뮤턴트이기 이전에 누군가의 소중한 사람이기도 했었으니까, 어느 날 갑자기 제 사람을 뮤턴트라고 연구소에 끌고 가 생이별을 시키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간혹 이렇게 무모한 일을 벌이는 사람들이 있곤 했다. 그들은 일부 돌연변이들의 도움까지 받아 가며 연구소에 침입해서 갇힌 뮤턴트를 구출해내려 하곤 했지만, 성공적으로 뮤턴트를 구출시킨 적은 아직 단 한 번도 없었다.
경보음은 외부인이 무력으로 연구소 내에 침입했을 때 주로 울리는 것이었다. 연구소에서만 십 년 가까이 살아온 엔젤은 다 알고 있었다. 아무도 연구소의 뮤턴트를 살아있는 채로는 밖으로 탈출시킬 수 없다는 것을. 또 어설픈 신임 연구원 다니엘이 완전히 닫는 걸 깜박하고 열어둔 저 문 밖으로 나가봤자 결국 자신은 이 작은 방으로 돌아오게 되리라는 것도.
처음 겪는 상황에 놀라 뛰쳐나가서 연구소 경비들과 다른 연구원들까지 붙들고 상황 파악을 하고 나서야 엔젤이 갇혀있는 작은 방 앞으로 돌아온 다니엘은 제가 문을 제대로 닫지도 않고 방을 나섰다는 사실을 깨닫고 아연실색했다. 하지만 작게 열린 문틈 사이로 보이는 방의 모습은 평소와 다를 게 없어 보였다. 다니엘은 조심스럽게 문을 열어젖혔다. 작은 방 안에는 여전히 날개를 묶인 가엾은 엔젤이 열린 문 밖으로 나갈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는 듯, 늘 앉아있던 그 자리에서 가만히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문을 닫은 다니엘이 안도의 한숨을 쉬며 엔젤의 앞에 주저앉자 그의 시선이 와닿았다.
“왜 안 나갔는데...?”
도무지 그 이유를 알 수 없다는 듯 다니엘이 물었다. 작은 방과 바깥세상을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그는 뮤턴트가 왜 열린 문 밖으로 나가지 않았는지 알 수 없을 것이었다. 엔젤은 큰 날개를 가졌으면서도 하늘을 날 수 없는, 새장에 갇힌 새에 불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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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같은 공간에서 함께하는 다니엘과 뮤턴트의 공기는 조금씩 달라져갔다. 뮤턴트는 다니엘이 저를 인간과 다름없이 따뜻하게 대해주는 것이 좋았다. 건네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거나 작은 대답을 하는 것만으로도 다니엘은 걸음마를 시작한 아이를 보듯 기뻐했다. 뮤턴트는 처음 다니엘을 만났을 때에 비하면 훨씬 많은 감정을 표현하게 되었다. 그와 함께하면 누구든 그렇게 될 것 같았다. 뮤턴트는 환하게 웃는 그의 얼굴을 매일매일 조금씩 아껴두고 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다니엘은 처음엔 그저 아름다운 날개를 가지고도 연구소에 갇혀서 창밖의 세상을 바라만 봐야 하는 뮤턴트가 가엾었다. 제 손으로 그의 묶인 날개를 쉽게 풀어줄 수도 있었지만, 날개를 풀어주면 그는 높은 하늘을 향해 멀리 날아가 버릴 것만 같았다. 영영 제 곁을 떠날 것만 같았다. 온통 하얀 그가 푸른 하늘을 나는 모습은 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새보다도 아름다울 것 같았다. 하지만 다니엘은 그가 자유로워지길 바라면서도, 한편으로는 날아가지 말고 제 곁에 남아있었으면 하는 마음이 들었다. 다니엘은 그동안 뮤턴트에게 수많은 말들을 건넸으면서도, 바깥세상을 기대하게 할만한 말들은 전혀 꺼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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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깥세상은 조금씩 변해가고 있었다. 돌연변이를 경시하던 분위기는 점점 사라져가고, 돌연변이가 사람이건 동물이건 하나의 생명체라는 의견에 힘이 실리기 시작했다. 이는 비록 작은 케이지에 갇혀 온갖 실험을 당하는 강아지나 토끼를 가엾어하는 것과 별반 다를 게 없을지라도, 돌연변이들이 대놓고 차별을 당하는 일은 거의 사라지게 되었다. 그러자 연구소의 존재가 점점 논란이 되기 시작했다. 연구소의 모든 것이 철저히 비밀에 가려진 게 사람들의 의구심을 더욱 자극했다.
불씨는 자신들이 행동하는 양심이라 믿는, 혹은 연구소와 관련된 특종을 건져내려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던 기자들에 의해 당겨졌다. 연구소 뒷문으로 몰래 실려나가는 뮤턴트들의 사체가 얇은 천 하나 덮지 못한 채 처참한 몰골을 하고 있는 사진이 신문 1면을 한가득 메우게 된 것이다. 오랜 세월 연구소가 자행해온 비인간적인 행태들이 밝혀지기 시작하자 돌연변이들은 극노했고, 인간들까지도 연구소를 향한 비난의 목소리를 높였다. 이러한 목소리는 곧 변화로 이어졌다. 돌연변이를 감금, 학대하거나 실험을 하는 것을 금지하고, 적발될 시 거액의 벌금 및 연구소 관계자들을 엄벌에 처하도록 하는 법안이 발의된 것이다.
여론에 힘입어 이 법이 통과될 조짐이 보이자 연구소는 꼬리 자르기에 들어갔다. 미리 발 빠르게 연구소 전면 폐쇄 결정을 내린 것이다. 그리고 법안이 시행되던 날, 연구소에 갇혀있던 뮤턴트들은 비로소 하나도 남김없이 모두 제 발로 연구소에서 걸어 나올 수 있었다. 이제는 전직 연구원이 된 다니엘과, 자유의 몸이 된 뮤턴트는 처음으로 함께 바깥세상을 맞이했다.
“...어때?”
“좋은 것 같아요.”
좋다, 싫다도 아닌 좋은 것 같다는 애매한 대답을 한 뮤턴트가 밝게 웃어 보였다. 다니엘은 조금 긴장된 표정을 한 채 뮤턴트에게 제 손을 내밀었다. 너는 이제 묶여있는 네 날개를 풀고 저 먼 하늘로 날아갈 수 있어. 자유로운 두 발로 어디든 도망갈 수도 있고. 그래도, 혹시 만약에, 내 곁을 떠나지 않을 거라면... 이 손 잡아줄래. 다니엘은 제 속에 있는 말을 한마디도 꺼내지 못한 채 입술만 깨물었다. 그런 다니엘을 마주하고 선 뮤턴트의 얼굴은 기쁜 듯 웃는 표정이었음에도 눈에서는 한줄기 눈물이 흘러내렸다. 곧 뮤턴트의 작은 손이 다니엘의 큰 손 위로 포개지고, 두 개의 입술이 잠시 닿았다 떨어졌다. 뮤턴트는 다니엘만 들을 수 있을 만큼 작은 목소리로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하성운이에요. 원래 내 이름...”
돌연변이로 발현하기 전의 이름을 십여 년 만에 처음으로 꺼내보는 입가가 잘게 떨렸다. 다니엘은 제 손을 마주 잡고 나란히 선 성운을 향해 그제서야 웃어 보였다. 성운은 묶인 제 날개를 풀지 않은 채 다니엘의 손을 잡고 천천히 걸어갔다. 엔젤이라는 이름을 버린 뮤턴트는, 저를 가둔 새장을 탈출하고도 스스로 하늘을 날지 않는 새가 되었다.